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 14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14)
“낙일창의 무공이 이 정도였나?”
“대단하군!”
군웅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흉신광검은 이미 강호 무림에 소문이 자자한 유명 인사였다. 그러니 설마 낙일창이 그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아아아!”
청계는 비명인지 괴성인지 모를 소리를 질러 댔다.
뱃심이 잔뜩 들어간 괴성은 듣는 사람의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다.
그는 반으로 쪼개진 가면을 붙잡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갈라진 틈새로 그의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와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가 다시 모습을 감췄다.
“일검을 모셔라!”
백검회의 인물들 몇 명이 황급히 다가와 그런 청계를 데리고 물러났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몸으로 그를 가렸다.
시끌벅적하게 소란스럽길 잠시.
강물이 갈라지듯 백검회의 무인들이 길을 터 주자, 가면을 바꿔 쓴 청계가 다시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네놈을 찢어 죽일 것이다!”
청계는 조서인을 앞에 두자마자 빽― 하니 소리를 질렀다.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는 건 여전한데, 조서인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건 어제부터 해 오던 말이 아닙니까?”
“건방지고 뻔뻔한 놈!”
“저는 흉신광검이 광자라고 들었는데, 이제 보니 생각보다 멀쩡한 것 같습니다.”
조서인의 말은 도발적이었다.
일검뿐만 아니라 뒤에 늘어서 있던 백검회 무인들도 움찔하며 흥분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가면이 깨졌다고 도망치셨던 분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재촉하지 마라. 어차피 난 널 죽일 것이다. 그전에 기회를 주는 걸 천운이라 생각하라.”
“기회요?”
“그 무공은 무엇이냐? 누구에게 사사를 받았지?”
“…….”
“그 창술, 묘하게 낯이 익다. 한 번에 열 개의 창으로 늘어나는 환공이라니. 게다가 허초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다 실초다. 대체 무슨 무공이지?”
“딱히 숨길 일은 아닙니다. 일연적룡무. 내가 배운 창술의 이름입니다.”
“일연……, 일연적룡무라…….”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청계를 향해 이번에는 조서인이 물었다.
“그 가면은 왜 중요합니까?”
“뭐?”
“정체를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쓰는 건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방금 전에 보니, 흉신광검께서는 가면이 부서지면 큰일이 나는 듯한 반응을 보이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청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위험한 눈빛으로 조서인을 노려보았을 뿐이다.
“대답을 안 하시는 걸 보니 중요한 이유가 있는 듯합니다. 그럼 이번에도 가면을 노리면 되겠습니까?”
“노리거나 말거나. 아까 같은 천운은 또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나도 하나 물어보자.”
청계는 비웃으며 손가락으로 성벽 너머 백경채를 가리켰다.
“네놈이 이렇게 시간을 끈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으냐? 어차피 대세는 기울었다. 백검회가 녹림수로맹을 해체시킬 것이다.”
청계는 조서인이 장강용왕이 회복할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을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조서인은 속으로 조금 놀랐다.
약속을 지키고 해가 지면 모른 척 돌아가 버리기에 그런 전략적인 건 모르는 줄 알았는데.
다 알면서도 그리 행동했다는 것이다.
‘왜 내 장단에 맞춰 준 거지?’
이쯤 되니 진정한 목적이 궁금해졌다.
“왜 녹림수로맹을 노립니까?”
“회주께서 그걸 원하기 때문이다.”
“백검회주는 왜 녹림수로맹을 노립니까?”
“…….”
“녹림수로맹은 강할뿐더러, 힘겹게 이긴다고 해도 백검회는 절대로 이곳을 다스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런 이득이 없는 싸움입니다.”
“못 다스린다고? 큭큭, 칼을 목에 들이대면 다 말을 듣는 법이다.”
“녹림의 호걸들과 장강의 사내들이 그리 가벼워 보이십니까?”
조서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백 명의 군중.
그리고 그들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사내들 중에는 거지도 있고 산적도 있으며 수적도 있다.
그 외에 백경채가 관리하는 인근의 뱃사람들도 많다.
특히 백경채의 사람들은 성벽 위와 대문 앞에 모여서 조서인을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로 칼이 목전에 다가왔다고 해서 사람들이 다 말을 듣는다면 흉신광검의 검에 피가 그리 많이 묻지는 않았을 겁니다.”
“……말을 안 들으니 내가 죽였단 말이냐?”
“예. 녹림의 호걸들과 장강의 영웅들은 기개가 있습니다. 당신의 칼이 백 명을 죽일지라도, 옳지 않은 일을 하려 한다면 천 명의 칼이 다시 백검회를 겨눌 것입니다.”
“우스운 협박이군. 내가 지금껏 몇 명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거냐?”
청계는 가면 너머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도록 웃었다.
그 모습에서 악취로 느껴질 정도의 짙은 피 냄새가 났다.
“애송아. 사람은 네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 눈앞에서 목이 날아가고, 뱃가죽을 찢어 자신의 내장을 보면 다들 순순히 말을 듣기 마련이야. 사돈의 팔촌까지 아는 건 다 털어놓으면서 나는 살려 달라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비는 게 사람이란 말이다.”
실제의 경험에 근거하는 듯한 청계의 말이 모두에게 스멀거리는 공포를 흩뿌렸다.
넓은 지역, 수백의 사람들이 있음에도 크게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막강한 무공을 지닌 초인이 피 비린내 나는 광인이라니.
이만큼 천재지변 같은 상황이 또 있을까.
조서인은 창대를 바닥에 내리쳤다.
쿵.
모두가 그 소리에 맞춰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정광 어린 눈빛으로 그런 청계를 똑바로 마주하는 조서인은 마치 망망대해의 등불과도 같았다.
“힘이 강하다고 해서 약자를 괄시해선 안 됩니다. 함부로 목숨을 빼앗고 재물을 강탈해도 안 됩니다. 그게 무인이 지켜야 할 ‘협’입니다.”
강대한 힘 앞에서 꼿꼿한 자세로 협에 대한 올곧은 이상을 토해 내는 청년.
그 이야기 속 한 장면 같은 모습이 모두의 가슴에 큰 울림을 만들어 냈다.
군중들의 분위기가 변했다.
조서인에 대한 호의와 흉신광검 청계를 비롯한 백검회에 대한 적의가 좀 더 직접적인 분위기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옳은 말이다.”
“낙일창! 훌륭하다!”
“우리 장강 사람들이 얼마나 강골인지 모르는구만!”
“녹림의 호걸들은 또 어떤가! 고작 몇 명의 목을 날린다고 개처럼 길 것 같냔 말이야!”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 간다.
청계는 그 모습을 쭉 둘러보더니 코웃음 쳤다.
“이젠 가르치려 들어? 우습구나. 따르기 싫으면 따르지 않으면 된다. 다 죽여 버리면 어떻게든 될 테지.”
“그렇게는 두지 않을 것입니다.”
“애송이. 기고만장하구나.”
청계는 좌수로 자신의 가슴을 더듬거려 무언가를 꽉 움켜쥐었다.
우우웅―.
묘한 떨림과 함께 청계의 두 눈이 시뻘겋게 변한다.
눈의 혈관이 터져서 새빨갛게 변한 것이다.
일렁거리는 무형기가 마치 날개를 펼친 거조(巨鳥) 같았다.
화아아악―.
강대한 기세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막강한 힘.
그 능력은 아까와 비할 바가 아니다.
‘이거, 집혼기다.’
조서인은 소호가 장기린과 겨뤘을 때를 떠올렸다.
그 힘.
그 광기.
막강함.
고오오오―.
청강검의 본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만큼 선명해진 강기가 붉은빛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킥킥.”
광기 어린 웃음이 흘러나온다.
청계의 모습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쩌어엉!
조서인은 양손으로 창대를 붙잡은 채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극한의 상황.
시간이 느려진 듯한 흑백의 세계 속에서 새하얗고 매끈한 청계의 가면이 눈앞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쩌저저저정!
폭우처럼 쏟아져 내린 검격이 순식간에 전신을 난도질했다.
청풍검.
이전의 두 배가 넘는 듯한 속도다.
반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정신없이 뒤로 물러서다 보니 벌써 백경채 성벽에 가까워졌다.
쒜에에엑―!
검끝으로 꾸욱 누르는 듯한 찌르기가 심장을 노려 온다.
파팟!
조서인은 몸을 뒤집어 성벽을 밟고 위로 솟구쳐 올랐다.
푹― 하고 단단한 돌벽을 두부처럼 꿰뚫은 검강이, 조서인의 움직임을 쫓아 수직으로 치솟았다.
촤아악!
조서인의 허리끈이 잘려 나가 복부의 맨살이 드러났다.
잘려 나간 것은 입고 있던 옷만이 아니다.
드드드드―.
성벽이 떨린다.
날카롭게 잘려 나간 주춧돌 몇 개가 비스듬히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성벽이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고작 칼질 한 번에 바위가 잘려 나간 것이다.
“흡.”
저 정도로 무시무시한 강기에 옷만 잘려 나간 게 천운이다.
조서인은 아직 목숨이 멀쩡히 붙어 있음을 확인한 뒤, 천근추를 사용해 바닥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양손으로 창끝을 붙잡고 크게 궤적을 그리며 아래로 내리쳤다.
“챠핫!”
소호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 낸 조가창법이었다.
강맹하게 내리친 일격이, 청계가 귀찮다는 듯이 옆으로 밀어치는 일격에 튕겨 나가 허무하게 바닥을 내리친다.
퍽!
땅바닥이 움푹 패며 돌멩이들이 튀어 올랐다.
조서인은 땅을 내려쳤던 반탄력을 살려 곧바로 창을 위로 회전시켰다.
후우웅―.
바람이 갈라진다.
발끝으로 창대를 걷어차는 것과 동시에 왼쪽 발을 앞으로 쭉 뻗었다.
무게 중심이 급격히 아래로 쏠리면서 양 다리가 전갈처럼 일자로 쭉 늘어났다. 수직으로 회전한 창날이 청계의 명치를 노리고 독사처럼 치솟는다.
조가창법의 초식.
진토출룡(塵土出龍)의 한 수다.
파라락―.
청계는 비조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조서인의 창을 피했다.
그뿐인가?
뒤로 물러나는가 싶은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화살처럼 쏘아져서 수십 번의 검격을 쏟아 냈다.
따다다다당!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검격에 조서인은 모든 공격을 중단한 채 막기에 급급했다.
“쿠억.”
쌓이고 쌓인 내상에 결국 피를 토했다.
엄청난 파괴력.
내력에서 밀리니 병기끼리 부딪칠 때마다 단전이 망치로 얻어맞는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큭큭! 크캇캇!”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청계의 광기도 더 커져 갔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두 눈은 흡사 짐승의 눈과 같다.
검끝이 노려오는 요혈도 점점 악랄해졌다.
무인으로서 노릴 법한 요혈에서, 국부나 눈을 노리는 것처럼 잔혹한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집혼기의 힘은 정말 엄청나. 내공만으론 정말 무림오존 수준이다.’
무공의 깊이에선 큰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병기를 부딪쳤을 때 느껴지는 충격은 검선이나 장기린과 비교될 정도다.
조서인은 피에 젖은 입술을 앙다물고 고통스럽게 버텨 냈다.
다행이랄까.
상대방은 막강하지만 약점이 있다.
조서인의 시선이 청계의 가면과, 그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노려야 할 곳은 두 군데.
우우우웅―.
은자창이 떨린다.
일연적룡무 제이식.
열 개로 분열된 창이 일시에 상대방을 덮쳐 간다.
쉬시시시식―!
청계는 기다렸다는 듯이 속검으로 창격을 상쇄해 나갔다.
조서인의 창이 열 개로 늘어났다면, 청계는 손이 여러 개로 늘어난 천수관음상 같았다.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세상에 만 가지 흐름이 있다 한들 결국은 하나의 바다로 귀결된다.
무공의 결은 다르지만, 결국 핵심 묘리는 같은 방식으로 청계는 조서인의 일연적룡무를 막아 냈다.
‘모자라다. 하지만.’
조서인은 손을 살짝 폈다가 다시 거머쥐었다.
잠시 놓았다 잡았을 뿐인데, 창날이 강하게 회전한다.
파앙!
쒜에에에엑―!
일연적룡무 제일식.
경쾌하고 압도적인 섬격이 공간을 좁히며 청계의 가면을 노렸다.
콰아아!
청계는 속공을 힘으로 내리눌렀다.
청강검을 덮고 있던 검강이 일시적으로 일 장 길이까지 늘어난다.
붉은색 검강을 덧씌운 검을 비스듬히 올려치니 커다란 벽이 하나 세워지는 듯했다.
까앙!
일연적룡무 제일식이 허무하게 옆으로 비껴 나간다.
경로가 비틀어진 찌르기.
가면을 부수지 못하고, 옆으로 비틀려 애꿎은 허공만 격하고 터뜨린다.
‘곡지혈!’
조서인의 눈이 번쩍 빛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조서인에게는 숨겨진 한 수가 있다.
혈도를 폭발시켜 일시적으로 동작을 회수하지 않고 그대로 일격을 더 가하는 것이다.
퍼퍼펑!
조서인의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다.
크게 흥분한 상태라 고통은 느끼지 못했다.
전완근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피부 위로 솟구친 혈관은 끊임없이 약동했다.
애꿎은 허공을 찔렀던 바로 그 순간, 조서인은 오른발을 한 발 더 내딛으며 그대로 창을 앞으로 한 번 더 내리꽂았다.
쒜에에엑―!
“흡!”
찰나에 찰나를 쪼갠 순간에 벌어진 일이다.
청계가 대경하며 검을 회수하여 창을 쳐 냈지만, 이미 반 호흡 늦어 버렸다.
까아앙!
청강검이 은자창의 창대를 때리고, 은자창의 창날 끝이 청계의 가슴팍을 길게 베어 냈다.
촤아악!
뿜어지는 참격.
청계의 발밑으로 장신구 하나가 툭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