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06화 (535/686)

17권 4화

제35장 절대중립(絶代中立) (4)

삼산현 은자촌.

풍운객잔의 아침은 뒷마당 우물가에서 감자를 깎는 걸로 시작된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녘 찬 공기가 코밑을 서늘하게 식혀 준다.

나무칼로 감자를 깎는 작업은 장기린에게 있어 하나의 의식과도 같았다.

얇은 가죽신 아래에 닿는 단단하고 서늘한 흙의 감촉. 투박하게 깎은 통나무 의자에 털썩 걸터앉으면, 밤새 맺혀 있던 이슬이 엉덩이를 축축하게 적신다.

누군가에게는 지겹고 싫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장기린에게 있어서는 ‘평범한 삶’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하나의 제례였다.

우물에서 물을 한 됫박 퍼내고 운찬이 미리 꺼내 둔 식재료 바구니를 보니 생각보다 높이가 낮았다.

“오늘은 감자의 양이 적군.”

한창때는 바구니 위로도 산처럼 쌓여 있던 감자들이 이제는 바구니를 채우는 것도 간당간당했다.

옆에서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 있던 강운찬이 시선을 느꼈는지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사람이 줄어서 그래요, 형님. 어르신들 다 고향 가시고, 남아 있는 사람이 얼마 없잖아요.”

“새로 들어온 아이들이 있지 않나?”

“태산이랑 성천이요?”

이태산과 태성천.

한때 무산학관의 유망한 무인이었던 청년들이 이제는 은자촌의 막내 일꾼들이다.

“이 감자도 걔네가 캐낸 거긴 한데, 걔들 의외로 많이 안 먹더라고요. 특히 태산이는 그 큰 덩치로 딱 일 인분만 먹는다니까요?”

“일 인분만 먹는다고?”

“예! 수도승처럼 딱 주어진 한 그릇만 먹어요. 걔는 도대체 덩치가 어떻게 그렇게 커졌는지 모르겠어요. 물만 마셔도 커진다는 게 그런 건가 봐요.”

강운찬은 손을 자신의 어깨에 갖다 대면서 숨을 한껏 들이켜서 이태산처럼 덩치를 부풀렸다.

이태산을 흉내 내는 듯한데 그렇게 부풀려도 덩치가 이태산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는 점이 재미있다.

은자촌 최고의 거구인 대석과 비교하면 절반의 절반 정도다.

“운찬, 덩치가 큰 걸 부러워할 필요는 없어.”

“그렇긴 하죠. 그래도 뭔가 그런 거 있잖아요? 남자의 자존심이랄까. 막, 이야기 속 영웅 같은. 그런 호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죠. 사내놈들이 다 그렇잖아요?”

“그런 게 있긴 하지.”

장기린은 선선히 웃었다.

그가 왜 사내들의 낭만을 모르겠는가.

북방의 전쟁터에서도 비슷했다.

덩치가 큰 장수가 갑옷을 입고 중병을 들고 덤벼 오면, 그 모습 자체로도 주는 위압감이라는 게 있다.

누구나 관운장, 상산 조자룡을 꿈꾼다.

적의 목을 수수 꺾듯 베어 버릴 수 있는 영웅은 시대를 막론하고 인기가 있는 법이다.

‘좋을 건 하나도 없지만.’

정작, 이미 모든 걸 겪어 본 장기린 입장에선 허무한 이야기였다.

“지금 가진 것에 충실하면서 살아야지. 은자촌은 그걸 위해 만든 거니까.”

“예에, 그렇긴 하죠.”

강운찬은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은자촌이라는 장소 자체가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이 평범하게 살기 위한 장소다.

가지지 못한 것을 원하는 마음.

욕망과 야망이야말로 은자촌과는 가장 안 어울리는 것 아니던가.

“운찬.”

“예, 형님.”

“마을에서 나가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또 그러신다.”

강운찬은 손을 내저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밖에서 활약하고 싶었으면 용화성 대령숙수님이 부르셨을 때 냉큼 갔죠. 전 은자촌이 좋아요. 그냥 여기서 객잔 주방이나 지키렵니다.”

“네 재능이 아까워서 그렇다.”

“여기 있는 분들 중에 재능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딨어요?”

강운찬이 씩 웃는 모습은 제법 호쾌했다.

“신의라 불리는 우 어르신, 신공 소리 듣는 광 어르신. 검선이라 불리는 구양 어르신은 뭐,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제 눈앞에도 무림 제패도 할 것 같은 분이 한 분 계시네요.”

“으음.”

“다― 좋아서 하는 겁니다. 좋아서.”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이 의뭉스럽기 짝이 없다.

은자촌에서의 삶은 강운찬에게 물욕을 빼앗고 여유와 능글맞음만 준 것 같았다.

“녀석.”

장기린은 그 이상 말하지 않고 감자를 깎기 시작했다.

한 바구니를 간신히 채우는 감자는 장기린과 강운찬이 동시에 칼질을 하자 순식간에 황옥색 속살을 드러냈다.

껍질을 다 깎았으니 찰랑거리는 맑은 물에 한 번 씻으면 끝이다.

강운찬은 바구니에 담긴 깨끗한 감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으음, 식재료를 조금 더 준비해 둬야겠어요.”

“왜?”

“형님이 감자가 적다고 해서 그런가. 왠지 모자라 보이네요.”

강운찬은 말로만 그치지 않고 창고로 가서 청경채와 버섯 몇 종류, 거기에 대추와 약재 몇 가지도 꺼내 와서 다듬기 시작했다.

그 양이 이미 한 바구니를 가득 채우고도 남아서, 평소의 두 배에 가깝다.

“오늘 특별한 요리라도 하려고?”

“그런 것도 좋겠네요. 서인이가 좋아하던 오향장육이랑 심태연도 좀 만들어 볼까요?”

“새삼스럽군. 주방은 네 거다.”

“흐흣, 형님도 고기 좋아하시는 걸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운찬의 요리는 뭐든 맛있으니 환영이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가 좀 더 힘을 내야겠구만요!”

운찬은 과장되게 말하며 으쌰으쌰 힘을 북돋웠다.

정오 무렵, 장기린은 미리 식재료를 많이 준비하던 운찬의 예감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부시게 햇볕이 내리쬐는 정오, 풍운객잔에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

새하얀 소 한 마리가 끄는 우마차는 주변의 시선을 한눈에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소는 덩치가 컸고 걷는 속도도 빨랐다. 사람처럼 눈썹이 긴 소였는데, 한 걸음 한 걸음을 신중하게 내디딜 때마다 고고한 기품이 느껴지는 영물이었다.

“백아야. 여기다.”

마부석에 있던 건장한 중년의 사내가 다독이듯 말하자, 백아라 불린 소는 반동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럽게 속도를 줄여서 서서히 멈춰섰다.

우마차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한 명은 마부석에 앉은 건장한 중년의 사내고, 다른 한 사람은 짐칸에 앉아 있는 미모의 여인이다.

여인의 모습은 특별했다.

검은색 비단 옷에 흰색 수실로 검 문양이 빼곡히 새겨져 있는 옷차림부터 범상치 않다.

그녀는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얼굴이 절반 이상 가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백이면 백이 모두 뒤돌아볼 법한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우마차가 완전히 멈춰 서자, 풍운객잔의 입구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덜컹거리는 마차 소리를 들은 일꾼 두 사람이 손님을 배웅하러 나온 것이다.

“당신은……!”

한 명은 건장하고, 다른 한 명은 평범한 체구를 지닌 두 청년.

이태산과 태성천은 별생각 없이 나왔다가 마부석에 앉은 사람을 보고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나를 아시는가?”

백아라 불린 흰 소의 목을 토닥이며 건장한 중년의 사내가 물었다.

이태산과 태성천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서로를 힐끔 쳐다본 뒤, 허둥지둥 포권을 취했다.

“무림 말학 이태산이 일해검을 뵙습니다.”

“검의 길을 좇고 있는 태성천입니다. 무산학관의 개관식 때 멀리서 뵌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당당한 무림의 협객을 꿈꾸던 두 사람에게 있어 무림맹주라는 자리는 험난한 준봉의 꼭대기와 같았다.

특히 태성천은 크게 흥분했다.

오매검마 육모담과의 만남 때도 그랬지만 뛰어난 검사와의 만남은 언제나 그를 기쁘게 했다.

두 눈은 소년처럼 반짝거렸고, 검사답게 긴 손가락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이제 보니 철탑패웅과 섬전검객이로군. 자네들의 무명은 잘 알고 있네.”

무림맹주 백연은 그들 두 사람의 환대가 기쁜 듯 인자하게 웃어 주었다.

“예?”

이태산과 태성천은 크게 놀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저희를 아십니까?”

“왜 모르겠나. 무산학관이 초기에 배출한 뛰어난 인재들인데. 난 자네들을 무림맹에 데려올 수 없음에 아쉬워했었지. 직접 보게 되어 나도 반갑네.”

구름 위의 존재 같았던 백연이 이렇게 소탈한 성품일 줄 몰랐던 두 사람은 당황하여 얼굴까지 빨개졌다.

“영광입니다. 맹주님께서 저희를 기억해 주시다니.”

“큰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그 소식이 잘못된 건가? 자네들을 이렇게 직접 보니 무탈해 보이는군.”

“신의께서 저희를 돌봐주신 덕분에 많은 차도가 있었습니다. 아직 무공을 펼치기엔 힘든 점이 많습니다만, 그래도 노력하는 중입니다.”

“호오.”

백연은 흥미롭게 두 사람을 보았다.

오른쪽 무릎이 꺾인 이태산과 오른쪽 팔목과 팔꿈치가 꺾인 태성천.

두 사람은 각자 권사와 검사로서의 생명은 끝났다고 해도 좋을 부위를 부상당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중 나올 때 거의 정상인과 다를 바 없는 움직임을 보여 주었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백연이 미리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절뚝거리는 걸 전혀 못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인상적이군. 비바람을 맞으며 자란 소나무가 화초처럼 자란 꽃들보다 강한 건 당연한 일일세. 게다가 주변에는 뛰어난 분들이 많으니 자네들의 앞날이 기대되는군.”

“그런, 말씀을 해 주시다니.”

이태산과 태성천은 서로를 힐끔 본 뒤 감격에 차서 말을 더듬거렸다.

“감사합니다. 맹주님께서 해 주신 격려를 잊지 않겠습니다.”

“내가 해 준 게 뭐 있다고.”

껄껄 웃는 백연의 등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인사할 기회도 주지 않을 거예요?”

“아차! 미안하오. 부인. 지금 바로 내려 주겠소.”

백연은 급히 움직여 짐칸에 앉아 있던 미모의 여인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짐칸에서 내려오는 것을 도왔다.

그 모습에서 애정과 공경이 넘쳐 흐른다.

이태산과 태성천은 면사포 너머로도 느껴지는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무림맹주 백연이 부른 ‘부인’이란 호칭에 몸을 떨며 전율했다.

“맹주님의 부인이라면…….”

“구양제일화……!”

천하제일 구양세가에서 무당의 속가 제자에게로 시집간 여인.

한때 구양세가와 무당파의 결합이라는 소리가 들리며 전 무림을 긴장시켰던 사건이 바로 두 사람의 혼인이었다.

“반가워요, 두 분, 객주님은 안에 계세요?”

구양화의 목소리는 기품이 가득했고 낭랑하며 당당했다.

“예, 안으로 드시지요.”

이태산이 두 사람을 안내했고, 태성천은 장기린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서둘러 안채로 향했다.

백연은 우마차에서 성인 남성이 양팔을 다 벌려야 들 수 있을 네모난 보따리를 들고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부인, 옛날 생각이 나는구려. 그때도 이렇게 풍운객잔에 왔었지.”

“그러게요. 그때가 벌써 이십 년 전이네요.”

두 사람은 아련한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객잔 안에 들어섰다.

“힘든 여정이었지. 부인은 어렸고, 나도 너무 어설펐소. 소매치기를 당해 돈이 없는데도 이곳에 묵을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었지.”

“천운? 무슨 소리예요. 아무것도 못하고 당황하는 당신 대신 내가 나선 거죠. 내가 생활력과 기지를 발휘해서 객주님과 휘연 언니의 환심을 샀잖아요? 기억 안 나요?”

“으응? 그건 내 기억과 많이 다른데.”

“어떻게 다르죠?”

“전낭을 잃어버린 부인의 철없는 요구를 두 분께서 넓은 아량으로 받아 주신 것이지.”

“말 다 했어요, 지금?”

얇은 면사 너머로 강렬한 눈빛이 느껴졌다.

백연은 헛기침을 했다.

“내 기억이 잘못되었나 보군.”

“단단히 잘못되었네요.”

“그때 부인이 난을 쳐 주고 객잔에 묵었었지?”

“그래요. 충분히 값을 치렀죠.”

“…….”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몰라도.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알았소.”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들어서자 안내하던 이태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뻘쭘하게 서 있는 수밖에 없었다.

이태산은 두 가지를 알 수 있었다.

하나는 천하의 무림맹주가 풍운객잔과 인연이 깊다는 점이고, 둘째는 무림맹주가 부인에게 꽉 잡혀 산다는 점이다.

둘 모두 이태산에게는 크게 놀라운 사실이었다.

“오랜만이군, 두 사람.”

그때, 안에서 나타난 장기린이 두 사람을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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