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권 2화
제35장 절대중립(絶代中立) (2)
“예?”
명진 도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풍운객잔이라니. 제가 아는 그 풍운객잔 말입니까?”
“그래. 거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파와 사파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화전촌의 객잔에서 만나는 건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거기가 어디 그냥 객잔인가?”
“복마전이 따로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그건 아니지요.”
명진 도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뭇거리며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무량수불, 게다가 구양세가에 부탁하지 못하는 것을 풍운객잔에 부탁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적양문이랑 대대적으로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럴 바에는 구양세가에 부탁하는 게 나은 것 아닐지요?”
“그게 그렇지가 않을 거다.”
백연은 계책에 밝은 인물은 아니지만, 무림의 정세와 사람의 심리는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편이었다.
그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더더욱 확신을 갖고 말했다.
“명진. 적양문이 큰 전란을 피해 간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큰 전란이라고 하시면. 혹시 북천의 난을 말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거.”
영락제의 명으로 사서(史書)에서는 지워졌지만, 나이가 좀 있는 강호의 인물들은 모두가 알고 있는 큰 사건이었다.
강호의 사마외도 무림인들이 관직을 탐내며 난을 일으켰던 큰일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나라가 뒤집혔던 일인데. 그게 벌써 이십여 년이나 지났군요.”
“시간 참 빠르지?”
“예. 그런데 그 북천의 난을 적양문이 피해 갔는지요?”
“그래. 북천맹이 패망하면서 그곳과 협력했던 사마외도의 걸출한 방파들이 모조리 쓸려나갔잖나? 사실 지금 적양문의 성세는 그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경쟁하던 방파들이 모두 쓸려나간 덕분에 순식간에 성장했으니.”
“과연. 무주공산을 차지한 셈이군요.”
경쟁자가 모두 난으로 쓸려나갔으니 성장하는 데 거리낄 게 없는 건 당연했다.
백연은 과거의 기억을 곰곰이 되짚어 보며 말했다.
“북원의 잔당들이 북천맹을 만들고, 그곳에서 주장한 강호관직론에 이끌려서 사마외도의 모든 걸물들이 모여들었어. 그때 북천맹에 협력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문파가 바로 적양문이야.”
명진은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그랬지요. 다들 전란으로 바쁠 시기에 북경 쪽은 조용했던 기억이 납니다.”
“북천의 난이 끝난 뒤에 무림맹의 군사들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적양문이 북천맹에 협력하지 않은 것은, 딱히 그들이 대단한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마 북천맹이 승리하지 못할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라고 말이야. 적양문에서는 앞날을 내다봤다는 거지.”
“어떻게 그들은 앞날을 내다본 것입니까? 적양문에 제갈량 같은 책사가 있었는지요?”
“아니. 적양문은 국경지대에서 밀무역으로 성장한 문파니까. 그만큼 국경 북쪽의 소식에도 정통했을 거라더군. 북천맹의 힘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었을 거란 소리야.”
“그건 이해가 안 됩니다, 사숙.”
명진 도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북천맹은 강했습니다. 북천맹주, 그를 따르던 삼대천. 북천맹에 협력한 사파의 왕들. 강호의 무림인들이 모두 힘을 합쳐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막강하지 않았습니까?”
“분명 그랬지.”
“그들의 힘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면 오히려 협력을 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솔직히, 무쌍귀 장 대협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아?”
명진 도장은 그제야 백연이 말하는 바를 깨닫고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기까지 했다.
그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듯 눈빛이 흔들렸다.
“설마, 적양문에서 장 대협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확실한 건 아니야.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럴 리가. 세상에.”
백연은 차분하게 미소지었다.
“어떻게……? 아니, 그렇다면 말이 되긴 하는데.”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었어. 난 아직도 기억이 나. 북천맹에서 남경을 차지했을 때 세상이 난리가 났었어. 기억하지?”
“물론이지요. 그때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명진, 너는 북경이 조용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북쪽 국경 인근의 적양문이 움직임을 보여서 모든 이들이 긴장했었지.”
“예? 적양문이 움직인 적이 있었습니까?”
“나는 그때 영락제 폐하를 뵙기 위해 북경에 가 있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어. 적양문이 내려올 것 같다고 북경 무림이 난리였다. 때를 맞춰 북원의 잔당들이 국경을 다시 침범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적양문과 북원의 잔당들이 힘을 합쳐서 남진하면……, 큰일이었으니까.”
“그렇지요. 남쪽엔 남경을 차지한 북천맹이, 북쪽엔 적양문이 준동하면 위아래로 포위당한 셈 아닙니까?”
“그래. 그런데 적양문은 뜬금없이 다시 자기 문파로 돌아가 봉문을 했어. 그때는 이유를 몰랐는데, 나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장 대협께서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때쯤인데, 혹시 그 때문은 아니었을까?”
“설마.”
명진은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선뜻 믿기지가 않는다.
뭔가 끼워 맞춘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 그 이상 완벽한 설명은 없다는 게 명진 도장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일단 상황이 맞아떨어지긴 합니다만, 변수가 너무 많습니다. 적양문이 북천맹과 협약을 조율하다가 틀어졌을지도 모르고, 밖에선 몰라도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물론 그건 그렇지. 남의 일을 어떻게 다 알겠어. 명진은 어떻게 생각하지?”
“…….”
“느낌이 오지 않나?”
백연은 온화하게 웃으면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명진은 한숨을 내쉬며 항복했다.
“무량수불, 억측일 수도 있으나 솔직히 의심스럽긴 합니다. 사숙, 장 대협이 북쪽에선 유명했었지요?”
“북로전쟁의 붉은 악귀라고 하면 초원 쪽에서는 악몽 같은 이름이라더군. 당시 북천맹주를 제외하곤 상대할 자가 없다고 했어. 이야기만 들어보면 태풍이나 해일 같은 자연재해처럼 취급하더군.”
“북천맹주를 상대하던 그 무력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러니 적양문에선 장 대협을 알아보고 북천맹에 합류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그런데 만약 그랬다면? 적양문이 장 대협이 나타난 것을 알게 되자 여우처럼 빠져나가 몸을 낮추고 기회를 노린 것이었다면?”
“무섭습니다. 지극히 냉정하군요.”
당시 북천맹이 제시한 강호관직론은 사마외도의 무림인들에게는 꿀처럼 달콤한 유혹이었다.
늘 사나운 성향 때문에 핍박받던 그들에게 가진 힘에 따라 관직을 나눠 준다니.
본래 동전 한 닢의 이득만 있어도 앞뒤 안 가리고 손을 뻗게 되는 게 사람의 심리다.
그런데 그만한 유혹을 앞에 두고 과감히 승패를 판단해 봉문을 하고 기다린다?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면, 적양문의 역량은 생각보다 더 뛰어날지도 몰랐다.
“그래. 그 무서움이 우리가 노려야 할 부분이다.”
“으음.”
명진은 신음을 흘렸다.
“설령 그렇다고 한들, 풍운객잔에서 회담을 가지는 것은 쉬운 길은 아닙니다.”
“그래도 해 볼 만한 시도잖나? 지금은 무림의 힘을 결집시켜 부흥을 노려야 할 때야. 사파와 정파로 갈라져 전쟁을 벌일 때가 아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백연은 확고한 표정이었다.
이미 강하게 마음먹었을 때의 얼굴이며, 그럴 때의 백연은 황소처럼 우직하게 자신의 길만 밀고 나간다.
명진 도장은 속가 출신의 이 우직한 사숙을 고집으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가 없군요. 사숙, 그렇게 결정하셨다면 앞으로 바빠지실 겁니다. 군사부에도 알려서 회담을 준비시키겠습니다.”
“우선 구양세가에 들렀다가, 풍운객잔에 가서 허가를 받도록 하자.”
“반드시 모두의 허가를 받고 일을 진행시키셔야 합니다. 아! 구양 부인께도요.”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마음이 약해지는데.”
“사숙께서 선택한 길입니다.”
백연은 농사를 위해 걷어 올렸던 바짓단을 다시 내리고, 밀짚모자를 완전히 벗어 던졌다.
은거하던 무림맹주 백연은 이제 없다.
새로운 시대, 변화된 무림 강호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싸움의 열기는 늘 뜨겁다.
피, 분노, 욕망, 집념.
전장(戰場)이란 가열 차게 타오르는 용광로와 같다.
이 세상의 모든 욕망을 그러모아 목숨과 철을 녹여낸다.
적양문의 문주.
태양염왕 고흠은 양팔을 넓게 펼친 채 호연지기를 담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보라. 이것이 적양문이다.”
산서의 토호.
진주언가에서 보낸 잠호대는 하나같이 바위를 깎아 만든 것 같은 건장한 사내들이었다.
진주언가의 언가권과 비호무영보는 그들을 말벌처럼 날쌔고 위협적으로 만들었다.
오십여 명이 한꺼번에 사용하는 잠호멸살진 또한 강맹하다.
주변을 둘러싼 채 상방과 하방에서 철권(鐵拳)을 날려오는 그들은 잘 만든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서 돌아가고 있었다.
진주언가는 강하다.
만약 그들이 약했다면 산서 땅에 수백 년 동안 터를 잡고 지켜 낼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 강한 진주언가를, 평생 국경지대에서 숨죽이고 살았던 적양문이 압도적으로 밀어붙인다.
이 어찌 통쾌한 광경이 아닐 수 있겠는가.
“적화검대는 좌측으로 간다!”
절영검귀 막하승의 쾌검이 잠호멸살진의 빈틈을 파고들어 진법을 찢어 놓았다.
“청화도대는 우측이다!”
나찰마도 정옥상은 자신의 키만 한 대도를 휘둘러 진주언가의 무인들을 두세 명씩 뒤로 튕겨냈다.
진주언가의 잠호대가 모두 무릎을 꿇는 데는 불과 반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고흠은 그때쯤 느긋하게 움직였다.
금의위들이 황제가 지나갈 길을 열 듯, 일렬로 도열한 적양문 문도들 사이를 통과하자, 팔과 어깨에 부목을 대고 광목천을 칭칭 감은 진주언가의 가주 언주명이 장로 두 사람과 함께 서 있었다.
“그만한 상처를 입고도 오늘 또 나타나다니. 그 기백만큼은 참으로 가상하구나.”
고흠은 오연하게 칭찬을 하였으나, 언주명은 순순히 그 말뜻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
분기를 주체하지 못한 채 언주명은 버럭 소리쳤다.
“태양염왕!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리석구나. 이미 내 뜻대로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느냐.”
“건방진! 무공에서 약간의 성취를 이뤘다고 한들, 한 땅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거파를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고흠은 코웃음 쳤다.
“기백이 높은 자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였군.”
“뭐라!”
“무는 개는 짖지 않는 법이다.”
체구만으로 봐서는 붕산철권 언주명은 고흠의 두 배가 넘지만, 고흠의 기파가 반대로 언주명을 크게 압도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무형기.
막강한 기파를 앞에 두고 언주명은 이를 악물면서 덤벼들었다.
후우우웅―!
언주명이 붕산의 권격을 내뻗는 순간, 가만히 침묵하던 두 명의 장로가 동시에 벌처럼 뛰어올라 고흠에게로 쏘아졌다.
언주명을 포함해 세 명이 삼방에서 공격하는 셈이다.
“저런!”
나찰마도 정옥상이 대도를 뽑고 뛰쳐나가려는 것을 절영귀검 막하승이 가로막으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고흠은 세 명의 연수합격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뒷짐을 진 채 서 있다가, 양손을 뻗어 세 번의 장타를 허공으로 격타했다.
단지 그것뿐.
세 번의 장력이 허공을 격타했을 뿐인데, 달려들던 세 명의 몸이 섶을 쥐고 불에 뛰어든 것처럼 순식간에 불에 타올랐다.
“그아아!”
공기가 뜨거워진다.
고흠의 온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극에 달한 적염승천공은 그들의 몸통을 까맣게 태워 버렸다.
언주명은 몸이 활활 타오르는 와중에도 집요하게 철권을 날렸으나, 고흠이 손등으로 주먹을 올려치고 장저로 어깨를 내리치는 일격에 단박에 몸이 휘청였다.
불과 삼 초식.
언주명은 처절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었다.
진주언가의 강시공이 아니었다면 죽음에 달했을 상처였다.
“흐읍.”
고흠이 숨을 들이켜며 호흡을 갈무리하자, 활활 타오르던 세 사람의 몸에서 불길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융통무애.
자신의 몸뿐 만아니라 인근의 자연기까지 자유자재로 통제하에 둔 모습이다.
그 경이로운 무공은 적양문 문도들에게는 자부심과 존경을, 진주언가 문도들에게는 절망과 공포를 주었다.
“쿨럭! 쿨럭! 그으…….”
언주명은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 내다 충혈된 두 눈으로 고흠을 올려다보았다.
“보아라. 내 뜻대로 되지 않았느냐.”
“무림맹은……,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무림맹이 뭐라고. 흑시군 아래 쥐새끼처럼 숨어다니던 자들 따위 두렵지 않다.”
오오오―.
적양문 문도들에게서 과연 그렇다는 듯 함성이 터져 나왔다.
언주명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적양문은 진주언가 사람을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은 채 모든 이들을 무릎 꿇렸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패배이지 않은가.
“문주님. 무림맹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적양문의 부문주이자 군사, 남가성이 고급스러운 비단 서찰을 들고 고흠에게 다가왔다.
“거지가 들고 왔나?”
“예.”
고흠은 백 보 떨어진 곳에서 긴장한 채 서 있는 개방의 삼결제자를 힐끗 바라본 뒤 비단 서찰을 펼쳤다.
단박에 읽어 가던 고흠.
그의 눈썹 위로 지그시 주름이 생겨났다.
“풍운객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