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98화 (527/686)

16권 21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21)

조손처럼 친근한 호칭을 부르는 사이치고는 너무나 세속적인 대화였다.

소호는 추묵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빙긋 웃었다.

“장강의 교통이 필요해요. 조만간 강남에서 하북으로 대규모의 물류 이동이 벌어질 건데, 그때 도움을 받고 싶어요.”

“교통? 조운을 말하는 건가? 어차피 지금도 상회나 표국을 통해 적절한 돈을 내면 얼마든지 장강을 이용할 수 있다.”

“그걸로는 부족해요.”

“도대체 규모가 얼마나 되길래 그러느냐?”

“다른 한 나라와 전쟁을 할 수 있을 만큼이요.”

주변의 공기가 딱딱하게 굳었다.

전쟁.

시대를 불문하고 전쟁이라는 사건은 언제나 국가의 모든 산업을 바꿔 놓았다.

장강의 교통로와 녹림의 산길을 둘 다 장악하고 있는 녹림수로맹은 그 영향을 직격타로 받는 종류의 일을 한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결과는 둘 중 하나다.

기적적인 부흥이거나, 극단적인 침체거나.

어느 쪽이든 나라가 가진 물자를 미친 듯이 빨아들여 소모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전쟁이 일어난다고?”

추묵환은 잠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으나, 이내 고개를 흔들고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천무공자가 하는 말이다.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그의 능력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용왕 형님, 이 일은 아무리 상대가 은인이더라도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오.”

백경이 은근한 목소리로 조언하였으나, 추묵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소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놈, 소호야.”

“예?”

팡! 팡!

추묵환은 건장하다.

거인처럼 키가 큰 것은 아니나, 떡 벌어진 어깨에 단단하게 응축된 근육은 웬만한 젊은 장정들을 압도한다.

“이놈! 이놈!”

“어어?”

추묵환은 양 손바닥으로 마치 손뼉을 부딪치듯 소호의 팔을 팡팡 두드렸다.

소호는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플 테지만, 아픈 내색조차 하지 못할 만큼 당황했다.

“이 대단한 놈아! 이 머리 좋고 뛰어난 놈! 이 천고의 기재 같은 놈아!”

“예에?”

분명히 칭찬인데, 쌍욕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추묵환은 기행으로 느껴지는 칭찬을 내뱉은 뒤, 속을 알 수 없는 뜨거운 눈빛으로 소호를 지그시 응시했다.

손바닥으로 소호의 팔을 붙잡은 상태.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이놈아, 평생 실패를 모르고 살았을 것이야. 근데 막상 해 보니까 한 무리를 이끄는 게 쉽지가 않지?”

소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할애비는 다 안다. 기대는 부담이 되고, 부담이 넘치면 사람이 늘 묘수만 찾는 법이다. 그런데 말이다. 묘수는 오래가지 못한다. 한 번밖에 못 쓰기에 묘수인 것이야.”

추묵환은 큰 충격을 받은 듯한 소호에게서 비로소 손을 떼고 물러났다.

“너는 신의의 영약이라는 귀물을 내놓고, 무인의 생명이랄 수도 있는 내공을 쓰면서까지 와룡과 그의 의형을 살려 주었다. 이 은혜를 갚지 못해서야 어찌 녹림수로맹 사람들이 호걸이라 자부하겠느냐.”

펄럭―.

추묵환은 푸른색 승룡(乘龍)이 그려진 장포를 펄럭이며 뒤로 돌아 수로맹의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소호야, 네가 옮기겠다는 물건은 나라의 것이냐?”

“……네.”

추묵환은 정말로 모르는 게 없었다.

소호는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 녹림수로맹의 총표파자이자 장강 만리 수채들의 고향 동정호의 채주로서 말하겠다. 천무련이 나라를 위해 옮기는 모든 물품은 우리 녹림수로맹의 이름으로 보호될 것이다.”

허리에 붕대를 감고 있으나 노쇠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완전히 상처를 회복한 장강의 용.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가감 없이 모두 드러냈다.

“백 아우, 내 마음대로 정해 버렸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없습니다.”

추묵환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있는 호걸들이 뜨겁게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쿵! 쿵!

커다란 공간을 떨쳐 울리는 진동은, 마치 승리의 북소리 같았다.

추묵환은 허공을 향해 주먹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릴 습격한 백검회 놈들을 이제부턴 우리가 사냥할 것이다.”

“우오오오―!”

뜨거운 함성이 열렬히 터져 나갔다.

***

“함께 가진 않을 거야?”

“응.”

조서인은 마차에 올라타는 소호를 배웅해 주었다.

“서인아,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난 천무련에서 매일 너를 기다렸어.”

“그랬어? 나도 꼭 가 보고 싶더라.”

“주해랑 미미도 널 보고 싶어 할 거야. 와 보면 재밌을걸? 우리 둘이 함께하면 뭐든지 할 수 있잖아.”

“재밌겠다. 분명히 재밌을 거야.”

“그러니까. 같이 가자니까?”

햇살처럼 빙긋 웃는 소호의 얼굴에선 학관 때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였다.

“소호야.”

“응?”

“넌…….”

한참을 기다려도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서인아, 왜? 뭐가 묻고 싶어?”

“아냐.”

조서인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함께 가고 싶지만, 내 임무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난 추 어르신을 좀 더 도우려 해. 사부님께 받은 명령이니 확실히 처리하고 싶어.”

“으음, 그래?”

무산학관 때부터 오랫동안 함께했기에 조서인은 잘 알고 있었다.

소호는 평소에 뭐든지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결정한다.

마치 답은 원래 정해져 있다는 듯이.

스님들의 즉문즉답과 비슷할 정도다.

뭐든지 칼로 두부를 베듯 쉽게 결정하는 소호가 망설인다는 건, 그가 정말로 조서인과 함께하고 싶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가장 친한 친우를 만난 것은 기쁘지만, 아직은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기에 함께할 수가 없었다.

“천무련의 련주님은 바쁠 텐데 어서 가서 일 봐야지. 천무련엔 조만간 찾아갈게. 정말로.”

“알았어.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조를 수가 없네. 그럼 안휘에서 꼭 보는 거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소호는 아쉬움으로 가득한 얼굴로 마차에 올라탔고, 이내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두두두두―.

조서인은 소호가 탄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푸른 하늘 위로 태양이 중천에 떠오른 탓일까. 머리끝 정수리가 뜨겁다.

잠시 그렇게 서 있으니, 백경채의 환송 인파들 중에 두 사람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천무공자가 떠났구려.”

“네.”

와룡 제갈륜.

만박서생 육지생.

야조탑 특급 살수 청조에게 일점혈의 수법으로 중상을 입었으나, 천무공자의 영약과 추궁과혈로 살아남은 두 사람이다.

그들은 아직 몸을 비틀거리며 걷기는 했지만, 생기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 분은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죠?”

두 사람은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륜은 백경채의 환송 인파가 모두 성채 안으로 돌아간 뒤, 넓은 평지에 세 사람만이 남았을 때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 공자께서는 천무공자의 절친한 친구인데, 정말 이 이야기를 들어도 괜찮겠소?”

“이미 듣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어떤 문제든 알아야 해결할 수 있는 법이다.

“모든 일의 시작은 육 형이 천무련의 일을 도우면서부터였소.”

제갈륜과 육지생은 번갈아 가며 지금까지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급격히 확장한 천무련은 인재를 필요로 했고, 당시에 자신을 받아 줄 곳을 찾고 있던 육 형은 천무공자의 업적에 반해 천무련에 몸을 의탁했소. 그리고 지자(智者)로서 천무련의 총사를 돕기 시작했지.”

“으음, 이제 와서 말하지만, 천무련은 괜찮은 조직이오. 지도자는 매력이 넘치고, 총사가 만든 규율은 공과 과가 명확하여 누구나 이해하기 쉽소. 문제는……. 내가 일을 돕던 중에 천무련과 백검회가 모종의 협약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오.”

“협약이요? 천무련과 백검회가요?”

“일종의 서로 간에 불가침 협약이더군.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지 말자는 내용이었소. 그런데 그뿐이 아니더군. 백검회가 녹림수로맹을 습격하는 것을 일부러 방치하는 듯한 의사를 느꼈고, 한 달간 비각(祕閣)의 정보들을 뒤진 끝에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냈지.”

육지생은 그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오싹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천무련이 백검회가 녹림수로맹을 공격하는 걸 일부러 방관했다. 그 말씀인가요?”

“그렇소.”

“으음.”

“믿기 어렵겠지. 하지만 내 이름을 걸고 말하겠소. 그건 분명히 사실이오. 천무련은 분명히 두 집단의 전쟁을 조장하면 조장했지 말리거나 멈추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소.”

“그래서 육 서생이 움직인 것이군요.”

“그렇소. 제갈 동생이 녹림수로맹에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나에게는 그건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정보였소. 그래서 곧바로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천무련을 나왔지. 그런데 웬걸? 천무련을 빠져나오자마자 천무련의 총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소. 지금도 소름이 끼치는군. 그는 이미 내가 비각을 뒤져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그걸 어떻게 사용할지까지 잘 알고 있었소.”

조서인은 최대한 담담한 심정을 유지하며 되물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육 서생이 쫓기게 될만한 이유는 있었군요. 천무련 입장에선 정보를 훔쳐서 달아나면서 천무련을 배신한 거니까요.”

“……군사로서 잘한 일은 아니오. 자랑스럽지도 않고. 하지만 나는 그때로 돌아간다면 똑같이 행동할 것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천무련의 처사는 의롭지 않소. 나야 단순히 제갈 동생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긴 했으나, 용왕님과 조손처럼 지내는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더욱 그렇게 느끼게 되었소. 그래선 안 되는 것 아니오? 정도 무림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겠다는 천무련이 녹림수로맹을 희생양으로 삼아 싸움을 조장해서 이득을 보려 하다니?”

“그렇……군요.”

“다른 집단이었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오. 강호 무림은 비정한 곳이니까. 하지만 천무련은 그러지 않을 줄 알았소.”

“으음.”

“그래서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방법을 사용해 혼란을 일으키고, 천무련에서 도망쳤소. 다행히 내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제갈 동생과 만나 도주를 시작했고, 이틀 뒤……, 청조가 왔지.”

청조라는 이름은 이제 그들에게 공포의 상징과 다를 바 없었다.

제갈륜과 육지생.

두 사람의 안색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그래서 그랬구나. 청조가 나보고 끼어들지 말라고 한 건 그래서였어.’

조서인은 숲속에서 만난 청조가 그때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다 기억할 수 있었다.

“분명한 호의를 갖고 말하겠소. 이 일에 끼어들지 마시오. 만박서생, 저자가 알고 있는 게 모두 진실은 아니며, 이 일에 끼어들면 그대는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오.”

“청조는 육 서생께서 알고 계신 사실이 다 진실은 아니라고 말했지요.”

“……부끄럽지만 그 말은 맞소. 지자로서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지.”

제갈륜이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소. 싸움을 방치하고 상황을 이용한 건 맞지만, 의도까지 나쁜 건 아니었던 것이오.”

“두 분은 죽을 뻔했는데도 그리 생각하시는군요.”

“습격당한 일은 놀랍소. 솔직히 응어리가 없다면 거짓말이지. 그런데 한편으론 무서우면서도 감탄스럽소.”

육지생의 평에 이어, 제갈륜도 씁쓸하게 평했다.

“우릴 미끼로 삼아 전 무림의 시선을 녹림수로맹으로 돌린 사이에 천무련은 백검회의 본단을 공격했다고 했소. 이제는 그들이 백검회와 인연을 끊기로 정했다더군.”

“적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계책이었군요.”

“그걸 사사로운 정에 휘둘려 망쳤으니 천무련 입장에선 정보를 훔쳐 일을 망친 도적놈일 것이오. 허나…….”

“똑같은 상황이 오면 똑같이 행동하시겠죠.”

만박서생 육지생과 와룡 제갈륜의 우애는 그 정도로 각별했다.

“추궁과혈을 해서 살린 뒤에 천무공자는 그리 말하더군. 내가 천무련에 저지른 잘못은 잊을 테니, 본인의 과도 잊어 달라고. 장강 교통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매우 중요하니 협력이 필요하다고 하였소.”

“두 분은, 그걸로 된 것입니까?”

“됐소. 죽일 만해서 죽이려 했고, 의도야 어찌 됐든 천무공자가 우릴 살렸으니 어찌 우리의 감정만 논하겠소. 그건 지자가 해야 할 행동이 아니오.”

제갈륜과 육지생은 서로를 힐끗 보면서 말했다.

“다만 천무공자는, 두렵소. 대단하고 무서운 분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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