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권 8화
제35장 절대중립(絶代中立) (8)
천천히 적왕의 등에서 내려오는 장기린을 보는 정옥상의 이마 위로 한줄기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진상은 무슨…….”
적아를 구분하기 이전에 이미 내 부하는 소로 쳐 버리지 않았냐고.
저기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몰골이 안 보이냐고 소리쳐야 하겠으나. 그는 단 한 마디도 불평을 토해 낼 수 없었다.
쿵!
므워어――.
괴물 같은 소.
적왕은 그 와중에 뽐내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마구간에 있는 흰 소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정옥상은 그 꼴을 보니 속에서 천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원래 옆에서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하지 않던가.
누군 지금 피가 마르는데, 부하를 뿔로 쳐 버린 저놈은 암소한테 껄떡거리고 있다니.
지금 당장 칼로 내리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백창의를 입고, 그 무력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대자 한 사람 때문이다.
“큭.”
정옥상은 이미 손에 익을 대로 익어 손잡이가 착 달라붙는 자신의 대도를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괜히 지기 싫은 마음에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듯이 나왔다.
“당신이 풍운객잔의 주인인가?”
“그렇소.”
장기린은 그저 모습을 드러냈을 뿐인데도 마치 왕처럼 사방의 분위기를 지배했다.
“우리 객잔에서 일하는 젊은 친구 두 사람이 먼지투성이로군. 불쾌한데.”
심유한 눈빛이 정옥상을 지그시 바라보는 순간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단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심혼이 격타당한 것처럼 온몸이 떨렸다.
‘이 느낌. 어디선가 느꼈었는데……?’
기억을 떠올리기엔 너무나 오래전 이야기였다.
정옥상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이태산이 지금까지의 일을 보고했다.
“객주님, 이들은 적양문의 사람들로 특히 지금 칼을 빼고 있는 저자는 강호에서 나찰마도라 불리는 무인입니다. 사파에서 제일 칼을 잘 쓰는 사람이란 칭호로 사파제일도라고도 불립니다.”
장기린은 사파제일도든 나찰마도든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 하찮은 객잔의 주인 놈 좀 나와 보라고 성화를 부렸습니다.”
“흠.”
이태산은 팔짱을 척 하니 낀 채 어디 한번 변명해 보라는 듯한 자세로 정옥상을 노려보았다.
옆에서 태성천이 그런 이태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객잔의 탁자랑 의자들을 발로 걷어차고, 마구간에 있는 현판을 부수려 했다는 건 왜 빼냐?”
“아차.”
이태산은 담담하게 첨언했다.
“저자가 그랬습니다.”
“진상 손님이 맞았군.”
정옥상은 자신의 뒤편에서 혼란에 빠져 있는 부하들을 힐끗 쳐다본 뒤 마음을 다졌다.
“그래! 내가 그랬다!”
정옥상은 그가 가진 모든 힘을 끌어 올렸다.
대도의 한 뼘짜리 칼날 위로 선명한 강기가 분수처럼 치솟는데, 그 기세가 하늘을 뚫을 지경이었다.
구천지옥도법의 기수식.
일렁이는 무형기가 폭발하듯 하늘로 치솟았다.
“적양문 청화도대 대주로서 묻는다. 무림맹이 왜 이곳을 회담 장소로 정한 것이냐! 이런 흉흉한 곳에 너 같은 고수가 숨어 있다니. 무림맹은 대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이지!”
고오오오――.
도강의 첨예한 극단이 장기린의 목을 겨누었다.
선명한 살기.
대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장기린을 노려왔다.
“그런가. 그게 목적이었군.”
장기린은 팔을 뻗어 마구간의 지붕에서 대나무를 하나 뽑아냈다.
한 손으로 착 감기듯 잡을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소죽이었다.
장기린이 손날로 툭툭 건드리니 소죽의 날카로운 끝단이 평평하게 잘려 나갔다.
그는 뭉툭한 창끝으로 정옥상을 겨누었다.
“일단 좀 맞자.”
쒜에에엑―!
공간을 격하고 찔러 온 죽창이 정옥상의 도강을 깨부수고 미간 한가운데로 쏘아졌다.
***
전쟁은 가혹하다.
사람의 목숨과 욕망만을 삼킬 뿐만 아니라, 인근의 모든 농토와 삶의 터전까지 못 쓰도록 망가뜨려 버린다.
정옥상이 장가구 북부를 이리저리 떠도는 꼬마 유민이 된 것은 그 지역에선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굶주림에 지치면 사람은 자식들을 동전 한 푼에도 쉽게 버리는 법이다.
부모는 물론이고 자신의 이름도 모른 채 젖동냥을 받아 자라난 아이들이 주변에는 한둘이 아니었다.
험난한 지역에서 혈혈단신 고아로 태어난 아이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단순했다.
뭐든지 하는 것.
풀을 뜯어 먹고, 늑대가 먹다 남긴 찌꺼기를 먹고, 양치기가 기르는 양을 훔쳐먹다가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는 것은 예사다.
전쟁터를 쫓아다니면서 시체를 뒤져 물건을 주워다 파는 일은 위험하지만 돈벌이가 컸고, 가장 안정적인 것은 병사들을 졸졸 쫓아다니면서 배급을 얻어먹는 것이다.
전쟁터 병사들이 잘 먹어 봤자 얼마나 잘 먹겠냐마는, 그래도 주변에서 그나마 쌀밥을 구경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병영이 유일했다.
병사들을 쫓아다니던 열 살 언저리의 정옥상은 그 날 운이 좋았다.
방금 막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기마부대의 뒤처리를 맡는 몇 명에 뽑힌 것이다.
정옥상은 신이 났는데, 그래도 오며 가며 몇 번 안면이 있는 명군의 노병(老兵)이 충고를 해 주었다.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멀쩡한 놈이 몇이나 되겠냐만. 그래도 저놈들한테는 함부로 다가가지 마라. 귀신 옮는다.”
정옥상은 그 말이 섬뜩하긴 하지만 우습다고 생각했다.
귀신은 무섭다.
하지만 굶주림은 사람을 죽인다.
병영의 병사들 중에서도 특히 기마부대쯤 되면 깨끗이 닦고 다듬어야 할 장비는 워낙 많았다.
말 등에 얹은 등자와 고삐부터 시작해서, 칼, 도끼, 창은 물론이고 활, 화살, 허리에 찬 소도들까지.
거기에 부잣집 출신이 많은 기마병은 갑옷부터 때깔이 다르다.
팔꿈치나 무릎에 차는 비구나 신발까지 닦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해 뜰 때부터 시작해 해 질 때까지 계속 닦기만 해도 시간이 모자랐다.
그런데 정옥상은 막상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긴장해서 얼어 버렸다.
눈앞으로 다가온 기마병들은 그가 지금까지 봐온 보통의 병사들과는 달랐다.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마군들이 있다면 딱 이런 모습일 것이다.
온통 새카만 갑주를 입었는데, 용머리를 닮은 투구와 뾰족하게 뿔이 돋아난 어깨 갑주를 보면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심지어 말까지 갑옷을 입혀 놓았다. 덩치가 큰 명마들이 용광로처럼 뜨거운 콧김을 쉴 새 없이 불어 대는데, 콧김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기절할 것처럼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런 자들이 수백이다.
게다가 코를 찌르는 피 냄새.
대체 피를 얼마나 뒤집어쓴 건지, 그들은 움직일 때마다 온몸에서 말라붙은 핏가루를 흙먼지처럼 뿜어댔다.
“유민이군. 받아라, 꼬마.”
공손 뭐시기라고 불린 마군들의 대장은 통이 컸다.
보통 피를 닦아 주는 일을 끝내면 몇 푼의 동전과 배급받은 주먹밥을 주는 것이 전쟁터의 불문율이었는데, 그는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주먹밥과 동전 열 개를 던져 주었다.
일을 잘하면 한 번 더 주겠다는 말까지 하면서.
심지어 주먹밥에는 육포도 같이 있었다.
정옥상은 평생 얻기 힘든 호사라고 생각하며 육포를 품 안에 얼른 쑤셔 넣어서 숨겨넣었다.
“아…….”
바로 그때, 정옥상은 ‘그’를 보았다.
다각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주변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피범벅이 된 마군들 중에서도 한층 더 짙은 피 냄새를 풍기는 단 한 명.
신화 속에 나올 것 같은 거대한 흑마 위에 올라탄 채 오연히 정면만을 바라보는 젊은 청년이 있다.
그가 기마대의 투구를 벗었을 때 정옥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열 살인 그와 별로 나이 차이도 안 날 것처럼 그는 어려 보였다.
수염도 나지 않은 얼굴.
앳된 기색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니 아직 약관의 나이도 안 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살벌하고 사나운 기마병들이 그 청년이 두려운 듯 일제히 몸을 움직여 청년의 앞길을 비켜 주었다.
힐끔거리는 시선이 단 한 명에게 집중되었다.
그 모습은 그저 막연히 살아남고 싶다고만 생각하던 꼬마 고아, 정옥상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또래의 청년이 이미 저런 살인귀들 속에서 경외를 받고 있다니.
그가 탄 말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비스듬히 눕힌 창끝에서 뚝뚝 떨어진 피가 바닥에 길게 선을 그렸다.
감히 눈을 마주칠 수도 없었다.
청년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정옥상은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은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존재만으로도 압도당한다는 게 이런 것이다.
숨 쉬듯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자.
막강한 힘과 철혈의 의지로 모든 이들에게 공포를 흩뿌리는 죽음의 무신(武神).
그 청년과의 만남은 정옥상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정옥상은 잊지 않았다.
그의 이름.
훗날 시간이 흘러 북방초원의 유목민들과 국경을 지키던 모든 군문의 병사들이 경외하며 외치던 그의 별명.
그는 바로.
***
“헉.”
헛숨을 삼키며 벌떡 상체를 일으킨 정옥상은 자신이 대나무에 얻어맞고 정신을 잃었음을 깨달았다.
이마가 저릿저릿했다.
손으로 만져 보니 이미 퉁퉁 부어서 불룩한 혹이 되어 있었다.
살짝 시선을 돌리니 어안이 벙벙한 채 입을 쩍 벌리고 굳어 있는 청화도대의 수하들이 보인다.
그리고 정옥상이 몰아붙였던 두 청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얼굴도 보였다.
‘젠장, 쪽팔리게.’
정옥상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턱― 하니 어깨 위에 죽창이 올라왔다.
“하찮은 객잔의 주인 놈을 만나 보니 어떤가?”
“으음, 그건…….”
아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후회를 하며 상대를 노려보는데, 숨이 턱― 하니 막혔다.
눈빛이 다르다.
분위기도 다르다.
그런데 왜일까.
싸우기 위해 마주하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이 위압감.
언뜻언뜻 보이는 섬뜩한 살기가 정옥상의 과거 기억을 강제로 끌어 올렸다.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북쪽 국경 인근에선 그의 별호를 듣는 것만으로도 우는 아이가 울음을 그치던 공포의 대명사.
정옥상에게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의 이름.
“붉은 악귀……?”
정옥상은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몰랐다.
그저 본능적으로 말을 내뱉었을 뿐이다. 기절했을 때 아련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흡!”
그런데 그 순간 공기가 변했다.
해가 지고 밤이 되듯.
뜨거운 여름이 끝나고 시린 북풍이 불어닥치는 겨울이 오듯.
사아아―.
공기가 가라앉는다.
장기린의 눈빛이 차갑게 식는 순간, 천하 만물이 몸을 낮추는 듯했다.
정옥상은 숨 막히는 위압감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나를 아나?”
장기린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무감정했다.
그 말이 어찌나 놀랍던지, 정옥상은 무공을 익힌 지 삼십 년 만에 처음으로 들고 있던 대도를 손에서 놓칠 뻔했다.
“정말이오? 당신이 정말 붉은 악귀가 맞소?”
정옥상은 목소리마저 떨렸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이제 보니 알겠소. 눈빛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른데 얼굴은 그대로요.”
어릴 적 선망의 대상이자, 자신이 되고 싶었던 인물을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정옥상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곳에 있었구려. 그랬군. 그랬어. 북천의 난 때, 창천랑을 쓰러뜨린 붉은 악귀가 어디로 사라졌나 했는데, 이곳에 있었어.”
슥―.
죽창이 그의 입을 겨누자 정옥상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내 과거의 인연은 형제들을 제외하곤 그리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그, 그렇소?”
장기린의 눈빛은 여전히 서늘했다.
정옥상은 일어서지 못한 채로, 황급히 포권을 취했다.
“적양문의 무인, 나찰마도 정옥상이라고 하오. 적양문의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어린 시절엔 국경근처를 떠돌던 유민이었소. 그, 붉은 악귀가 적룡기마대에 있던 시절에…….”
장기린의 눈빛이 번뜩였다.
정옥상은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린 채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계, 계시던 시절에 나는 꼬마였소. 열 살쯤이었는데, 당시에 그 공손……, 공손 뭐라던 그분이 일거리를 주셔서……, 당신의 무기와 갑주를 닦았던 적이 있었소.”
어찌 보면 지금 성공한 무인으로서는 비참했던 과거건만.
장기린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 정옥상에게선 그런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평생 꿈꾸던 일을 이뤄낸 듯 오히려 벅차 보이기까지 했다.
“공손 대장군…….”
장기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의외의 상황에, 뜻밖의 사람에게서 그리운 이름을 들은 것이다.
“그런가. 그 시절의 인연인가.”
“뵙게 되어 영광이오. 지금까지도 국경 인근의 북방초원과 장가구에선 붉은 악귀라는 이름은 전설과도 같소. 저 친구들은 나보다 훨씬 젊지만 그럼에도 그대의 이름은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정옥상이 굳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이미 청화도대의 무인들 중 붉은 악귀를 보며 놀라워하지 않는 인물이 없었다.
정옥상은 포권을 풀고 그 자리에서 냅다 엎드렸다.
“그대가 이곳에 있는 줄은 몰랐소. 내가 이곳에서 한 모든 행동과 발언은……, 미친 소리였소.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