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 25화
제34장 낙일지협(落日之俠) (25)
사람의 육신이 불에 타는 모습은 묘한 감상을 자아낸다.
인생무상(人生無常).
인간 삶의 무상함을 알리는 고사성어는 무수히 많다.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서 사람의 육신이 재가 되어 버린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명예?
돈?
권력?
그 어떠한 것도 죽어 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십여 명의 사람들이 불에 활활 타오르는 모습은, 조서인으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제 기억 속의 백검회는 상당히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힘이 부족해서 붙잡히면 저렇게 백린탄으로 자결을 하고 스스로 불을 질러 버리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조서인은 말라붙은 입을 꾹 다물고 침을 삼켰다.
공기가 건조하고 뜨거웠다.
“목숨을 안 아끼는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죠. 그런데, 지금 보니 허무합니다.”
백검회 전력의 절반이 불꽃이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황궁과 흑시군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강호 무림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던 백검회가 한순간에 마른 장작이나 다름없는 꼴이 되다니.
그야말로 인생사 새옹지마.
화려했던 궁전이 한순간에 고토(古土)로 변한 듯한 허무함이다.
“허무하긴 개뿔.”
방풍은 차돌같이 단단한 팔뚝으로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은 죗값을 받는 거지. 내가 말했던 것처럼 도끼로 대가리를 쪼개지 못한 것은 아쉽다만.”
방풍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청계의 시신으로 향했다.
그는 음울한 표정이었다.
아끼던 동생들이 청계와 백검회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했었다.
무림인으로서 그 복수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가슴의 응어리가 풀릴 리가 없다.
“아직 마음이 안 풀리셨어요?”
“당연한 거 아니냐.”
“그래도, 으음, 쪼개졌네요. 도끼로는 아니지만, 확실히 쪼개졌습니다. 동생들도 기뻐할 거예요.”
조서인은 어찌 그를 위로할까 고민하다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했는데, 그게 방풍의 마음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뭐? 큭큭큭!”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 그렇긴 하지. 쪼개졌구나. 추룡아! 야! 고맙다! 쪼개 줘서!”
“뭐?”
열 발자국 정도 떨어져서 무심히 서 있던 추룡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의아해했다.
“무슨 소린가 했네.”
한발 늦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방 형이 좋아하면 됐어.”
“파하핫!”
방풍이 속이 후련하다는 듯이 껄껄 웃는 사이, 추룡은 성큼성큼 조서인에게로 다가왔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자 십자 모양의 흉터가 둥그렇게 휘어졌다.
“낙일창, 내 창술은 어땠냐?”
“예? 제가 어찌 감히 추 대협의 창술을 평가하겠습니까? 까마득한 후배로서 해선 안 될 일입니다.”
조서인은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라는 듯 정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추룡은 강인한 사내였다.
지닌바 무공은 은자촌 안에서도 손꼽아야 할 정도로 막강하고, 서역을 왕래했다는 말만 들어도 알 수 있듯 온갖 경험이 풍부한 듯했다.
그런 사내를 한낱 애송이인 자신이 어찌 평가하겠는가.
조서인이 공손하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뭐 어떻다고. 원래 없는 데서는 나라님도 욕하는 게 사람인데.”
“으음…….”
“낙일창. 겸손한 것은 미덕이라고 한다만, 그래도 넌 좀 많이 겸손하네. 너무 그렇게 살면 손해 본다?”
“…….”
“고지식하긴. 그럼 이렇게 말해 볼까? 너 우리 대형의 제자지?”
“예?”
“아까 무공 쓰는 거 보고 한눈에 알아봤어. 일연적룡무를 쓴다는 건 대형의 제자라는 거 아니냐?”
일연적룡무까지 안다.
조서인은 당황해서 눈을 끔뻑거렸다.
“대형이라 하시면, 제 사부님을……, 아십니까?”
“알다마다. 한 가족인데. 대형이 이름이 좀 특이하시지?”
“……!”
“다 안다, 인마. 대형께선 잘 계시냐? 아직도 객잔 영업하시고? 우리 영감님이 백경채로 나왔다는 건 은자촌 장사 접은 것 아니야?”
“아!”
조서인은 깜짝 놀랐다.
머릿속에서 섬광이 번뜩이는 기분이었다.
은자촌.
추묵환.
그의 아들 추룡.
‘왜 생각을 못 했을까? 인연이 있는 게 당연한 건데. 아니, 서로 인연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조서인은 황급히 다시 포권을 취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조서인이라고 합니다. 은자촌은 무사하고 사부님께선 계속 객잔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불러야 할지…….”
“뭐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아?”
추룡은 재밌는 걸 찾았다는 듯이 흥미로워했다.
돌발적인 상황에 약한 조서인 입장에선 그런 질문이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 음, 사숙이라 부르면 될런지요.”
추룡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네 사부님과 내가 같은 일문(一門)의 사승 관계는 아니라서. 그 호칭에는 문제가 있네. 본래 군사부일체라는 말도 있으니 넌 나를 숙부라고 불러라.”
군사부일체.
주군과 사부는 부모와 같으니, 사부의 동생은 곧 어버이의 동생이라는 소리다.
“우리 영감님이 너를 손자 같은 아이라고 소개했으니 딱히 틀린 호칭도 아닐 거다.”
“추 어르신의 인연으로 사부님과 의형제를 맺으셨는지요?”
“그 반대야. 나는 대형과 북로전쟁을 함께했거든. 군문에 있을 때 동고동락하면서 친해졌지.”
“아……!”
“몰랐구나? 하긴, 너는 추 영감님밖에 몰랐으니 그리 생각할 수도 있지.”
“죄송합니다. 제 견식이 짧았습니다.”
“영감님은 오히려 처음 만났을 때 군문의 병사가 실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냐고 대형을 무시했었어. 나중에는 아들인 나보다 대형이랑 더 친해져서 깜짝 놀라긴 했다만.”
놀라운 이야기다.
은자촌에서의 추묵환과 장기린은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친했던 사람처럼 익숙해 보여서 그런 비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무튼, 앞으로 너는 나를 숙부로 불러라. 난 너를 조카로 대할 거야. 모자란 건 가르치고, 잘못하면 내가 혼낸다. 알겠냐?”
조서인은 깊이 허리를 숙이며 새로 생긴 숙부에게 인사를 올렸다.
“예, 숙부님.”
“오냐, 조카야. 그래서, 내 창술이 어떻게 보였냐?”
“…….”
“이번에도 답답하게 대답 안 하면 때린다.”
설마 진짜로 때리기야 하겠냐만, 엄포를 놓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조서인은 황급히 대답했다.
“대단하셨습니다. 추 어르신께서 쓰는 해왕십삼기와 비슷하면서도 굉장히 많이 달랐습니다. 뒤로 이어질수록 강맹해지는 형태가 아니라, 처음부터 상대를 압도하는 모습이……, 으음, 효율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초반부터 압도하여 수직 일참으로 청계를 반으로 갈라 버리는 모습.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강렬한 모습이었다.
“잘 봤네.”
추룡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내가 추구하는 바야. 서역에서 말도 잘 안 통하는 놈들이랑 싸우다 보니 느낀 거다. 가끔은 처음부터 압도적인 걸 보여 주지 않으면 주제를 모르고 덤비는 놈들이 너무 많아.”
“아…….”
“정중하고 예의 바른 것만이 답은 아니라는 소리야. 때로는 말로 안 통하는 놈들이 있어. 그런 놈들에게는 까불면 죽겠구나, 하고 단번에 알 수 있게 겁을 주는 게 최고지.”
조서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왜 모르겠는가.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게 당연한 권리인 줄 알고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은 세상에 너무나도 많았다.
극단적인 예로 청계를 처음 만났을 때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물러가라고 한다면 물러났겠는가.
“맞습니다.”
“무공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격하의 상대를 상대로 초반에 압도하는 것만큼 좋은 승부법은 없지. 왜 쓸데없이 공자 왈, 맹자 왈 하면서 초식을 차근차근 전개해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추룡은 조서인의 어깨를 덥석 붙잡아 어깨동무를 했다.
“이 숙부님께서 새로 생긴 조카를 데리고 다니면서 좀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예?”
“우리 대형의 첫 번째 제자가 청계 같은 미친놈한테 무시당하는 걸 보니 열불이 뻗치더라고. 대형도 그러시긴 했는데, 어째 너도 뭔가 사회적으로 경험이 너무 없는 것 같단 말이지. 그러면 안 돼. 보고 있는 내가 속 터져.”
“제가……? 아니 잠깐, 사, 사부님도 그러셨다고요?”
“아니, 그건 실언.”
추룡은 갑자기 말을 수습했다.
“넌 인마, 책임감을 가져야 해. 네 사부가 어떤 분인데. 어중이떠중이 잡놈한테 무시당해서야 쓰겠어?”
“예. 그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백검회의 일검이 어중이떠중이 잡놈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천하제일을 다투는 무쌍귀와 비교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내가 널 좀 더 멋있는 사내로 이끌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알겠냐?”
가벼운 말투로 말하지만 언중유골이다.
말 속에 뼈가 있으니 그 말뜻이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인생 별거 없다. 멋지게 살아야지. 내가 많은 걸 가르쳐 줄 테니 앞으로 잘 배워.”
“어, 으음, 예. 알겠습니다, 숙부님.”
“백경채로 가서 영감님께 인사만 좀 드리고, 그다음에 은자촌으로 함께 가자. 대형께도 어서 인사드려야겠어. 비단길 너머에서 선물 사온 것도 드리고. 아! 너는 은자촌에 가 봤지? 선물 모자라려나 모르겠네. 지금 은자촌엔 몇 분 정도 계시냐?”
“얼마 전에 다들 일 보러 가신 뒤에 무림에 흩어지셔서……, 지금 은자촌에 남아 계신 분들은 다섯 분 정도…….”
“그래? 생각보다 많이 없으시네.”
조서인은 마차에 다시 올라타는 추룡을 따라가다가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몇 년간 강호를 종횡하며 공포를 퍼뜨리던 백검회의 무인들.
그들 중 일검의 시신에도 불이 옮겨붙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집혼기는 부서졌고, 그 시신은 불태워진다.
백검회는 일검과 함께 전력의 절반을 잃었다.
앞으로 강호에서 백검회의 활약을 듣기란 난망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구나.’
음지에 숨어 암약하던 무림의 시대는 끝나고, 이제는 다시 팔파일방과 협객들이 활약하는 강호 무림이 시작될 것이다.
시대의 변화.
백경채의 싸움에서 이어진 갑작스러운 인연.
‘어?’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장기린을 대형으로 모시는 동생이 추룡이라면.
그는 왜, 소호에게는 인사를 하지 않았을까.
은자촌을 잘 아는 듯한데 정작 소호를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 것일까?
‘나중에 한 번 여쭤봐야겠네.’
아직은 속을 알 수 없는 추룡이기에 앞으로 알아가야 할 점이 많을 것이다.
강대한 무공.
경험이 풍부해 보이는 응용력.
조서인은 많은 것을 배워야겠다고 강하게 마음먹었다.
***
북경의 자금성 인근에는 황룡객잔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객잔이 있었다.
오 층짜리 주루와 다루를 모두 갖고 있는 거대한 객잔인데, 황룡이라는 이름이 그러하듯 황족을 뒷배로 갖고 온갖 영역으로 발을 넓히는 객잔이다.
황룡객잔 주루 최상층에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흰색의 비단 장포에 황금색 수실로 장식된 화려한 무복을 입은 청년이었다.
그는 탁자 세 개를 이어붙여도 모자랄 만큼의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도 음식에는 좀처럼 젓가락을 뻗지 않았다.
조용히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술잔을 기울이던 그는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술잔을 내려놓았다.
건장한 사내들이 짊어진 사인교가 도착하고 얼마 뒤, 문 앞이 소란스러워지며 말소리가 들렸다.
“그대들은 여기서 대기하도록 하세요.”
“하지만 태감…….”
“북경에서 나를 위협할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하나요?”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몇 번 왕복했으나 결국은 태감이 이겼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짙은 감색의 관복을 입고 얼굴에는 새하얗게 분칠을 한 사내였다.
현 황제의 스승이자 황실의 실세인 그를 사람들은 ‘왕진’ 태감이라 부른다.
“대명제국 황실의 사례감 태감이 눈앞에 나타났는데도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다니. 그대는 내가 미처 알지 못한 황족인가 보군요.”
손수 문을 닫고 들어와 둘만이 남은 공간에서 왕진.
아니, 왕진의 모습을 한 선이 까르르 웃었다.
“예전에도 태감에게는 그리 예를 차리지 않았었는데. 지금이라고 더 예를 차릴 필요가 있겠어?”
새하얀 비단 무복의 청년은 술병을 들고 갑자기 허공에 술을 따랐다.
밑에 잔이 없는 상태에서 술을 따랐으니 그 술은 바닥에 떨어져 청년의 바지를 적셔야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청년이 따른 술은 허공에 보이지 않는 길이 있는 것처럼 탁자를 가로질러 선의 앞에 놓인 술잔으로 빨려들어 갔다.
선은 감탄하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날이 갈수록 무공이 고강해지는군요. 천무공자라는 이름으로도 부족한 것 같은데. 이제는 존자라는 별호를 붙여야 할까요?”
천무공자 장소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존자는 너무 나이가 많아 보이네.”
“그럼 어떤 별호가 갖고 싶죠?”
“황실에서 인정한 무림맹주.”
선은 잠시 술잔을 멈칫했다가 입으로 가져갔다.
그에 맞춰 소호도 자신의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게 존자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요.”
“그런가? 뭐, 어떤 일이든 처음은 있는 법이니까.”
“최연소 어린 무림맹주를 해 보겠다는 거군요.”
왕진의 역할을 하는 선.
예전의 왕진과 인연이 닿아 있는 소호.
두 사람이 만난 것은 불과 몇 달 전이다.
상대의 숨소리, 체구, 보폭까지 모두 파악하는 소호에게 있어서 선이 왕진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속내를 숨기지 않는 소호는 곧바로 그 사실을 지적했고, 안 그래도 황실에 자신의 지지 기반이 없는 선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말한 대로 장강의 물류 교통은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거야.”
“네. 장강의 일이 잘 처리되었다더군요. 낙일지협이던가요. 새로운 소문이 돌긴 합니다만.”
“예상 밖의 일이 있긴 했지.”
소호는 내심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담담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반개한 채 살짝 내리깐 소호의 눈 위로 붉은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어려울 건 없죠. 하지만 나는 강호 무림에서 손을 뗀 사람이에요. 대놓고 건드릴 수가 없으니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약속만 지켜.”
“그야 물론이죠.”
선은 술에 입술만 살짝 담갔다가 뗀 뒤 술잔을 내려놓았다.
“피차 바쁜 사람들이니 용건만 말하겠어요. 곧 북방으로 친정(親征)이 있을 거예요.”
“황제 폐하가 직접 가신다고?”
“뭐, 그렇게 됐어요. 그때가 기회입니다. 당신은 원하던 무림 일통을 하고, 나는, 폐하께 승리를 건네드릴.”
두 사람은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뚫어져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술잔을 들어 올렸다.
“폐하는 승리하실 거야.”
“공자께선 최연소 무림맹주가 되시겠네요.”
두 사람의 의례적인 웃음이 밤공기 사이로 흘러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