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99화 (528/686)

16권 22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22)

무림 강호에서 명성을 떨친다는 것은 그만한 피를 봤다는 뜻이다.

장강와룡 제갈륜.

만박서생 육지생.

그동안 피도 눈물도 없는 계책을 무수히 써 온 군사들이 이제 겨우 약관을 조금 넘은 청년이 두렵다고 한다.

그런데 왠지 조서인은 두 사람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행하는 그 실행력이 두렵소. 죄를 짓더라도 모든 게 옳아 보이는 그 매력과 자신감은 무서울 정도요.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기는 할까?”

제갈륜과 육지생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했다.

“게다가 우리가 아무리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고 한들, 용왕께서 이미 받아들이셨으니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도 없는 일이오.”

“그것 말인데.”

조서인은 막연했던 추측이 사실로 드러났음을 깨달았다.

“소호가……. 청조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누가 알고 있습니까?”

“용왕님. 그리고 부표파자님만 알고 계시오.”

추묵환과 백경은 소호가 이 모든 일의 배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래서 그랬구나.’

칭찬을 하면서도 감탄이 아니라 탄식하던, 묘수는 한 번만 통하는 거라던 호된 질책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제갈 서생께서는 죽을 뻔하다가 살아날 거라고 이미 알고 계셨다면서요?”

“혹시나 했을 뿐이오.”

제갈륜은 씁쓸해 보였다.

“차라리 살수에게 죽는다면 녹림수로맹이 원한을 가질 것이오. 그러나 죽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난다면…….”

“위험하죠.”

“그렇소. 상대는 용의주도하고 완벽하다는 뜻이기에, 그러면서 그 은원을 토대로 녹림수로맹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것이기에 가장 위험한 경우였소.”

“결국 그렇게 되었고요.”

“그렇게 되었소.”

조서인은 두 사람과 시선을 교환했다.

무언의 대화가 서로 간에 오갔다.

“고생하셨습니다. 두 분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그건 우리가 드릴 말씀이오. 구명지은 잊지 않겠소.”

육지생도 한마디를 보탰다.

“녹림수로맹은 빚지고는 못 사는 법이지. 무슨 일이든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시오.”

“꼭 그러겠습니다.”

“고생이 많으셨소. 조 공자가 이곳에서 외친 낙일지협은 무림 강호의 사람들이 십 년에 걸쳐 떠들 협행이 될 것이외다.”

제갈륜과 육지생은 한참이나 어린 조서인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해 예를 차렸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제갈륜은 조서인의 겸손함에 더욱 따뜻하게 웃어 주었다.

“천무공자에게 감정은 없소. 하지만 다음번엔, 우리도 당하지 않을 것이오.”

“당해선 안 되지. 오히려 갚아 줘야지.”

“그럼, 그럼.”

그 대화를 끝으로 제갈륜과 육지생, 두 사람을 백경채 안으로 들여보내고 나자 이제는 조서인 혼자만 남게 되었다.

조서인은 마음이 텅 빈 것 같은 허무함 속에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소호.

천무련.

녹림수로맹과 백검회.

그 거대한 싸움의 틈바구니 안에서, 자신이 고군분투한 것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황실에서 경극을 공연하는 배우 꼴이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내가 낙일지약을 하고 버티지 않았으면 천무련이 먼저 나섰을 거고, 그러면 소호가 굳이 제갈 서생과 육 서생을 습격하지 않아도 되었겠지? 어찌 보면 나 때문에 다친 건데……, 으음, 근데 원인을 따지자면 애초에 살수를 이용한 소호가 나쁜 짓을 한 거고.’

복잡했다.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는다.

두두두두―.

“응?”

그런데 조서인은 생각을 정리할 틈이 없었다.

멀리서 한 대의 마차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등 뒤의 백경채로 향하는 마차인가 싶어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 마차는 조서인의 앞에 급하게 멈춰 섰다.

먼지가 피어오른다.

마차가 삐걱거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꼬마야.”

“예?”

차돌처럼 단단한 체구의 사내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퉁방울 같이 튀어나온 눈과 단단한 사각형 턱, 덥수룩한 반백의 수염이 인상적인 사내다.

“방 대협!”

“대협은 무슨.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마차의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녹림의 불 도끼 방풍이었다.

조서인이 나서기 전에 먼저 나서서 홀로 흉신광검과 싸웠던 사내.

그는 몸 곳곳을 광목천으로 둘둘 감고 있었다.

특히 검에 관통당했던 왼쪽 어깨와 팔은 부목까지 댄 상태로 천으로 단단히 감아 두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제대로 일어서기도 힘들 정도로 온몸에 상처를 입은 지 겨우 사흘.

아직 이렇게 마차를 타고 돌아다닐 상태는 아니지 않겠는가.

“상처는 좀 괜찮으세요?”

“안 괜찮지. 숨 쉴 때마다 온몸이 쑤셔.”

방풍은 겸양 같은 건 모르는 사내였다.

그는 툴툴거리면서 불평을 말하더니, 통나무 같은 팔뚝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뭐해? 마차에 빨리 타라.”

“예?”

“같이 가자고.”

“어딜 가시는데요?”

“세상이 낙일지협을 칭송하는데, 겨우 그거로 끝이야? 사내자식이 일을 한번 시작했으면 끝장을 봐야지.”

“예?”

“아, 빨리 타.”

조서인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들고 있던 창이 비스듬히 다 들어갈 정도로 마차는 컸다. 얼떨결에 타긴 했는데 행선지도 모르고, 뭘 하러 가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앞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다.

“저기, 처음 뵙겠습니다. 조서인입니다.”

조서인은 건너 쪽에 앉아 있는 기묘한 인상의 사내에게 먼저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사내는 씩 웃으면서 대뜸 되물었다.

“처음 본 건 아니잖아?”

“어, 음, 예. 그, 그렇긴 합니다.”

흉신광검 청계와 싸우려던 때가 떠오른다.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군중들 중에 유난히 눈에 띄던 한 사내가 있었다.

비단길을 건너온 것처럼 이국적인 색감의 천을 목과 허리에 두르고, 콧잔등을 가로지르는 십(十)자 모양의 흉터가 강렬하던 사내다.

하지만 눈만 마주쳤을 뿐, 한마디 인사도 나누지 않은 사람을 ‘봤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조서인은 자신도 모르게 옆에 앉은 방풍을 쳐다봤다.

방풍은 직접 들으라는 듯 턱짓만 했을 뿐, 그에 대해 소개해 주지 않았다.

오래된 가족을 바라보듯 친근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볼 뿐이다.

‘녹림수로맹 사람이었을까?’

사내의 나이는 사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젊지 않은 나이지만 그렇다고 나이가 많아 보이지도 않는다.

장년이라는 말이 딱 걸맞다.

완성된 사내.

태양처럼 강렬한 눈빛부터 차분하고 절제된 자세까지 모든 게 완성된 남자였다.

“타고 계시던 말이 이국적이던데…….”

“멋진 말이지?”

“예에, 덩치도 크고, 태어나서 그런 말은 처음 봐서…….”

“같이 비단길을 건너온 말이야. 원래 그쪽 말들이 덥고 건조한 사막을 엄청 힘들어하는데, 그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모래사장도 뛰어다녀.”

“대단한 말이네요. 그 친구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잠깐 객잔에 맡겨 두고 왔지. 마음에 드는 암말이 있는 것 같더라고.”

“예? 아, 예.”

“사랑은 방해하면 안 되는 거야. 사랑은 신성하고 소중한 것이거든.”

약간 억양이 특이한 것을 보니 세외(世外)에 오래 나가 있었구나 싶었다.

햇볕에 갈색으로 잘 그을린 피부에, 온몸이 금강석처럼 단련되어 있다.

옷섶을 풀어헤쳐서 훤히 보이는 가슴팍의 수많은 흉터는 그가 수많은 격전을 거쳐 살아남았음을 보여 준다. 은으로 만들어진 이국적인 십자 모양의 목걸이를 차고 있기도 했다.

‘천축 사람인가? 서역인? 으음, 얼굴은 한족인데.’

외모의 모든 것들이 특이하지만, 유독 조서인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다.

그가 애창 은자를 비스듬히 세워 뒀듯, 이국적인 이 사내는 새카만 묵철로 만들어진 언월도를 자신의 옆에 비스듬히 세워 두고 있었다.

손때가 잔뜩 묻어 있었다.

사내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듯한 그 언월도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조각된 용의 입에서 새카만 칼날을 토해 내는 듯한 생김새였다.

그저 무기일 뿐이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지는 명품이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인데. 뭐지? 어디서 봤지?’

사내는 조서인의 시선을 느낀 듯 씩 웃으면서 설명해 주었다.

“이 창이 마음에 드나?”

“예? 아, 예. 정말 훌륭한 창인 것 같아서요.”

“영락제 시절에 최고의 명장이라 불리던 황실의 풍 도공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만든 오룡창 중 하나지. 이름은 황룡(黃龍)이다.”

“황룡창……! 풍 도공!”

“풍 도공을 들어 본 적 있어?”

“예!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최고의 명장이잖아요? 오오! 풍 도공의 작품을 또 보다니!”

황룡.

참으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러고 보면 세공된 용의 눈 부분에 황색의 보석이 하나 박혀 있었다.

언월도라는 중병기이며 길이는 육 척.

반달형의 두툼한 칼날 위로, 마치 낚싯바늘처럼 무언가를 잡아채서 끌어당길 수 있는 뾰족한 고리가 칼등에 만들어져 있었다.

‘풍 도공이라니! 과연! 그래서 그랬구나!’

눈을 반짝거리면서 언월도를 바라보자 사내는 자신이 칭찬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그런데 풍 도공의 작품을 ‘또’ 봤다고?”

“예? 아, 예. 운이 좋아서, 다른 창을 한 번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창은 이름이 뭔데?”

“그…….”

순간 망설임이 들었다.

강호 무림에서 잔혹한 혈사가 일어나는 건 보통 천하를 떨쳐 울릴 절대 무공이거나, 아니면 쇠를 무 자르듯 자르는 신병이기에 대한 탐욕 때문이었다.

뛰어난 명검 같은 게 강호에 나타나면, 그 위치를 아는 것만으로도 살수들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이게 함부로 말해도 되는 정보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저분은 아직 이름도 모르는데. 으음, 그런데 저분이 황룡창에 대해서는 먼저 말해 줬잖아? 어차피 똑같은 풍 도공의 작품인데 괜찮겠지……?’

사내는 조서인의 그런 복잡한 마음을 다 안다는 듯 피식 웃었다.

“말하기 곤란하면 하지 않아도 돼.”

“아뇨, 아닙니다. 진청룡이라고. 제가 지금껏 본 모든 병기 중에 최고였어요.”

“진청룡……. 그렇구나. 멋진 창이지.”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씩 웃는데, 짙은 흉터 때문에 험악해 보일 만한데도 그 웃음이 매력적이었다.

‘진청룡을 본 적이 있어? 혹시 사부님을 아는 분인가?’

조서인이 질문을 던지기 전에, 사내는 먼저 손가락으로 조서인의 창을 가리켰다.

“그 창은 이름이 뭐야?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쇠의 탄성도 좋아 보이고 휘두르면 힘이 잘 전달될 것 같아. 한 치의 군더더기도 없는 명품의 느낌이다.”

“그렇죠?”

지음(知音)이란 말이 딱 어울린다.

대륙에 수많은 무인들이 있고, 그들은 모래알만큼이나 다양한 종류의 무기를 제각각 사용하지만, 이렇게 비슷한 중병기, 또는 창을 사용하는 무인을 만나면 공통의 관심사가 있는 것이다.

“말씀하신 대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창이에요. 이름은 은자(隱者)고, 으음, 성함을 밝힐 수는 없지만 좋은 장인께서 만들어 주셨어요.”

“은자? 은자라……, 그렇구나. 잘 어울리네. 딱 봐도 좋은 창이다. 밝고 곧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창. 주인을 닮았어.”

“감사합니다.”

“난 추룡이다.”

마침내 밝히는 이름에 조서인은 정중히 다시 한 번 포권을 취했다.

“조서인입니다.”

“그래. 낙일창.”

“아…….”

“부끄러워하다니. 이젠 낙일지협의 사건으로 더 유명해질 텐데. 사내자식이 좀 뻔뻔하고 능글맞은 면도 있어야지. 그렇게 우물쭈물하다가는 좋아하는 여자 다 뺏긴다?”

“예에?”

추룡은 마치 친조카를 대하듯 친근한 태도로 조서인을 대했다.

그 급격한 변화에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딱 봐도 경험이 없어 보이는데. 그렇지?”

“그, 그렇지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애정을 나누는 연인이 있어?”

“…….”

“그럴 줄 알았지. 잘 들어. 좀 능숙한 면이 있어야 인기가 있는 거야.”

“그, 그렇습니까?”

“그래.”

정작 그는 혼인이라도 했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남자인 조서인이 봐도, 추룡은 왠지 모를 사내의 매력이 물씬 풍겨 나왔다.

얼굴이 예쁘다거나 풍류를 즐길 줄 아는 화화공자는 아닌 듯한데,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가 어디 가는지는 알아?”

“추측은 하고 있습니다.”

“어디 가는 것 같은데?”

“……백검회와 결판을 내러 가는 것 아닙니까?”

“그래. 잘 알고 있네.”

설마 했던 추측이 사실로 드러났다.

꿀꺽.

마른침을 절로 삼키게 된다.

“지원은……?”

“없어. 우리뿐이야.”

“예에?”

자꾸만 놀라게 된다.

흉신광검과 싸우긴 했지만, 그건 녹림수로맹을 배후로 두고 일대일로 시간을 버틴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지금 찾아가는 것은 수십 명의 백검회 검사들이 아닌가.

‘자신 있게 타라 해서 뭔가 계책이 있는 줄 알았는데. 괜찮을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세 명만으로도 싸울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꼬마야. 불안해하지 마라. 우리가 숫자는 적지만, 저 녀석이 있으면 질 리가 없다.”

방풍은 자신만만한 말로 격려했다.

놀라웠다.

자존심 강한 방풍이 저렇게나 실력을 인정하는 무인이라니.

“그렇……습니까?”

“그래.”

추룡은 별일 아니라는 듯, 비스듬히 세워 둔 자신의 언월도 황룡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영감탱이를 상처 입힌 놈을 가만히 둬서야, 추룡이란 이름이 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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