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09화 (538/686)

17권 7화

제35장 절대중립(絶代中立) (7)

“점소이?”

정옥상은 코웃음 쳤다.

“헛소리하고 있네. 세상에 무공을 익힌 점소이가 어디 있나?”

“없을 건 또 뭐요? 먹고 살려면 일해야지.”

이태산은 담담하게 되물었다.

“무공을 익힌 놈이 먹고살기 위해 점소이 짓을 한다고?”

“세상에 땀 흘려 일하는 일에는 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오.”

“하! 점소이가?”

“그렇소. 칼 든 백정보단 나아 보이는데.”

무릎이 부서지면서 한 번 좌절을 맛보고, 은자촌에서 치료를 받은 이태산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정옥상은 당연히 수긍하지 않았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너흰 어디서 왔나? 무림맹이냐?”

“우린 소속이 없소.”

태성천이 이태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우리 소속은 여기다. 곰탱아.”

“아! 우리 소속은 풍운객잔이오.”

정옥상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주 둘이서 경극을 찍는구나. 좋다. 너희가 점소이라고 치자. 그럼 어서 손님을 대접하지 않고 뭐 하는 거냐?”

“당신들이 손님이오?”

이태산은 위풍당당한 정옥상과 그 뒤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는 무인들을 쭉 둘러보았다.

“내 눈엔 자릿세 받으러 온 파락호 같은데?”

“미친놈. 그래도 배짱 하난 마음에 드는구나.”

“넘어뜨린 탁자를 정리하면 차를 내어 드리겠소.”

“탁자를 정리하라고?”

정옥상은 발끝으로 멀쩡히 서 있는 다른 탁자를 한 번 더 툭 쳤다.

와장창― 넘어진 탁자가 의자 몇 개와 함께 옆으로 굴렀다.

이태산의 미간에 주름이 늘어났다.

“충고 하나 하겠소. 그 이상 우리 객잔의 집기를 건드리지 마시오.”

“웃기고 있네.”

정옥상은 보란 듯이 옆의 탁자를 하나 더 걷어찼다.

이번엔 아까보다 세게 걷어차서 탁자의 다리가 뚝― 하고 부러졌다.

“당장 주인장 불러와라. 이 몸께서 이 하찮은 객잔의 주인 놈이랑 할 말이 있으시다.”

“주인 ‘놈?’”

“하찮은 객잔?”

이태산과 태성천은 눈빛이 서늘해졌다.

“왜? 불만이냐?”

정옥상은 팔짱을 낀 채 씩 웃었다.

행동이야 어쨌든 그는 적양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다.

터져 나오는 기세.

일렁거리는 무형기가 객잔 내부를 꽉 채웠다.

이태산과 태성천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자세를 살짝 낮추면서 전의를 불태웠다.

“이곳의 주인이 누군지 아시오?”

“이딴 객잔 주인이 누군지 내가 알게 뭐냐?”

“그 말을 나중에도 할 수 있길 바라오.”

“객잔 주인이 무림맹주라도 안 놀란다. 입만 나불거리지 말고 당장 주인 데려오라니까!”

그때 밖에서 객잔을 한 바퀴 돌며 정찰한 무인이 정옥상에게로 다가왔다.

“대주님, 밖에 이상한 게 있습니다.”

“뭐? 지금 중요한 대화 나누는 거 안 보이냐?”

“마구간에 이상한 현판이 붙어있는데……. 이건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현판?”

정옥상은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다들 얼굴 보고 산 지 십 년은 넘은 사이인 만큼 그의 부하들은 별거 아닌 일로 그에게 보고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기다리고 있어라. 금방 돌아온다.”

“허?”

자신들을 무시하고 떠나는 것에 대해서 이태산과 태성천은 분개했지만 상대방의 등 뒤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허어?”

풍운객잔의 마구간은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우측 구석에 만들어져 있었다.

향냄새가 났다.

만든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이는 작은 제단이 하나 마련되어 있는데, 그 앞에 위패들이 열 개 정도 세워져 있었다. 개중에 이름이 적힌 위패가 단 하나도 없다는 점이 특이했다.

마구간은 향이 타오르는 제단의 바로 옆에 붙어있었다.

므워어―.

안에서 가만히 서 있던 새하얀 소 한 마리가 풀을 으적으적 씹는 와중에 정옥상과 눈이 마주쳤다.

“마구간에 왜 소가 있어?”

“예, 그것도 좀 특이하긴 한데, 중요한 건 저 위입니다.”

정옥상은 부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지붕 아래에 대충 받침대를 받치고 얹어 놓은 현판이 하나 있다.

정옥상은 그 현판을 보자마자 입이 딱 벌어졌다.

“무림맹? 무림맹이라고?”

질 좋은 오동나무에 용사비등한 글씨체로 적혀 있는 무림맹이라는 글자에선 보이지 않는 현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진짜야, 이거?”

“진짜 같지 않습니까?”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비싼 목재인 데다, 현판의 양 끝에는 각각 두 마리의 용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게 왜 마구간에 있어?”

“그러니까 말입니다. 대주님,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기가 무림맹이랑 연관이 있는 곳일까요?”

“연관이야 있겠지.”

정옥상은 혼란에 빠진 채 되물었다.

“그런데 왜 마구간에 있냐고?”

“으음.”

“무림맹과 연관이 있으면 현판을 자랑스럽게 걸어 놔야 하는 거 아냐?”

“그건 그렇습니다.”

“그럼 이건 무림맹을 놀리는 거지.”

“예, 그렇긴 하네요.”

현판은 그 집단의 상징이었다.

그런 물건을 마구간에 걸어 놓는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는 처사다.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우리한테 무림맹은 마구간이나 다름없다. 뭐 그런 건가?”

다섯 명의 청화도대 무인들이 서로를 보며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진짜 무림맹 현판이면 객잔 현판 위에 걸어 둬야지.”

“무림맹이 인정한 삼산현 최고 맛집! 이런 거?”

“그렇지. 아니면 객잔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곳에 떡 하니 걸어 놓던가. 우린 무림맹과 이런 사이라고.”

“그래. 그거 좋네.”

수군거리는 말에 틀린 말 하나 없었다.

“대체 뭐야, 이것들은?”

정옥상은 혼란에 빠졌다.

부하들과 이야기를 나눠 봐도 납득이 되질 않았다.

“이것들 혹시 마교인가?”

“에이, 설마요.”

평소에 공손했던 부하가 손사래를 칠 만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럼 동업자야? 사파인가?”

“으음.”

“현판을 마구간에 걸 정도면 무림맹이랑 철천지원수 아니냐?”

“그건 그런 것 같습니다만.”

어째 답이 바로 안 나오고 떨떠름했다.

“혹시 저희가 온다고 해서 황급히 숨긴 거 아닐까요?”

“숨긴 거라고?”

“예. 자세히 보면 받침대 만들어서 걸어 놓은 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 저희가 온다고 하니 차마 현판을 버릴 수는 없고, 눈에 안 띄게 숨겨 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럴듯하네.”

정옥상은 그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단 저 현판 좀 내려 봐. 진짜든 가짜든, 마음에 안 드니 부러뜨려야겠다.”

“예.”

정옥상의 명을 받은 무인이 비조처럼 뛰쳐 오르려던 그 순간이었다.

쒜에에엑―!

“……!”

섬전처럼 날아든 단도가 마구간 기둥에 쩍! 하고 틀어박혔다.

므워어어―.

깜짝 놀란 하얀 소가 울음을 터뜨린다.

뛰어오르려던 무인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가 반 박자만 빨랐어도 저 단도는 그의 목에 박혀 있었을 것이다.

“경고는 한 번뿐이오.”

단도를 던진 것은 이태산이었다.

그는 통나무를 깎아 만든 것 같은 커다란 목봉을 쥐고 있었는데, 위아래 타격부가 어찌나 두꺼운지 마치 절굿공이 같았다.

“다음은 목을 노리겠소.”

“미친놈.”

정옥상은 체면 때문에 손쓰길 망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곧바로 칼을 뽑아 이태산을 향해 내리쳤다.

후우우웅―!

칼을 휘두르는데 마치 철퇴를 휘두르는 것처럼 육중한 소리가 났다.

구천지옥도법(九天地獄刀法).

제일식 양천지로(陽天指路)다.

우측 하단으로 내리치는 듯했던 대도가 튕기듯이 좌측으로 치솟아 올랐다.

터엉!

이태산은 절굿공이 같은 목봉으로 검면을 때리며 뒤로 일 보 물러섰다.

정옥상은 검면을 비스듬하게 기울이더니, 제이식 변천망월(變天望月)로 이어지는 공격을 연이어 내리쳤다.

터엉! 쩡! 푸확!

구천 중 변천은 동북방의 변화무쌍한 바람이니.

얼핏 단순해 보이는 투로지만 그 안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변화가 담겨 있어, 이태산은 방어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연이어 세 걸음을 물러서며 급하게 방어에 집중했다.

반면에 정옥상은 일격을 내리칠 때마다 한 마디씩 말할 만큼 여유로웠다.

“몸도, 성치가, 않구나.”

이태산은 가슴을 비스듬히 갈라 오는 도격을 한 번은 옆으로 쳐 내고, 한 번은 힘을 실어 막았으며, 한 번은 피해서 애꿎은 땅바닥이 쩍! 하니 갈라졌다.

그때 옆에서 정옥상의 목덜미를 노려오는 검이 있었다.

정옥상은 몸을 반 회전하여, 새로운 습격자의 검을 강하게 내리쳤다.

쩌엉!

“병신들이 까불고 있군. 둘이면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이태산과 태성천이 어딘가 움직임이 어색하다는 걸 대번에 알아차린 정옥상이다.

태성천은 심지어 좌수검을 사용하고 있었다.

정옥상은 태성천의 검을 내려치자마자 곧바로 그의 목을 노렸다.

쩌엉!

태성천의 목을 베기 직전, 이태산의 목봉이 그 사이를 파고든다.

태성천은 이태산이 막아 줄 줄 미리 알았다는 듯 자연스레 정옥상의 하반신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것들이?”

쩌저저정!

정옥상이 폭풍처럼 휘두른 도법을 이태산과 태성천이 완벽에 가까운 연수합격으로 막아 냈다.

두 사람의 고군분투는 마치 밀려드는 물살을 두 사람이 바가지로 퍼 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밀리고, 차오르고, 떠밀렸다.

일 초 반 합이 순식간에 삼십 초의 공방으로 이어졌다.

터엉!

정옥상은 진각을 밟으며 두 사람을 떨쳐낸 후 공격을 멈췄다.

“후우우―.”

“허억, 허억.”

이태산과 태성천, 두 사람은 숨을 헐떡이긴 했지만 아직까지 상처는 없었다.

“이것들 봐라?”

말은 비웃듯이 하고 있으나, 위기의식을 느낀 정옥상이다.

앞으로 오십 초식 내에 정옥상은 두 사람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봐야 무엇 하는가.

나이와 명성, 그리고 배분 차이로 볼 때, 그는 까마득한 후배 두 명의 연수합격에 무공을 백 초식 가까이 써야 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태산과 태성천은 분명 자신들을 객잔의 ‘막내’라고 표현했다.

만약 객잔의 서열이 무력 순이라면?

고작 점소이 두 사람이 강호에 이름 높은 나찰마도를 막아 세울 수 있다는 말이니 그 윗사람은 대체 어떤 자들이란 말인가?

“네놈이 쓰는 봉술은 소림의 금강장(金剛杖)이고, 저놈이 쓰는 검술은 점창의 사일검이구나. 팔파일방의 제자냐?”

두 사람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팔파일방의 제자가 아니라면 무산학관이란 소리군. 그럼 관부가 개입한 건가?”

정옥상의 지적은 날카로웠으나 그 또한 틀린 말이다.

이태산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풍운객잔의 사람이오.”

“그런가. 나는 적양문의 정옥상이다.”

이태산과 태성천의 눈이 번쩍 빛났다.

“나찰마도!”

“사파제일도!”

사파제일도법, 구천지옥도의 고수가 바로 정옥상이다.

천하에 도를 쓰는 무인을 일렬로 줄 세우면 그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절대 고수 중 한 사람인 것이다.

정옥상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떠올랐다.

“오냐. 그게 나다.”

정사마를 떠나서 선배가 먼저 이름을 밝히고 인사를 했으니, 이제는 그들이 인사를 할 차례다.

이태산과 태성천이 망설이다가 포권을 취하려는 찰나, 정옥상이 손을 들어 올렸다.

“통성명은 필요 없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마. 주인장을 불러라. 그렇지 않으면 다음엔 너희를……, 죽이지는 않겠다만. 팔다리가 성치는 못할 것이다.”

이태산과 태성천은 전의를 가라앉히지 않았다.

정옥상의 정체를 알고, 경고를 들었음에도 끝까지 버텨 내겠다는 듯 무기를 더 세게 거머쥘 뿐이다.

“이놈들이 결국 벌주를…….”

정옥상이 분기를 터뜨리려는 그 순간이었다.

므워어어어어―――!

천지를 진동시키는 소의 울음소리가 벼락처럼 터져 나왔다.

두두두두―.

일만 명이 진군하는 듯한 진동과 함께 붉은색 형체가 마구간을 향해 달려온다.

“피, 피해.”

“괴물이다!”

과장을 좀 보태서 집채만 한 붉은색 황소가 달려드는 모습은 그야말로 천재지변을 연상시켰다.

우지끈!

콰직!

마구간의 뒤쪽 기둥 하나가 뿌리째 뽑혀 날아갔다.

깜짝 놀란 청화도대 무인들이 몸을 피하려 했으나, 엄청난 속도로 다가온 소는 무인들 중 한 명을 뿔로 받아 버렸다.

“크악!”

피를 뿜으며 날아간 무인이 바닥에 몸을 세 번이나 튕기며 굴렀다.

쿠웅!

커다란 소가 발을 구르자 땅이 흔들리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므워어어―!

소가 자신의 힘을 뽐내듯 울부짖었다.

뜨거운 콧김이 마치 용광로에서 나오는 공기처럼 뜨겁다.

“이건 또 뭐야?”

정옥상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괴물인가 영물인가.

새빨간 소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 소의 등에 타고 있는 백창의를 입은 중년의 사내다.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면 좋든 싫든 상대의 능력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정옥상이 보기에, 소를 타고 나타난 사내는 범상치가 않다.

새카만 우물 속을 막연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무공의 깊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객주님!”

이태산과 태성천이 기쁨과 당황이 반반 섞인 얼굴로 인사한다.

정옥상의 눈이 번뜩였다.

이자였다.

이자가 이 범상치 않은 객잔의 주인이었다.

“손님인가?”

장기린은 오연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태산과 태성천의 후줄근한 모습을 거쳐, 마지막으로 칼을 빼 들고 있는 정옥상을 바라보았다.

“진상 손님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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