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08화 (537/686)

17권 6화

제35장 절대중립(絶代中立) (6)

나찰마도(羅刹魔刀) 정옥상은 불혹의 나이를 넘어섰다.

그는 아장아장 걸음마를 뗄 때부터 북로전쟁의 난민으로서 밥을 빌어먹던 고아다.

아버지 이름도 모른다.

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던 그가 적양문의 대주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적양문과, 그를 믿고 절세 무공을 전수해 준 태양염왕 고흠 덕분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정옥상의 충성심은 유명했고, 늘 능력으로 그 충성심을 증명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거구는 아니지만, 듬직한 체형에 강골을 지닌 그는 언제나 적양문에서 온갖 험한 일을 몸소 맡아 처리하는 해결사였다.

감히 적양문의 일을 방해하는 자들.

적양문이 관리하는 상점에서 어깃장을 놓고, 어설프게 도당을 꾸려서 허락도 없이 밀무역을 하던 자들.

그들 모두가 정옥상이 휘두르는 구천지옥도(九天地獄刀)의 제물이 된 지 오래다.

적화검대와 그곳의 대주인 절영귀검 막하승이 오로지 사람만 척살하는 살수들이라면, 정옥상이 이끄는 청화도대는 전사(戰士)이자 해결사였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고, 사람들을 겁주는 법을 안다는 뜻이다.

어려운 일을 하나둘씩 처리하다 보니, 이젠 장가구 인근에선 나찰마도가 나섰다는 소문이 들리면 해결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는 적양문에서 신뢰받는 해결사였고, 그렇기에 태양염왕은 이번에도 정옥상을 보낸 것이다.

“무림맹 놈들. 대체 어떤 잔수를 쓰려고 화전촌 객잔 따위를 회담 장소로 정했는지. 이 몸이 낱낱이 파헤쳐 주마.”

정옥상은 의욕이 만만했다.

평생을 몸담은 적양문이 사파 제일문이 되려는 순간이다.

그 중요한 시점에 무림맹이 회담 장소랍시고 지정한 곳이 이름 모를 화전촌의 객잔이라는 사실에 정옥상은 크게 분개한 상태였다.

“삼산현은 대체 어디 붙어 있는 촌구석이냐? 너희들 들어 본 적이 있냐?”

“없습니다.”

청화도대의 무인들은 고개를 저었다.

하남에 사는 사람이라도 알까 말까 한 곳을 장가구 인근 출신들이 대부분인 적양문 사람이 알 리가 없었다.

“흥, 보나 마나 표국도 제대로 없는 깡촌이겠지. 일을 끝내고 문주님께 전언을 날려야 하는데 큰일이군.”

물어물어 찾아가다 보니 시간이 더 걸렸다.

마침내 삼산현에 도착했을 때, 정옥상과 청화도대의 대원들 다섯 명은 생각과 다른 마을의 모습에 너무 놀라 잠시 말을 잃어버렸다.

“대주님, 깡촌이 아닙니다.”

“표국이 세 개나 있는데요……? 저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장사가 되나?”

“천하전장도 있잖아?”

“금룡표국도 있어. 저건 장가구에도 없었는데. 성내의 도읍 정도 되는 곳에만 있는 거 아니었나?”

“풍운전장, 풍운표국, 풍운상회……, 풍운이 왜 이렇게 많아?”

삼산현은 그들이 생각했던 허허벌판의 농촌이 아니었다.

지난 몇 년간 급격히 발전해서 물류와 상인들이 오가는 큰 마을로 거듭나고 있었다.

보따리를 짊어진 상인들과, 온간 물건들을 마차에 가득 실은 표행이 쉴새 없이 드나들며 움직이고 있었다.

마을 곳곳에 노점을 펼치고 음식을 파는 사람들이 즐비했고, 그들은 모두 물건을 파느라 정신이 없어서 생기가 넘쳤다.

정옥상은 잠시 굳어 있다가 자신의 허벅지를 탁 치면서 감탄했다.

“그럼 그렇지! 무림맹 놈들. 미치지 않고서야 깡촌을 회담 장소로 할 리가 없지! 으하핫!”

정옥상은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다.

무림맹이 적양문을 무시한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만하면 장가구보다 훨씬 낫군. 저것 봐라, 동네 가게에 온통 풍운이란 이름이 붙어 있지 않느냐?”

“예. 분명히 그래 보입니다.”

“보아하니 풍운상회가 이곳에 본거지를 차린 모양이군. 아마 풍운객잔은 이 마을에서 가장 큰 객잔일 것이다.”

“그럴 것 같습니다. 대주님.”

“흐흐, 바로 가 보자.”

“예!”

정옥상과 청화도대 무인들의 표정이 다시 굳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삼산현에서 제일 번화한 거리를 몇 번이나 돌았는데, 아무리 봐도 풍운객잔이라는 곳은 보이질 않았다.

희한한 일이었다.

혹시 간판이 없는 곳인가 생각해 보았지만, 대체 간판이 없는 객잔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결국 풍운객잔과 이름이 비슷한 풍운상회에 들어갔다 나온 청화도대 대원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대주님, 풍운객잔은 이곳에 없답니다. 저 뒤에 보이는 세 개의 산봉우리 쪽으로 산길을 올라가다 보면 화전촌이 나오는데, 그곳에 있다는데요.”

대원이 가리킨 방향을 보자, 과연 각각 하얗고 검은 세 개의 봉우리가 구름 위로 솟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옥상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으득―.

이가 갈렸다.

급격히 좋아졌던 기분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나빠졌다.

청화도대 대원들의 안색도 덩달아 딱딱하게 굳었다.

“가 보자. 그래. 죽이든 살리든, 일단 직접 봐야지.”

파라락―.

정옥상은 신법까지 쓰면서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그는 급하게 따라붙는 청화도대 대원들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흠?”

휘리리릭―.

상당히 가파른 산길을 오르길 잠시. 정옥상은 아름드리 거목의 가지를 밟고 펄쩍 뛰어올라 허공에서 회색 비둘기 한 마리를 잡아서 내려왔다.

한 마리의 맹금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는 비둘기의 발목에 붙어 있는 손가락 하나 만한 대나무 통을 열었다.

“이것들 봐라?”

정옥상은 사파의 온갖 흉계에 잔뼈가 굵다.

그들이 올라가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저 위의 산으로 향하는 전서구가 우연일 리가 없었다.

“암호입니다. 하오문 쪽 같은데 해석은 힘들 것 같습니다.”

암흑가 뒷골목 쪽 경험이 있는 무인이 전서구의 내용을 펼쳐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용이야 뻔하지. 우리가 객잔을 찾다가 올라갔다는 거겠지.”

“저도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속도를 높인다.”

정옥상은 푸드덕거리는 비둘기의 목을 꺾어 버린 뒤 아무렇게나 옆에 집어 던졌다.

산행을 다시 시작한 지 일각.

정옥상와 청화도대 무인 다섯 사람은 세 개의 산봉우리가 모이는 기묘한 분지에 만들어진 화전촌을 발견했다.

그리 크지 않은 땅에 논과 밭이 있고,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이다.

그야말로 농촌.

살고 있는 가구 수를 다 합해 봐야 열 개나 될까 말까 한 시골 마을이다.

정옥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풍운객잔이 있다던 화전촌의 모습은 정옥상이 처음에 서신을 받고 상상했던 딱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무림맹 놈들이 미쳤구나. 정말로 화전촌으로 회담 장소를 정한 거였어.”

절로 이가 갈리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정옥산은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시선으로 은자촌의 입구에 있는 객잔을 노려보았다.

설마 저곳이 아닐 거라고 자위할 필요는 없었다.

객잔의 입구엔 용사비등한 필체로 ‘풍운객잔’이라는 이름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

“대주님. 그래도 객잔은 깔끔해 보입니다.”

“객잔만 봐선 시골 같지가 않습니다. 삼산현에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화전촌에 있잖아!”

정옥상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한마디씩 보태던 대원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산천초목을 떨쳐 울리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워어어――.

“응?”

“소가 있나? 보이지는 않은데?”

“목소리가 우렁차군. 소가 이렇게 크게 우는 건 처음 듣는데.”

건장한 수소의 울음소리가 들린 후, 반대쪽 산봉우리 방향에서 이번엔 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쿠워어엉――.

“흠!”

이번엔 조금 위협적이다.

사파의 맹주인 적양문의 무인들이 미물 따위에게 당하겠냐만, 그래도 맹수가 있다면 긴장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었다.

그들은 곧바로 등 뒤에 차고 있는 대도의 손잡이에 자연스레 손을 가져갔다.

무워어!

쿠워어어어!

강맹한 울음소리를 서로 주고받길 잠시, 마을 너머 멀리 떨어져 있는 울창한 산림에서 나무들이 흔들렸다.

각각 산봉우리의 좌우 양쪽에서 무언가가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나무가 움직이는 것만 봐선 마치 용 두 마리가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모양새다.

꽈앙!

무워어!

쿠워어어!

소와 곰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시끄러운 굉음이 멀리서 들려왔다.

“고, 곰이 소를 사냥하나?”

상식적으로 누구나 그리 생각할 테지만, 어째선지 소의 울음소리는 계속 기세등등했다.

반면에 땅이 울리는 굉음이 들릴 때마다. 곰의 울음소리는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길 반복했다.

쿵쿵.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린다.

그때 멀찍이 보이는 시골집에서 백발의 노인 한 명이 지팡이를 짚고 나와 빽 하니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들아! 낮잠 좀 자자! 시끄러워 죽겠어! 고만 안 싸울래!”

노인이 지팡이에 달린 방울을 몇 번 흔들자, 갑자기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노인은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에잉,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 서인이가 없으니 힘이 남아도는구나, 남아돌아! 대석이한테 또 놀아달라고 부탁해야 하나.”

노인은 정옥상 일행을 힐끔 쳐다봤으나, 관심도 두지 않고 다시 집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어…….”

“으음…….”

황량한 바람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짐승들의 울음소리는 그쳤다.

나무도 땅도 더 이상은 흔들리지 않는다.

기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놀라움. 당황스러움.

그리고 왠지 모를 불안감.

“……역시 촌구석은 이래서 안 돼.”

정옥상이 선택한 것은 분노였다.

“짐승 새끼들 관리도 안 되는 이런 곳에서 무림맹주랑 우리 태양염왕님이 만난다고? 개가 웃을 일이지. 개가 웃을 일이야!”

정옥상은 다시 분노를 끌어 올린 뒤 성큼성큼 나아갔다.

커다란 대죽을 반으로 잘라 깨끗하게 벽면을 만든 건물이었다.

정옥상은 풍운객잔의 주렴을 젖히며 당당하게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먼지 한 톨 없이 잘 관리된 탁자와 의자들이 보였다.

열 자리 정도는 나올까.

생각보다 깨끗하고 제대로 된 모습이었지만, 역시나 사파 제일문 태양염왕이 잠시라도 앉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정옥상은 눈을 부릅뜬 채 허리에 손을 얹었다.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허리에 척 하니 손을 얹고 뱃심을 가득 담아 외쳤다.

“주인장 나오라 그래!”

안쪽에서 숙주나물을 다듬고 있던 덩치가 큰 청년과 얼굴이 갸름한 청년이 놀란 토끼 눈으로 정옥상을 바라봤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정옥상을 보고 있었다.

덩치 큰 청년이 숙주의 꼬리를 툭툭 끊어내다가 탁자에 떨어뜨렸다.

얼굴이 갸름한 청년은 옆에 있던 찻물을 쏟기까지 했다.

‘이놈들, 놀랐군.’

정옥상은 그런 시선에 익숙했다.

처음엔 저럴 것이다.

폭력과 위압에 익숙한 인간들이면 이야기가 좀 더 쉽겠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다.

그가 어떤 곳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알려 주고, 구천지옥도의 강력함을 보여 주면 저절로 허리를 굽히고 기어 다니게 되어 있다.

“안 나오냐? 주인장 나오라고 하라고!”

정옥상이 옆에 있는 탁자를 발끝으로 툭 차자 의자 두 개와 같이 옆으로 와장창 넘어졌다.

“으음.”

두 청년이 서로를 보면서 눈빛을 교환하더니 그제야 숙주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한테 한 말이오?”

“여기에 너희 말고 또 있냐? 너네 여기 객잔 일꾼 아냐?”

“그건……, 그렇소.”

정옥상의 눈이 가늘어졌다.

막상 일어선 모습을 보니 두 청년의 모습이 범상치가 않다.

걷는 모습.

숨 쉬는 박자.

온몸이 잘 단련되어 있는 게 눈에 띈다.

‘이것들, 무인인가? 무림맹? 아니면 팔파일방?’

정옥상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너희 뭐냐?”

두 청년.

이태산과 태성천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객잔의 막내를 뭐라고 하지……?”

“점소이 아니야?”

“그렇군. 점소이로군.”

태성천은 담담하게 말했다.

“우린 점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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