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90화 (519/686)

16권 13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13)

청풍검은 빠르고 경쾌한 검술이다.

화창한 날씨에 솔잎 사이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과도 같다.

몸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잡을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손끝을 빠져나가는 것이 바람이지 않던가.

청풍검이 그랬다.

목덜미를 노리는 것 같아서 막으려 하면,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져 귀밑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검끝이 극도로 빠르고 부드럽게 휘어지는 환검(幻劍).

거기에 피비린내 나는 살기가 더해지니 그야말로 언제든 목을 베고 지나갈 것처럼 등골이 오싹해지는 검술이다.

‘강하다. 이런 검술이 청성에 숨어 있었다니.’

조서인은 몸의 긴장을 끌어 올린 채 청계와의 거리를 유지했다.

청성파의 대표 무공이라 하면 칠십이파검이나 청운적하검이 유명하지만, 청계의 손에서 펼쳐지는 청풍검은 조서인이 장담컨대 그에 못지않았다.

보법은 또 어떠한가?

진퇴(進退)를 결정하는 세류표(細柳飄)는 표표하고 가벼워 마치 몸이 깃털로 변한 것 같다. 거기에 상하좌우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비류보(飛流步)까지 더해지니 마치 날개 달린 새를 상대하는 기분이다.

파라라락―.

청계의 넓은 소맷자락이 펄럭이고.

따다다당!

정신없이 쏟아지는 검술을 막다 보면, 어느새 조서인은 조금씩 뒤로 물러나게 된다.

그러다가 한 번씩 시야의 사각지대에서 날카롭게 찔러 오는 공격이 매섭다.

꾹! 하고 찍어 누르는 듯한 검술에 이번에도 조서인의 소맷자락이 팟― 하고 잘려 나가 맨살이 드러났다.

조서인은 따끔한 감각을 느꼈다.

이전까지는 옷만 살짝 베이면서 피할 수 있었는데, 이번엔 핏물이 보일 정도로 생채기가 났다.

분명히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다.

청계를 힐끔 바라보니 그는 큭큭거리며 웃고 있었다.

‘검기에 실린 힘으로 거리를 미묘하게 조절하는구나. 점점 막기 힘들어진다. 일연적룡무의 묘리를 파악하기 시작했어. 이러니 방 대협이 당했지. 움직임의 진퇴가 비조처럼 자유로워.’

흉신광검이란 별호를 거저먹은 게 아니라는 점은 충분히 알겠다.

집혼기를 사용해 내공이 늘어났다고 한들, 이 정도로 무공이 뛰어나다면 그건 애초에 실력이 뛰어났던 것 아니겠는가.

‘질 수 없지.’

하지만 조서인이 누구의 무공을 익혔던가.

전장에서 붉은 악귀라 불리던 자.

장기린의 무공이다.

고오오―.

조서인은 정중동의 장중한 움직임을 보였다.

마음은 가라앉히고 동작은 부드럽게.

하지만 발끝이 계속 원을 그릴 뿐, 한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청계는 홰를 치며 먹잇감 주변을 맴도는 맹금 같았고, 조서인은 몸을 낮추고 조용히 노려보는 한 마리의 호랑이 같았다.

조서인은 참고, 버티며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때는 한순간.

청계가 또 한 번 조서인의 소맷자락을 찢어 놓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벼락처럼 우수를 앞으로 내뻗었다.

쒜에에엑―!

일연적룡무 제일식.

공간을 격하고 쏘아지는 첨격이 허공을 관통한다.

마치 커다란 철전이 쏘아지는 듯했다.

펑― 하고 공기가 터진다.

청계의 산발한 머리카락 일부가 창끝에 휩쓸려 끊어졌다.

“흐읍!”

청계는 크게 놀라며 세류표를 사용해 황급히 물러났다.

그가 한 치만 고개를 덜 꺾었어도 가면이 완전히 박살 났을 것이다. 그나마도 완벽히 피하진 못해서, 검 문양이 새겨진 새하얀 가면의 일부가 파삭―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감히!”

가면을 건드리자 청계의 광기가 한층 더 강해졌다.

가면 너머 청계의 붉은 안광이 짙어진다.

사납게 무형기가 흔들리면서 기묘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일렁거리는 기세.

청계가 휘두르는 청풍검의 초식이 더욱 빨라졌다.

쉬쉬시시식―!

삭풍이 불어닥친 듯, 전신을 저며 오는 검격이 매섭다.

청풍검?

아니다.

이젠 혈풍검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조서인은 태풍을 견디는 바위처럼 묵묵히 버텨 냈다.

위험한 요혈은 쳐 내고, 그 밖의 공격들은 비껴 냈다. 가까이 다가올 때 공격하려 했지만, 일연적룡무가 아닐 때는 청계의 신법이 워낙 빨라 잡을 수가 없었다.

피슉―.

파파팟!

가랑비에 옷이 젖듯 조금씩 새어 나오던 핏물이 어느새 옷자락을 시커멓게 적셨다.

조서인은 오른발을 크게 뒤로 뺐다.

허리가 회전한다.

정돈된 자세로 창을 제자리로 회수했다가, 벼락같이 다시 한 번 창을 뻗어 냈다.

또다시 펼쳐지는 찌르기.

섬전 같은 속도로 날아간 창날이 청계의 가슴을 꿰뚫는다.

쒜에에에엑―!

그 순간 청계가 두 눈을 번뜩이며 위로 튀어 올랐다.

찌이이익―.

창끝이 청계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가슴을 꿰뚫지 못한 창날이 청계의 소맷자락을 길게 찢었다.

파라라락―!

청계의 움직임은 처음과 달랐다. 창대를 타고 넘듯 허공에서 유연하게 몸을 회전시켰다.

비류보의 변형.

반응 속도가 놀랍다.

창대를 타고 넘은 검끝이 조서인의 턱밑에서 위로 솟구친다.

“흡.”

조서인은 숨을 멈추면서 건곤조화신공의 공능을 끌어 올렸다.

지고한 검선의 내공이 조서인에게 초인적인 활력을 주었다.

발끝으로 창대를 걷어찼다.

따앙!

창날이 아래로 가고, 창대 손잡이가 위로 솟구친다.

커다란 원형 방패를 든 것처럼 창을 회전시키니 턱 밑을 노리던 칼날이 창대에 얻어맞고 위로 솟구쳤다.

쿠웅!

거기서 왼발로 강하게 진각을 밟는다.

다리가 저릿저릿할 정도로 땅에서 올라온 반탄력을 살려 등을 꽉 조인 채 허리를 회전한다.

후우우웅!

조서인은 그대로 창을 수평으로 크게 휘둘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청계가 삼 장이나 튕겨 나갔다.

안타깝게도 직격은 아니다.

청계가 검을 세워서 막긴 했지만, 그 안에 실린 막강한 경력이 청계의 오장육부를 뒤흔들었다.

“크큭!”

청계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몸을 낮췄다.

지이익―.

바닥에 새겨지는 긴 족적.

하지만 멈춘다.

청계는 새하얀 가면 주위로 산발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미친 듯이 웃었다.

청계는 곧바로 화살처럼 쏘아지며 달려들었다.

다다다닷―.

땅을 박차고 날아와 한 자루의 청강검을 광인처럼 휘두른다.

청계가 일(一)의 힘을 수십 수백 번 휘두르는 자라면, 조서인은 이(二)의 힘을 가끔씩 뿜어 내는 무인이었다.

얽히고설키는 상황.

사방에서 쏟아져 내리는 청풍검 검격들을, 조서인은 강맹한 찌르기와 시의적절한 횡소천군으로 단단하게 방어하고 있었다.

쩌엉!

청강검과 창날이 부딪치며 강렬한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조서인이 우상향으로 내찌른 창격에, 청계는 힘을 다 해소하지 못한 채 위로 솟구쳤다.

“대단하구나! 더 해 봐라! 더! 더!”

까가가강!

찰나의 틈에 터져 나온 수십 번의 검격.

촤아악!

조서인은 대부분을 창대를 휘둘러 막아냈으나, 미처 대응하지 못한 일부의 검격들이 조서인의 어깨와 허리에 긴 상처를 남겼다.

핏물이 솟구친다.

얕지 않은 상처였다.

은자창을 꽉 움켜쥐었다.

조서인은 일연적룡무 제일식을 다시 사용하려다가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뒤로 물러났던 청계가 눈을 번뜩이며 조서인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찌르는 순간 창대를 뛰어넘으며 공격하려는 것이다.

‘강해. 강하긴 한데……. 완성되진 않았어.’

조서인은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틀째 싸워 보니 충분히 알겠다.

흉신광검 청계는 모든 것을 갖췄다.

청성파의 무공을 기반으로 한 뛰어난 검술 실력과 집혼기를 통해 얻은 삼 갑자에 준하는 막강한 내력.

강기를 자유자재로 뿜어대며 팔파일방의 무공을 휘두르는 자를 어찌 막을까.

하지만 완성된 건 아니다.

검선이나 장기린을 떠올려 보면, 서로 병기를 겨누는 것만으로도 숨조차 쉬기 힘든 압박감이 있었다.

청계에게는 결정적으로 그게 없다.

나보다 강하지만 해볼 만하다.

그게 조서인의 청계에 대한 평가다.

‘아깝다. 아까 승부를 보고 싶었는데.’

지금 조서인이 지닌 힘으로는 이 이상 빠르고 강하게 찌르는 건 불가능하긴 했다.

자신의 공격 범위와 한계를 정확히 아는 것.

그것 또한 승부에 있어 중요한 일이지 않던가.

‘사부님이시면 일식만으로도 승부를 보셨을 거야. 역시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해.’

붉은 악귀나 무쌍귀의 이름을 따라잡는 것은 아직 요원한 일임을 새삼 깨닫는다.

파라락―.

청계는 조서인이 공격하질 않고 가만히 있으니 그쯤에서 뒤로 훌쩍 물러나 삼 장 정도 거리를 벌렸다.

“애송이.”

광기 어린 눈빛이 조서인을 비웃듯이 바라본다.

“똑같은 무공이 계속 통할 것 같으냐? 이거 아무래도, 오늘은 해질 때까지 못 버티겠는데?”

청계는 하늘을 가리켰다.

화창한 해는 이제 막 중천에 떠올랐다.

해질 때까진 세 시진은 족히 남았다는 뜻이다.

어느새 몇 시진이나 지났는지 모를 만큼 정신없이 싸웠지만, 점점 상처가 늘어나는 것은 조서인 뿐이다.

하지만 조서인은 굴하지 않는다.

잠시 거리가 벌어지자 묵묵히 상처 인근의 옷자락을 꽉 묶어서 피를 지혈할 뿐.

조금도 쇠락하지 않은 눈빛으로 청계를 당당하게 응시한다.

“벌써 반이나 지났네요.”

까딱 잘못하면 방풍 같은 꼴이 될 것이다.

화살을 수십 발이나 맞아 쓰러진 멧돼지처럼 그렇게 천천히 상처 입은 채 죽어 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조서인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두 눈에선 희망의 불꽃과 전의(戰意)가 함께 타올랐다.

“계속 안 합니까?”

조서인은 눈빛으로 말했다.

어서 덤벼라.

“하?”

청계는 어이가 없어 하길 잠시, 재미있다는 듯이 꺽꺽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로구나.”

파라락―.

아까와 똑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수십 번의 검격을 바람처럼 뿜어내는 청계.

그리고 묵묵히 방어만하면서 때를 기다리던 조서인.

청계의 검과 조서인의 창이 부딪치려는 그 순간, 조서인의 창끝이 기묘하게 떨렸다.

우우웅―.

일연적룡무 제이식.

한 개의 창이 열 개로 늘어났다.

조서인이 창을 앞으로 내뻗는 순간, 마치 열 개로 분열한 창이 한순간에 청계를 덮쳐 가는 듯했다.

청계가 눈을 부릅뜬다.

당연히 쾌공이라고 생각한 게 패착이다.

이틀째 극한의 쾌공만을 사용하던 자가 자신과 똑같은 환공을 쓴 것이다.

놀라지 않을 리가 없다.

조서인은 당황하는 청계를 그대로 끝까지 밀어붙였다.

따다다다당!

청계의 검과 조서인의 창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부딪친다.

내뻗는 창에 한층 더 힘을 더하고, 건곤조화신공의 신묘한 내력을 거침없이 뿜어냈다.

퍽!

파르르 떨리는 창날이 청계의 어깨와 우측 허벅지를 베고 지나갔다.

“칵!”

이번엔 청계도 피하지 못했다.

옷자락뿐만 아니라 살을 꿰뚫는 느낌이 미약하지만 분명히 있었다.

청계는 지금까지 중에 가장 다급한 움직임을 보이며 몸을 비틀었다.

“이놈, 이런 무공을 숨겼다니!”

청계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화아아악―.

강렬한 살기가 치솟는 모습은 마치 불길이 타오르는 듯했다.

검끝에서 솟구치는 핏빛 광채.

단단하게 뭉쳐진 검강이 한계를 모르고 치솟아 조서인의 장창을 후려쳤다.

쩌어어엉!

은자창이 벌 떼가 다가온 것처럼 웅웅 떨렸다.

조서인의 왼쪽 귀밑 머리카락이 뜯겨져서 터져 나간다.

안 그래도 너덜너덜했던 소맷자락이 충격만으로도 찢어져서 바닥으로 떨어진다.

부러질 듯 휘청거렸지만 그래도 강기를 상대로 손상 없이 버텨 낸 것만 봐도 은자창이 얼마나 뛰어난 창인지를 증명한다.

상대방은 내공이 강하다.

최소한 삼 갑자가 넘는 힘.

평범한 무인이라면 검을 한 번 맞대는 것만으로도 병기가 부러질 상황이다.

쿠웅!

조서인은 거기서 한 발을 더 나아갔다.

내딛는 진각.

회전하는 허리.

방금 전에 쓴맛을 보았던 환공을 대비하는 청계를 향해, 그의 얼굴로.

새하얀 가면을 노리고 전력을 다해 우수를 내뻗는다.

일연적룡무 제일식.

극한의 쾌공이 은빛 일섬을 만들어냈다.

쒜에에에엑―.

파공음은 공격이 닿은 뒤에야 터져 나왔다.

콰직!

“크아악!”

청계의 가면이 쪼개진다.

흉신의 위엄을 잃고, 청성의 광기 어린 제자로 돌아온 청계가 놀라고 분노하여 소리를 질러 댔다.

조서인은 그대로 진격했다.

창대로 후려치고 또다시 창을 앞으로 내찔렀다.

청계는 반격할 생각도 제대로 못한 채 다급하게 뒤로 물러난다.

여전히 훨훨 나는 듯한 신법으로 물러나는 그를 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조서인은 추격을 중단했다.

제자리에 멈춰선 곳은 싸움을 시작했던 바로 그 자리다.

“아직 반나절이나 남았습니다.”

그때까지 당신은 버틸 수 있겠는가?

당당한 속뜻을 내포한 조서인의 말에 군웅들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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