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03화 (532/686)

17권 1화

제35장 절대중립(絶代中立) (1)

장가구 인근.

국경의 근처라고 하면 보통 황량한 폐허나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을 떠올리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물류가 이동하기 마련이며, 월봉을 받은 군문의 사람들이 돈을 쓰게 만드는 온갖 향락도 발전하게 된다.

그뿐인가?

세상에 법을 지키는 사람들만 살지 않는다. 국경의 세금을 피해 장사를 하려는 밀무역 상인들도 구름처럼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뤘다.

위기에서 기회가 생긴다고 하지 않던가.

목숨을 거는 곳엔 목숨을 걸 만한 돈도 오고 가는 법이다. 사람들은 밀무역으로 몇 배나 돈을 불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자 평생 모은 쌈짓돈까지 꺼내 장사를 시작했다.

적양문(赤陽門)은 바로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엔 밀무역 상인들의 뒷배를 봐주던 파락호 패거리가, 한 성(城)을 쥐락펴락하는 거대한 방파가 되는 데 불과 십 년도 걸리지 않았다.

밀무역에서 오고 가는 돈은 평범한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관직을 받고 찾아온 관인들은 모두 두툼한 주머니를 받은 뒤 적양문의 우방이 되었다.

적양문이 지은 기루와 주루를 이용하는 군문의 관인들 또한 적양문의 든든한 힘이다.

무공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돈이 생기니 뛰어난 무공들이 스스로 흘러들어 왔다.

죄를 짓고 문파에서 쫓겨난 무인들.

평생 싸움을 전전한 낭인들.

세외에서 훔쳐 온 무공 비급을 싸구려 투전판의 판돈으로 거는 무지한 자들까지.

돈이 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온갖 험악한 자들이 적양문의 힘을 점점 더 강성하게 만들었다.

그런 세월이 사십 년이다.

술을 담아도 사십 년이면 너무 독해서 먹기가 힘들 텐데, 무려 원 말기부터 재력과 힘을 쌓아 온 적양문의 세는 이제 하늘을 찌를 정도가 되었다.

사파제일세(邪派第一勢).

대륙의 수많은 사파인들의 고향.

적양문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

햇빛이 어스름하게 떠오르는 새벽녘.

음기에서 양기로 넘어가는 묘시(卯時) 경에 두꺼운 철문이 서서히 붉은색으로 달아올랐다.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철문의 한가운데, 태양을 형상화해 둔 거대한 원형이 점점 빨갛게 변하는 중이다.

주변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이 크게 감격하여 사방으로 신호를 보냈다.

두웅― 두웅―.

낮고 울림이 큰 북소리가 거대한 장원으로 퍼져 나갔다.

해도 제대로 뜨지 않은 새벽이었지만, 수백의 무인들이 곧바로 침상에서 뛰쳐 나와 불과 반각도 지나기 전에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갖췄다.

하나같이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이었다.

얼굴에 흉터 하나쯤은 기본적으로 가진 그들은 저잣거리에 나가면 누구나 눈을 피하고 도망칠 외모다.

그런 그들이 마치 장난감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기대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다.

두 눈은 반짝거렸고, 입을 앙다문 모습에선 간절함마저 엿보였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삼 년.

그들의 주인이자 신(神)인 적양문주가 폐관 수련에 들어간 지 정확히 삼 년째 되는 날이었다.

적양문의 철문에 태양이 떠오르면 폐관 수련이 끝났다는 신호다.

이는 곧 적양문주의 무공이 한 단계 진일보했다는 뜻이며, 조용히 숨죽이고 살던 그들의 봉문 또한 곧 끝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쩌저적!

빨갛게 달아오른 철문의 잠금쇠가 어느 순간 물처럼 녹아내렸다.

철문이 열리는 순간, 새벽녘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순식간에 안개처럼 흩어졌다.

숯이 활활 타고 있는 아궁이 속에 머리를 들이민 것 같은 뜨거운 열기가 훅― 하고 퍼져 나갔다.

철문 너머 지극히 어두운 공간에서 활활 타오르는 듯 안광을 빛내는 사내가 한 명 존재했다.

그는 피처럼 붉은 비단 옷을 입고 양손에서 삼매진화의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맨손에서 불을 일으키는 자였다.

전신에서 뿜어내는 열기 때문에 공기가 일그러져 보일 지경이었다.

수백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부복했다.

그들은 진심을 담아 결연하게 외쳤다.

“적양문주 태양염왕의 성취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대성을 경하드립니다!”

적양문주.

태양염왕(太陽閻王) 고흠은 오연한 모습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나이는 오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키가 그리 크지 않았으며 체격까지 평범하여 만약 옷을 달리 입었다면 시장통의 범상한 중년인들과 구별이 되질 않았을 것이다.

얼굴에 살이 없어서 골격이 날카로웠고, 볼과 눈 밑이 움푹 패어 눈빛이 더욱 깊어 보인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딱히 근골도 뛰어나 보이지 않는 그가 특별해 보이는 이유는 딱 하나다.

눈빛.

하늘에서 태양을 떼어내 눈에 박아 놓은 듯 눈빛이 강렬했다.

칠 척 거한조차 눈을 마주치기 힘들 정도로 그는 강렬한 존재감을 지닌 사내였다.

무재도 뛰어나 어떠한 강자와 싸우더라도 언제나 승리의 방법을 찾아내곤 했다.

“문주님.”

가장 앞줄에서 기다리던 두 사람이 뛰쳐나가 고흠에게 각각 술과 술잔을 건네주었다.

“적화검대 대주 막하승, 문주님의 대성을 경하드립니다.”

“청화도대 대주 정옥상, 대공을 축하드립니다.”

절영귀검과 나찰마도.

적양문의 두 기둥이라 불리는 적화검대주와 청화도대주가 그들의 정체다.

부복하고 있는 모든 이들을 무심하고 오연히 바라보던 고흠이지만, 그들 대주 두 사람에게는 인사를 건네며 술잔을 받아 주었다.

“고맙군. 두 사람 모두 잘 있었느냐?”

“예. 문주님.”

쪼르륵―.

최고급 오량액이 술잔에 떨어지는 소리는 방울 소리처럼 청량했다.

고흠은 오량액 한 잔을 물처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는 입안에서 혀를 굴리며 술맛을 깊이 음미하더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삼 년 만의 술인가. 달군.”

고흠은 막하승과 정옥상을 향해 물었다.

“부문주는? 우리의 지낭은 어디에 있는가?”

“남가성 부문주는 문주실에 회담을 준비 중입니다. 문주께서 폐관을 마치셨으니 곧바로 회담을 열 거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고흠은 껄껄 웃었다.

“역시 내 맘을 가장 잘 아는 건 남가성이로구나. 참으로 옳다. 나는 당장이라도 회담을 열고 싶구나.”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고흠은 공손히 허리를 굽히는 막하승과 정옥승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 전에, 이렇게 나를 환영해 주러 온 문도들을 두고 그냥 떠날 수야 없지. 문도들이여! 나 태양염왕 고흠이 우리 적양문의 적염승천공(赤炎昇天功)을 대성하였다. 이제 하늘 아래 나의 적수가 없으니, 우리 적양문의 이름이 천하에 울려 퍼질 것이니라!”

“오오오―!”

경하드린다거나, 축하드린다는 감탄이 곳곳에서 함성처럼 터져 나왔다.

고흠은 크게 기뻐하며 선언했다.

“잔치를 열거라. 우리 적양문의 곳간을 열고 고기를 구워라. 열흘간 우리의 한을 모두 풀 수 있을 성대한 잔치를 열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엔, 우리가 사파 무림의 태산북두가 될 것이야.”

고흠이 하늘을 향해 주먹을 번쩍 치켜드는 순간 사방에서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문주님의 대성을 축하드립니다.”

부문주 남가성은 몸이 너무 말라서 고목(古木)처럼 보이는 중년의 인물이었다.

그는 새카만 문사건을 정갈하게 쓴 채 미리 준비해 둔 서찰들을 자리에 있는 적양문 간부들에게 나눠 주었다.

“부문주, 드디어 때가 왔다.”

“예. 드디어 천의가 저희와 함께하는 듯합니다.”

“길었어. 왕진 태감, 그리고 흑시군 놈들. 관이 무림에 개입하는 바람에 우리는 봉문을 해서 세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지.”

고흠은 웃음을 터뜨리며 감정을 드러냈다.

오랜 시간 숨죽이고 송곳니를 갈게 만든 와신상담의 복수가 드디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사흉 따위는 이제 내 앞길을 막을 수 없다. 무림오존이 여전히 살아 있다면 그들 또한 내게 길을 비켜야 할 것이다.”

“적양문에서 적염승천공을 대성한 분은 문주님이 처음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역사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후후,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 적양문은 하늘 위의 태양이 될 것이야. 무림에 우리의 명성을 떨칠 때가 왔다.”

고흠은 깡마른 얼굴, 태양 같은 눈빛으로 순식간에 사위를 제압했다.

“우선 무림맹과 만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힘을 보여 사파제일세로서 인정을 하도록 만들 것이야. 명분을 얻고 나면 천하가 두렵지 않은 법이다.”

“마땅히 그러셔야 합니다.”

“황실. 그리고 흑시군 놈들. 참으로 길었다. 이젠 두려울 것이 없으니 무림맹에 서찰을 보내거라. 그리고 만약 장소를 정하면 우리 적화검대와 청화도대를 보내 그곳을 싹 쓸어버리도록.”

“회담 장소를 우리가 장악해서 힘을 보이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그 후에 선언을 할 것이다. 무림 제일세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적양문의 것이라고 말이야.”

야망은 사람을 흥분시키는 법이다.

식욕, 성욕보다도 더 급격한 감정이 장내를 지배했다.

고흠의 감정이 파도치자, 그가 들고 있던 술잔 속의 술이 급격히 끓어오르더니 아지랑이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화아악―.

들끓는 무형기처럼 막강한 기파가 잠시 존재감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절영귀검 막하승과 나찰마도 정옥상도 마찬가지다.

고흠의 열정에 감화되어 모두가 눈을 빛냈다.

‘천외천의 무공이다. 문주님의 무공이 하늘에 닿았구나.’

‘중원의 모든 무공을 발아래에 두겠구나. 이제는 적양문의 시대다.’

남가성 부문주는 고흠의 말대로 행동했다.

적양문은 국경 인근이 떠들썩해질 정도로 열흘간 성대한 잔치를 열더니, 그 후에는 갑자기 무림맹 본단으로 서찰을 보냈다.

반응은 뜨거웠다.

처음에는 북경 인근에 있는 종심검문(從心劍門)이라는 작은 무파에서 약속을 잡았으나, 무림맹의 인물이 움직이기 직전에 종심검문이 박살이 나고 말았다.

사망자는 없었으나, 모든 집기가 박살 났으며 종심검문의 무인들은 각자 일 년 이상은 무공을 쓰지 못할 만큼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적화검대.

그리고 청화도대의 일부가 무림맹과의 회담 하루 전에 벌인 만행이었다.

북경 최대의 방파.

사파제일세 적양문이 무림맹과 회담을 갖는다.

강호의 소문은 마치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

“사숙,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해질 것 같습니다.”

명진 도장은 무림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작은 암자 위로 한 달음에 올라왔다.

양의신공을 익혀 언제나 명경지수의 마음을 유지하던 명진 도장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지그시 내려 깐 눈에서 복잡한 내심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적양문인가?”

백연은 어깨까지 모두 가리는 밀짚모자를 옆으로 치우며 물었다.

“예. 종심검문이 봉문하였습니다. 문도 전원이 당하는 바람에 부상을 치유하는 데만 일 년, 명성과 세를 회복하는 데는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적양문이 힘을 쓰기 시작했군. 과감한데.”

“전에 없이 과감합니다. 태양염왕이 폐관 수련을 끝내고 나왔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무공을 대성한 듯싶습니다.”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대단한데.”

백연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명분을 놓지 않으면서 세를 과시하겠다?”

“아마 그렇겠지요. 죽이지 않고 단순히 무공과 힘을 겨룬 것이라면 조금 과감해도 무림에선 크게 흠이 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종심검문과 싸운 이유는 뭐였지?”

“정파 놈들이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 모르니 샅샅이 뒤져서 확인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답니다.”

“놀라워. 그냥 사파로 취급하면 안 되겠어. 종심검문도 그리 약한 곳은 아니지 않았나?”

“명성이 부족할 뿐 문주는 절정의 극에 달한 고수이고, 일류를 넘은 고수가 기백 명에 달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방심하면 안 될 것입니다. 기세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그래야겠군. 아직 왕진 태감과 흑시군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건 그리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들은 뭘 알고 나선 건가?”

“북경과 가까우니 뭔가를 알고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몰랐더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 같습니다.”

“적양문 전체가 자신감에 차 있다는 거군?”

“예. 개방에서는 태양염왕에 대해 ‘무공 측정 불가’라고 보내왔습니다.”

백연은 허허 웃으면서 자신의 까끌거리는 턱수염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종심검문으로 안된다면 다른 큰 문파에 도움을 청하면 될 일. 팔파일방에서 회담을 하면 될 것이지만…….”

백연은 명진 도장이 무겁게 고개를 젓자 헛웃음을 흘렸다.

“다들 몸을 사리나 보군. 종심검문만으로 그럴 것 같지는 않고. 누가 또 당했나?”

“진주언가에서 나섰다가 크게 당했습니다. 태양염왕에게는 언가주가 불과 십 초 지적에 불과했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붕산철권이 요즘 계속 봉변을 당하는군. 지난번에 소수마녀 건으로도 망신을 당했었잖나?”

“무운이 없는 모양입니다.”

“허허.”

백연은 자신이 앉아 있던 허름한 정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선선한 바람과 함께 시대의 변화를 느낀다.

백연은 적양문의 준동이 커다란 사건의 시발점이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을 느꼈다.

“유유자적 농사나 짓던 삶은 끝인 모양이군. 아무래도 예전의 무림맹으로 돌아가야겠어.”

“잘 생각하셨습니다.”

“팔파일방이 안 되면 구양세가……는 힘들겠지?”

“예. 검선께서 계시니 무력이야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만, 그건 적양문과 대신 싸워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라…….”

“구양세가가 아니면 답이 없군. 허허벌판 황야에서 만나야 하나? 그런데 그러면 분명 큰 싸움이 일어날 텐데.”

“지금 적양문의 분위기로 봐서는 그렇겠지요.”

욱일승천.

적양문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거기에 지든 이기든 무림맹 입장에서는 얻을 게 없는 싸움이었다.

“대화가 필요해. 태양염왕도 감히 싸울 수 없으면서 중립의 입장에서 서로 대화를 나눌 만한 장소가…….”

한순간.

백연의 머릿속에서 한 곳의 이름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최근 들어 가장 많은 사건과 연관이 되어 있는 곳.

그 어떤 곳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천외천의 선인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선경(仙境).

“풍운객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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