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96화 (525/686)

16권 19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19)

어디로 가야 할지 찾는 건 쉬웠다.

사람이 가장 몰리는 곳.

백경채의 호걸들이 각자의 무기를 든 채 서둘러 향하는 곳에 암습을 당한 제갈륜과 육지생이 있을 게 분명했다.

‘청조구나! 그래, 살수들은 집요하니 방심하면 안 되는 거였어. 왜 그걸 생각 못했지?’

야조탑의 특급 살수인 청조.

생각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있었다.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당장 눈앞에 있는 백검회를 상대하느라 너무 바빠서 다른 것은 신경 쓰지 못했다.

“비켜!”

“의원님 가신다!”

잔뜩 몰려 있던 호걸들이 양옆으로 갈라져 길을 터 주었다.

노회한 의원이 들어가는 것에 맞춰서 조서인도 안으로 들어갔다.

단출한 숙소 내부는 난장판이었다.

싸움이 벌어졌던 듯 찢기고 박살 난 가재도구들이 즐비했다. 침상은 두 동강 났고, 벽을 긁은 검흔이 천장까지 뻗어 있다.

그 혼란스러운 난장판의 가운데에 두 사람이 있다.

복부 측면을 찔린 두 사람이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데, 상처의 위치가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똑같았다.

“허어.”

의원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탄성을 내뱉었다.

“똑같은 곳을 찔렀군. 칼솜씨가 대단한 자로다.”

의원은 주름진 눈을 날카롭게 뜨고는 두 사람을 직접 손으로 상처 부위를 누르며 진맥했다.

그러자 대번에 안색이 변했다.

“기가 막힌 솜씨군. 비장 바로 옆을 비껴 갔소. 중요한 내장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으면서 피부와 근맥만 관통하다니.”

의원은 감탄을 하는 듯했으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채 풀리지를 않았다.

“비켜라!”

그때 습격당한 곳으로 다가오는 거구의 노인이 있었다.

백경.

녹림수로맹의 부표파자인 흰고래가 노기를 감추지 않으며 다가온 것이다.

“이 자라만도 못한 놈들아. 너희는 뭐했어! 경계도 안 서? 살수 놈이 성채 안에서 제 맘대로 돌아다니는데 대체 뭘 했냔 말이냐!”

“수하의 불찰입니다.”

퍽, 소리와 함께 건장한 사내 하나가 일 장이나 나가떨어져서 바닥을 굴렀다.

딱히 무공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도저히 노인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바닥으로 쓰러졌던 사내는 벌떡 일어나 다시 백경의 곁으로 다시 다가왔다.

그는 얼굴의 한쪽 면이 발갛게 부어올랐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대번에 경직되었다.

주변에 있던 호걸들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몸가짐을 바로 했다.

“왕 의원! 어찌 됐소!”

“힘들겠소.”

무시무시한 기백을 뿜어 대는 백경을 눈앞에 두면 호랑이도 오줌을 지릴 것 같건만, 왕 의원이라 불린 자는 배짱이 두둑한 사람이었다.

그는 백경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장을 건드리지는 않았으나 강호의 무공으로 사혈을 찍었소. 지독한 음기가 사혈을 중심으로 단단히 스며들었구려. 이러면 몇 시진 동안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비틀다가 결국은 죽게 될 것이오.”

“뭐라?”

백경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더니 커다란 덩치를 웅크린 채 직접 와룡 제갈륜의 손목을 잡았다. 내공을 집어넣어 일주천을 하고서야 왕 의원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이런 잔인한 무공이 있나.”

탄식밖에 나오지 않는다.

제갈륜과 육지생의 단전 아래, 독사처럼 지독한 음기가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점혈(一點血)이라는 무공이 있다고 들었소. 살수들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가진 몇 명만 쓸 수 있다던데, 그자가 과시하려고 쓴 듯하오.”

죽이고자 했다면 목을 베든 심장을 찌르든 했다면 간단했을 일.

이렇게 서서히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만들어 놓은 것은 그야말로 과시하려는 것 말고는 이유가 없었다.

“이런 우라질.”

백경은 덥수룩한 반백의 수염을 꿈틀거리더니, 쓰러져 있는 와룡 제갈륜과 만박서생 육지생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파랑새.

손가락 두 개 정도 크기에 불과한 새 모양의 목각 인형이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콰직―.

백경은 그걸 집어 들고 옆으로 던져 버렸다. 그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파랑새 인형이 나무 벽면에 파편을 튀기며 그 안에 박혀 버렸다.

“그럼 이놈 죽는 꼴을 이대로 보고만 있어야 한단 말이오? 왕 의원, 말해보시오. 정말 방법이 없소?”

“방법은……. 있긴 한데. 없는 거나 마찬가지요.”

왕 의원의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다.

“방법이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지.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내가 이곳의 사정을 뻔히 아는데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오.”

“대체 방법이 뭔데 그러는 거요?”

“말하는 게 좋겠소?”

“뜸 들이지 말고 당장 말하시오!”

“일점혈의 해법은 단둘뿐이오. 천하에 셋뿐인 신의(神醫)가 만드는 최상의 영약이라면 사혈에 파고든 음기를 떨쳐낼 것이오. 또는, 내공이 삼 갑자가 넘는 고수가 내공의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정성 들여 추궁과혈을 한다면 그 또한 치료가 가능할 테지.”

“……!”

백경의 눈빛이 흔들렸다.

왕 의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소? 그러니 내가 방법이 없다고 한 것이오.”

“영약……, 아니면 추궁과혈이라…….”

“영약 같은 게 있었다면 애저녁에 용왕님께 썼을 것이오. 그리고 알다시피 이곳에서 내공 삼 갑자 이상의 추궁과혈을 할 만한 사람도…….”

“용왕님뿐이지.”

백경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녹림수로맹에 고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륙 전역에 있는 맹도들 중에 절정을 넘은 고수는 기백 명에 달하고, 초절정에 오른 고수도 한 손에 꼽힐 만큼은 존재한다.

하지만 내공이 삼 갑자가 넘는 자는 천하를 논할 만한 초강자라는 뜻이고,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은 모래사막에 떨어진 바늘 하나를 찾는 것과 같다.

“정녕, 이대로 지켜봐야 하는가.”

백경은 핏발 선 눈으로 제갈륜과 육지생을 내려다보았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호걸들도 이를 악문 채 자신들의 무력감을 통감했다.

“시간은 얼마나 있겠소?”

“많아야 두 시진.”

“이런 썅.”

백경은 쌍소리까지 내뱉었다.

두 시진은 금방이다. 녹림수로맹의 정보망을 가동해 어딘가에서 영약을 찾아볼 만한 시간도 없는 것이다.

“그런……!”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조서인에게도 그건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와룡 제갈륜과 만박서생 육지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니.

마음이 아프다.

이곳까지 오는 마차 안에서 그들 두 사람과 나름대로 친분을 쌓지 않았던가.

“청조……, 실패를 모르는 특급 살수라더니. 대단하구나.”

분노와 감탄의 감정이 동시에 든다.

구해 온 사람을 잃게 될 줄이야.

이렇게 되면 조서인이 기껏 구해 온 모든 행위들도 허사다.

절망스러운 상황.

조서인이 은자촌에 경공을 전개해서 갔다와 볼까 진심으로 고민할 때쯤의 일이었다.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모여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비단 장포와 화려한 금사로 치장한 청년.

천무공자 장소호가 안타까운 얼굴로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천무공자?”

백경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방법이라니.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의원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의께서 제조한 영약이나 내공이 삼 갑자가 넘는 무인이 추궁과혈을 해서 음기를 몰아내면 거기 계신 두 분을 살릴 수 있다고요?”

“분명히 그리 말했네.”

소호는 품 안에서 작은 목갑을 하나 꺼내 들었다.

“천운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게는 흑신의께서 만들어 주신 영약이 하나 있습니다.”

“흑신의!”

비명을 지르듯 외친 것은 왕 의원이었다.

그는 마른 장작처럼 가는 팔을 당장이라도 그 목갑을 향해 뻗고 싶은 것처럼 손을 꿈지럭거렸다.

“그게 정말인가? 흑신의께서 영약을 만들어 주셨다고?”

“제 이름을 걸고 보장합니다. 어린 시절부터의 인연이 있어서 귀한 약을 하나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주변의 모두가 감탄하며 하늘을 올려다보기까지 했다.

절망의 끝에서 희망이 생긴 셈이다.

모두가 열망이 가득한 시선으로 천무공자를 바라보았다.

“그, 그 귀한 것을……! 흑신의께서 만드신 약이라면 부르는 게 값일 텐데.”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값을 따질 수야 없는 일이지요.”

소호는 곧바로 왕 의원에게 다가가 그에게 목갑을 건네려다가, 아차! 하는 얼굴로 백경을 바라보았다.

왕 의원 또한 백경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이 자리의 결정권을 쥔 어른을 무시하고 일을 처리해선 안 되는 일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백경에게 묻고 있었다.

소호는 이 약을 건네도 되는지, 왕 의원은 받아도 되는지 물었다.

“으음.”

백경은 당황스러운 내심을 숨기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왕 의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목갑을 받아들더니, 천하에 둘도 없는 보물을 대하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목갑을 열고 코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는 코로 향을 맡고, 목갑에 남아 있는 단환의 부스러기 가루를 손끝에 묻혀 촉감과 재질까지 확인했다.

“침향, 소구, 숙지황……. 이 향, 이 재질. 침향묵황단(沈香墨荒丹)이로군. 하나만 섭취해도 상처는 물론이고 내상까지 씻은 듯이 나을 수 있는 약이야. 무인에게는 둘도 없는 보물일세.”

왕 의원은 홀린 듯이 단약을 들여다보다가 중대한 문제를 알아채고는 백경을 바라보았다.

“이건 진품이 확실하오. 흑신의께서 만드신 침향묵황단이오.”

“으음!”

“천운이군, 천운이야.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건 하나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문제는 그거였다.

단약이 하나뿐이라는 것.

물론 천하에 귀한 약을 하나라도 갖고 있었던 게 어디냐 싶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아쉬움이 든다.

침향묵황단이 하나만 더 있었다면, 고민도 않고 두 사람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을.

“부표파자. 이 단약을 둘 중 누구에게 먹이시겠소?”

“으음!”

백경은 딱딱하게 안색이 굳은 채 신음만 흘렸다.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 자리의 결정권자로서 단호하게 결정해야 하는 건 안다.

육지생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미 오랜 세월 한 식구처럼 살아온 와룡 제갈륜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차마 그 말을 어찌 할까.

의형인 육지생은 죽든 말든 내버려 두고 하나뿐인 약은 제갈륜에게 쓰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사내답지 못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일에 대해선 왕 의원께서 미리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백경을 구원하듯 다시 소호가 나섰다.

“제가 추궁과혈을 하겠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할 말을 잃고 헛숨을 삼켰다.

“천무공자. 그게 무슨 말이오?”

백경은 억눌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까 왕 의원이 한 말을 듣지 못하였소? 내공이 삼 갑자가 넘는 고수가 추궁과혈을 해야 한다고 하였소.”

“예, 그래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모두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말은……?”

“제가 운이 좀 좋아서 기연이 있었습니다. 추궁과혈을 하기엔 충분한 내공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어!”

그야말로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삼 갑자의 내공이면 천하 무림 전체에서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거늘.

그만한 내공을 고작 약관을 넘은 지 얼마 안 된 젊은 청년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모두에게 납득이 되는 이야기였다.

천무공자의 드높은 명성.

젊은 나이에 천무련이라는 큰 조직을 만들어 낸 업적.

그 모든 것이 그 정도 내공은 있으니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하면 말이 되는 것이다.

소호는 정중하게 질문했다.

“부표파자님, 제가 도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림의 은원은 확실해서, 목숨의 은혜는 반드시 그에 준하는 걸로 갚아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와룡 제갈륜과 만박서생 육지생의 목숨.

목숨이 경각에 달한 자를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쓰러져 있는 사람은 녹림수로맹의 지낭이며 그걸 구하려는 자는 신생 단체 천무련의 련주다.

은혜를 입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갚아야만 할 터.

그러니 이건 절대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백경은 미간을 좁혔다.

신음을 흘리며 고민하기까지 했다.

그는 갑자기 십 년은 더 늙어 버린 것 같은 얼굴로 주름을 있는 대로 드러내며 고민했으나,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내가 부탁을 해야 할 걸세. 천무공자. 부디 우리 맹의 와룡과 그의 의형을 살려 주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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