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07화 (536/686)

17권 5화

제35장 절대중립(絶代中立) (5)

“객주님. 오랜만입니다.”

백연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포권을 취했다.

장기린은 짧고 간결한 포권으로 그 예를 받아 주었다.

“형부!”

반면에 구양화는 친근한 태도로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호칭에는 두 사람이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흡!”

이태산은 헛숨을 들이키며 굳어 버렸다. 장기린의 뒤를 따라오던 태성천은 어찌나 놀랐는지 한 발을 내딛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형부? 형부라니?’

‘그럼 장 객주님 부인께서 구양 부인의 언니라는 뜻……?’

이태산과 태성천이 서로 무언의 시선을 주고받았다.

충격적인 일이다.

인연이 있을 수도 있겠다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깊은 인연일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저 말대로라면 풍운객잔은 무림맹주와 혈족으로 얽혀 있는 사이라는 게 아닌가.

‘풍운객잔은 역시 대단한 곳이었구나.’

‘하긴, 장 객주님이라면. 그리고 은자촌에 계신 분들 정도라면 무림맹주와 그 정도 인연은 만들고도 남지.’

두 사람이 깊은 상념에 빠지거나 말거나, 장기린은 구양화와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았다.

“오랜만이군. 처제가 이곳에 찾아온 지는 오래된 것 같은데.”

“저야 평소에는 하남이나 저 밑의 삼산현에서 언니만 만나고 가니까요.”

“그런가. 휘연은 지금 이곳에 없어.”

“알고 있어요. 오늘은 형부 만나러 온 거예요.”

“나를?”

장기린의 시선은 자연스레 백연에게로 넘어갔다.

구양화가 장기린에게 용무가 있을 리는 없다.

있더라도 평소에 종종 만나는 휘연을 통해 일을 처리하거나 그녀와 함께 찾아와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객잔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분명 무림 강호의 일일 터.

장기린은 우선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유했다.

“일단 앉지. 먼 길을 왔을 텐데.”

“삼산현이 생각보다 많이 발전해서 놀랐습니다.”

“안사람이 신경을 좀 쓰더군.”

“역시, 지나오면서 풍운이란 글자가 적힌 현판이 많다 싶었습니다.”

장기린은 직접 차를 가지고 오려 했으나, 그 전에 손님이 왔음을 눈치챈 강운찬이 한발 앞서 따뜻하게 데운 찻물과 다과를 올린 소반을 들고 왔다.

“어?”

운찬은 백연을 보고 깜짝 놀랐다.

“누군가 했더니. 옛날에 같이 야채 옮겼던 형님이잖아?”

“오랜만에 뵙소.”

“하하! 반가워요. 신수가 훤하시네! 수염이 길었는데도 그때의 얼굴이 그대로 있어!”

백연의 정체가 무림맹주라는 사실을 모르는 운찬에게는 그저 옛날에 풍운객잔에 찾아와 야채를 함께 날랐던 청년일 뿐이었다.

백연 역시도 운찬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흡!”

“헙!”

이태산과 태성천은 이제는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표정이다.

설마 했는데 강운찬까지 무림맹주와 알고 있는 사이였을 줄이야.

게다가 같이 야채를 옮겼다니.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란 말인가.

“백……, 백……, 그, 백씨였던 것 같은데…….”

“이십 년이 지났으니 잊을 만도 하오. 나는 백연이라고 하오.”

“강운찬입니다. 먼 길 오셨는데 따뜻한 차 한잔해요. 보이차(普洱茶)인데 입맛에는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흑차도 좋아하오. 부인께서도 좋아하고.”

백연이 따뜻한 시선을 보내자 구양화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하핫, 식사는 하셨어요?”

“사양하는 게 예의이긴 하겠으나, 항주에 아직도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는 최고의 숙수님을 뵙고 그 요리를 얻어먹지 못한다면……, 너무나 아쉬운 일 아니겠소?”

“하핫! 최고의 숙수라니. 무슨 그런 과찬의 말씀을.”

“과찬이라니. 아직도 항주에서 강 숙수의 이름이 유명하다 들었소.”

“세상에, 못 본 새에 성격이 많이 유들유들해지셨네. 뭐든 말만 해요. 반가운 손님인데. 다 해 드릴게.”

“항주제일소면은 여전히 팔고 있소?”

“그럼요. 항주에 살던 애송이 때보다는 지금 솜씨가 훨씬 나아졌죠. 형님. 제가 식재료 미리 준비하길 잘한 것 같아요. 이렇게 큰 손님이 오셨잖아요?”

장기린은 선선히 웃었다.

“그러게 말이다.”

“하핫, 저는 그럼 식사 준비 좀 하겠습니다. 이야기들 나누세요.”

운찬은 신이 나서 주방 안으로 돌아갔다.

퉁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대대적으로 요리를 한판 해 보려는 듯했다.

“막내들아! 뭐하냐! 손님도 왔는데 날 좀 도와줘야지!”

“아, 예.”

“예에.”

이태산과 태성천은 아쉬운 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면서 주방으로 끌려갔다.

갑자기 고요해진 객잔 안.

장기린은 백연의 말을 기다렸다.

구양화는 조용히 차만 마시고 있었고, 백연은 큼큼거리면서 몇 번 목을 가다듬었다.

그럼에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보다 못한 구양화가 먼저 나섰다.

“형부. 예전에 언니한테 들었는데, 제가 풍운객잔에 처음 왔을 때 그렸던 난을 아직 갖고 계세요?”

“난?”

장기린은 침실에 걸려 있는 손바닥 두 개만 한 족자를 떠올렸다.

항주 풍운객잔이 무너질 때 잔해 속에서 건져 낸 몇 안 되는 물품 중의 하나다.

“그때 객실값으로 치른 그림을 말하는 건가?”

“네! 그거요.”

“침실에 있는데, 보고 싶은가?”

“아아!”

구양화는 면사를 걷었다.

아직 삼십 대 초반의 나이.

활짝 핀 꽃처럼 물오른 미모가 화사하게 빛났다.

“진짜로 갖고 계셨구나!”

“휘연이 아끼더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값어치가 있다던데.”

“그거 잘 갖고 계세요. 나중에 꽤 귀한 물건이 될 테니까요.”

“오랜 추억의 물건이다. 당연히 잘 간직해야지.”

“형부라면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제가 나름대로 글씨랑 그림 쪽에서 인정을 받고 있거든요. 이번에 학림관의 경연에 참가했었는데 결과가 좋았어요.”

구양화는 배시시 웃더니 찰싹 소리가 나게 백연의 팔을 때렸다.

“그렇죠?”

“으음! 객주님, 제 안사람 자랑 같지만, 화매의 그림은 요즘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휘연도 그런 말을 했었지. 재능 있는 동생이라고.”

구양화는 뿌듯한 얼굴로 백연을 흘겨보았다.

“거봐요. 형부도 인정해 주시잖아요. 그때 나는 분명히 제값을 치른 거예요. 알았어요?”

“알았소, 알았어. 이십 년 전 그날 부인은 제값을 치렀소.”

“이 사람이 맨날 형부랑 언니가 그때 내 억지를 받아 준 거라고 놀리는 거 있죠?”

구양화는 서른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철이 없는 모습이었다.

이십 년 전, 순수하면서도 건방진 소녀였던 그때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소매치기를 당해 돈 한 푼 없던 소녀.

객잔에 낼 돈을 난을 쳐서 치르겠다던 당돌한 아이.

그 아이가 다 커서 이제는 무림맹주 백연의 부인이 되어 눈앞에 있었다.

“그렇군. 그때의 인연이 벌써 이십 년이나 되었어.”

장기린은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과거를 떠올렸다.

구양화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네. 이십 년이나 되었어요. 세월이 참 빠르네요.”

“그렇군.”

“형부, 사실 이이가 부탁이 있대요.”

‘어릴 때도 영리하더니.’

이십 년 전의 추억과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부탁 이야기로 넘어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헛웃음을 지으며 바라보자, 백연은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했다.

“객주님.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말해 보게.”

“무림맹주로서 치러야 할 중요한 회담이 있습니다. 상대는 적양문이라는 곳으로 북쪽 장가구 근처에 본파를 둔 사파의 거물입니다.”

“장가구……?”

북방 국경 인근이라면 장기린에게 있어서도 생소한 장소가 아니었다.

자연스레 관심이 가면서, 예전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 혹시?”

“적양문에 대해 들은 적이 있으십니까?”

“북로전쟁 때 전쟁터를 따라다니는 아이들이 있었지. 무기나 갑옷 같은 것들을 닦아 주고 대신 적당한 돈이나 먹을 것을 얻어먹는 아이들이었어.”

“그런 아이들이 있었군요.”

“잘은 모르지만 그 아이들이 결국엔 적양문이라는 곳으로 흘러간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마 맞을 겁니다. 적양문은 북쪽 국경에서 밀무역으로 성장한 곳이니까요. 국경지대의 난민들은 군문에 들어가거나 적양문에 입문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백연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다시 이야기했다.

“지금 적양문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강호 무림이 흑시군에게서 벗어나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려는 이 중요한 순간에 몸을 일으켰습니다. 속내가 보이는 행보지요.”

“그렇군.”

“적양문은 사파의 맹주로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중입니다. 모든 사파의 무인들이 주목하고 있고, 기회만 된다면 그곳에 합류해서 힘을 뽐내고 싶어 합니다. 이미 사파의 무인들을 흡수하면서 세가 점점 불어나서 이제는 팔파일방 중 두 개를 합친 것 같은 크기가 되었습니다.”

“익숙한 이야기군.”

한산했던 강호에 나타난 커다란 깃발.

그 아래로 모여드는 온갖 험악한 자들.

장기린과 백연은 과거에 일어났던 한 사건을 똑같이 떠올리고 있었다.

“예. 북천의 난. 북천맹과 행보가 비슷합니다. 이미 북경 인근의 무림 문파들과 진주언가가 당했습니다. 거기서 조금만 더 남하하면 소림이 되지요.”

“정파라 불리는 무림 문파들이 나서서 싸우면 되는 일 아닌가?”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백연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살받이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지요. 그렇다고 전 무림의 위기냐고 묻는다면 다들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적양문은 마교나 북천맹이 아니니까 말이지요. 그러니 먼저 나서려는 문파가 없습니다.”

“소림이나 무당도 그런가? 내 기억에 그들은 다른 무림 문파들과 달라 보였는데.”

“그 두 개의 문파는……. 부탁하면 나서 주겠지요. 하지만 그 상황까지 안 갔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분명히 전면전이 벌어질 것입니다.”

장기린은 백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온갖 인간 군상들이 모인 전쟁터.

장기린은 그곳에서 백연과 같은 장수를 본 적이 있었다.

적과 아군 모두의 목숨을 아끼던 덕장 중의 덕장.

필요 이상의 살육을 엄격히 금지하던 그는, 큰 규모의 전투 끝에 사로잡은 적군 포로들을 살려 두었고, 결국 그들이 탈출할 때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때론 과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철저하게 예봉을 꺾어야 할 때도 있지. 자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한번 생각은 해 보았으면 좋겠군.”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가능하면 피를 보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지금은. 무림 강호가 다시 태어나 재편되는 지금은 큰 분란이 없었으면 합니다.”

백연에게도 신념이 있었다.

장기린의 말은 이치에 맞는 조언이지만, 백연은 자신의 생각을 우직하게 밀고 나가고 싶은 듯했다.

“부탁은 회담인가?”

“예.”

장기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무림맹주와 사파의 떠오르는 신흥 맹주가 격의 없이 만날 수 있는 곳. 감히 싸우거나 피를 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중립을 지키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 저는 그런 장소를 온 천하 강산에서 풍운객잔. 이곳밖에 알지 못합니다.”

백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가지고 왔던 보따리를 풀어헤쳤다.

“그게 뭔가?”

“무림맹의 현판입니다.”

백연이 꺼내 든 것은 용사비등한 글씨체로 ‘무림맹’이라 적힌 현판이었다.

실제로 그동안 반쯤 은거나 다름없이 농사나 짓던 내내 정자에 걸려 있던 무림맹 현판이 이것이다.

“객주님께 맡기겠습니다.”

“뭐?”

“풍운객잔에 무엇을 선물로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돈, 명예, 보물, 그 어떤 것으로 객주님을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이미 모든 것을 비워 낸 분께 어떤 물건이 의미가 있을까요?”

백연은 고개를 저었다.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하지요. 그러니 저는 무림맹의 미래를 맡기고 신뢰를 얻고 싶습니다.”

“이 나무판자 하나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미가 있습니다. 그 현판을 돌려받기 전까지는 무림맹이 현판을 내걸고 활동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물건입니다.”

이렇게 대놓고 부담스러운 부탁이라니.

장기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안 본 사이에 성격이 재밌게 변했군.”

“객주님은 훨씬 더 강해지셨구요.”

“…….”

“이제는 검선의 아래가 아니시지요?”

백연은 확신을 담아 물었다.

일해검.

무당의 무공을 토대로 나날이 강해지던 백연이다.

장기린이 얼마나 지고한 경지에 올라 있는지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럴 리가.”

장기린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전에 봤을 때보다 강해진 것은 맞지만 검선 어르신과 비교할 수는 없지.”

“무림맹의 현판은, 그 현판이 있는 곳이 곧 무림맹이라는 뜻입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부터는 풍운객잔이 무림맹이나 다름없는 공간이며, 이곳을 건드리는 자는 무림맹의 전력을 다한 보복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지켜 주겠다고?”

“필요 없으신 것은 알지만 그래도 언젠가 쓸모 있는 날은 올 것입니다.”

“…….”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객주님. 적양문과의 회담 장소를 제공해 주십시오.”

양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인다.

백연은 최고의 예를 표한 채 허리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장기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받기는 했는데 이런 쓸모없는 나무판자를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겠군. 마구간에나 걸어야겠어.”

백연은 감동에 휩싸인 채 몸을 떨었다.

“그래도 마구간보다는 객잔 벽에 거시면 어떨지…….”

“불만인가? 돌려줄까?”

“아닙니다. 객주님 원하는 데 두셔야지요.”

옆에서 구양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릴 적에 내가 친 난이 낫네요. 그래도 그건 침실에 있잖아요?”

세 사람 사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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