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97화 (526/686)

16권 20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20)

어깨를 타고 내려온 물방울 하나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던 손등으로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차갑지만 한편으론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조서인은 그가 마치 연인처럼 가만히 품고 있던 창을 살짝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오늘도 침실에서 자지 않는 건가?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겠군.”

백경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은은히 피어오르는 잎차의 향기가 정신을 맑게 해 준다.

조서인은 곧바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그리 깍듯할 것 없소. 우리 맹의 은인인데 내가 더 예를 차려야지.”

“안 될 말씀입니다. 추 어르신의 동생 같은 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당연히 웃어른으로 대해야지요.”

“허헛, 용왕께서 왜 손자 같은 아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군. 요즘 보기 드물게 참으로 선한 청년이오.”

조서인은 백경이 건네주는 찻잔을 양손으로 받아들었다.

따스한 온기가 온몸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감기에 걸려서야 무인이라고 말할 수 없지요.”

“무공을 암만 익혀 봤자 병 걸리면 아프고, 칼 맞으면 죽는 게 사람이오. 늙어서 아프지 않으려면 젊을 때 몸 관리를 해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백경은 조서인의 곁으로 다가와 나란히 섰다.

두 사람의 시선은 같은 곳을 향했다.

이틀째 은은한 등불이 켜져 있는 방 안.

영약을 먹고 왕 의원의 침술을 받고 있는 와룡 제갈륜과, 천무공자 소호에게 추궁과혈을 받고 명문혈을 통해 내공까지 다스리고 있는 만박서생 육지생이 함께 있는 곳이다.

“잘 될 걸세. 두 사람 모두 아마 별문제 없이 나을 수 있을 테지. 천운이군. 천운이야.”

희망을 말하지만 백경의 표정은 어두웠다.

“조 공자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예? 아, 예. 저도 두 분이 무사히 나을 거라 믿습니다.”

“그런데 왜 밤이슬을 맞아 가며 이곳을 지키는 것이오?”

조서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책임감을 느낍니다.”

“녹림수로맹 안에서 습격당한 것인데, 어째서 조 공자가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지?”

“추 어르신의 서신을 받고 제가 저 두 사람을 구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때 그 야조탑의 특급 살수와 싸운 게 접니다.”

“그랬지. 나도 그렇게 들었소. 살수명이 청조라지?”

“예. 그자를 만나 보니 보통 인물이 아님을 단번에 알았습니다. 집요하고 의지도 강해 보였죠. 당연히 다시 습격할 거라 생각했어야 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한 제가 원망스럽습니다.”

“허허.”

백경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 마음은 기꺼우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히려 저 두 사람에게 모욕이 될 것이오.”

“그렇……습니까?”

“와룡 저놈이 녹림수로맹의 지낭이라 불리는 놈이오. 도적놈처럼 짐승 가죽이나 대충 걸치고 있는 놈이지만, 저래 봬도 장강에서 글 좀 읽는다는 놈들 중에서도 최고 소릴 듣던 놈이지. 그런 놈이 자기가 살수에게 다시 습격당할 거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 같소?”

“예?”

조서인은 정말로 깜짝 놀랐다.

“그럼 자기가 습격당할 줄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그런데 왜 가만히 있었던 것입니까? 살수에 대한 대책은 왜 안 세웠고요?”

“…….”

“부표파자님?”

백경은 씁쓸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조서인은 그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왕 의원의 말에 소호가 나섰을 때.

영약을 건네주며 받겠냐고 물었을 때의 바로 그 얼굴이었다.

“때론 알기 때문에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지. 와룡은 그랬소. 앞으로 세 가지 경우가 있는데. 최선은 이대로 조용히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고, 범상한 결과는 자신들이 죽는 것이며, 최악의 결과는 자신들이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는 것이라고 했소.”

“……!”

두 번째까지 듣고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고 무심코 딴지를 걸 뻔했던 조서인은 세 번째 가설을 듣고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뒤엉킨다.

백경의 말이 맞다면, 제갈륜은 자신이 습격당할 것도, 그리고 습격당했다가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실이 꼬이다 못해 단단히 엉켜서 결국은 칼로 자르는 수밖에 없는 실타래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그 말씀은…….”

조서인은 질문을 삼켰다.

백경은 아마 그에게 말해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으리라.

육지생이 말하던 ‘그분’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머릿속에 한 가지 추측이 떠오르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두 분이……, 무사하길 바랍니다.”

결국 조서인은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리 되길 바라고 있소.”

등을 돌리고 멀어지는 백경의 뒷모습은 초라하고 쓸쓸했다.

***

녹림수로맹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한때는 큰 싸움으로 피폐해지고 절망적인 분위기였으나, 지금은 정반대의 축제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폐관에 들어간 지 사흘째 되는 날 장강용왕 추묵환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여전히 건장한 체구로, 호랑이처럼 눈을 빛내며 성큼성큼 걷기까지 했다.

불과 얼마 전에 옆구리가 찢어져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놈들아, 많이 기다렸느냐?”

껄껄 웃는 모습만 봐선 자신이 언제 다치기라도 했냐는 것처럼 멀쩡하다.

“우오오오―――!”

녹림수로맹의 호걸들이 환호했다.

쿵. 쿵.

그들은 딱딱한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피멍이 들도록 후려쳐서 북소리를 냈다.

뜨거운 심장.

녹림수로맹 사내들의 표식이다.

“시끄럽다! 승전을 하고 돌아온 것도 아닌데, 다쳤다가 다 나은 게 뭐가 대수라고. 쪽팔리게 하지 마라!”

추묵환은 버럭 소리치면서도 얼굴로는 기특하다는 듯이 웃었다.

자신의 귀환을 수하들이 반겨 주는데 기분 나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그는 산꼭대기에 오른 산중 대호처럼 위엄 가득한 모습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

녹림수로맹 호걸들과 눈을 마주한 뒤, 반가운 얼굴로 미소 짓고 있는 조서인을 향해 손짓을 했다.

“조서인, 이 녀석아, 이야기는 들었다.”

“어르신,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기특한 짓을 했다면서? 흉신광검인가 하는 그놈, 무공 수위가 변화무쌍한 놈이었다. 실력을 숨긴 것인지 갑자기 능력이 변하더구나. 숨 쉬듯이 강기를 뿌려 대던데, 어떻게 혼자서 버틸 생각을 했느냐?”

“그게, 가장 피해가 적을 것 같은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기특한지고. 나보다 낫구나. 나보다 나아.”

껄껄 웃는 추묵환을 앞에 두자 조서인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찾지 못했다.

너무 뿌듯하고 기뻤던 탓이다.

은자촌에서도 무공의 묘리를 몇 가지 배우면서 좋은 이야기는 들어 보았지만, 이번만큼 극찬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네가 기지를 발휘해서 그리도 오래 버텼는데, 정작 내가 싸우자마자 다쳐서 골골거렸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운이 나빴을 뿐인데 어찌 자신을 탓하십니까? 저는 어르신의 발끝도 아직 쫓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됐다. 과례는 비례일 터. 네 사부도 그렇고, 태사부는 더더욱 그렇고. 그분들의 명성을 생각하면 네가 그리 너무 겸손하게 굴어도 안 될 것이야.”

“그건…….”

조서인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난감했다.

추묵환의 명예를 위해서는 겸손해야 하는데, 갑자기 사부와 태사부를 끌어들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정작 흥분해서 수군거리는 것은 주변의 호걸들이다.

그들은 장강의 신(神)이나 다름없는 용왕이 높게 평가하는 조서인의 사부와 태사부가 누군지 서로 간에 추측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흘흘, 세월이 무상하구나. 그러고 보니 내가 너무 자만하고 살았던 모양이다. 이봐, 백 아우, 그렇지 않아? 우리가 장강 일통하겠답시고 천지 분간도 못하고 이리저리 헤집고 다닐 때는 이보다 더한 상처도 입었었잖아?”

추묵환처럼 노익장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건장한 노인인 백경이 화통하게 웃어댔다.

“껄껄! 용왕 형님, 그야 말할 것도 없지요. 우리가 배때기가 찢어진 채 장강에 빠져서 염라대왕을 영접한 게 어디 한두 번입니까? 피 냄새 맡고 다가온 교어(鮫魚:상어)를 이빨로 물어뜯으면서 살아남았잖소? ”

“옳지. 옳지. 역시 다 기억을 하는구만. 늙는다는 건 참 슬픈 것이야. 예전엔 그리 다쳐도 별로 흠이 아니었는데, 이깟 상처 한 번 입었다고 이런 애송이가 내 체면까지 걱정해 주는 걸 보면 말이야. 그렇지 않나?”

“물론입죠. 이까짓 일, 논할 거리도 안 됩니다.”

백경이 인상을 쓰면서 주변의 호걸들을 노려보았다.

“용왕께서 조금 긁히셨는데, 그게 뭐 큰일이냐? 어?”

“아닙니다!”

“장강에서 가장 위대한 건 누구야?”

“용왕님이십니다!”

수백 호걸들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대전을 뒤흔들었다.

추묵환은 껄껄 웃으며 조서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봤느냐? 난 아무렇지도 않다.”

“예, 똑똑히 보았습니다. 어르신.”

“마을에서 제대로 더덕도 못 캐던 놈이 언제 이리도 컸을꼬?”

추묵환의 따스한 눈길에 조서인은 울컥 가슴이 일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한마디 말이 천리 밖의 심금을 울린다더니. 너의 용감한 협행 하나가 이 늙은이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구나. 고맙다. 이 장강용왕은 네가 보여 준 애정과 존중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그…….”

목이 메어 말이 안 나왔다.

조서인은 그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주변의 시선이 따뜻하다는 것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추묵환은 다시 한 번 조서인의 어깨를 툭― 두드린 뒤, 최종적으로, 그가 만나야 할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소호야.”

장강용왕 추묵환의 그 친근한 호칭은 많은 이들을 당황시켰다.

강호 무림에서 비상하고 있는 천무공자와 추묵환이 미리 인연이 있다는 사실은 극소수의 인물들만 알고 있었던 탓이다.

그런데 정작 두 사람 사이의 친조손 같은 관계를 이미 알고 있던 조서인은 정반대의 의미로 당황했다.

‘저렇게 차갑게 부르시다니?’

원래 은자촌에서 부르던 말투를 떠올리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어조가 싸늘했다.

“할아버지, 건강하셔서 다행이에요. 잘 지내셨죠?”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기다리던 소호가 밝게 웃으며 인사한다.

모두의 경악 어린 시선이 쏟아졌으나, 추묵환과 소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다행히 이렇게 멀쩡히 일어났다. 추궁과혈을 했다면서? 내공은 괜찮으냐?”

“네. 다행히 육 서생이 내공의 기초가 전혀 없어서 오히려 수월했어요.”

“다행이구나. 하긴, 단전에 엄한 내공이 자리 잡고 있으면 추궁과혈이 더욱 힘든 법이지.”

추묵환은 그의 좌측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용왕수호대주 해사에게 그들이 괜찮냐고 물었고, 둘 다 목숨에 지장 없이 무사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영악도 그렇고, 추궁과혈도 그렇고 네가 많은 손해를 보았구나. 고생이 많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뭘.”

소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추묵환은 그런 소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녹림수로맹은 도움을 받았다면 대가를 반드시 지불한다. 너는 무엇이 필요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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