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11화 (540/686)

17권 9화

제35장 절대중립(絶代中立) (9)

욱일승천하는 적양문의 대표적인 무인이자 사파제일도라고도 불리는 나찰마도 정옥상이 마치 신하처럼 읍소했다.

불경이라도 저지른 듯 사과하는 자세가 공손하기 이를 데 없으니 진심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태산, 성천. 다친 곳은 없나?”

이태산과 태성천은 작금의 상황에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예, 다친 곳은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객주님.”

장기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됐다. 그대도 일어나시오. 사과는 충분하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정옥상은 일어난 뒤에도 연신 허리를 숙였다.

“태산, 다친 손님을 우 어르신께 모시고 가라. 성천이는 운찬이에게 가서 손님 식사 좀 준비해 달라고 해.”

이태산은 곧장 적왕에게 치여 쓰러져 있는 무인을 업고 흑신의 우문환에게로 달려갔고, 태성천은 강운찬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신법까지 쓰며 사라졌다.

장기린은 차분하게 그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들어갑시다. 사과를 받았으니 이제 그대는 우리 풍운객잔의 손님이오.”

정옥상은 황송하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숙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적양문은 무림맹이 자신들을 모욕했거나, 아니면 음모를 꾸미는 중이라 생각해서 급히 이곳으로 왔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여긴 깊은 산속 화전촌일 뿐이니 그리 생각하는 것도 이해는 가오.”

쪼르륵―.

찻물을 따르는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알지 못해서 그랬습니다. 객주……님께서 계신 걸 알았다면 다르게 대응했을 것입니다.”

“내가 뭐라고.”

장기린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저 풍운객잔의 주인으로서 무림맹주의 부탁을 받고 회담 장소를 제공하기로 했을 뿐이오.”

“그 점에 대해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정옥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림맹주는 왜 이곳을 고른 것입니까?”

“풍운객잔에 분쟁은 없소.”

장기린은 단호했다.

그럴 거라는 예측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겠다는 확신이다.

“정파든 사파든, 강호에서의 입지는 내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지. 풍진 강호를 떠나 조용히 쉬고 싶은 분들을 위해 만든 곳이 객잔 뒤쪽으로 보이는 마을이오. 이름은 은자촌이라고 하지.”

“아……! 아까 보았습니다.”

“이곳에 불필요한 싸움을 일으키는 자, 불순한 의도를 갖고 우릴 끌어들이는 자가 있다면, 나는 좌시하지 않겠소.”

베겠다.

돌려 말하고는 있지만, 단호한 그 말은 머지않은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 같아 섬뜩했다.

장기린은 고작 대나무 하나로 정옥상이 필사의 심경으로 만들어 낸 도강을 박살 냈다.

정옥상은 장기린이 작정하고 병기를 들었을 때 대체 얼마나 강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전쟁터에서 붉은 악귀라 불리던 때보다 훨씬 강해졌겠지. 염왕님. 태양염왕이시여. 여기 이 무신(武神)을 이길 수 있으시겠습니까? 회담은 저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옥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즉, 풍운객잔에서는 그 누구도 함부로 분쟁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무림맹주가 회담 장소로 이곳을 골랐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그 대가로 내게 무림맹의 현판을 맡겼지.”

“으음!”

정옥상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는 듯 침음성을 흘렸다.

“마구간에 걸려 있던 현판이 정말로 무림맹의 것이었다니…….”

신음하는 정옥상만큼이나 주변에서 쥐 죽은 듯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적양문의 무인들도 혀를 내두르며 당황스러워했다.

그들이 만약에 아까 그 현판을 부러뜨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으로도 일이 복잡하게 꼬이는 듯했다.

“그건 마치, 국경지대의 마시(馬市) 같습니다.”

“……그 중립지대 말인가?”

“예.”

국경지대의 마시라면 장기린도 알고 있었다.

명나라와 북원의 잔당이 밥 먹듯이 전쟁을 치르는 앙숙이라고 한들, 사람이란 늘 교통하고 거래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던가.

몽골과 명나라가 조공을 주고받으며 만들어진 시장은, 예전부터 그 어떤 자들도 함부로 싸움을 일으키지 않는 고요한 장소가 되었다.

“이곳을 강호 무림의 중립지대로 만들 생각이십니까?”

“그럴 마음은 없소. 하지만 이번처럼 누군가 도움을 요청하면 돕기는 하겠지.”

앞날은 모르는 일이다.

장기린은 스스로를 협객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눈앞에서 위기에 빠진 자가 있다면 돕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무림맹주는 정말로 흉계를 꾸미지 않았던 것인가…….”

정옥상은 여전히 미심쩍은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에 대해서는 직접 물어보면 되겠군.”

“예?”

장기린이 힐끗 객잔의 뒤편을 바라보고, 잠시 후에야 정옥상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챘다.

한 쌍의 기척이 객잔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정옥상은 마치 풍운객잔에 처음 왔을 때처럼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적양문 청화도대의 무인 네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객잔의 뒷문으로 일남일녀의 한 쌍이 들어오는 순간, 등에 멘 칼에 손을 가져가며 당장이라도 일어설 것처럼 몸을 들썩였다.

“객주님. 덕분에 산에 잘 다녀왔습니다.”

“할아버님이 계시던 곳을 잘 정리하고 왔어요.”

백연과 구양화 부부는 뿌듯한 얼굴이었다.

가문의 어른인 검선이 있던 곳을 확인하고 정리했으니, 앓던 이를 뺀 것처럼 속이 시원할 수밖에 없었다.

“손님이 온 것입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객잔에 주르륵 늘어앉은 건장한 무인 네 사람을 모른 척 지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백연이 묻자 장기린은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자네랑도 연관이 있는 듯한데.”

“……저랑 말입니까?”

“적양문에서 왔더군.”

백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칼을 든 무리인 데다 인상이 범상치 않아서 혹시나 하고 생각은 했었지만, 설마 진짜로 적양문이 이렇게 빨리 움직인 것은 그의 예상 밖이었다.

“보기 드문 강골에 나찰문양을 새긴 대도. 그대가 사파제일도, 나찰마도 정옥상인가 봅니다.”

“그러는 그쪽은 무림맹주라 명성이 높은 일해검 백연이로군. 명성은 익히 들었소.”

두 사람은 서로 나이 차가 별로 나지 않는 또래였다.

물론 정도 무림맹의 주인이라는 점이 그를 특별하게 만들기는 했으나, 그 무림맹은 왕진과 흑시군 치하에서 숨죽이고 지내면서 명성을 많이 잃었다.

정옥상이 생각하기론 사파의 맹주가 될 적양문의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가 자신이니, 백연에게도 그리 꿀리지 않는 직위였다.

정옥상은 백연의 정체를 듣자 벌떡 일어서려는 수하들을 손으로 제지했다.

“가만히 있어라. 아까 객주님과 나눈 대화를 듣지 못했더냐. 이곳은 풍운객잔이다.”

정옥상의 준엄한 경고는 그간 장기린과의 모든 대화를 축약한 것과 다름없었다.

백연은 새삼 감탄하며 장기린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대단하십니다. 그사이에 벌써 저 사람들을 설득하신 겁니까?”

“그저 이곳의 규칙을 말해 주었을 뿐이다.”

“지금껏 무림맹과 적양문의 간극이 마치 장강만큼이나 멀었는데, 풍운객잔에 오니 순식간에 장강에 다리를 지어 버리시는군요.”

장기린은 헛웃음 지었다.

“다리를 놓아 가까워진다고 한들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리가 있나? 결국엔 사람이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잘 나눠야지.”

“옳으신 말씀.”

백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 대주, 염왕께 전해 주시오. 나 백모는 그저 이곳 풍운객잔에서 천하에 명성이 높은 태양염왕과 직접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라고 말이오.”

백연은 무림맹주로서의 허례허식을 내려놓고 사람 대 사람으로서 정중히 예를 차렸다.

“그…….”

차라리 욕을 하거나 적양문과 태양염왕을 매도했다면 대하기가 편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화를 내며 싸움을 걸면 끝이니 말이다.

정옥상은 당황하여 헛기침을 몇 번 한 뒤에 겨우 대답하였다.

“꼭 전하겠소.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전해 드리리다.”

“고맙소. 부디 그렇게 해 주시오.”

상대의 내심을 파악하려는 정옥상과, 그런 정옥상에게 여유롭게 웃어 주는 백연이다.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안쪽에서 강운찬이 이태산과 태성천의 도움을 받아 쟁반에 소면을 가득 담아 들고 왔다.

“백 형도 오셨군요. 같이 식사하실래요?”

“그렇게 할까?”

부드럽게 웃은 백연이 옆에 있던 구양화에게 의견을 묻자 말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주 부부와 사파인 적양문이 동석해서 함께 식사를 하는 기묘한 상황이 시작되었다.

동그란 탁자 위로 차례차례 나오는 음식들이 차려졌다.

양념이 잘 밴 오향장육, 돼지고기를 실처럼 가늘게 썰어서 걸쭉하게 볶은 어향육사, 감자와 가지를 깍둑 썰어 큼직하게 볶아 낸 지삼선.

밥도 나오긴 했지만, 가장 압권인 것은 일 인당 하나씩 나온 풍운객잔 특유의 소면이다.

“오랜만에 봅니다. 항주제일소면이로군요.”

백연이 감회가 새롭다는 듯 자신의 앞에 놓인 소면을 바라보았다.

살짝 노란 빛을 띈 수타면 위로 잘 익은 닭고기와 청경채가 뜨거운 김을 모락모락 피웠다.

“항주제일소면?”

“풍운객잔이 항주에 있던 시절에 이 소면이 그리 불렸다오.”

“호오. 그랬소?”

“그 당시엔 항주 금선로에 이 소면을 먹기 위해 식사 때마다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소.”

장기린은 혀를 차면서 백연을 타박했다.

“쓸데없이 옛날 이야기하지 말고 식사나 하게.”

“허허, 그래야지요.”

백연은 젓가락을 들고 소면을 큼직하게 집어 입으로 가져간 후, 풍부하고 진한 맛을 느끼면서 지그시 눈을 감고 감동에 몸을 떨었다.

“역시, 이 맛입니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무림맹주가 감동을 하는 맛이다.

정옥상과 적양문의 무인들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크게 한 입을 집어먹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맛이……!”

한 입이 두 입이 되고, 순식간에 정신없이 젓가락질을 하다가 마침내 소면 그릇을 들고 입안에 거의 쑤셔 넣다시피 음식을 털어 넣고 있었다.

“염왕님께 맛보여 드리고 싶은 맛이로군.”

정옥상은 스스로 말해 놓고도 아차 싶어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헛기침을 하는 사이, 부하들이 이번엔 요리를 맛보고는 또 한 번 몸을 떨면서 감동했다.

“오향장육이 입에서 녹는다……! 사라지고 있어……!”

“어향육사는 또 어떻고? 질척할 것 같았는데 이 실 같은 돼지고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탱글거려……!”

나름대로 장가구 인근의 최고급 객잔에서 밥도 먹어 본 그들이지만, 항주 금선로에서도 인정받던 숙수인 강운찬의 요리는 그들의 미각에 충격을 선사했다.

식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구양화를 제외한 모두가 소면을 두 그릇씩 먹고, 탁자의 요리가 두 번째로 채워진 것까지 모조리 먹어치웠는데도 고작 일각 정도 걸렸을 뿐이다.

식사를 모두 마치고 인사를 나누는 사이, 정옥상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를 장기린에게 건넸다.

“최고의 식사였습니다. 적양문의 문주님께는 말씀을 잘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정해진 날짜에 적양문은 이곳에서 회담을 가질 것입니다.”

백연을 향해 말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가 자존심 강한 정옥상의 최선이었다.

무림맹주와 나찰마도의 만남은 평화적으로 끝났고, 그들은 임시지만 치료를 받고 많이 회복한 무인을 부축하며 풍운객잔을 떠나갔다.

“백연. 궁금한 게 있다.”

“어떤 점이 궁금하십니까?”

“풍운객잔에서 회담을 해도 좋다는 답을 한 게 오늘인데, 저들은 어떻게 그리 빨리 소식을 알고 이곳에 온 거지?”

“…….”

백연이 웃던 얼굴 그대로 굳어진 채 먼 산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나찰마도가 객잔에 와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백연이다.

옆에 있던 구양화는 그의 타는 속도 모르고 웃으면서 옆구리를 찔렀다.

“정말로 그렇네. 세상에, 그 순수했던 일해검 맞아요? 언제 이렇게 늙은 요괴처럼 능글맞아졌지?”

“그, 그것이 아니고…….”

“자네, 내가 허락할 줄 알고 미리 저들에게 알린 것이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무림맹의 군사들은 대체 일을 왜 그리 서둘러 진행한 것인지.

게다가 적양문 사람들은 왜 그리 성질이 급해서 곧바로 풍운객잔에 직접 손님들을 보낸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군사들이 이렇게나 일을 서둘러 처리할 줄은 몰랐습니다.”

“흠.”

장기린은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물론 일의 선후가 바뀌긴 했지만, 상황이 다급하다 보면 선조치를 해야 할 순간도 있는 법이다.

다만, 그걸 모른 척 넘어가 주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에 지적했을 뿐.

“무림맹 현판은 마구간에 오랫동안 있을 듯하군.”

구양화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고, 백연은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죽어 버렸다.

“정말로 무림맹 현판을 마구간에 두셨습니까…….”

“불만인가? 떼서 도로 줄까?”

“아닙니다. 말은 객잔 손님들의 소중한 재산이지요. 예.”

무림맹주라는 사람이 이렇게 볼품없어지는 곳은 온 세상에 풍운객잔 한 곳뿐일 것이다.

‘그래도, 일이 잘 풀렸어. 회담이 가능하겠구나.’

잘하면 정사의 충돌이 먼 미래로 밀려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백연은 객잔의 창문 너머에서 비쳐 드는 화창한 햇볕을 희망찬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

황금과 적색의 비단으로 황제처럼 꾸며진 화려한 침실.

그 속에서 수도승처럼 가만히 참오하고 있던 태양염왕 고흠은 수하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나찰마도 정옥상이 평소와 달리 입구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고흠은 나직한 저음으로 물었다.

“국수가 맛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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