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12화 (541/686)

17권 10화

제35장 절대중립(絶代中立) (10)

“국수……. 예, 크흠! 항주제일소면이라 불린다고 들었습니다.”

정옥상은 크게 당황했다.

“거창한 이름이군. 요리와 유흥으로 유명한 항주에서 최고로 꼽힌단 말이지?”

“제가 입맛이 고급은 아니지만, 먹어 보니 과연 그런 이름으로 불릴 만하다 싶더군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럴 만한 근거도 있었습니다. 풍운객잔의 숙수가 항주에서 벌어진 숙수들의 대회에서 우승을 했답니다.”

“과연, 그 정도면 자랑할 만하군.”

정옥상은 조심스레 고흠에게로 다가갔다.

불호령이 떨어져도 몇 번이나 떨어져야 할 텐데, 아직까진 고흠도 그를 탓하지 않고 있었다.

다탁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고흠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래서? 직접 거기까지 간 목적은 이뤘나?”

“예. 마침 객잔에 찾아온 무림맹주와 직접 만났습니다.”

“일해검과?”

고흠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일해검은 어떻던가? 강한가?”

“강해 보였습니다. 무형기도 단단하고, 싸워도 쉽지 않겠더군요. 그런데 못 넘을 산은 아닙니다.”

험준하지만 넘어 볼 만한 산.

정옥상이 생각하는 무림맹주 백연의 무공 실력이었다.

“그 정도로군. 그래. 그렇겠지. 그런데 그자가 왜 그곳에 있었나?”

“알고 보니 저희에게 풍운객잔에서 회담을 하겠다고 말하긴 했는데 정작 객잔의 허가는 못 받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갔을 때는 막 허가를 받은 지 얼마 안 된 듯 보였습니다.”

“무림맹이 회담을 하는데 어째서 객잔의 허가를 받아야 하나?”

고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무림맹과 적양문의 결정이 문제지, 객잔 따위가 지들이 뭐라고 회담을 허락하니 마니 한단 말인가.

그냥 무림맹에서 거기서 회담을 하겠다고 하면 그저 알겠다고 하면 되는 게 객잔이 아니던가.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옥상은 고흠의 마음을 백번 이해했다.

자신도 직접 풍운객잔에 가 보기 전에는 고흠과 똑같이 생각했으니 말이다.

“문주님, 다른 곳이면 몰라도, 풍운객잔은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군. 그 객잔이 어째서 그리 대단한가?”

“풍운객잔의 주인이……, 붉은 악귀이기 때문입니다.”

적양문의 문주.

태양염왕 고흠의 움직임이 멎었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고흠은 미간을 지그시 좁힌 채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길 잠시, 고요했던 방 안에 바람이 휘몰아쳤다.

후웅―.

구석에 놓인 향로에서 연기가 흩어졌다.

그뿐인가?

등불에선 불꽃들이 당장이라도 꺼질 것처럼 흔들린다.

단지 이름만 들었을 뿐인데 수도승처럼 앉아 있던 고흠의 명경지수가 깨졌다.

정옥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염왕의 분노는 주변의 공기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벽쪽에서 흔들리던 등불이 어느 순간 기름이라도 부은 것처럼 활활 타올랐다.

염왕의 막대한 내공이 주변의 양기를 들불처럼 들끓게 만든 탓이다.

“붉은 악귀라니. 설마 북로전쟁의 붉은 악귀를 말하는 것인가?”

“예. 창천랑 텐챠이와 쌍벽을 이루던 그 붉은 악귀 말입니다.”

탕.

고흠은 격정을 감추지 못하고 다탁을 손으로 내리쳤다.

가볍게 쳤을 뿐인데, 단단한 오동나무 탁자 위로 고흠의 손이 한 치나 파고들었다.

‘문주의 내공이 더욱 깊어졌구나. 폐관을 막 마쳤을 때랑은 또 다르다. 측량이 되질 않아.’

탁자가 부서지지 않고, 손이 목재를 파고들었다는 점이 염왕의 뛰어난 내공을 증명했다.

정옥상은 감탄했다.

일렁이는 무형기가 마치 집 한 채를 통째로 태울 때의 불꽃처럼 강렬하기 짝이 없었다.

“옥상. 너는 알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사파의 맹주라 불릴 수 있게 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잘 압니다, 문주님.”

“인내했기 때문이다. 내가 십 년의 연공 끝에 적양문 문도들을 이끌고 북천맹에 투신하여 왕의 자리를 받으려 했을 때도 그의 소식을 들었었지.”

“그랬지요.”

정옥상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 중의 하나였다.

당시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지금은 죽거나 은퇴했지만, 국경 인근의 마적 떼를 모조리 소탕한 경험 많고 강인한 무인들이 적양문에는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그랬던 그들이 남방 무림 진출을 포기했던 이유는 딱 하나다.

붉은 악귀!

그 괴물 때문이지 않던가.

“삼십 년이다. 삼십 년을 인내했어.”

“맞습니다.”

“붉은 악귀가 그 괴물 같은 기마대를 다시 모으고 북천맹과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말머리를 돌렸지. 북천맹이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 예측이 맞았기에 지금의 저희가 있는 것이지요.”

“바로 맞췄다. 그런데 재밌구나. 이십 년 후에 우리가 다시 남방으로 향하려 하는데, 너는 또 그 이름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치이익.

고흠의 손바닥 밑에서 타는 듯한 냄새가 나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적염승천공이 무극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다.

고흠은 극양의 진기가 자신의 감정에 따라 자연스레 움직일 만큼 무공과 일체화하고 있었다.

“옥상, 붉은 악귀를 만나고 왔느냐?”

“예, 그렇습니다.”

“무공이 어떻던가?”

“비할 상대를 못 찾겠습니다.”

무쌍(無雙).

천하에 짝이 없는 사람이기에 붙은 별호다.

“나를 앞에 두고도 그렇게 말한단 말인가.”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정옥상은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옆으로 걷어내 이마에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혹을 보여 주었다.

“제가 구천지옥도의 도강을 끌어 올렸는데, 지붕에서 뽑아낸 대나무 하나로 저를 기절시켰습니다.”

“하하핫!”

고흠은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강하구나! 강해! 과연 붉은 악귀다! 그래서, 옥상 너는 내가 회담을 포기하고 다시 적양문으로 돌아가길 바라느냐?”

정옥상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자신도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다.

‘고작 회담에 불과하다. 사실 붉은 악귀와 생사결을 겨룰 일은 없을 터. 그런데 왜 나는 자꾸 두 사람의 실력을 비교하게 되는가.’

불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회담에 참가하면 필연적으로 적양문의 문주와 붉은 악귀가 맞부딪칠 것 같다는 예감이다.

“큭.”

애초에 정옥상은 복잡한 계산을 할 수 있는 성격이 못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저는 붉은 악귀를 보고 이건 도저히 못 이긴다고 느꼈습니다. 폐관 수련을 막 마쳤을 때의 염왕님보다는 확실히 세구나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또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모르겠나?”

“문주님께서 더 강해지신 것 같습니다. 붉은 악귀와 똑같이……, 힘을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정옥상이 처세에 능한 자였다면 붉은 악귀의 힘을 부풀려서 겁을 주거나, 아니면 차라리 고흠의 힘을 칭송해서 응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이도 저도 아닌 대답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나찰마도 정옥상다운 대답인 것을.

실제로 고흠은 웃음을 터뜨렸을 뿐 그 애매한 대답을 조금도 탓하지 않았다.

“바로 맞췄다. 나는 나날이 강해지고 있으며, 폐관 수련으로 이뤄 낸 적염승천공과 극양무극도를 완성시키는 중이다.”

“아……!”

“지금은 폐관 수련을 마쳤을 때와 비교해 배는 강해졌을 테지.”

고흠은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패력을 드러냈다.

고오오―.

공기가 빨려드는 것 같다.

숨을 쉬기 힘들 것 같은 강대한 존재감이 고흠으로부터 물씬 풍겨 나왔다.

“무인으로 태어나, 뛰어난 강적에게 도전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무공을 완성한 자.

태양염왕의 배포는 이십 년 전과는 달랐다.

“이런, 아끼는 다탁에 자국이 남았군.”

고흠은 다탁에서 손을 떼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붉은 악귀. 그 이름은 지금도 두렵구나. 하지만 우리는 예전의 적양문이 아니며, 나 또한 그때의 애송이가 아니라 적양승천공을 대성한 태양염왕이다. 이번에는 지레 겁먹고 말머리를 돌리는 게 아니라, 정면으로 돌파해 사파의 하늘을 내가 열 것이니라.”

어려움을 정면으로 헤쳐 나가겠다는 소리다.

무인으로서 어찌 그런 사람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염왕께선 승리하실 것입니다.”

정옥상은 깊은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가성.”

“예. 문주님.”

적양문의 부문주이자 군사인 남가성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회담에 참석하겠다. 그곳에서 우리가 최대한의 이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남가성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힘을 보여 주셔야 합니다. 마침 삼산현 근처에는 별다른 무림 문파가 없으니 소림을 포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결국은 분쟁을 일으키자는 건가?”

“아닙니다. 분쟁‘만’ 안 일으키면 되겠지요.”

남가성은 벽면에 걸려 있는 하남의 대략적인 지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무림맹이 하북 무림을 적양문과 사파의 땅으로 인정해 주면 됩니다. 무림맹이 인정하면, 적양문은 명실상부한 하북 무림의 지배자이자 사파의 맹주가 될 것입니다.”

“그 정도만 받아들이게 만들면 성공이란 말이군.”

“예.”

“분쟁만 일으키지 않을 뿐, 힘을 보여 줘서 겁을 주고?”

“역시 현명하십니다.”

남가성은 고흠이 폐관 수련을 하는 동안, 무림 강호의 이름난 문파와 무인들 수천 명을 조사했다.

흑시군의 지배 아래에서 무림문파들이 얼마나 힘을 잃었고,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몰래 힘을 키우고 있는지를 십 년간 분석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가 말한다.

하북 무림에 깃발을 올리면 천하를 노려 볼 만하다고.

“아마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북 무림을 내주면 개방을 내주는 것과 같으니까요.”

“궁가방이라.”

북경 무림에서 개방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일이다.

고흠은 얼마 전에 무림맹의 전갈을 갖고 찾아왔던 섬여개의 결연한 표정을 떠올렸다.

개방에는 그런 결기 있는 무인들이 수두룩했다.

무림맹이 그들을 하북 무림의 맹주로 인정한다 한들, 그들이 순순히 납득할 것인가?

“재밌군. 인정 못하면 하게 만들면 되겠지.”

고흠은 남가성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하게.”

“존명.”

남가성은 준비할 일이 많다는 듯 곧바로 떠났다.

고흠 또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옥상.”

“예, 문주님.”

“하승과 함께 소림으로 가서 적양문의 힘을 보여 주어라. 배를 타고 가는 게 좋다더군.”

하승이라 하면 적화검대의 대주 절영귀검 막하승을 뜻했다.

“청화도대와 적화검대를 모두 보내십니까?”

“물론.”

고흠은 정옥상의 얼굴에 스치는 걱정을 놓치지 않았다.

“걱정되는가?”

“풍운객잔은 무서운 곳입니다.”

“붉은 악귀 때문에?”

“그도 그렇지만 검선 또한 그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듯 보였습니다. 무림맹주가 설설 기더군요.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무림맹주 백연과 구양화가 나누던 대화를 놓치지 않았던 정옥상이다.

“방심할 리가 있나. 상대는 붉은 악귀다.”

고흠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회담을 하는 것뿐이야. 그리고 나는, 검선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

강호 무림에 식견이 있는 누군가가 들었다면 비웃었을 발언이다.

하지만 폐관 수련 끝에 진일보한 고흠의 실력을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는 정옥상은 그를 비웃지 않았다.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부르십시오. 소림 따위는 반나절 안에 밀어 버리고 객잔으로 가겠습니다.”

“믿음직하군.”

고흠은 껄껄 웃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정옥상은 다탁에 새카맣게 남은 태양염왕의 손자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번 회담은 적양문의 득이 될 것인가 실이 될 것인가.

그 답은 하늘만이 알고 있었다.

***

끼룩거리는 갈매기 소리가 마치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커다랗고 튼튼한 배의 갑판 위에서, 대자로 뻗어 있던 조서인은 눈앞에서 번쩍거리는 별을 보고 있었다.

‘햇빛이 뜨겁다.’

온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땀을 어찌나 흘렸는지.

게다가 장강 위의 햇살이 얼마나 뜨거운지 얼굴 위의 땀이 다 말라붙어서 소금이 버적버적 나올 것만 같았다.

“빨리 안 일어나냐? 꾀부릴래?”

한량처럼 삐딱하게 선 추룡의 한 마디에 조서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좀 더 쉬었어야 했는데, 배를 타고 오는 내내 추룡에게 굴려졌더니 이젠 생각하는 것보다 몸이 더 빨리 반응하게 되어 버렸다.

“꾀부리지 않았습니다.”

“꾀부려도 돼.”

“예?”

“대신, 공격은 받아 내고 꾀를 부려야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추룡이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든 쌍수목검이 조서인의 발목으로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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