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89화 (518/686)

16권 12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12)

서늘한 새벽바람과 경쾌하게 지저귀는 새소리에 조서인은 눈을 떴다.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새벽녘을 보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으음.”

온몸이 찌뿌둥하다.

온갖 수련으로 단련된 육체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밤이슬을 맞아가며 가부좌를 틀고 밤을 새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더 힘든 일이었다.

몸만 피곤한 게 아니다.

밤새 건곤조화신공을 사용해 대주천을 거듭했음에도 아직 혈도에 피로가 남아 있었다.

‘옛날 생각나네. 소호랑 같이 조가창법 연구할 때도 이렇게 밤새 움직이느라 아침 되면 피곤해서 곯아떨어지고 그랬는데.’

조서인은 갈기갈기 찢어진 장포를 여며서 최대한 옷차림을 가다듬었다.

어제는 간신히 큰 상처 없이 싸움을 끝내는 데 성공했지만, 오늘도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조서인이 청성파 무공에 적응하는 만큼, 청계도 조서인의 일연적룡무에 적응하는 것이다.

먼지를 툭툭 털며 일어서니,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던 청계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해 떴다. 다시 붙자.”

“좋은 아침입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청계는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조서인을 노려보았다.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놓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는데 밥이 목구멍에 넘어갈 것 같냐?”

“그러시면 안 되죠. 제 스승님께서 그러셨습니다. 몸을 쓰는 직업일수록 가장 좋은 것을 먹고, 몸을 관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요.”

뻔뻔할 정도의 넉살은 소호의 전매특허지만, 조서인도 이 정도는 따라할 수 있었다.

주변에는 어느새 새벽녘 특유의 촉촉한 공기 사이로 뿌옇게 안개가 피어올라 있었다.

삼십 장가량 떨어진 위치에서 제각각 모닥불을 피운 채 거적때기 같은 것들을 걸치고 삼삼오오 모여 있는 구경꾼들도 보인다.

‘아니, 백검회는 그렇다 치고, 군중들은 왜 밤을 샌 거야?’

조서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검회나 백경채에 소속된 것도 아닌 사람들이 대체 왜 야숙을 하면서까지 싸움을 지켜본단 말인가?

‘거적때기를 입은 사람들은 개방인 것 같고. 어? 저 사람 또 있네.’

그중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

화려한 옷감을 몸에 둘렀으나 건장한 양팔은 드러낸 사내.

중원의 것이 아닌 특이한 품종의 커다란 말을 타고, 말안장에는 언월도를 매고 있는 사내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씩 웃었다.

중년의 나이.

왼쪽 볼에서 콧등을 지나 오른쪽 볼까지 수평으로 가르는 상처에, 이마의 중심에서 콧등까지 수직으로 가르는 상처가 합쳐져 얼굴 위에 크게 열십자 흉터를 지닌 사내다.

“이놈, 지금 죽고 싶으냐?”

조서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청계에게 집중했다.

그렇다.

지금은 딴 곳에 한눈을 팔 때가 아니었다.

‘솔직히 어제 약조를 지킬 줄은 몰랐는데. 자존심 때문일까?’

조서인은 삼백 초를 겨뤘던 어제의 싸움을 떠올리며 몸을 긴장시켰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침을 먹지 않으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습니다.”

“뭐?”

“이렇게 된 거 식사를 같이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청계가 어이가 없는 듯 물끄러미 바라본다.

“네놈은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니냐?”

“제가요?”

“네 눈앞에 사신이 다가와 있거늘. 밥을 같이 먹자고? 가만 보자, 허세를 부리는 건가?”

새하얀 가면을 쓴 채 어린아이처럼 비스듬히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은 소름이 끼치게 섬뜩하다.

청계는 모른다.

조서인이 그동안 어떤 사람들과 함께 생활했는지.

검선과 함께 빨래를 하고, 붉은 악귀 장기린과 감자를 깎고, 장강용왕과 함께 더덕을 캤다.

청계는 그들에 가깝게 강하지만, 조서인에게 있어 귀신처럼 두려운 존재는 아니다.

“비무라는 것은 정신을 집중해 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자고로 온 힘을 다하기 위해서는 배 속이 든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조서인을 들여다보던 청계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탄성을 내뱉었다.

“이놈, 예의바른 샌님처럼 공손하더니, 사실은 뻔뻔한 놈이로구나.”

“샌님과는 거리가 멉니다.”

조서인은 웃으며 그리 말한 뒤, 인근에서 걱정스럽게 조서인을 보고 있던 백경채의 문지기에게 물었다.

“혹시 수채에서 먹을 걸 좀 얻을 수 있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리십쇼.”

백경채 문지기 사내는 공손했다.

방풍을 지켜 준 것, 백경채를 위해 시간을 끌고 있는 것. 그리고 어제 청계를 상대로 보여 준 고강한 무공이 좋은 인상을 남긴 게 분명했다.

그는 조서인이 부탁한 지 반각도 지나기 전에 곧바로 뜨끈한 연기가 올라오는 채반을 들고 나왔다.

도리어 부탁한 조서인이 깜짝 놀랄 만큼 빠른 속도였다.

“아니, 벌써 준비하셨습니까?”

“부표파자님께서 어제 공자께서 비무를 끝내신 후, 음식과 잠자리를 찾으면 언제든 드릴 수 있게 준비해 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조서인은 감탄했다.

성채 안에 있을 백경의 배려가 느껴지지 않는가.

“부표파자님께 꼭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하지요.”

채반 위에는 새하얀 생선살이 듬뿍 담긴 죽과 두툼한 만두가 함께 올라와 있었다. 자그마한 그릇 위엔 채소를 볶은 소채도 함께였다.

“맛있겠네요. 잘 먹겠습니다.”

조서인은 정중히 감사를 표한 뒤, 방금 전까지 가부좌를 틀고 있던 곳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청계에게 물었다.

“같이 드시겠습니까?”

“하!”

청계는 코웃음 치며 비웃었다.

“그래. 오늘이 제삿날이니 잘 먹어 둬라. 미리 말해 두겠는데, 네놈의 그 기이하고 쾌속한 창술은 이제 파훼할 수 있다.”

“단 하루 만에 그걸 파훼하시다니. 대단하군요.”

조서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청계는 숨을 씩씩거리더니 휙― 하니 등을 돌려 백검회의 무리 사이로 돌아갔다.

조서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뜨끈한 어죽을 듬뿍 퍼서 입에 집어넣었다.

“으음!”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맛있다.

풍운객잔에서 먹던 요리들만큼 완벽한 맛은 아니지만, 장강에서 잡히는 물고기들을 뼈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럽게 찧어서 끓인 죽이다.

고소하고 뜨끈한 죽이 배 속을 든든하게 데워 주었다.

그사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자고 있던 군중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청계와 조서인의 대화가 그들의 잠을 깨운 데다, 연기처럼 퍼져 나간 어죽의 향이 군중들의 식욕을 자극한 탓이다.

“저게 뭐야.”

“맛있겠다……!”

수군거리는 군중들 사이에서 거적때기를 입은 거지 한 명이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낙일창 소협. 거 사해가 동도라는데 밥 좀 나눠 먹읍시다.”

서른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젊은 나이.

허리춤에는 세 개의 매듭과 밥 빌어먹는 데 쓰는 바가지를 하나 매고 있는 사내였다.

넉살 좋게 뻔뻔하게 웃는 그는, 조서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채반 건너 쪽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는 얼마든지 환영입니다만, 비무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군요.”

조서인은 힐끗 백검회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청계는 물론이고, 그 휘하의 검객들은 둥그렇게 모여앉아 불을 피우고 앉아 있을 뿐, 조서인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치 이쪽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한 태도였다.

“거 나눠 먹기 싫으면 싫다고 하지. 천하의 흉신광검을 상대로 마음껏 배짱을 부리는 분이 왜 갑자기 눈치 보는 척을 하고 그러시오?”

“제가 배짱이 좋아 보입니까?”

“그럼 아니오? 우리 개방이 배짱이 좋기로 소문났다지만, 난 소협처럼 행동할 자신이 없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그렇게 따지면 지금 다가온 거지 사내의 배짱도 조서인 못지않다.

거지 사내는 음식 때문인지 연신 최고라며 조서인을 추켜세웠다.

“개방의 분이셨군요. 처음 뵙습니다. 조서인입니다.”

“번잡한 예는 됐소. 난 오골개요.”

“예?”

조서인은 잠시 귀를 의심했다.

“그 오골계(烏骨鷄)의 오골입니까?”

“비슷하오. 우리 사부가 내가 오골계처럼 뼛속까지 시커먼 거지라고 이상한 이름을 지어 줬거든. 그나저나 만두 좀 먹어도 되겠소?”

“얼마든지 드십시오. 저는 어느 정도 배가 차고 있습니다.”

“거 보기보다 양이 적은 분이시군.”

오골개는 주먹만 한 만두를 집어 들고는 우적우적 깨물어 먹었다.

평범한 체구인데, 왕성하게 만두를 물어뜯는 식욕은 웬만한 장정의 두세 배는 되는 것 같았다.

“오늘. 음음, 하루 종일. 음음, 싸워야 할 텐데. 겨우 그거 먹고 되겠소?”

오골개는 입속의 만두를 다 씹어 삼키기도 전에 우물거리며 질문했다.

“너무 많이 먹어 봤자 토하기밖에 더하겠습니까?”

“흉신광검은 강하지. 향후 십 년 내에 천하를 논할 인재요. 사실 놀랐소. 난 소협이 ‘어떤 무공’을 익혔든 흉신광검을 상대로 해질 때까지 버티려면 팔 하나는 내놔야 할 줄 알았거든.”

“……그래요?”

말속에 담긴 의미가 상당했다.

마치 조서인이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아는 듯하지 않은가.

조서인은 어죽을 먹던 숟가락을 잠시 멈췄다.

“제가 익힌 무공은 어디 가서 함부로 팔이 잘려선 안 되는 무공입니다.”

“그럴 만도 하지. 창술도 일절인데, 내공은 천하 절공이고. 아무튼 핵심은 그거요. 소협의 무공이 생각보다 훨씬 고강하다는 것. 아마 이번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 나가면 소협의 명성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것이요. 벌써 동네 걸개 놈들이 하나같이 소협 이야기로 시끌벅적하다오. 이것 참, 여긴 강호 초출이 명성을 떨치기엔 최적의 장소가 아니오? 안 그렇소? 마치 하늘이 점지해 준 것 같은 시점에 떡! 하니 소협이 나타났다오.”

“저는 명성을 바라지 않습니다.”

“알고 있소. 나도 사람 보는 눈이 꽤 있거든. 소협은 그런 종류의 얄팍한 소인배가 아니야.”

오골개는 입안에 있던 만두를 다 먹어 치우고 두 개째를 입에 넣었다.

두 번째 만두는 첫 번째 만두보다 더 빨리 먹었다.

“어찌 됐든 소협은 하늘이 내려 준 사람 마냥 이곳에 서 있소. 게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흉신광검의 행보를 가로막는다? 원래는 피바다가 되었어야 할 서릉협을 지켜 내고? 거참, 통탄할 일이지. 아마 대가리 굴리는 지자(智者)들 중에 소협의 등장으로 머리털 쥐어뜯는 사람이 많을 거요.”

오골개는 통쾌하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조서인은 조금 부루퉁하게 되물었다.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습니다.”

“칭찬이오. 칭찬. 게다가 나는 개인적으로 더 기쁘다오. 아마 이번 일로 천무공자가 많이 속 썩을 것 같거든.”

“예? 누가 속을 썩어요?”

“백경 채주가 고민하다가 소협을 보고 마음을 크게 먹었거든. 장강에 전선들이 모여들고 있소. 전쟁이라도 치를 기세야.”

“아…….”

“대세는 그렇고, 그렇다면 이 대결의 무공은 또 어떠한가? 사실 이건 보는 방향에 따라 의미가 상당하오. 저쪽은 ‘청성’, 이쪽은……, 뭐, 아시다시피 금분세수하고 은거한 사람들이 지내는 마을의 절공.”

조서인은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그런 쪽으로도 볼 수 있겠구나 싶었다.

팔파일방인 청성의 절공과 은자촌 무공의 대결이라니.

“백검회주도 머리가 아플 거요. 이걸 어찌해야 하나. 흉신광검을 슬슬 다루기가 힘든데, 버리자니 백검회의 최강 전력이고. 회유를 하자니 말이 잘 안 통하고. 그런데 정작 뜬금없이 나타난 소협이 그를 어린아이 다루듯 다루고 있으니. 이크, 괜한 말을 했군.”

오골개는 급히 만두 두 개를 더 집어서 소매 안에 숨긴 뒤 벌떡 일어나 몸을 날렸다.

“만두 잘 먹었소. 어디 한번 오늘도 백경채의 대문을 잘 지켜 보길 바라오.”

후다닥 도망치는 발놀림이 잔상이 남을 만큼 빨랐다.

취팔선보.

개방에서도 무재를 인정받는 자들만이 전수받을 수 있는 절정의 신법이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정신없는 사람이네. 해 준 말들도 다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들은 것 같은데, 정작 명확한 건 하나도 없는 느낌이다.

그저 조서인의 지금 행동이 가져올 여파가 클 것이라는 점.

그리고 천무공자 장소호와 백검회주가 머리 아플 상황이 될 거라는 것 정도만 알게 되었을 뿐이다.

“잔치라도 벌린 것이냐? 왜? 아예 식사만 해질 때까지 하면서 시간을 끌어 보지?”

청계는 살벌한 기세를 내뿜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죽일 듯한 시선으로 오골개의 뒷모습을 노려보았지만 칼을 빼 들지는 않았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리 놔두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비무고 뭐고 다 죽여 버리겠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다 먹어 갑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조서인은 어죽을 마저 떠먹은 뒤, 만두를 크게 베어 물고 우물우물 씹어서 삼켰다.

음식이 조금 남은 채반은 백경채 문지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가져갔다.

툭툭.

조서인은 배 속을 든든히 채운 채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양손으로 잡았다.

자세를 바로잡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몰려든다.

조서인은 호연지기를 담아 강렬하게 선언했다.

“둘째 날입니다. 오늘도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오늘 저 해가 떨어지는 순간까지. 흉신광검은 이곳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흥.”

청계는 더 이상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이 어제와 동일한 자세로 청풍검의 초식을 날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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