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05화 (534/686)

17권 3화

제35장 절대중립(絶代中立) (3)

고흠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소림사가 아니라고?”

지금 그들이 있는 산서의 바로 아래가 하남이며, 하남이라 하면 본래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가 가장 유명하다.

이쯤되면 당연히 소림사에서 만남을 주관할 줄 알았건만, 느닷없이 풍운객잔이라니.

“풍운객잔이 뭐하는 곳이지? 들어 본 적 있느냐?”

고흠이 주변의 반응을 살펴보니 풍운객잔이라는 곳을 아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부문주 남가성이 난감한 표정으로 나섰다.

“문주님, 평범한 객잔은 아닐 거라 생각됩니다.”

“무림맹에서 정한 장소인데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그런데 왜 무림 문파가 아니라 객잔에서 보자는 것이냐?”

“으음, 저희가 지금껏 살생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명분을 쌓으려는 의중을 알고 있을 것이고, 그러니 무림 문파가 아닌 곳을 고르면 공격을 하지 않을 거라는 그런 얄팍한 술책이 아닐지요.”

“흐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남가성의 의견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고흠은 그 말에 선뜻 동의할 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 무림을 겪어 오면서 생긴 육감이 그에게 무언가를 경고하고 있었다.

찝찝하고 불쾌한, 함부로 발을 들여선 안 될 것 같은 그런 불안감 말이다.

“객잔……, 객잔이라니. 부문주, 어떻게 생각하나?”

“정파와 사파의 맹주가 만나는 자리인데 그래도 최고의 장소이지 않겠습니까? 최고급 객잔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남가성도 확답을 하지는 못했다.

무림맹의 의중을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때, 침묵을 지키던 청화도대 대주, 나찰마도 정옥상이 불쑥 나섰다.

“모르면 물어보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옥상, 그게 무슨 말이냐.”

“문주님. 제가 머리가 좋지는 않지만, 이 세상의 모든 소식은 거지에서 시작되어 거지로 끝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호오.”

고흠이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정옥상은 상이라도 탄 것처럼 함박웃음을 지었다.

멀리서 이쪽의 눈치를 살피던 개방 삼결제자의 안색이 사색이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곧바로 몸을 돌려 도망치려던 거지는 정옥상에게 목덜미가 잡혀 개처럼 질질 끌려오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조용히 해! 태양염왕께 예를 갖춰라!”

거지는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몸집이 단단하고 목이 짧으며 코는 작고 납작해서 두꺼비 같은 외모를 지녔다.

청년 거지는 어깨를 움츠린 채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개방의 거지. 이름이 무엇인가?”

고흠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아도 상대를 위축시키는 기파를 지니고 있었다.

번뜩이는 시선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같다.

청년거지는 목이 없어지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머리를 움츠렸다.

“내 이름은, 크흠, 으음, 섬여개(蟾蜍丐)요……니다.”

하오체를 쓰며 배짱을 부리려던 섬여개는 주변의 압박을 느끼고는 곧바로 존대를 사용했다.

“섬여라니. 이름부터 두꺼비로군.”

“제가 어릴 때부터 얼굴이 요모양 요꼴이라서요……. 서너 살쯤에 말할 수 있을 무렵부터 움막에서 섬여라고 불렸습죠.”

“그렇군. 잘 어울린다.”

섬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오묘한 얼굴이 되었다.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화법이었다.

“개방의 거지 섬여개. 말하라. 풍운객잔이 어디에 있느냐? 무림맹은 왜 이곳을 회담 장소로 골랐지?”

“그, 그게…….”

섬여개는 눈을 뒤룩뒤룩 굴리면서 고민하는 듯했다.

속으로 셋을 셀 시간이 지나갔다.

고흠은 기다리는 것을 싫어한다.

대번에 눈썹이 하늘로 치솟자, 이번에는 적화검대 대주 절영귀검 막하승이 곧바로 검을 뽑았다.

스릉―.

“히익―, 마, 말합니다. 말해요. 굳이 피를 볼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두꺼비. 염왕께선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신다.”

안개처럼 쫙 깔린 막하승의 목소리는 섬여개가 듣기엔 저승사자의 부름 같았다.

고흠은 벌벌 떠는 섬여개를 보며 코웃음쳤다.

“팔파일방. 개방의 협의가 하늘을 찌른다더니 다 헛소문이군. 개방의 제자라는 놈이 이렇게 속이 약하단 말인가?”

“제, 제가 원래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이런 일?”

“저는 다리만 빨라서 항상 뭔가를 전달하는 일만 했습니다. 정보를 캐고, 넉살 좋게 강짜부리고, 그런 건 제 일이 아닙니다요.”

“허어?”

“두, 두꺼비가 뒷다리가 길어서 잘 뛰지 않습니까? 제가 섬여라 불리는 것은 그런 이유도 있습죠.”

섬여개가 땅딸막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다리가 몸집보다 좀 길기는 했다.

신법이 뛰어난 거지라는 소리다.

고흠은 벌벌 떨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섬여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알겠다. 대답이나 하라.”

“예, 예. 빨리 말합죠. 풍운객잔은 삼산현 화전촌에 있는 작은 객잔입니다. 무림맹이 왜 그곳을 골랐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뭐?”

섬여개의 대답에 의아해한 것은 막하승뿐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당황하고 말았다.

그들은 귀를 의심하며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섬여개는 그가 했던 말을 수정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저 난감한 기색으로 우물쭈물 거릴 뿐이다.

“삼산현? 혀언? 화전촌?!”

나찰마도 정옥상이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고 소리쳤다.

“우릴 화전촌으로 불렀어? 이것들이 우릴 뭘로 보고!”

애초에 남경이니 항주니 그런 지명이 나온 게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삼산현 따위가 나온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게다가 화전촌이라니.

그딴 곳에 있는 객잔으로 종심검문과 진주언가를 박살 낸 적양문을 부른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옥상, 조용히 하라.”

“하지만 문주님……!”

“조용히. 하라.”

고흠이 나직하게 목소리를 깔자 정옥상은 곧바로 사죄를 표한 채 뒤로 물러났다.

“화전촌의 객잔이라는 것이군. 그곳은 특별한 객잔인가?”

“…….”

“말하라. 섬여개.”

섬여개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모, 모릅니다. 그저 무림맹주님이 직접 그곳을 정했다는 사실만 알 뿐입니다.”

“그래? 백연이 그곳을 직접 지정했다고.”

“예. 예. 그랬습죠. 안 그래도 하남의 거지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왜 풍운객잔이냐면서요.”

고흠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섬여개의 목을 날려 버릴 것처럼 숨이 거칠어진 수하들을 말렸다.

그런데 평소엔 막하승과 정옥상을 말리는 역할이던 남가성조차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모든 일에는 그에 걸맞은 격과 식이 있는 법입니다. 사파의 맹주로서 저희 적양문이 행보를 시작했는데, 첫 회담이 화전촌의 이름 모를 객잔이라니요.”

“아무래도 그렇긴 하군.”

“거절하고, 저희의 원래 계획대로 소림으로 향하면 됩니다. 문주께서 소림승들에게 적염승천공의 위력을 보이시면 모든 이들이 앙복할 것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아니.”

남가성의 말이 백번 옳다.

굳이 여기서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 없는 무림맹의 요청을 승낙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옛말에 아쉬운 놈이 우물을 판다고 하지 않던가.

이대로 적양문의 행보를 계속 이어 나가면 다급해진 무림맹이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질 것이다.

만약 화를 낸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참에 적양문의 힘을 보여 줄 수 있으니 좋다.

“그런데 일해검이 그걸 몰랐을까?”

“예?”

“그자가 농사 일이나 하면서 유유자적 선인처럼 산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런데 자기가 그리 소탈하게 살더라도 맹주끼리의 만남을 산골 화전촌 객잔에서 하는 건 누가 들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냐?”

“백이면 백, 모두가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 그런데 왜 그자가 그렇게 결정했냔 말이다.”

대답은 없었다.

누가 생각하더라도 답을 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고흠은 그 답을 섬여개에게 요구했다.

“섬여개.”

“예?”

“풍운객잔이라는 곳. 화전촌에 있는 그 객잔이 무림 문파와 관련이 있나?”

섬여개의 표정이 변한다.

마치 허물을 벗은 듯 사람이 전혀 달라졌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지금껏 보여 주던 비굴하고 눈치나 살피던 굴종의 태도가 사라졌다. 남은 것은 대 개방의 정통 제자로서의 협기다.

셋을 셀 시간이 지났다.

대답은 없었고, 섬여개는 무언가를 각오한 듯 결연한 얼굴로 입술만 질끈 깨물고 있었다.

“허어.”

“이런.”

남가성, 막하승, 정옥상.

적양문 최고 간부들이 탄식했다.

“이놈 감히 우릴 속여?”

이번엔 정말로 베어 버릴 요량으로 막하승이 칼을 들었다.

“속이지 않았소!”

섬여개는 결연하게 외쳤다.

“말할 수 있는게 있고, 없는 게 있을 뿐이오.”

“이놈이 끝까지 수작을……!”

“그만.”

고흠은 손을 들었다.

단박에 내려치려던 막하승이 검을 든 자세로 굳었다.

“아직 피를 보지 마라.”

“문주님. 저 두꺼비 같은 놈이 감히 문주님을 농락하려 했습니다.”

“농락하려한 것 같진 않다.”

고흠은 태양 같은 눈빛으로 섬여개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섬여개, 이제야 개방의 거지답군. 의기(意氣)를 숨기고 있었어.”

“……칭찬에 감사하오.”

“묻겠다. 섬여개, 풍운객잔은 무림맹이 준비한 함정인가?”

“그건 아니오.”

답은 곧바로 나왔다.

여전히 결연한 얼굴.

섬여개는 목숨을 건 모습 그대로였다.

후우웅―.

“……!”

그 순간 고흠의 무형기가 일렁일렁 타올랐다.

화려하게 터져 나가는 기파.

단지 존재감을 드러냈을 뿐인데도 숨이 턱 막히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섬여개는 안색이 하얗게 질렸으나, 입술만 피가 나도록 깨물 뿐 발언을 철회하진 않았다.

“섬여개여. 대답을 잘 해야 할 것이다. 풍운객잔이 정말로 회담장소일 뿐이더냐?”

“그, 그렇소.”

“그래. 알았다.”

막강한 기파가 썰물처럼 사라진다.

섬여개는 숨을 헐떡였다.

멍석말이로 칭칭 감겼다가 풀려난 듯한 기분이었다.

고흠은 가슴을 펴고 사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체구지만 천지를 포용할 것 같은 기백이 흘러나왔다.

“함정이어도 상관없다. 가서 전하라. 나 태양염왕 고흠은 풍운객잔에서 무림맹주를 만나겠노라.”

적양문의 문주이자 현 사파 지존의 선언이다.

막하승과 정옥상은 각자의 무기를 다시 집어넣은 채 물러났다.

그게 순순히 보내 주겠다는 뜻임을 알아챈 섬여개가 우물쭈물하며 일어났다.

셋을 셀 시간이 지났다.

고흠의 아미가 위로 솟아올랐다.

“본좌는 기다리는 것을 싫어한다. 냉큼 떠나거라.”

“그, 그리하겠소.”

섬여개도 적잖이 당황했던 모양이었다.

섬여개는 거지 답지 않게 진심으로 예를 다해 포권을 취한 뒤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다.

“취팔선보가 제법이군요. 단순한 삼결제자는 아닌 듯 보입니다.”

남가성의 말에 고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팔파일방이 무서운 점이 저것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옳다고 믿으면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키는 것을 망설이지 않아.”

“적양문의 문도들은 사파의 지존이신 문주님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가성은 결연하게 외쳤다.

막하승과 정옥상이 과히 그렇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우리 청화도대 놈들 중에 목숨을 아까워하는 놈은 없습니다!”

“적화검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흠은 말없이 조용히 웃었다.

“내가 복이 많군.”

“적양문은 승리할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문도들이 일제히 남가성의 말을 따라했다.

“적양문은 승리할 것입니다!”

대지가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그때까지 무릎을 꿇고 있던 진주언가의 사내들이 절망적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적양문의 용기와 기백이 범상치 않음을 체감한 것이다.

“어떠한 함정이 있더라도 우리는 이겨 낼 것이다. 하지만 방심하여 상대방에게 놀아나는 것만큼 추한 일도 없지. 청화도대주.”

“예! 문주님!”

청화도대 대주. 나찰마도 막하승이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굽혔다.

“청화도대 몇 명을 데리고 먼저 풍운객잔으로 향하라. 그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무림 문파와 엮여 있기에 개방의 거지가 목숨을 걸고 침묵을 지킨 것인지 알아내거라.”

“존명!”

막하승은 열정을 불태우며 가슴을 두드렸다.

“만약 무림맹이 수작을 부렸다면, 제가 그곳을 정리해 놓아도 되겠습니까?”

“그리하라. 단, 죽여서는 안 된다.”

“화전촌 객잔 놈들 따위. 피를 볼 필요도 없습니다.”

막하승은 기대된다는 듯이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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