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95화 (524/686)

16권 18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18)

낙일지약.

어쩌다 보니 거창해졌지만 사실 조서인이 청계의 호승심을 빌미로 억지를 부리고 있던 상황이다.

그나마도 원래 계획대로라면 장강용왕이 다 회복할 때까지 사흘을 버텨야 했는데 고작 이틀 만에 이미 조서인이 위태로워지고 있지 않았던가.

집혼기의 힘을 사용해 붉은색 강기를 이리저리 휘두르던 청계는 천하를 논할 만한 강자였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백경채의 성벽을 두부처럼 자르던 검강은 무시무시했다.

한 호흡이라도 놓치면 목숨이 달아나는 그 긴장감.

만약 그 시점에 소호와 천무련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했다.

일연적룡무와 건곤조화신공은 세상에 짝이 없는 절공이지만, 아직 조서인의 성취로는 그 상태의 청계를 상대로 반나절을 견디기도 버거웠을 것이다.

‘이래선 안 되는데. 나만 칭찬받으니 내가 소호와 천무련의 공까지 뺏은 것 같잖아.’

그건 안 될 일이다.

조서인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 환대를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보다는 여기 천무공자와 천무련의 도움이 더 크지 않았겠습니까?”

조서인은 당연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침묵이 감돈다.

주변의 분위기가 떨떠름했다.

“커험!”

백경은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건장하고 두꺼운 손으로 소호에게 짧게 포권을 취했다.

“인사가 늦었군. 나는 녹림수로맹의 부표파자 백경이오. 강호 무림을 떠도는 천무공자의 명성을 잘 듣고 있었소. 오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와 줘서 감사의 뜻을 표하오.”

“장소호입니다. 당연히 왔어야 할 일이니. 개의치 않으셨으면 합니다.”

백경은 누가 봐도 조서인을 대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로 시큰둥하게 인사한 뒤 곧바로 다시 조서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과연 용왕의 손자다운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조 공자.”

“어어…….”

조서인은 난감한 심정으로 소호를 힐끔 봤지만, 소호는 그저 웃고 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민망하네. 진짜 손자 같은 인물이 바로 옆에 있는데.’

평생을 은자촌에서 살면서 추묵환의 손자처럼 살아온 친구가 바로 옆에 있는데, 고작 이 년을 함께 한 조서인이 손자처럼 구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내가 말해야 하나?’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소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조서인은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백경의 칭찬을 받아 주는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백검회가 물러난 것 같기는 하지만 아직은 방심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흘간 성문을 지키기로 약조했습니다. 장강용왕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까지는 성벽 근처에서 머무르겠습니다.”

조서인이 곧바로 다시 나가려고 하는데 백경이 그를 만류했다.

“잠깐. 됐소. 조 공자는 이틀이나 고생했으면 된 것이지.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더 큰 은혜를 입히려고 하는 것이오? 이대로 우리 맹에 입맹해서 통째로 물려받기라도 할 거요?”

“예? 아뇨, 그런 것은 아니고…….”

“장강 유역에서 우리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소. 혹시 백검회에서 쳐들어오면 꼭 알릴 테니 조 공자는 천무공자와 함께 숙소에서 좀 쉬도록 하시오.”

“저는 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옷도 그렇고, 행색도 그렇고. 괜찮지 않아 보이는군. 부디 이 노인네의 부탁을 들어주시오.”

머리카락이 하얗게 샌 노인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조서인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부표파자님의 말은 거절할 수가 없군요.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소. 용왕수호대 놈들아! 조 공자와 천무공자를 모셔라! 용왕께서 깨어나시면 내가 직접 알리겠다!”

“존명!”

조서인은 소호와 함께 용왕수호대의 안내를 받아 대전을 빠져나갔다.

예전에 이미 한 번 안내되었던 숙소로 다시 들어가자 소호가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추 할아버지의 손자? 여기선 그렇게 알고 있어?”

“으음, 어르신께서 갑자기 그런 식으로 날 소개해 주셔서. 그래서 저러는 거야. 민망하네. 진짜 손자인 소호가 있는데.”

“하핫, 아냐, 나야 오랫동안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추 할아버지가 그러셨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어차피 서인이 너도 은자촌 사람이잖아.”

소호는 개의치 않는 듯 손을 내저었다.

“마을은 어때? 다들 잘 지내셔?”

“으음, 이 년 전의 일 때문에 강호에 나간 분들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계셔.”

“그렇구나. 마을이 텅텅 비었겠네.”

“그래도 여전히 평화롭고 매일 바빠. 적왕은 밥을 너무 많이 먹고, 깜돌이랑 놀아 주는 건 항상 힘들고. 아! 철이가 소호 너를 되게 좋아해.”

“철이! 미미 동생 철이?”

“맞아. 대철. 걔가 널 엄청 좋아해. 나중에 꼭 소호 형처럼 되고 싶어 하더라.”

“하핫, 신기하네. 철이도 못 본 지 오래됐다.”

“한 번쯤 놀러 오지 그랬어? 사부님이랑 사모님이 말씀은 안 하셔도 보고 싶어 하실 거야.”

“하핫.”

소호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고요한 방 안.

용왕수호대도 돌아가고 나니 이제는 정말로 두 사람만이 남았다.

조서인은 잠시 미뤄뒀던 질문을 이제 던질 때가 왔음을 알았다.

“소호야.”

“어? 왜?”

“추 어르신께서 위험하셨어. 옆구리를 길게 베여서 피가 멈추지 않으시더라. 지금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요양 중이셔.”

“으음…….”

창밖의 강물을 가만히 내다보던 소호가 침음성을 흘렸다.

“많이……, 다치셨어?”

“꽤 심해 보였어.”

“왜 직접 나서셨대? 녹림수호맹에는 강한 사람들도 많은데.”

소호는 탐탁지 않아 보였다.

미간을 잔뜩 좁힌 모습은 몹시 불만스러워 보인다. 투덜거리는 말도 추묵환을 걱정해서 타박하는 말에 가까웠다.

“흉신광검 청계가 생각보다 강했던 거지. 추 어르신께서 혼자 나서셨다고 하시더라.”

“나이도 있으신 분이. 으음.”

조서인은 가만히 소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소호야, 넌 추 어르신께서 다치실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거지?”

“……왜 그런 질문을 해?”

“추 어르신께서 은자촌에 서신을 보내셨어. 녹림수로맹을 비울 수 없는 본인을 대신해서 한 사람을 구해 달라는 내용이더라. 검선께 보낸 거였지만 하필 그분이 자리를 비우셔서 내가 대신 나오게 되었어.”

“그랬……구나.”

“성정이 대쪽 같으신 그분이 서찰을 보낼 정도면 상당히 상황이 심각했을 거야. 소호 너도 알지? 추 어르신께서 얼마나 자존심이 센지.”

“잘 알지.”

“더덕밭을 일군 것처럼 끝까지 혼자 해내실 분이야.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분이 아니시지. 그런데 서신을 썼어.”

조서인은 소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체 왜 돕지 않았나.

추 어르신께서 계신 이곳 녹림수로맹이 백검회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데, 은자촌의 사랑받는 손자로서 왜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는가?

“날 탓하는구나.”

소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탓하는 건 아냐. 다만…….”

“무심해 보이지? 천무련처럼 큰 단체를 이끌면서 위험에 빠진 할아버지도 돕지 않고 뭘했나 싶고. 그렇지?”

“…….”

“최근 들어 이런 일이 많네. 의도는 좋은데, 늘 그렇게 의심을 받아.”

조서인은 소호의 대답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했다.

뒷짐을 지고 창밖을 내다보는 소호의 모습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구하러 오려고 했어.”

“역시! 그랬던 거지?”

들뜬 마음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소호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던 탓이다.

“그런데 일이 꼬여서 적절한 시점을 놓쳐 버렸네.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한발 늦어 버렸어.”

“어? 어어.”

“녹림수로맹 사람들이 아까처럼 박대할 만해. 시기를 놓쳤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원래 천시와 지시와 인시를 모두 얻어야 승리할 수 있다잖아? 이번엔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어.”

“잠깐만, 그러니까. 구하러 오려고는 했는데, 바로 온 게 아니고,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야……?”

“응.”

멍하니 굳어져 버렸다.

소호는 그런 조서인을 힐끗 본 뒤 창밖의 강물을 계속 바라봤다.

“세상은 의리만으로 돌아가지 않더라고. 천무련을 이끌다 보니 그렇게 움직이게 되더라. 상대방이 천무련을 가장 필요로 할 시점. 나랑 천무련이 가장 멋있게 보일 순간.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는 시점에 싸워야 해. 주해가 판을 짜면서 조언해 준 것도 그래서였고.”

섭주해.

천무련의 군사이자 소호의 지낭.

조서인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소호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천방지축.

무림 강호가 좁다고 뛰어다니던 순수한 청년은 어디로 간 것일까.

스물두 살이 넘은 청년답지 않게 천진난만한 얼굴은 그대로건만.

지금 눈앞에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를 극대화하려면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천무련의 련주만이 보였다.

“그…….”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찌 생각하면 큰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했다.

조서인의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지금의 소호는 위험하다고.

“그, 소호야. 내 생각에는 그래. 괜히 좋은 때를 기다리다가 그사이에 싸움이 나서 수많은 사람이 더 다치거나 죽었잖아? 그럼 그건 좋은 결과가 아니지 않을까?”

“눈앞의 일만 보면 그렇지. 그렇게 따지면 아예 백검회가 공격도 못하도록 여기에 도착하기도 전에 싹을 자르면 편하잖아?”

“그건……, 그렇지.”

“그런데 그럴 명분도 없을뿐더러, 녹림수로맹이 그렇게 위기를 겪지 않으면 그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몰라. 사람들은 관심도 없어. 녹림수로맹도 그게 은혜라고 생각은 안 할 거야.”

“위기를 겪어야 고마움도 안다. 그 말이야?”

“응.”

“그때까지 희생된 사람들은?”

“의도치 않은 작은 희생.”

자신감과 확신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커다란 소가 산을 오르는데, 발밑을 지나가던 쥐가 밟혀서 죽었어. 그러면 그건 죄가 아니잖아?”

“……!”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걸 탓할 수는 없지 않을까?”

조서인은 그때 깨달았다.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그 말의 무게감과 실체가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처음이다.

“그건……, 마치…….”

왕진 같다.

차마 그 말까진 할 수 없었던 조서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방해였구나. 아까 일이 꼬였다는 말. 그거 나 때문이지?”

소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밖을 바라볼 뿐.

“계획이 어긋나긴 했어. 내가 나서야 할 시점에 서인이 네가 먼저 싸웠거든.”

“상처 입고 피 흘릴 사람들을 두고 볼 수는 없었어. 무의미한 싸움을 보면서 나서기 좋은 때를 기다린다면 그건 협이 아니야.”

“그래. 네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소호는 조서인을 부정하지도 않았지만 긍정하지도 않았다.

조서인은 소호와의 거리감이 순식간에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멀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울컥.

가슴이 뜨겁다.

조서인은 이를 앙다물었다.

“소호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뭔데?”

“그렇게 해서까지 녹림수로맹에 은혜를 입히면? 천무련이 바라는 건 뭐야?”

소호는 웃었다.

이제야 대화가 통한다는 것처럼.

“장강의 교통로가 필요해.”

“어?”

“곧 북쪽에서 전쟁이 일어날 거야. 천무련은 물자의 이동을 돕기로 했고.”

“녹림수로맹에 그에 대한 협력을 요청하겠다고?”

“계획대로 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쉽지가 않을 것 같네. 이번에는 방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 방해하는 사람 중에 조서인도 들어 있을 것이다.

대앵― 대앵― 대앵―.

그때 백경채 내부에서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조서인은 반사적으로 방 안에 내려놓았던 창을 들었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암습이다! 살수가 나왔다!”

“누가 당한 거야!”

“와룡! 그리고 만박서생!”

전쟁이 터진 것처럼 각자의 병기를 챙겨 든 호걸들이 우르르 한쪽으로 몰려나갔다.

소호는 창밖만을 바라본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조서인은 이를 악물고 잠시 호흡을 골랐다.

창을 챙겨서 밖으로 뛰쳐나가는 그 순간까지.

소호는 조서인을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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