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 16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16)
“천무공자!”
“태행산에서 옥수마녀를 잡았다던 그 천재?”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최근엔 천무련주라고 더 자주 불린다고. 이미 안휘성은 제패했고, 절강의 모용세가랑 하남 무림까지 넘본다던데?”
“안휘를 제패했다고? 남궁세가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을 텐데 무슨 수로?”
“이유는 몰라도 천무련과 친하다더군. 남궁세가가 천무공자의 인품에 반한 거겠지.”
“대단하구만. 인물이긴 인물인 모양이야.”
군웅들은 화려하기 짝이 없는 천무련의 모습에 환호하며 즐거워했다.
백검회와 녹림수로맹.
그 둘의 격렬한 전쟁이 이제는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어찌 흥미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 거야?”
“천무공자가 싸움을 중재하려는 것 아닐까? 지금 녹림수로맹이랑 백검회의 싸움으로 장강 교통로가 엉망진창이라더라.”
“그것 참 큰 문제구만. 하긴 상인이랑 표국들도 요즘 난리라던데 그래서 녹림수로맹을 도우러 온 건가?”
“모르지. 천무련에는 줄을 대고 있는 표국이나 상회들도 엄청 많으니까.”
군웅들은 제각각 추측을 내놓았지만 정확한 답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편 전장에서는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병기들끼리 부딪치는 소리는 한참 전에 멈췄다. 당장이라도 서로를 죽일 듯 달려들던 자들이 주변의 눈치를 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서 두 집단의 경계선을 만들어 냈다.
녹림수로맹에서 장강용왕 추묵환과 소호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던 탓이다.
그들은 천무련이 왜 갑자기 나타난 것인지 의아해하며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아직 피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무기를 집어넣지 않은 채 천무련과 백검회를 번갈아 응시하며 경계했다. 성벽 위의 눈치를 살피며 지시를 기다렸지만, 어떠한 명령도 그들에게 떨어지지 않았다.
“기다려 봐라. 조 공자도 싸움을 멈추셨다.”
“예!”
용왕수호대 대주가 한마디 하자 그제야 그들은 칼끝을 내린 채 조용히 대기했다.
“이게 대체…….”
한편 백검회의 반응은 좀 달랐다.
그들은 깜짝 놀란 듯 서둘러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반응이 가장 격렬했던 것은 백검회의 일검, 흉신광검 청계다.
그는 누가 봐도 동요하는 모습으로 훌쩍 물러나 소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붉은색 강기를 무시무시하게 뿜어 대며 사위를 압도하는 강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백검회의 분들을 뵙습니다. 장소호입니다.”
새하얀 백마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소호는 절도 있고 깨끗한 자세로 포권을 취했다.
먼저 예를 취하긴 했으나 그는 당당했으며, 묘한 기품을 두르고 있었다.
새하얀 비단 장포, 그리고 황금빛 영웅건이 그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아!”
조서인은 감탄해서 입을 살짝 벌렸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볼 때마다 놀랍다.
간단한 행동 하나로 주변의 분위기를 확 잡아 버리는 매력은 조서인으로서는 따라할 수도 없는 일이다.
시끌벅적했던 군웅들도 서서히 조용해졌다.
침묵이 감도는 전장.
백검회의 삼검이 청계를 대신해서 앞으로 나섰다.
“백검회의 삼검이오. 대체 이곳엔 어쩐 일이오, 천무공자?”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다고 해서 급히 달려왔습니다. 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것을 보니 다행히 헛걸음을 하지는 않은 듯 합니다.”
소호는 마치 황족처럼 당당한 자세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치열한 전쟁터, 한쪽에선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린 무인들이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지만 소호와 천무련만큼은 그런 분위기와 동떨어진 사람들처럼 고요하게 평정을 지켰다.
소호의 시선이 짧게 조서인에게 머물렀다가, 최종적으로는 흉신광검 청계에게로 향했다.
소호는 청계와 꽤 오랜 시간 동안 말없이 시선을 마주했다.
백검회의 삼검이 그런 소호의 시선을 막아서듯 끼어들었다.
“천무련이 근래에 강호 무림의 대소사에 다 관여하고 다닌다더니 소문이 사실이었군.”
“의롭지 못한 일이 벌어지면 누군가는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본인이라는 것인가? 의기는 좋소. 하지만 광오하군. 대체 누가 의롭지 못하단 말이오? 그걸 누가 판별할 수 있소?”
소호는 대답하지 않고 삼검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삼검은 움찔했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근래 천무련과 천무공자의 명성이 높다고는 하나 다른 문파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어서야 안 될 일이오. 이 일은 녹림수로맹과 백검회의 일이니 천무련은 이 일에 끼어들지 마시오.”
삼검은 날 선 말투로 소호를 경계했다.
만에 하나라도 천무공자가 이 일에 끼어드는 것을 지극히 꺼려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소호는 그의 상식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건 제가 정하는 일입니다.”
“뭐요?”
“끼어들지 말지는 제가 정합니다. 제게 끼어들지 말라고 하는 백검회의 삼검이 더 광오하군요.”
소호는 빙긋 웃고 있을 뿐이지만 시선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삼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소호와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마치 거대한 맹수를 만난 것처럼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본능적인 공포감.
삼검은 피식자가 포식자에게 느끼는 무력감을 절실히 느꼈다.
후욱―.
침묵이 중압감을 만든다.
소호는 주변에서 불편함을 느낄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그보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어떤……?”
“저기에 백검회의 일검이 계신데 왜 삼검만이 나서는 겁니까? 백검회에선 삼검이 일검보다 더 높은 권한을 갖고 있나요?”
소호의 시선이 청계에게로 향한다.
원래 이렇게 무리와 무리가 만나면 대표끼리 대화를 나누는 게 맞다.
뻔히 그 자리에 높은 사람이 있으면서 대표자로 수하를 내보내는 건 상대를 자신보다 급이 낮은 단체로 대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표국과 표국이 대화를 나누는데, 한쪽은 국주가 나오고 한쪽은 표두 나부랭이가 나와서야 대화가 되겠는가.
물론 청계라는 자가 흉신광검이라는 별호처럼 늘 광인처럼 치고받으니 아무도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안 했을 뿐이다.
“일검께선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그러니…….”
삼검이 더듬더듬 변명하려는 사이에 청계가 나서서 버럭 소리쳤다.
“됐다! 멍청아. 변명하지 마!”
신경질적이고 무례한 목소리였다.
“천무공자! 네깟놈이 잘난 척 끼어들 일이 아니다!”
청계가 나서자 그 앞을 막고 있던 백검회의 인물들이 주춤거리며 양옆으로 갈라져 길을 만들어 주었다.
“드디어 나오셨네요. 왜 제가 끼어들 일이 아니죠?”
“애송아. 네놈이 여기서 이러면 안 될 텐데?”
청계는 당당했다. 원래부터 겸손이나 예의를 모르는 광자였지만, 지금은 그 이상으로 더욱 자신감에 차 있었다.
혈관이 다 터져서 빨갛게 변한 눈으로 찢어 죽일 듯이 소호를 노려보았다.
“대체 왜 여기에 있냔 말이다. 엉? 뭐 하자는 거야? 우리 일에 방해라도 할 거야?”
“저는 상황을 알고자 할 뿐입니다. 백검회야말로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겁니까? 녹림수로맹을 먼저 공격한 건 백검회던데요.”
“알 거 없다.”
“아까도 말했듯이 무엇을 할지, 무엇을 알아낼지는 제가 정합니다.”
“이건 약속이랑 다르다.”
청계는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소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무슨 약속을 말합니까?”
“천무련이 이러면 안 되는 거다. 백검회와의 약속이 달라.”
“누가 들으면 천무련에서 백검회와 약속이라도 맺은 줄 알겠습니다.”
“오리발 내미는 거냐?”
청계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소호는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백검회와 적대시하고 싸우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그게 백검회를 지지하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능청스럽게 굴지 마라.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면 회주께서 화를 내실 거다.”
백검회주의 분노.
즉, 천무련과 백검회의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위협이다.
그런데 소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마치 그럴 리가 없다는 것처럼.
“그래요?”
“…….”
“화를 내지 않으면요? 왜 갑자기 말이 없으시죠?”
청계의 눈빛이 흔들렸다.
“회주가 시켰나?”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애송이, 요악스럽군.”
“그런 평은 처음 듣습니다.”
“어느 쪽이든 좋다. 그래서? 이 싸움에 끼어들 거냐? 우릴 다 죽일 건가?”
“글쎄요.”
소호는 뒷짐을 진 채 고민하듯 미간을 좁혔다.
“그 전에 한 가지 묻겠습니다. 강호 무림이 어지럽던 시절, 그나마 왕진 태감과 흑시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움직이던 곳이 백검회가 아니었습니까?”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지금 녹림수로맹을 치는 것에는 무슨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이를 소상히 밝히고 성명을 내지 않으면 강호의 많은 무인들이 백검회를 비난할 것입니다.”
“흥.”
청계는 비웃었다.
“흑시군에 짓밟히면서도 입 다물고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던 놈들이 이제 와서 감히 누굴 비난한단 말이냐. 흑시군 놈들. 그 벌레 같은 놈들을 잡아 족치고, 겁을 줘서 무림의 힘을 보여 준 것은 우리다. 몸을 숨기고 살던 비겁자들이 아니야.”
“잠시 힘에 짓눌려 숨죽였을지언정, 강호 무림의 의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대의를 구하는 척 위선 떨지 마라. 녹림수로맹? 큭큭, 도적놈들이 모여 있는 도적 떼의 소굴이다. 그런 놈들 쳐죽이는 데 무슨 설명이 필요하단 말이냐?”
청계의 오만무도한 발언은 녹림수로맹 당사자들의 극심한 화를 불러일으켰다.
당장 선을 긋고 떨어져 있던 백경채의 모두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청계를 노려본다.
소호는 그런 모두의 반응을 쭉 둘러본 뒤에 말을 이었다.
“흉신광검, 말을 좀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아무리 약해졌다고 한들, 저기 백경채 놈들 배를 다 찢어 놓기엔 충분하고도 남는다. 네놈 몸에 숨겨진 내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여 줄 수 있지.”
“그 잔혹함. 도저히 좌시할 수가 없군요.”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라. 우릴 다 죽일 거냐? 그것만 말해.”
“천무련은 제대로 된 은원이나 명분 없이 혈사를 벌이는 자들을 가만히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흥.”
청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 말뜻, 천무련의 뜻이겠지?”
“제 뜻이 곧, 천무련의 뜻입니다.”
소호의 발언은 광오하다기보단 너무나 당연한 일을 말하듯 자연스러웠다.
더욱 압권인 것은 함께 온 천무련의 무인들 모두가 그 의견에 동의하는 듯 일말의 의심도 없다는 점이다.
모두 자부심과 열정으로 가득 차 소호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황제를 모시는 금의위 친위대조차 이렇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미친놈들이군.”
흉신광검 청계의 평가는 어딘가 역설적이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청계가 손을 들자 백검회의 모든 무인들이 일제히 청계를 중심으로 둥그런 방진을 형성했다.
스릉―.
날카롭게 갈아 둔 청강검들이 제각각 섬뜩한 예기를 뿌린다.
천무련은 가만히 서서 소호의 명을 기다렸다.
소호가 손을 들어 올리자, 그제야 거의 동시에 검을 뽑아 절도 있는 자세로 백검회를 겨누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도리어 원래부터 피를 흘리며 싸우던 녹림수로맹만 당황스러워진 상황이다.
“이게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정작 원래 싸우던 녹림수로맹은 놔두고, 갑자기 나타난 천무공자와 천무련이 백검회와 싸우려는 분위기가 되었다.
호걸들이 다들 당황하면서 서로의 눈치를 살핀다.
쿵!
피 냄새에 취한 그들의 정신을 깨우듯, 강렬하고 둔중한 진동이 땅을 흔들었다.
온몸이 넝마가 된 한 청년.
조서인이 애창 은자를 땅에 내리친 뒤, 하늘을 가리켰다.
“해가 지고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하늘을 향했다.
어느새 어스름해진 하늘.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가리키며, 조서인은 최대한 당당한 자세로 외쳤다.
낭랑하면서 담담한 목소리가 모두의 마음속에 파고들었다.
“오늘의 싸움은 여기서 끝입니다. 이 이상은 내일 계속 싸우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서인의 정중한 요청에, 천무련과 백검회의 인물들이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