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94화 (523/686)

16권 17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17)

“그게 무슨 말…….”

소호의 의문은 청계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묻혀 버렸다.

“젠장, 약속 시간이 다 됐군! 영악한 놈! 네놈과의 약속 때문에 오늘 또 널 죽이지 못했구나!”

겉으로는 조서인을 향해 화풀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마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청계의 태도에는 조심성이 전혀 없었다.

광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인 만큼, 기쁨 또한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소호는 의아한 모양이었다.

미간을 좁히며 궁금해하는 그에게 체격이 호리호리하고 날렵해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빠르게 다가와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낙일지약(落日之約)……?”

소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조서인을 쳐다본다.

조서인은 그 순간 ‘처음’으로 이 자리에서 소호와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검회는 녹림수로맹에 밀린 빚을 받고 싶었건만, 아쉽구나. 아쉬워! 이놈, 낙일창! 내가 네놈을 기억할 것이다. 다음에는 찢어 죽일 것이야!”

“정정당당한 비무라면, 무인으로서 언제든 피하지 않겠습니다.”

조서인은 당당하게 답했고, 청계는 두 눈이 살기로 번들거리기는 했으나, 그 이상 시비를 걸지 않고 순순히 물러났다.

“가자!”

흉신광검이라 불리며 광인 취급을 받는 청계였으나, 그의 생존본능은 생각보다 더 뛰어났다.

그는 어리둥절하게 있는 백검회의 인원들에게 명령을 내려 기다렸다는 듯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모든 광경을 천무련은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도망치는 겁니까!”

“도망은 무슨, 해가 졌으니 약속을 지키는 것뿐이다!”

소호는 차마 먼저 손을 쓰지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그리고 그런 소호를 놀리듯 버럭 소리치는 흉신광검 청계.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군웅들이 탄성을 내지르며 서로 간의 의견을 교환했다.

“천무련 입장에선 지금 흉신광검을 죽이는 게 좋을 텐데? 왜 가만히 보고 있지?”

“멍청아, 명분이 없잖아, 명분이.”

“무슨 명분? 방금 전까지 검 뽑고 싸우려고 했으면서.”

“낙일창이 낙일지약을 내세웠잖아. 해가 질 때까지 버티면 백검회가 그 날은 그만 물러나는 걸로 약속했던 그거.”

“아, 그게 낙일지약이야? 낙일창이 그걸 지금도 지키라고 한 거라고?”

“백검회 입장에선 울고 싶은데 뺨 때려 준 셈이겠지. 자존심 때문에 도망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이젠 되려 낙일지약 덕분에 봐주는 거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를 수 있게 됐잖아.”

“아아!”

“그나저나 천무공자의 무공이 생각보다 더 센 모양이군. 저 흉신광검이 얼굴을 보자마자 얼른 내빼려고 하는 걸 보면 말이야.”

“천무공자. 으음, 그 정도였나? 흉신광검이 이틀간 낙일창과 싸우면서 내상이라도 입은 것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 낙일창의 무공도 대단했으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강호 무림에 신성이 나타났다고 소문이 자자하겠어.”

“으음, 그러니까. 백검회가 싸우지 않는 건 순전히 낙일지약 때문이다? 백검회는 그걸 핑계 삼아 도망치는 거고?”

“그래. 흉신광검도 참 영악해. 결국 낙일창 덕분에 피 튀기는 싸움을 안 하고 넘어갈 수 있게 된 거잖냐. 명예와 실리를 모두 챙긴 거지. 사실 천무련 입장에서도 기분이 묘하겠지. 큰 싸움이 일어나면 양쪽 다 백 단위로 죽었을걸?”

“아마 녹림수로맹도 참전하지 않았겠어?”

“그래. 그러니까 백검회가 낙일지약을 핑계 삼아 냅다 도망치는 거라고.”

“하긴 백검회가 혈사를 일으킨다고 해서 중재하겠다고 천무련이 온 건데, 정작 안 싸우고 도망쳐 버리면 굳이 쫓아가서 다 죽일 수가 없겠지.”

“정파란 힘든 거야.”

“눈치 볼 게 많아서?”

“그래. 지금 우리처럼 보고 있는 눈이 한둘이야? 명분도 없이 어떻게 큰 싸움을 일으키겠어.”

“천무련은 기껏 여기까지 와서 아무 일도 못하고. 쯧쯧, 헛힘 썼구만.”

“뭐, 천무련이 온 덕분에 백검회가 물러나는 면도 있기는 하니까. 그렇게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건 이 모든 걸 저기 있는 낙일창이 만들어 냈다는 거지.”

“낙일지약, 협의 외침. 이거야말로 낙일지협(落日之俠)의 일대 사건이구만.”

“그렇지. 강호가 들끓겠어.”

그들의 목소리는 강호 무림이 보는 이 사건에 대한 평가나 다름없었다.

사람은 종종 그가 가진 능력보다는 그가 만들어 낸 ‘여파’에 의해 평가된다.

무명에 가까운 한낱 후기지수가 장강의 흐름을 바꿔 버린 일대 사건.

훗날 낙일지협이라 불릴 이 사건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순간이었다.

***

조서인은 설레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불안감도 있지만, 역시 반가운 설렘이 먼저다.

둘도 없는 오랜 친구.

조서인에게 있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명, 장소호뿐이었다.

첫 만남은 일방적인 은혜였다.

천상에 사는 존재가 잠시 세상에 내려와 그 탁월한 능력을 베풀어 준 신성한 순간을 어찌 잊을까.

나비가 꽃에 끌리듯, 조서인은 자연스레 소호의 맹렬한 숭배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무산학관에서의 삶이 그러했다.

소호가 내려 준 은혜.

소호가 가르쳐 준 무공.

찬란하게 빛나는 그 모습을 쫓으며 조금이나마 그와 닮기를 소망한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너무 뛰어나서 도리어 외로움을 느끼는 듯한 소호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게 조서인이었다.

아마 포기하면 편했을 것이다.

소호의 주변을 맴도는 수많은 사람들과 같이, 무공 면에서 소호를 따라잡는 것은 포기한 채 인간적으로만 함께하면 아마 마음이 지금보다는 훨씬 편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조서인은 그럴 수가 없었다.

늘 소호와 같은 경지에 올라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무인이 되기를 꿈꿔 왔다.

진정한 친구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단지 동경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같은 곳에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걷고 싶었다.

문제는 소호와의 차이가 너무 컸다는 점이다.

재능으로는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러니 조서인에게 남은 것은 노력뿐이다.

매일 소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수련하려 했다.

누군가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그것만으로도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소호는 겉으로만 봐서는 나태한 천재라 무공 수련도 대충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소호는 보기보다 성실했다.

매일 새벽 해 뜰 무렵에는 역근경을 기반으로 한 육체 단련을 한 시진 동안 수련하는 게 일상이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새로운 무공을 심심풀이 삼아 창안하고, 그걸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걸 낙으로 삼는 친구다.

그런 친구를 어찌 이길까.

조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잠자는 시간을 줄여 가며 그저 창술 하나에 미친 듯이 매달리는 방법뿐이다.

무공의 다양성은 포기한다.

오로지 한 길만 파서 대응 방법을 넓히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팔 년의 세월이 흘렀다.

무산학관을 졸업한 뒤에 서로의 관계가 조금 달라졌다.

은자촌의 거주민이 되어 장기린의 제자가 된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 준 기연이다.

검선과의 만남.

은자촌 노인들의 아낌없는 배려.

천외천(天外天) 신선들의 세계를 엿본 조서인은 하늘에 감사했다.

조서인은 최선을 다했다.

평소에도 노력이라는 것을 신봉했지만, 은자촌에서는 그야말로 노력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

그 끝이 지난번 소호와의 대결이지 않던가.

처음으로 겪은 승리.

천 전, 구백구십구 패, 그리고 일 승.

소호와의 마지막 만남은 그 승부로 끝을 맺었다.

“서인아. 오랜만이네.”

소호는 웃고 있었다.

이 년의 시간이 흘렀건만, 여전히 그의 웃음은 햇살처럼 환하고 화려했다.

“소호야. 잘 있었어?”

조서인이 다가가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손을 붙잡았다.

꽉 잡은 두 손.

소호의 손바닥엔 딱딱한 굳은살이 만져졌다.

‘열심히 수련하고 있구나.’

아마 조서인이 느끼는 것만큼 소호도 조서인의 굳은살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빙긋 웃었다.

“단체를 이끈다는 게 생각보다 힘드네. 할 일이 많아서 바쁘게 지내는 중이야.”

“그렇구나. 역시 대단하다, 소호야. 천무련이라니.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야.”

“그래? 아냐.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

“그래도 대단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한데 신기하다. 결국 그렇게 많은 사람을 이끌게 되었구나……. 하긴, 네 재능을 썩히면 안 되지.”

“너도 도와줘야지.”

조서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지는 소호의 말에 깜짝 놀랐다.

“나도? 내가 도움이 될까?”

“당연하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네가 마을에서 언제 나오나 기다리고 있었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소호는 진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시간의 환담만으로도 조서인은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호가 그를 기다렸다고 말한다.

그거면 충분했다.

지난 대결이 그렇게 끝났어도 소호가 그를 대하는 태도는 그대로였다.

‘그런데…….’

조서인은 문득 주변의 분위기가 오묘한 것을 느꼈다.

소호와 함께 백경채 내부로 들어온 게 방금 전이다.

천무련의 무인들은 성벽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수백에 달하는 무인들이 성벽 안으로 들어오면 불필요한 긴장감이 생기게 된다. 그걸 피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백경채 내부의 분위기가 묘했다.

호탕한 호걸들답게 그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조서인을 반겨 주었다.

대단했다거나, 낙일창을 잊지 않겠다는 인사말도 종종 들렸다.

그런데 그런 호탕한 이들이 소호를 향해서는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소가 닭 보는 듯한 분위기다. 딱히 반가워하지도 그렇다고 적대시하지도 않는 묘한 거리를 유지하는 듯했다.

소호는 늘 그렇듯 신경도 쓰지 않지만, 조서인 입장에선 그러기가 힘들었다.

‘제갈 군사? 육 군사? 왜 저기에서 다가오질 않는 거지?’

장강와룡 제갈륜과 만박서생 육지생.

두 사람이 제일 먼저 다가와서 축하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가장 먼 곳에 있었다.

잘 보이지도 않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호나 조서인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육지생은 심지어 몸을 돌려 장강 쪽을 바라보고 있기까지 했다.

‘도대체 왜?’

의아한 가운데 두 사람은 백경채 내부의 대전으로 향했다.

조서인은 추묵환을 만났던 전각 안에서, 그는 지금 상석에 앉아 있는 녹림수로맹의 부표파자 백경을 마주했다.

“조 공자.”

백경은 한달음에 달려 나와 조서인의 손을 붙잡았다.

“고맙소. 시간을 끌기 위해 조 공자가 보여 준 그 의기와 협의는 우리 맹의 맹도들이 죽는 한이 있어도 잊지 않을 것이오.”

“아닙니다.”

조서인은 손사래를 쳤다.

“절박해서 뭐든 해 보고자 호기를 부려보았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도왔는지 결과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오. 우린 최후의 항전까지 각오하고 있었소.”

“그래도 마지막엔 꽤 큰 싸움이 벌어졌었는데, 맹에 부상자는 많이 없는지요?”

“죽은 놈은 없소. 그럼 된 거지. 우리 녹림수로맹에 피부 좀 긁힌 것 갖고 부상을 입었다고 징징거리는 놈은 단 한 명도 없다오. 그렇지 않냐, 이놈들아?”

백경이 버럭 소리쳐 묻자 대전 안에 들어와 있던 간부들이 씩 웃으며 소리 높여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피부 좀 긁힌 것 갖고 다쳤다고 하면 수적질 못하지.”

“징징거리는 놈들은 다들 소금을 뿌려서 장강에 던져 버립시다.”

험악한 사내들이 거친 농담을 하며 껄껄 웃는다.

백경은 저것 좀 보라면서 허허 웃었다.

“조 공자는 마음 쓰지 마시오. 홀로 흉신광검을 상대하던 그 의기는 우리 녹림수로맹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오.”

백경이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자, 대전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똑같이 정중한 예를 취했다.

“왜들 이러십니까? 저는 별로 한 것도 없습니다.”

조서인 입장에선 사실 실패한 것 아닌가 생각했기에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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