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 24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24)
푹.
작은 소리인데도 검날이 허벅지를 파고드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뒤로 물러서려던 삼검은 졸지에 낚싯바늘에 코가 꿴 물고기 신세가 되었다.
부서진 가면 너머, 악에 받쳐 있던 눈빛이 이젠 완연히 공포에 질려 있다.
“큽!”
삼검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무게 중심은 이미 뒤로 물러난 상황.
검에 꿰여 있으니 다리를 뒤로 뺄 수도, 그렇다고 앞으로 내밀 수도 없는 노릇이다.
추룡은 오연히 서서 그런 그를 정면에서 응시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차분한 눈빛이다.
추룡은 그 상태로 칼을 비스듬히 비틀었다.
투툭―.
“끄아악!”
허벅지의 근육이 결대로 갈라지며 붉은색의 피를 분수처럼 뿜어낸다.
삼검의 눈빛이 변한다.
공포에서 절망으로.
절망에서 분노로.
삼검은 발악하듯 검을 앞으로 내찔렀다.
날카로운 기세.
가진 바 모든 힘을 끌어낸 듯 검기의 색깔이 전에 없이 선명했다.
동귀어진의 각오로 덤벼드는 기세와 눈빛이 악독하기 이를 데 없다.
서걱―.
추룡은 삼검의 허벅지에서 검을 뽑는 것과 동시에,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장검을 수평으로 가볍게 휘둘렀다.
통통 튀는 발동작이 마치 춤을 추는 것과 같다.
번뜩이는 은빛 검날.
삼검의 목이 잘 익은 감처럼 툭 떨어져내 렸다.
하늘에 닿을 듯 솟구치는 피는 추룡의 발끝에도 닿지 못했다.
휙―.
검날에 묻은 피를 가볍게 털어낸 추룡은 담담한 모습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정도가 삼(三)이면, 나머지는 이보다 다 약하다는 거지?”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백검회의 검사들은 분노했으나, 추룡의 경악스러운 실력을 직접 보았기에 함부로 달려들지는 못했다.
그때 가면에 오(五)라고 적힌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물러서지 마라. 백검회는 죽어서도 적을 반드시 죽인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품 안에서 손가락 하나만 한 호리병을 꺼내 입에 물었다.
“앗!”
조서인은 그 호리병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백린탄입니다! 사람의 몸에 불이 붙으면 절대로 꺼지지 않는 무시무시한 물건이에요!”
“그래?”
추룡은 심드렁했다.
“서역에 가면 이상한 신을 믿는 놈들 중에 저렇게 기름 뒤집어쓰고 달려드는 놈들도 있었지.”
만전(萬戰)을 겪은 경험이 절로 우러나오는 사내였다.
추룡이 당황할 만한 일은 장담컨대 매우 드물다.
주변에 있던 오십여 명의 검사들이 일제히 백린탄을 꺼내 입에 물었다.
결사의 각오로 싸움에 임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배수의 진을 펼친 듯 모두에게서 섬뜩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추룡은 씩 웃었다.
콧잔등을 가로세로로 지나가는 십자 모양의 흉터가 씰룩거렸다.
“간다.”
꽈앙!
추룡의 발이 녹림수로맹, 비전보법 수룡보(水龍步)의 진각을 밟는다.
땅바닥이 움푹 팰 만큼 강렬한 일보였다.
빽빽하게 가로막은 청강검 사이로 뛰어든 추룡이 양손으로 잡은 장검으로 화려한 기술을 뽐냈다.
채채챙―!
무기를 쓰는 대부분의 무인이라면 숨도 쉬기 힘들 만큼 좁은 공간이지만, 추룡이 질주하기 시작하니 그곳은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커다란 대로(大路)가 되었다.
채채챙! 까앙! 푸확!
청강검이 수수처럼 부서져 나갔다.
똑같이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건데, 추룡의 검은 상대방의 검을 베거나 부러뜨리는 게 아니고 박살을 내 버렸다.
까아앙!
퍼벅!
박살 난 파편이 암기처럼 날아가 몸에 박혔다.
그렇다고 해서 힘으로 밀어붙이는 무식한 방식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추룡은 길게 뻗어 나온 호수구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하고, 긴 검날로 급소를 푹― 찌르는 수법을 주로 사용했다.
푸확!
목, 쇄골, 허벅지, 오금.
치명적인 급소를 꿰뚫거나 매끈하게 베고 지나갈 때마다 무인들은 끈 떨어진 인형처럼 풀썩풀썩 쓰러졌다.
뻐억!
걷어차인 무인이 일 장이나 튕겨져서 바닥을 구른다.
쩌어엉!
살수처럼 몰래 다가와 공격하려던 오검과 검을 맞댄다.
쩌저정!
순식간에 세 번의 검격이 교차했다.
오검은 절제된 동작으로 청성의 검술을 펼쳤으나, 추룡이 양손으로 휘두른 검과 부딪치자 휘청― 몸이 흔들리며 검이 튕겼다.
푹―.
“……!”
사각에서 찔러 들어온 추룡의 장검이 오검의 오른쪽 볼을 관통했다.
콰직.
호리병이 깨지는 소리는 청량했다.
화아악―!
오검의 눈코입에서 시퍼런 불꽃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갸아악!”
백린탄에서 한 번 시작된 불길이 순식간에 상체를 태운다.
오검뿐만이 아니었다.
달려들어 추룡과 검을 맞대는 순간, 입에 물고 있던 백린탄은 오히려 그들의 목숨을 손쉽게 불태우는 도화선이 되었다.
화아악―.
푸확!
후려치는 일격에 활활 타오르는 시신 한 구가 뒤로 튕겨 날아간다.
막강한 힘.
잔인해 보일 정도로 단호한 손속.
능수능란한 서역의 검술로 밀고 들어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한 마리의 용과 같다.
악에 찬 백검회 검사들이 자폭하듯 끌어안으려 했으나 그런 틈을 내줄 추룡이 아니다.
일격, 일격.
깨끗한 동작으로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덤벼드는 무인들의 손발이 썩둑 잘려 나갔다.
쩌엉!
황소 같은 기세로 밀고 들어가던 추룡이 멈춘 것은 단 한 번뿐.
처음으로 느낀 만만치 않은 반탄력에 손속을 멈췄다.
아무런 숫자도 쓰여 있지 않은 새하얀 가면.
양팔과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긴 사내가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강하구나, 네놈.”
흉신광검 청계의 등장이다.
추룡의 눈이 가늘어졌다.
“드디어 나왔군.”
“이놈.”
까앙!
청계가 휘두르는 신학검과 마주한 추룡이 가볍게 뒤로 물러났다.
누르듯이 찌르는 검술.
날개라도 달린 듯 빠르게 움직이는 비류보(飛流步)가 위협적이다.
곧바로 쫓아오려던 청계가 갑자기 양팔을 벌리며 몸을 낮췄다.
후우웅―.
창처럼 긴 검날이 그의 머리카락 한 치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청계의 눈에서 적광이 번뜩였다.
아래에서 위로 치솟는 검격이 추룡의 가슴을 노려 왔다.
쩌엉!
추룡은 양손으로 거머쥔 장검을 아래로 내리쳤다.
중단세를 유지하며 뒤로 물러난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쏟아내는 검격들을 추룡은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 차분하게 검으로 쳐 냈다.
까앙! 깡!
쩌어엉!
검에 실린 기세가 점점 강해진다.
검기를 뿜어내던 두 사람의 일격들이, 어느새 단단하게 뭉친 검강으로 변해 있었다.
까드드득―.
콰과광!
논두렁처럼 땅이 패고, 박살 난 파편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때까지 살아 있던 백검회 검사들은 황급히 삼 장 밖의 공간으로 물러났다.
두 사람의 싸움은 팽팽하게 긴장된 채 백중세를 점하는 듯했지만, 자세히 보면 추룡이 먹잇감을 몰아가듯 천천히 청계를 압박하고 있었다.
중심에는 추룡이 자리를 잡고, 청계가 이리저리 물러났다가 다시 공격하길 반복하는 양상이다.
청계는 가열 차게 달려들었지만, 그때마다 호수구로 방어하고, 반격을 가하며 상처를 입히는 추룡의 검술에 당해서 팔다리에 상처만 늘어났다.
“검이라. 둘째 형님이 생각나는데. 그러고 보면 이제는 해볼 만하려나?”
추룡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분명한 건 그의 시선은 청계가 아니라 그 너머의 누군가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까앙!
격렬하게 부딪치길 수십 합.
청계는 훌쩍 뛰어서 이 장이나 물러났다.
긴 팔다리가 각다귀처럼 흔들거렸다.
“어디서 이런 놈이.”
경지에 오른 무인이기에 더욱더 자신의 능력과 상대의 능력을 냉철하게 비교할 수 있는 법이다.
청계는 바닥을 구르는 삼검의 머리를 힐끗 본 뒤 무언가를 결심했다.
이를 악물더니 광기로 눈을 빛낸다.
품 안에서 은으로 세공된 장신구를 꺼내 그 가운데에 박혀 있었던 조각난 호안석을 꺼내 갑자기 입에 쑤셔 넣었다.
“음?”
추룡은 미간을 좁혔다.
꿀꺽.
청계의 목울대가 꿀렁거리면서 호안석을 삼켰다.
“뭐야?”
그동안 온갖 것들을 봐온 추룡에게도 그 모습은 놀라웠던 모양이었다.
단단한 보석을 삼키다니.
그것도 쪼개진 것을!
“칵.”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말이지만 딱딱하고 날카로운 호안석이 목을 할퀸 듯했다.
청계는 기침을 몇 번이나 토해 내며 피를 흘렸다.
그런데 분위기가 묘했다.
무형기가 격렬하게 흔들린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청계는 호안석을 뺀 은세공품을 갑자기 자결이라도 하듯 자신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푸욱―!
“흐흐.”
청계는 웃었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뭐 하는 짓이야?”
추룡의 질문은 주변의 모두가 머릿속으로 떠올린 생각과 같다.
청계는 추위를 타는 것처럼 몸을 웅크렸다.
등이 잔뜩 굽은 꼽추처럼.
한없이 작아지듯 몸을 웅크리더니, 목을 비틀고 고개를 이리저리 꺾었다.
“갸갸갸.”
기이한 목소리를 내는 청계.
그는 서서히 허리를 비틀면서 몸을 일으켰다.
“흐으.”
날이 춥지도 않은데, 청계의 입에서 희뿌연 숨결이 흘러나왔다.
불룩 튀어나온 힘줄과 핏줄이 청계의 목을 타고 올라와 얼굴까지 번졌다.
우우웅―.
청계가 들고 있던 청강검에서 흘러나오는 검기가 점점 강해진다.
강기의 위력이 심상치가 않다.
웅웅거리며 뭉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검 위를 덮어씌운 강기만도 반 장 길이가 넘었다.
이름 없는 무인들이라면 병기가 닿자마자 박살 나고 몸까지 갈라 버릴 위력이다.
“이걸론 안 되겠군.”
추룡의 판단은 빨랐다.
그는 쌍수검을 다시 허리의 검집에 집어넣은 뒤, 등에 메고 있던 황룡창을 뽑아 들었다.
후웅―.
황룡창을 가볍게 휘둘러 정면을 겨누기만 했음에도 분위기가 달라진다.
장검을 들었을 때와 창을 들었을 때의 그는 분위기가 정반대였다.
추룡은 좌측 상단을 겨누는가 싶더니,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황룡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황룡창의 움직임에 따라 바람이 흔들리는 듯했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모두의 시선이 경천동지의 싸움을 지켜보며 풍랑을 맞은 배처럼 흔들렸다.
‘해왕십삼기!’
조서인의 입장에선 은자촌에서 몇 번이나 봤던 무공이다.
반가움과 놀라움이 함께했다.
추룡이 사용하는 해왕십삼기는 추묵환이 보여 주었던 무공과는 전혀 다른 무공처럼 느껴진 것이다.
똑같은 중병이라도 삼첨양인도를 쓰는 추묵환과 언월도를 쓰는 추룡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추묵환의 해왕십삼기가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를 이리저리 뒤흔드는 위엄 가득한 폭풍이라면, 추룡의 해왕십삼기는 해변가를 갑자기 덮쳐 오는 집채만 한 사나운 해일과 같았다.
화아아악―――!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기세가 막강했다.
한 사람의 육체에서 이만한 기파가 터져 나온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강호 무림은 왜 이런 사내를 그동안 모르고 있었는가.
추룡이 어깨쯤에서 아무렇게나 자른 머리카락이 폭풍이라도 맞은 듯이 흔들렸다.
그가 양손으로 붙잡은 황룡창의 창날에선 마치 뜨거운 햇살이 한데 뭉친 것 같은 샛노란 강기가 단단하게 결집했다.
쾅.
추룡이 진각을 밟자 땅이 기우뚱 흔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후우우우웅!
수평 일격.
하체를 아름드리나무의 뿌리처럼 단단하게 고정시킨 채, 강하게 휘두른 일격이 청계를 우측에서 후려쳤다.
까아아아앙!
청계는 처음에는 피하려 했으나, 막강한 기세에 빨려들 듯 해왕십삼기를 직접 검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병기와 병기가 마주쳤는데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휘청 흔들린 청계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신학검. 청풍검.
표표한 바람과도 같은 날카로운 검술이 수도 없이 뻗어 나온다.
바람으로 파도를 밀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엔 청계의 바람이 너무나 약했다.
황룡창 강맹한 일격을 뿜어 대는 추룡의 압도적인 파상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밀려 나갔다.
쒜에에엑―!
청풍의 검격은 화살처럼 빨랐지만, 추룡의 황룡창은 그보다 더 빨랐다.
넘실넘실.
황룡창 창날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한순간 하늘을 가리킨다.
힘에서 밀리는데 속도까지 비등하니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쩌저정! 쩌엉!
우측 진각.
강하게 내딛는 일보에 수룡의 위맹함이 깃들고, 내리치는 황룡창 일격은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벼락과도 같았다.
쩡!
청계는 머리 위로 검을 든 상단세의 자세 그대로 굳었다.
청강검이 박살 난다.
그대로 내리친 황룡창 창날이 청계의 가면을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샤악―.
목덜미를 칼날이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은 섬뜩한 소리가 났다.
쿵.
황룡창 창날이 땅에 닿는다.
침묵이 감돌았다.
주변에선 숨 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추룡은 황룡창으로 땅을 내리찍은 채 한참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정면을 응시할 뿐.
청계의 등 뒤, 멀쩡히 세워져 있던 움막이 반으로 쪼개진 채 스르륵― 무너져 내린다.
툭.
청계의 가면이 절반으로 갈라져 땅에 떨어졌다.
“이름……이 뭐냐.”
청계의 목소리에선 더 이상 광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추룡.”
“추씨……, 흐흐, 용왕의 천벌인가.”
청계의 이마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일직선으로 혈선이 생겨났다.
촤악―.
피가 뿜어질 때쯤, 추룡은 이미 청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주변에 살아남은 백검회의 검사들을 오연히 바라보았다.
“죽을 거냐. 덤빌 거냐.”
대답 대신 호리병을 깨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