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 15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15)
손바닥만 한 장신구였다.
은판에 새겨진 섬세한 문양 위로 샛노란 호안석이 중앙에 박혀있는데, 왠지 모를 붉은색 기운이 넘실거린다.
척 보기에도 값비싸고 진귀한 장신구지만, 그것에는 보이는 것보다 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자연스레 시선이 가는 그것.
급박하게 대결하는 도중임에도 마성에 사로잡힌 듯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윽.’
조서인은 잠시 잊고 있었던 통증이 격하게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혈도를 폭주시켰던 여파가 이제 슬슬 돌아오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장신구를 창대 끝으로 쳐서 자신의 발밑으로 끌고 왔다.
조서인은 차마 몸을 숙여 줍진 못하고 창을 앞으로 겨눈 채 청계를 경계했다.
“음?”
그런데 이상했다.
가슴이 좀 베이긴 했어도 깊은 상처는 아닐 터.
그런데 청계가 움직이지 않는다.
갑자기 석상이라도 되어 버린 양 가만히 있는 모습이 섬뜩하기까지 했다.
“그…… 으…….”
청계는 기묘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었다.
충혈된 눈.
광기 어린 눈빛은 그대로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잠시 비틀거리던 그가 중심을 잡는다.
화악―.
살기 가득한 눈으로 조서인을 노려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숨이 점점 가빠진다.
청계는 검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일검!”
“일검을 모셔라!”
갑자기 백검회 검사 오십 명이 일제히 달려 나왔다.
청계를 지키려는 것처럼 몰려나와 순식간에 조서인을 둘러싸려 했다.
“어딜!”
“조 공자를 지켜라!”
백검회가 선을 넘는 순간, 백경채 쪽에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수많은 호걸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르르 몰려든 그들이 조서인을 중심에 두고 서로를 견제했다.
채채챙―.
다들 흉흉한 무기를 뽑아 든 상황이다.
서로를 노려보는 모습.
지난 시간 동안 쌓인 서로 간의 원한이 하늘에 닿아 있었다.
살기로 공기가 일렁거렸다.
작은 계기만 주어진다면 당장이라도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닛.”
“싸운다! 전쟁이다!”
군웅들의 반응도 한껏 달아올랐다.
시끌벅적해지는 순간.
새하얀 가면 위로 삼(三)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잠깐!”
건장한 체격에 다부진 눈빛을 지닌 가면의 사내가 조서인을 향해 작게 목례를 취했다.
“조 공자, 나는 백검회의 삼검이오. 백검회를 대신해 말하겠소. 그 장신구를 돌려주시오.”
조서인은 자신의 발밑에 놓인 집혼기를 힐끔 바라봤다.
삼검의 눈빛에는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이 눈을 통해 다 드러났다.
“이것 말입니까?”
“그렇소. 그걸 발끝으로 툭 차서 이쪽으로 보내 주시오. 쉬운 일이지. 멋지게 ‘협’을 부르짖은 조 공자가 남의 물건을 탐내진 않으리라 믿소.”
“말을 교묘하게 하시네요.”
“아까 조 공자의 발언을 생각해 보면 피차일반이오. 정론을 말할 뿐이지.”
백검회의 삼검이 딱히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적의 것이라도 상대의 물건.
협을 부르짖는 무인이 물욕으로 탐내선 안 될 일이다.
그렇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그러하다.
‘하지만 이건 보통 물건이 아니야. 가지면 소호처럼 강해지는 물건이잖아?’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을지 몰라도 조서인은 안다.
청계가 집혼기를 손으로 잡고 그 힘을 받아들이자마자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음을.
조서인이 오른팔의 혈도를 터뜨려서라도 초반의 허점을 찌르지 않았다면, 그 막강한 힘에 가차 없이 당했을 터.
청계의 광기를 보면 조서인이 잔인하게 죽는 것은 물론이고 백경채 전부를 몰살시키고도 남는다.
강기를 숨 쉬듯 뿜어내게 만드는 힘이 얼마나 막강하던가.
삼 갑자의 내공을 선물하는 물건.
단번에 초절정의 경지에 데려다주는 천상의 마차 같은 물건이 바로 집혼기다.
‘저 요물.’
집혼기를 바라보는 조서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사람을 죽일수록 강해진다?
사람의 혼백이 모이면 모일수록 강해지고?
그런 이치에 안 맞는 일이 어디에 있는가. 만 명을 죽인다고 해서 만 명의 힘을 얻는 세상이 있다면, 그 세상에선 서로가 서로를 죽여 더 강해지려는 미치광이들만 남지 않겠느냔 말이다.
‘이건, 위험해. 정말로 위험한 물건이야. 분명히 가진 것만으로도 강해지는 건 매력적이지만…….’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든다.
그게 꼭 나쁜가?
사람은 선한 면만 갖고 있지 않다.
묵자가 말했듯, 천성이 악한 면도 분명히 갖고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동안 말로 표현은 못했지만 소호가 얼마나 부러웠던가?
뛰어난 재능, 위대한 스승, 절륜한 무공.
그 모든 것을 갖고 있던 소호마저 이 집혼기의 유혹에 넘어갔다.
소호는 집혼기로 얻은 막강한 내공 덕분에 그 어린 나이에 장기린이라는 절대자와 맞부딪칠 만한 힘을 얻지 않았던가.
붉은색 강기를 뿜어 대던 그 힘.
야성적이면서도 막강한 그 모습.
지금도 눈만 감으면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젊은 무인에게 있어선 꿈만 같은 광경이다.
시간과 내공의 벽을 뛰어넘어 전대의 고수를 무공으로 이기는 것만큼 짜릿한 일이 또 있을까.
그 힘이 내게 있다면?
잠시 양심의 가책에서 눈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질타할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꿀꺽.
조서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손만 뻗으면 된다.
단지 손을 뻗어 잡는 것만으로, 조서인은 소호가 얻었던 그 힘을 똑같이 갖게 된다.
“조 공자?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오? 정말로 우리 백검회의 물건을 탐내는 것이오?”
“…….”
“조 공자!”
삼검이 목소리를 높이자 백경채의 사람들이 험악한 얼굴로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꿈틀거렸다.
“어딜 감히!”
“한번 싸워 볼 거냐! 이 자라 같은 놈들아!”
백경채 사람들이 달려들기 전에, 조서인이 먼저 움직였다.
“이것은 평범한 물건이 아닙니다.”
조서인은 지그시 감았던 눈을 떴다.
호흡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건곤조화신공.
검선의 무맥으로 이어진 조화의 힘이 조서인의 상단전을 차분하게 감싸 주었다.
“귀물(鬼物)은 사람의 노력을 배신합니다. 사람을 죽여 혼자만 강해지겠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게 합니다. 흉신광검이 갑자기 강해진 것은 이 물건과 관련이 있겠지요.”
“조 공자!”
불길함을 느낀 삼검이 검 손잡이를 붙잡는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조서인은 망설이지 않았다.
쒜에에엑―!
저릿저릿한 팔로도 순속의 섬격(閃擊)을 뿜어내 집혼기를 꿰뚫었다.
쩡!
집혼기의 호안석이 깨지는 소리는 지극히 청명했다.
호랑이의 눈과 같던 보석이 박살 나고, 주변을 감싸고 있던 은판은 절반으로 뚝 부러졌다.
파괴는 간단했다.
바짝 마른 조개껍데기를 돌로 찧은 것처럼, 간단히 박살 났다.
그런데 그 순간, 세상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
삐이―――.
귓가에 이명이 들린다.
지독한 적막이 펼쳐졌다.
눈앞에서 개기일식이 벌어진 것처럼 빛이 점멸하니 머릿속이 어지럽다.
화아아악―.
부서진 집혼기를 중심으로 터져 나오는 힘.
수천 마리의 말들이 스쳐 지나간 것처럼 몸이 흔들렸다.
커다란 물결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조서인만 그리 느낀 것이 아니다.
검을 뽑으려 하던 삼검.
백검회의 인물들.
그리고 주변에 있던 백경채의 호걸들도 다 놀란 얼굴이다.
“그걸, 부숴?”
삼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
주변에서도 모두 놀란 분위기다.
군웅들 쪽에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싸움의 원인은 이제 없습니다. 무의미한 싸움은 이제 그만두고 서로의 협의점을…….”
퍼억!
격타음이 들렸다.
백검회 쪽에서 짐승 같은 괴성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아아―――!”
가죽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백검회의 검사 한 명이 멀리 나가떨어졌다.
마치 조약돌을 몽둥이로 후려친 듯한 모양새다.
어안이 벙벙한 사이 허공으로 시뻘건 검강이 솟구쳤다.
가차 없이 동료를 쳐서 날린 자.
흉신광검 청계가 검강을 줄기줄기 내뿜으며 조서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대체 어찌된 일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석상처럼 굳어 있지 않았던가.
집혼기를 부수자 그 결박에서 풀려나기라도 한 것 같았다.
“흡!”
문답을 나눌 시간조차 없다.
조서인은 호안석을 꿰뚫고 있던 은자창을 황급히 뽑아 들었다.
깡! 깡!
생각보다 창날에서 집혼기가 떨어지질 않는다. 몇 번이나 땅을 내리친 뒤에야 집혼기 파편들이 떨어져 나갔다.
팔목과 팔꿈치가 찌릿거린다.
은빛으로 빛나던 장창이 어째선지 살짝 붉어 보였다.
쩌어엉!
혼신의 힘을 다해 내리치는 청계의 검격은 여전히 강맹했다.
조서인은 정면을 겨눈 거창(擧槍) 자세를 유지한 채 뒤로 주춤 물러났다.
아까처럼 압도적이진 않지만, 여전히 흉신광검의 힘은 강력했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검격들을 재빠른 창술로 막아 냈다.
채채채챙!
일장일단.
막상막하의 힘으로 전개되는 싸움은 순식간에 절정으로 치달았다.
서로 간의 눈치를 보던 두 집단이 전의에 휩싸였다.
두 사람의 싸움은 모두의 전쟁을 시작하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죽여 버려라!”
“백경채 놈들을 다 벤다!”
새하얀 가면을 쓴 사내들이 일제히 동일한 모양과 크기의 검을 들고 달려든다.
“자라 같은 새끼들!”
“다 회를 쳐 버려!”
백경채의 호걸들도 제각각 대감도와 박도, 삼첨양인도 같은 병기를 잡고 거칠게 달려들었다.
“와아아아―!”
“죽여라!”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는 모습이다. 광기와 투기가 주변을 지배했다.
전화의 불길이 들불처럼 서릉협을 휩쓸며 퍼져 나갔다.
“캬아아앗!”
쩌저정!
조서인은 청풍검의 검격들을 막으며 주변의 상황을 살폈다.
백검회 삼검이 다급하게 바닥에 무릎을 꿇는 모습이 보였다. 부서진 집혼기의 잔해를 양손으로 쓸어 담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 주변으로 몰려든 백검회의 무인들이 제각각 화산과 청성의 무공을 사용하며 백경채의 호걸들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쇳소리가 울려 퍼지고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백경채 호걸들의 무공은 정돈되지 않았지만 기개와 기세가 있었다.
검에 찔리고 베이면서도 커다란 대감도를 목덜미에 박아 넣는 맷집과 투기가 있다.
두 집단의 싸움은 순식간에 많은 사상자를 만들었다.
“안 돼.”
허공에 흩뿌려지는 핏물이 조서인의 마음을 격동시켰다.
그가 이곳에서 왜 홀로 싸움을 시작했던가.
싸움을 막기 위해 온 것이다.
억지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청계와 말싸움을 벌이면서 도발했다. 사흘이라는 시간을 벌기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청계와의 정정당당한 비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다니.
이게 뭔가?
전란의 소용돌이에 빨려들어 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실감이 난다.
뭔가를 해 볼 틈도 없었다.
흉신광검이 달려드는 바람에 너무나 순식간에 싸움의 불길이 사방을 태우고 있었다.
쩌저저정!
조서인은 꼿꼿이 허리를 선 채 날아드는 검격들을 버텨 냈다.
청계의 검강은 강하다.
하지만 아까처럼 무림오존 수준의 막강함을 보여 주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한 방, 한 방.
공격을 주고받을 때마다 오장육부가 흔들리는 듯하지만, 충분히 견딜 만하다.
조서인은 이번에는 정말로 청계를 쓰러뜨리고 싸움을 끝낼 기회라는 것을 느꼈다.
“스읍.”
자세를 낮춘다.
건곤조화신공의 힘을 끌어 올리며 일연적룡무를 언제든 뿜어낼 준비를 한다.
고오오오―.
싸움이 고조되는 그 순간.
조서인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청계가 공격의 고삐를 조금 늦추던 바로 그 때, 거대한 뿔피리 소리가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뿌우우우우―――!
마치 대명제국 황제의 행차처럼 화려한 일행이었다.
푸른색의 깨끗한 무복을 동일하게 갖춰 입은 무인들의 수가 기백에 달한다.
특히 그들의 가장 앞에 선 자.
눈에 띄는 커다란 백마를 타고, 하얀색 비단 장포에 금색 영웅건을 쓴 미안(美顔)의 청년이 놀랄 만큼 커다란 존재감을 내뿜는다.
조서인은 놀라서 크게 뜬 눈으로 그와, 그의 뒤에 세워져 있는 황금색 깃발의 글자를 읽었다.
―천무(天武).
천무련.
그리고 천무공자가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