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 23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23)
‘영감탱이? 방풍 대협을 말하는 건가?’
머리가 희끗한 방풍을 힐끗거리니 갑자기 추룡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방 형, 이 친구, 내가 영감탱이라고 한 게 방 형을 말하는 줄 아는 것 같은데?”
“뭐? 내가 왜 너한테 영감탱이냐. 고작 열 살 남짓 차이 나는데.”
“하하핫! 그러니까. 방 형이 워낙 빨리 늙어서 그런 거잖아.”
“이런 우라질.”
“얼굴만 보면 일흔 늙은이야. 백경 삼촌 동생이라고 해도 믿겠다니까? 그러게 술 좀 작작 마시지.”
“시끄러워.”
방풍이 죽일 듯이 노려본다.
조서인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아닙니까?”
“귀여운 매력이 있네, 이 친구. 아까 한 말 취소다. 넌 좀 능숙하지 않아도 인기가 있겠다. 자꾸 보니 가르치는 매력이 있네.”
“예에?”
조서인은 어째 오늘 여러 번 놀란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건…….”
그 순간 머릿속에서 번뜩하고 추룡의 성씨가 떠올랐다.
추씨.
영감탱이.
방풍과의 친분.
“아!”
“아? 이제 알았어?”
추룡은 중년의 나이답지 않게 순수한 모습으로 씩 웃었다.
조서인은 그 모습에서 왠지, 무산학관의 진구 교관이 떠올랐다.
분명히 다른 사람인데, 묘하게 느낌이 닮았다.
“대인, 다 왔습니다.”
히히힝―.
마부가 신호를 보내자마자 말들이 크게 울었다.
마차 바퀴가 땅에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서서히 속도가 줄면서 부드럽게 멈춰선다.
“다 왔네.”
추룡은 지겨웠다는 듯이 허리를 쭉 펴면서 기지개를 폈다.
이리저리 어깨를 들썩이며 목을 꺾는 모습에선 싸움을 앞둔 사람 특유의 긴장감이 조금도 없다.
조서인이 창밖을 슬쩍 내다보니 밖에는 야영지가 세워져 있었다.
평범한 야산의 길목.
오십여 명의 인원이 나무와 천으로 간이 움막을 치고 모닥불을 피워 놓은 곳이다.
그들은 마차가 서는 것을 보고 하나둘씩 일어서서 검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하얀 가면을 쓴 오십 명이 슬금슬금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은 상당히 기괴했다.
조서인은 청계가 어딨는지를 먼저 찾았다.
오십여 명의 백검회 검사들을 한눈에 훑어보았는데, 그중에 청계는 보이지 않았다.
‘움막 안에 있나?’
원래 가장 높은 사람이 가장 편한 곳에 있는 법이니 아마 맞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부터 저들 모두와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일 것 같다는 점이다.
“낙일창. 표정이 왜 그래?”
추룡은 툭 던지듯이 물어 왔다.
“그게, 제가 백경채의 앞을 지키며 흉신광검과 싸운 건 최대한 피를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데, 다시 쫓아와서 싸우려니…….”
“그런데 이렇게 쫓아와서 피를 보려니 기분이 이상하다?”
“예.”
머릿속으로만 생각할 때는 몰랐는데 막상 말해 놓고 보니 애송이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협을 지키는 것이 뭐가 잘못된 일이던가.
가능하면 생명을 소중히 하려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다행히 추룡은 그런 조서인을 비웃지도 질책하지도 않았다.
“잘 들어. 사람에 대한 모든 예의는 상대가 ‘인간’일 때 지키는 거다. 옛날부터 협객들이 마두를 끝까지 추적해서 죽이는 것은 그들이 한시라도 빨리 마두를 죽여야 그만큼 피해자도 줄기 때문이야.”
“그건…….”
“백검회를 지금 가만히 놓아주면 저들이 고마워하면서 개과천선할 것 같아? 아니면 기회만 되면 또 사람들을 죽일까? 저놈들에게 정의가 있나?”
틀린 말이 없다.
조서인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
“왕진이란 놈을 죽이는 게 저놈들 목적이라며? 그런데 왜 엄한 사람들 죽이면서 까불고 다니는 거냐?”
“그렇……죠.”
조서인은 크게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렇다.
이제는 마음을 정해야 할 때다.
“예. 알겠습니다.”
“잘 알겠지?”
“네. 제가 청계와 겨루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그 틈에 두 분께서 오십 명의 무인들을 처리하시는 거죠?”
“응?”
마차의 문을 열고 내리려던 추룡이 눈을 크게 뜬다.
방풍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조서인을 본다.
“어? 저를 데려오신 이유는 그게 아닙니까?”
“…….”
“아니면, 제가 오십 명 쪽인가요……?”
뒤로 갈수록 자신감이 없어져서 목소리가 작아졌다.
잠시간의 침묵.
그 후에 추룡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파하핫!”
추룡은 유쾌하게 웃었다.
“이거 걸물일세. 조서인. 너는 나설 필요 없어. 심심하면 마차나 지켜 주던가.”
“예?”
“이 싸움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내 거다. 넌 나서지 마.”
추룡은 자신만만했다.
정말로 혼자서 백검회 전력의 절반을 다 쓸어버리겠다는 분위기다.
“그럼 저는 왜…….”
왜 부른 건가?
싸우지도 않을 거면 이곳에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조서인이 당황해서 방풍을 봤는데, 그는 당연하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는 팔에 둘둘 감긴 광목천을 좀 더 세게 동여매며 앞으로의 싸움을 기대하듯 눈을 반짝이기까지 했다.
“방 대협께선 지난번에 저한테 흉신광검을 꼭 직접 죽이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왜……?”
“장강에선 누가 제일 중요한지 아냐?”
“잘 모르겠습니다.”
“용왕님. 장강용왕.”
“아.”
“용왕님을 다치게 한 건 우리 장강 사람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신을 모신 사당에 불을 지른 거나 마찬가지라고. 천벌을 받을 놈들!”
“그렇군요.”
“용왕님이 다친 걸 누가 복수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추룡이지.”
“아…….”
“그러니 불만이 있을 리가 있겠냐. 그리고 지금 내 몸 상태론 제대로 싸우기 힘들기도 하고.”
어깨를 으쓱하는 방풍은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조서인에게 너는 나서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저분이 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의문은 금방 풀릴 듯했다.
마차 문을 벌컥 열고 나선 추룡이 마차의 지붕 위에서 오 척 길이의 무기를 꺼내 허리에 찼다.
“어어?”
풍 도공이 만든 황룡창이 있는데, 대체 왜 다른 무기가 필요하단 말인가.
심지어 허리에 찬 무기는 특이한 생김새였다.
검병과 검신 사이를 구분 짓는 호수(護手)가 유난히 길고 직선적이라는 점이 특이했다.
마치 열 십(十)자를 옆으로 눕혀 둔 것 같은 생김새인데, 검날은 검병 근처가 가장 넓었고 검첨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역삼각형 모양의 검이었다.
‘저런 모양의 검이 있다고?’
크기와 형태가 모두 생소한 병기였다.
추룡은 그 특이한 검을 허리에 찬 채, 한 손으로는 황룡창을 들고 성큼성큼 나아갔다.
“백검회.”
추룡은 동네 산책 나온 사내처럼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스스스―.
선선히 부는 바람에 무릎 높이까지 오는 풀들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청계 나오라 그래.”
분위기가 살벌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무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것도 잠시.
스릉―.
채채챙!
백검회 무인 오십 명이 일제히 검을 빼들었다.
가면에 삼(三)이라고 적힌 사내가 거친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우리의 일검을 함부로 부르는 그대는 대체 누구요?”
“알 거 없다.”
추룡의 대답은 짧았다.
심지어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더더욱 놀라웠다.
“어차피 죽을 놈들이 내 이름은 알아서 뭐하게?”
허세가 아니다.
진심으로 눈앞에 있는 수많은 무인들을 ‘적’으로 보지 않는 말투.
적은커녕, 곧 죽을 시체들이 말을 한다는 듯 하찮게 깔보는 눈빛이다.
‘대단하다. 어찌 저런 말이 나올까?’
조서인은 소호 이래 처음으로 누군가의 발언에 감탄했다.
오만할 정도의 자신감에 대한 반응은 극적이었다.
“미친놈!”
들끓는 전의.
삼검의 살기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일렁거린다. 추룡은 가만히 백검회의 무인들을 둘러보더니 무언가 생각이 바뀐 듯 들고 있던 황룡창을 등에 묶었다.
스릉―.
허리에서 검을 뽑는 소리가 영롱했다.
역삼각형 검날 위로 화려하게 장식된 물결무늬가 햇빛을 받아 신비롭게 반짝인다.
병기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정사마를 막론하고 무인들의 공통점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추룡이 뽑아 든 기묘한 장검에게로 쏠렸다.
“기병(奇兵)인가?”
“이 나라 말로 하자면 사생아라고 해야 하나. 아니지, 양수장검(兩手長劍) 정도로 표현해야겠군.”
추룡이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아 머리 위로 들어 올리자, 역삼각형의 긴 검날이 마치 창처럼 비스듬히 상대를 겨누었다.
상단세.
추룡이 그리 키가 큰 사내는 아니지만, 양팔을 머리 위로 쭉 뻗어서 장검을 겨누자 그 기세가 마치 용과 같았다.
“하!”
삼검은 그 자세를 보고 자신도 기수식을 취했지만, 입으로는 비웃음을 흘렸다.
“오랑캐였나. 그래서 그리 무례했군.”
“내가 어딜 봐서 오랑캐냐. 우리 아버지가 뻔히 장강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데.”
“뭐?”
“기회 줄 때 어서 공격해. 안 그러면 뭐에 당했는지도 모르게 죽는다.”
“하!”
이런 소리까지 듣고 싸우지 않으면 그건 무인이 아니다.
삼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뛰어들었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구나!”
쒜에에엑―.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암향표와 함께 쏘아지는 검격.
떨어지는 매화를 햇살이 꿰뚫듯, 선명하게 쏘아지는 검술은 이십사수 매화검법 중 매화낙섬(梅花落暹)이다.
추룡은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가만히 기다리다, 번개같이 검을 휘둘렀다.
깡!
쩌정!
세 가지의 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려 퍼졌다.
“흡!”
조서인은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내가 지금 뭘 본 건지?’
중원의 검술과는 궤를 달리하는 무공이었다.
추룡은 삼검이 펼치는 매화낙섬을 장검의 십자 모양 호수구에 걸어 막아 내더니, 연결된 부분을 지렛대 삼아 창처럼 긴 검첨을 좌우로 재빠르게 휘둘렀다.
손이 빠른 이가 상대방을 좌우로 뺨을 때리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런데 뺨을 때리는 손은 날카롭기 그지없는 검날이고, 상대방의 검을 지렛대 삼아 나오는 파괴력은 단박에 삼검의 가면을 박살 내 버렸다.
“큭!”
박살 난 가면의 파편이 삼검의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삼검은 너무 놀라 주춤주춤 물러났다.
‘대단해!’
지켜보던 조서인은 속으로 탄성을 내뱉었다.
‘사량발천근? 후발제선? 으음, 반격을 기반에 둔 검술인데. 특이하다. 저런 무공도 있구나.’
검을 쓰는 방식이 특이하여 참고가 된다.
저 커다란 검을 마치 종이 뭉치 휘두르듯 사용하는 추룡의 육체도 범상치 않았다.
“어이, 가면. 보이지도 않았지?”
“이, 이놈.”
“또 와 봐. 오랜만에 중원 무공 상대하니 재밌네.”
삼검은 악에 받친 얼굴로 기세를 끌어 올렸다.
우우웅―.
무형기가 일렁인다. 절정의 고수다운 선명한 검기가 청강검 위로 솟구쳐 올랐다.
삼검의 검술이 변했다.
속도를 중시하는 속검이 안 통하니 이번엔 화려하게 변화를 주는 환검이 펼쳐졌다.
천지사방에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듯, 매화만개(梅花滿開)를 전개한 검첨이 사방으로 화려한 검 그림자를 뿌렸다.
후우웅―.
추룡은 커다란 서역 검을 허공에 대고 휘둘렀다.
추룡은 육체만 막강한 자가 아니었다.
이국적인 무공을 사용하는 것치고 중원 무공에 대한 이해가 높다.
드러나지 않지만 지닌바 내공도 막강한 자다.
검끝으로 원을 그리듯, 동그랗게 움직인 투로가 매화만개의 초식을 보자기로 덮듯 감쌌다.
채채채챙!
매화만개의 초식이 갈 곳을 잃고 허공에서 사그라진다.
펑펑 터지는 폭죽을 손바닥으로 가둬 둔 듯했다.
사납게 터져 나오는데 절대로 그 영향이 밖으로 뻗어 나오지는 않는다.
“큭?”
삼검의 눈빛은 이제 공포에 가깝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이 이렇게 기묘하게 파훼된 적이 있었던가.
삼검의 내공은 무한하지 않고, 추룡이 가둬 둔 투로 안에서 서서히 힘을 잃고 검기가 약해졌다.
그 순간, 추룡이 왼발을 성큼 앞으로 내딛더니 손잡이를 위로 올렸다.
손잡이를 위로 올리니 긴 검날이 아래로 떨어진다.
대경한 삼검이 상체를 뒤로 빼는 순간, 추룡은 긴 장검의 끝으로 삼검의 허벅지를 위에서 아래로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