16권 11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11)
따당!
두 번의 격타음이 마치 한 번처럼 동시에 울렸다.
방풍의 도끼가 옆으로 휘청 흔들렸고, 청계는 검을 수평으로 세운 채 뒤로 훌쩍 물러섰다.
강렬한 존재감을 뿜으며 바닥으로 내리꽂힌 창 한 자루가 웅웅거리며 떨린다.
청계는 자신의 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백경채의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뭐, 뭐야?”
“대체 누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모두의 시선이 급격히 한쪽으로 쏠렸다.
높은 성벽 위에서 비조처럼 날아오른 한 사람.
키가 크고 온화하게 생긴 한 청년이 방풍과 청계 사이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넌 뭐지?”
청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하지만 사이에 내려선 청년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먼저 정중히 방풍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방 대협, 갑작스레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백검회의 일검에게 볼일이 있어 참지 못하고 끼어들고 말았습니다. 대협의 승부를 방해하였으니 이 빚은 나중에 꼭 잊지 않고 갚겠습니다.”
방풍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의외의 사태에 할 말을 잃어버린 청계.
그리고 지켜보던 관중들 모두가 입을 쩍 벌린 채 멍하니 굳는 순간이었다.
‘죄송합니다. 방 대협, 아까 신신당부하셨지만,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높은 성벽 위에서 지켜보던 조서인의 눈에는 싸움의 향방이 분명히 보이고 있었다.
방풍이 피투성이가 되면서까지 때를 기다리는 이유는 명확했다.
목숨을 도외시한 동귀어진이다.
명문혈이 꿰뚫리면, 온몸으로 검을 붙잡은 채 도끼로 내리찍을 생각이었을 터.
다만 청계는 그보다 한 차원 높은 고수였다.
조서인은 청계가 놀랍도록 빠른 반사 신경으로 검끝을 이동하는 모습을 분명히 목격하였다.
방풍의 도끼는 빗나가고, 청계의 검은 방풍의 목을 베었을 터.
조서인은 그 시점에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방풍은 그의 도움을 환영할 것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애초에 목숨을 버리려 했던 사람이다. 자존심이 드높은 방풍이 새파랗게 어린 후배한테 도움 받는 것을 어찌 좋아할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고고한 절개가 있는 녹림의 불 도끼가 이런 곳에서 허망히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넌…….”
방풍은 가래가 끓는 목소리로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그의 체면을 지켜 주려는 조서인의 뜻을 직감한 듯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건가…….”
“무인의 승부는 끝날 때까지 모르는 법이라 들었습니다. 여기 이 후배에게 잠시만 양보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조서인과 방풍은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흠.”
방풍은 말없이 도끼를 집어 들고 비틀거리며 백경채 쪽으로 물러났다.
용왕수호대 몇 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 나와 그를 부축했지만 방풍은 그들을 뿌리치고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은 채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애송이.”
기다릴 만큼 기다린 청계가 삐딱한 자세로 조서인을 불렀다.
“재밌어서 두고 봤는데, 뭐하는 거냐?”
“백검회의 일검이시죠.”
조서인은 청계를 향해서도 절도 있게 포권을 취했다.
“제 이름은 조서인입니다. 무산학관에서 무예를 닦았습니다.”
“호오?”
새하얀 가면 너머 청계의 눈이 가늘어졌다.
주변 곳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무산학관?”
“조서인? 들은 적이 있어! 낙…… 낙……, 그래, 낙일창. 낙일창이다.”
“낙일창이면 천무공자에 밀린 만년 이등?”
“그래! 무산제전에서 늘 이등 아니면 삼등 하던 낙일창.”
군중들은 조서인의 이름을 알아채고 삼삼오오 모여 떠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내용을 듣기 힘들겠지만, 청계도 조서인도 강한 내공을 지닌 무림인이다.
멀리 있는 군중들의 말소리도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조서인은 예상치 못한 내용까지 나와서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안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다. 무산학관의 알량한 명성을 믿고 이렇게 함부로 나대는 거냐? 내가 누군지 정말로 안다면 무산학관이라는 말은 오히려 감춰야 할 텐데?”
무산학관은 황실에서 지은 학관이고, 백검회가 지금의 황실과 원수지간인 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이다.
청계는 검끝을 까딱거리며 조서인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당장이라도 칼이 화살처럼 쏘아져 목을 꿰뚫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가면 사이로 흘러나오는 안광이 시리도록 매섭다.
‘흉신광검의 무공 실력이 무림오존에 버금간다는 소문이 정말 사실이었구나.’
광기 어린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한지, 조서인은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노송의 그늘에서 자란다고 해서 다 소나무가 되는 건 아니지요.”
“뭐?”
“저는 황실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방 대협에게 말씀드렸듯, 백검회의 일검에게 볼일이 있어 먼저 나섰을 뿐입니다.”
조서인은 당당하게 굴었다.
“볼일? 무슨 볼일?”
“백검회는 비록 황실에 불만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청성과 화산의 무공을 쓰는, 정파 무림에 근본을 둔 단체라고 들었습니다.”
무산학관에서 배운 것은 무공뿐만이 아니다.
무림 강호에서의 예절.
무인들 사이의 암묵적인 규범.
그리고 ‘명분’의 중요성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배웠다.
“그런데 오늘 백경채에 와서 다짜고짜 행패를 부리고 녹림수로맹의 사람들을 핍박하는군요. 대체 이유가 무엇입니까?”
“뭐? 이유?”
청계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쓸데없는 말을 하는구나. 도적놈들을 때려잡는 데 이유가 필요해?”
“필요하지요. 백경채는 도적 떼가 아니니 말입니다.”
“개소리. 녹림수로맹이 도적 떼가 아니면 어디가 도적 떼란 말이냐?”
“그럼 묻겠습니다. 여기 백경채가 도적질을 한 곳은 어디입니까?”
“뭐?”
“도적이란 소리를 들으려면 누군가의 돈을 빼앗고 괴롭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백경채는 누구의 돈을 빼앗았습니까?”
녹림수로맹의 부표파자가 있는 백경채가 삼류 산적 나부랭이들처럼 지나가는 행인들의 돈을 빼앗았을 리가 없다.
큼직한 상단이나 표국의 행사가 있을 때 그들의 통행세 명목으로 은전을 받는 것만 해도 엄청난 액수일 테니 말이다.
즉, 백경채를 도적이라 규탄하는 자는 애초에 없을 거라는 뜻이다.
‘제갈륜의 말대로라면 장강 사람들이 백경채를 고발하거나, 욕할 리가 없어. 청계는 그에 대한 정보 같은 건 갖고 있지도 않고, 찾을 생각도 안 하겠지.’
조서인은 당당했고, 청계는 인내심의 한계가 다가오는 듯 고개를 비트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궤변이나 늘어놓는구나. 산적이랑 수적들이 자기는 도적이 아니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야.”
“백검회가 강호 무림의 당당한 한 문파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법도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마인이 되어 다른 문파를 힘으로 찍어 누르려 한다면 백검회와 흑시군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조서인은 달변가는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잊어선 안 되는 법도.
지켜야 할 예의에 관해서는 얼마든지 당당히 말할 자신이 있었다.
“낙일창의 말이 맞지.”
“이렇게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는 건 마인들이나 하는 짓이야.”
군중들 중에 조서인의 말에 동조하여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개소리.”
청계는 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가까워지는 만큼 살기도 그만큼 강해졌다.
채채챙―.
백경채 쪽에서 모두가 검을 뽑아 드는 소리가 들렸다.
백경과 용왕수호대 전원이 조서인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려 하는 것이다.
‘괜찮습니다.’
조서인은 그들에게 살짝 눈인사를 보내 안심시킨 뒤, 땅에 꽂혀 있던 그의 창 ‘은자’를 뽑아 들었다.
“불만이 있다면 정식으로 문파 대 문파의 비무첩을 보내십시오.”
“뭐?”
“명분을 갖고 당당히 무예를 겨루고 그 결과에 승복하면 됩니다. 그게 무인입니다.”
바꿔 말한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그는 무인이 아니란 소리다.
무공을 익힌 잡배일 뿐.
청계는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애송아. 백검회와 녹림수로맹이 사사건건 싸운 게 벌써 이 년째다. 네가 뭐라고 지껄이든 나는 저 안에 들어가서 장강용왕을 죽일 것이다.”
“제가 그걸 막을 것입니다.”
“네가?”
청계가 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가면 너머로 붉은색 안광이 뿜어진다.
우웅―!
청계가 들고 있던 검끝에 새빨간 검강이 선명하게 뭉쳤다.
검강을 뿜어내기 시작하자 청계는 죽음을 관장하는 사신 같은 위엄을 보였다.
번뜩이는 눈빛.
새하얀 가면을 쓴 얼굴이 기괴하게 꺾였다.
“말해 봐라, 애송아. 명분을 말하는데, 너는 무슨 명분으로 날 막을 거지?”
“장강용왕 어르신은 제게 있어 조부와 다름없는 분. 당신이 함부로 해하도록 지켜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서인은 창끝을 하늘로 향한 채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백검회의 일검이자 흉신광검 청계. 당신께 무림 말학 조서인이 비무를 청합니다.”
“……!”
비무를 청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것일까.
청계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종잡을 수 없는 성정이기에 광인(狂人)이라 불리는 청계다.
그는 오래전 일을 떠올리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비무? 비무……. 나한테 비무…….”
청계만 굳은 게 아니다.
백경채의 사람들, 지켜보던 군웅들도 제각각 수군거렸다.
“낙일창이 흉신광검에게 비무를 걸어?”
“상대가 안 되지. 녹림의 불 도끼가 박살 나는 거 못 봤어?”
“아니, 그런데 비무를 건다고? 죽으려는 건가?”
“장강용왕이 조부나 다름없다는 건 또 뭐야?”
군웅들이 시끌벅적해지는 만큼 청계의 마음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듯했다.
조서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해가 지고 나서는 싸워선 안 될 것입니다. 그거야말로 살육전이고 전쟁입니다. 녹림수로맹과 백검회가 서로를 다 죽일 때까지 피를 피로 갚는 전쟁이 벌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미 전쟁 중인 것과 다름없다. 내가 그런 걸 두려워할 것 같으냐?”
“강호에 명성이 높은 흉신광검은 두렵지 않으시겠죠. 하지만 그리 되면 백검회는 피를 원하는 마인들의 문파가 될 것입니다. 백검회주도 그걸 원하고 있습니까?”
“이놈, 또 개소리를.”
“불필요한 피를 흘려서야 안 될 일입니다. 그래서 청하겠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저는 이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당신의 공격을 버티겠습니다. 강호의 명성이 높은 흉신광검으로서 약조해 주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제가 버틴다면, 그 날은 싸우지 않고 물러나겠다고.”
청계의 눈이 가늘어졌다.
“생사결이 아니고?”
“생사결입니다. 하지만 저는 죽지 않을 겁니다.”
쿵.
조서인은 진각을 밟으며 창대로 땅을 내리찍었다.
둔중한 충격이 모두를 침묵시켰다.
“해가 질 때까지. 저는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 해 보시겠습니까?”
청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스름하게 노을이 지려고 하긴 하지만, 아직도 해가 지려면 반 시진은 더 걸릴 것이다.
조서인이 나이에 걸맞지 않은 무공을 가졌다 한들 그래 봐야 이십 대 초반의 애송이였다.
반면에 청계는 이제 무림오존에 준한다는 평까지 듣는 일대 고수다.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오냐, 약속한다. 해가 지기 전까지 네놈을 갈기갈기 찢지 못하면 백경채에 들어가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이제 보니 광인은 내가 아니고 네놈이었구나.”
청계는 재미있다는 듯이 낄낄 웃는다.
조서인은 그저 정중히 포권을 취한 뒤, 창끝을 정면으로 겨누었다.
자세를 정갈히 한 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공을 고요하게 끌어 올렸다.
“오십시오.”
정중한 조서인의 청에 서릉협이 들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