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13화 (542/686)

17권 11화

제35장 절대중립(絶代中立) (11)

“흡!”

조서인은 본능적으로 한 발을 들며 물러났다.

서로 내공은 쓰지 않고 순수한 육체의 힘만으로 겨루는데도 승부 결과는 압도적이다.

발목을 스쳐 지나간 쌍수검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뭉툭한 검끝이 목젖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으왓! 무기 아직 안 집었어요! 무기 없습니다!”

조서인은 양 손바닥을 쫙 펼친 채 아직 전투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추룡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무기를 놓친 놈이 병신이지.”

“으어왓!”

쉭― 슉― 후웅―.

검날이 길면 보통 검의 움직임이 느린 법인데, 추룡은 쌍수검을 마치 창처럼 잡고 꺾는 방향을 좁혀서 속도의 문제를 해결했다.

맨손으로 칼날을 붙잡고, 검끝으로만 이리저리 휘두르는 식이다.

왼쪽 목을 노리는가 싶으면 오른쪽 목으로 칼이 날아오고, 무기로 막으려 들면 손잡이 부근의 검배를 갈고리처럼 걸어서 하체를 푹― 쑤시려 든다.

상대하는 게 까다롭기 그지없다.

마치 낭인이나 야인의 검술 같은 느낌.

단순하면서도 실전적이라서 빈틈을 파고드는 느낌이 집요했다.

“으랏차!”

조서인은 부드러운 태극권의 묘리로 손바닥을 이용해 쌍수검을 옆으로 비껴 냈다.

터엉!

쌍수검이 애꿎은 배의 갑판을 때린 그 짧은 틈에, 나려타곤처럼 몸을 날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목봉을 주워 올렸다.

“어쭈?”

추룡은 재밌다는 듯이 씩 웃더니, 갑자기 다리를 거의 일자에 가깝게 찢으며 보폭을 넓혀 성큼 다가왔다.

“으악!”

철판교의 수법으로 몸을 뒤로 젖힌 조서인의 코끝으로 쌍수검이 스쳐 지나갔다.

팟! 하고 스쳤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코끝이 얼얼했다.

텅!

조서인은 짧게 잡은 목봉으로 바닥을 후려친 뒤 반탄력을 이용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야야.”

“하핫! 코끝이 벌건 게 술주정뱅이 같구나!”

호탕하게 비웃는 모습이 그렇게나 밉살스러울 수가 없다.

‘내가 왜 이렇게 흥분했지?’

만약 누군가의 호승심에 불을 붙이는 것도 재능이라면, 추룡은 천하제일일 게 분명했다.

조서인은 호흡을 가다듬은 뒤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이제야 좀 얼굴이 볼만해졌는데?”

“챠하앗!”

일연적룡무 제일식이 섬광처럼 뻗어 나갔다.

내공을 쓰지 않더라도 평생을 창술만 단련해 온 조서인의 근력은 목봉을 포탄처럼 쏘아낼 수 있었다.

파앙!

허공을 격하자 공기가 터져나간다.

추룡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공격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비스듬한 각도로 아무것도 없는 조서인의 우측 옆구리 부근을 찔렀다.

‘저길 왜 찌르지?’

무공을 겨루는 와중에 깊은 생각을 할 겨를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찰나의 순간.

아무것도 없는 곳을 공격한다는 것에 의문을 잠시 가졌을 뿐, 조서인은 본능적으로 칼날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살짝 몸을 틀었다.

그 순간.

딱!

터엉!

“흡?”

정면으로 찔렀던 목봉이 다시 회수되는 와중에 추룡의 쌍수검 호수(護手)에 걸린 게 첫 번째.

진창에 빠진 마차 바퀴에 나무막대를 끼워 들어 올리듯, 지렛대처럼 움직인 쌍수검이 조서인의 우측 무릎 뒤를 강하게 후려친 게 두 번째다.

거기다 추룡은 한 발을 크게 다가오며 검끝에 무게를 실었다.

단박에 몸이 반회전한다.

낙법을 취하며 일어서려 했으나, 어느새 추룡의 검끝이 목전에 겨눠져 있었다.

“으으.”

화창한 하늘이 보인다.

추룡은 씩 웃고 있었다.

“이게 진검이었으면 넌 힘줄이 잘렸다.”

조서인은 추룡이 내민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어떠냐. 서역의 검술도 제법 재밌지?”

“예.”

조서인은 방금의 대련을 머릿속으로 한 번 복기해 보았다.

그 이전도, 그 이전의 이전도 생각해 보면 다 비슷한 방식이다.

“초식이 아니라 단박에 승부를 보는 절초가 많네요.”

“그래. 실용적이랄까. 중원의 검술에 비해 화려하지 않아서 보는 맛은 좀 없지만, 수만 번의 실전 끝에 정리된 동작들은 곱씹을수록 깊은 묘미가 있지.”

“효율적이긴 한데, 지나치게 간결해서 시전자가 누군지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건 어떤 무공이든 그렇지 않냐?”

추룡은 삐딱하게 선 채 쌍수검으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강한 사람이 강한 건 어디나 마찬가지야.”

“그건, 으음, 그렇죠.”

태어날 때부터 강한 사람.

조서인은 순간 머릿속에서 소호가 떠올랐다.

“내가 비단길 통해서 사막도 건너 보고, 생판 처음 보는 나라에서 작위도 받아 보고 하니까 느낀 게 있다. 방식이나 예의는 좀 달라도, 사람 사는 곳은 세상 어딜 가든 돌아가는 꼴이 다 비슷비슷해.”

“예? 거기서 작위도 받으셨어요?”

“북원 놈들이 비단길 너머를 완전히 작살을 내놨더라. 뭐라더라? 어느 나라랑 어느 나라는 백 년간 전쟁을 하고 있기도 했고, 그쪽 무관들이 떼 몰살을 당했는지. 이래저래 돌아다니다가 한 칼 보여 주니까 날 붙잡으려고 난리도 아니었어.”

추룡은 담담한 척 말하지만 한편으론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얼마나 난리였는지, 그쪽 공주님이 나한테 빠져서 살림 차릴 뻔했다니까?”

“예에? 공주님이랑요?”

“그래. 궁금하냐?”

조서인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 사내들 중에 출세해서 인정받고 공주와 혼약하는 것을 꿈꿔 보지 않은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궁금하면 내 공격을 받아 내야지.”

추룡은 놀리듯이 씩 웃는데, 얼굴에 깊은 흉터가 있음에도 그 모습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공주가 빠진 게 무공 때문만은 아닌가 보다.’

추룡에겐 무력으로든 인격적으로든 완성된 사내의 매력이 있었다.

아직 애송이에 불과한 조서인으로서는 그 또한 닮고 싶은 부분이었다.

“그건 그 이야기와 상관없이 해내고 말겠습니다.”

“성실한 녀석일세. 하긴, 그러니까 대형이 제자로 삼았겠지?”

“부족한 저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 부분이 좋은데, 또 한편으론 그런 부분을 좀 고쳐 버리고 싶네.”

추룡은 한 발을 살짝 뒤로 빼면서 검끝을 조서인에게 겨누었다.

조서인 또한 목봉을 양손으로 나눠 잡고, 침착하게 중단세를 취했다.

“서역 검술 다 익힐 때까지는 못 쉴 줄 알아라.”

“윽, 갑니다!”

열정적으로 덤벼드는 조서인과 능숙하게 받아넘기는 추룡이 다시 한번 갑판 위에서 격렬하게 부딪쳤다.

***

결과적으로 조서인은 이기지는 못했지만 백 번 가까이 덤벼든 끝에 공격을 막아 내서 무승부를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 덕분에 시작된 추룡의 서역 유람기는 어릴 적에 읽었던 서유기만큼이나 조서인의 흥미를 강하게 자극했다.

“서역 여성들의 허리가 한 줌이라고요? 정말로요?”

“그래. 양손을 이렇게 모으면 그 안에 들어갈 정도라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몸에 있는 내장은요? 서역 여자들은 내장이 없나요?”

“뭐 그런 무식한 소리를 하고 그래? 당연히 있지. 그런데 어릴 때부터 세게 묶어서 허리를 가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더라.”

“아아! 그, 전족 같은 거군요?”

“그래. 명태조 주원장이 전족을 없애려 했는데, 오히려 귀족들은 그게 더 평민들이랑 구분된다고 열심히 전족을 시켰잖아. 서역도 그거랑 똑같다. 저쪽 여자들도 예쁜 거에 대해서는 독해. 특히 저 위의 높은 사람들은 더.”

추룡은 생각보다 더욱 박식한 사내였다.

가볍게 내뱉는 말에 조서인이 몰랐던 온갖 지식들이 가득했다.

“허리가 가늘면 저쪽에선 예쁘게 봅니까?”

“나도 처음엔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가만히 보다 보니까 알겠더라. 허리가 가느니까 여기, 여기 이런 게 되게 으음, 보기 좋아. 풍요로워 보여.”

“그래요?”

추룡이 양팔을 막 벌려 가면서 설명을 하는데, 조서인에게는 잘 상상이 안 가는 이야기였다.

“애송이에게는 아직 이른 이야기구나.”

“윽, 또 그 말씀이십니까.”

“그런 여유도 중요하다. 사내놈이 허둥거리고 우물쭈물하는 거 좋아하는 여자는 하나도 없어.”

“그런 겁니까?”

“그런 거지.”

그 순간 무산학관 시절에 계속 눈이 가던 단발머리 소녀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조서인은 고개를 붕붕 저어서 생각을 떨쳐냈다.

“어? 이것 봐라? 누구 생각했냐, 방금?”

“아닙니다. 그보다 그런데 왜 거기서 혼인하고 자리 잡지 않으셨습니까? 작위도 주고 공주랑 결혼하면 그, 왕족이 되는 것 아닌가요?”

“이놈 말 돌리는 것 좀 보게?”

추룡은 어이없어했으나, 껄껄 웃으면서 넘어가 주었다.

그는 슬슬 해가 지기 시작한 노을을 보면서 술병을 꺼내 들었다.

뱃전에 장강의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좋은 안주가 되어 주었다.

“서역도 괜찮아. 기와집이나 하늘하늘한 비단 옷이 없는 대신에, 돌로 만든 화려한 사당이나 장식이 많은 옷을 보면 그것도 신기하고 새롭다. 과일도 맛있는 게 많고. 그런데 딱 하나, 죽어도 안 되는 게 있더라.”

“그게 뭡니까?”

“거기서 살려면 신을 믿어야 하더라고.”

추룡은 독한 향이 나는 술을 한 모금 들이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거긴 이상하게 왕도 그, 뭐라고 하냐. 교주보다 아래야. 무슨 눈치를 그리 보는지. 그래서 작위를 받는 서약도 거창하고 그래. 이상한 기도문 같은 거 줄줄 외우고 그러다가 딱 느꼈다. 아, 나는 정착하면 안 되는 놈이구나.”

갑판 위로 쌩쌩 불어오는 강바람에 추룡의 야인 같은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그래서 서역 구경도 할 만큼 했겠다. 우리 영감님 임종이나 지켜보자는 심정으로 냅다 돌아온 거지.”

추룡은 술병에 든 술을 꿀꺽꿀꺽 들이켜더니 기분 좋은 얼굴로 냅다 술병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퐁―.

물결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경쾌했다.

“오니까 좋더라. 역시 고향은 고향이야.”

“그런데 추 어르신 임종을 지키시려면…… 평생 계셔야겠는데요?”

“응? 몇 년 안 남지 않았겠냐?”

“무슨 그런 말씀을. 백 년은 더 사시겠던데요.”

“으하핫! 뭐, 그 영감이 좀 정정하긴 하지.”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사이, 장강을 헤치며 나아가던 배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견성포구도 오랜만에 보네.”

“저기 멀리 보이는 산이 숭산인가요?”

“그래. 저기가 숭산이야. 등봉현 소림. 알지?”

“모를 수가 없죠.”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배가 녹림수로맹의 깃발을 달고 있는 탓인지, 포구 안으로 들어가는데 앞을 가로막는 배가 단 한 척도 없었다.

포구 주변의 작은 배들이 일제히 모른 척 시선을 피하며 양옆으로 길을 벌려 주었다.

“역시 장강에선 아직 우리 입김이 통하는구만.”

추룡은 만족스러워했다.

“그런데 소림에는 어쩐 일로 가시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냥 뭘 좀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예전에 조심하지 않다가 실수한 적이 있거든.”

조서인은 그 순간 추룡의 눈빛을 스치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분위기를 보았다.

“조심해야지. 그래. 돌다리도 두들겨 봐야 해. 저번처럼 실패하지 않으려면.”

자세히 말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위험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느낌이 왔다.

조서인은 헛기침을 하면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크흠, 그 뒤에는 은자촌, 아니 풍운객잔으로 가시는 거고요?”

“그래야지. 형님 뵙고 인사도 좀 드리고.”

두 사람이 빙긋 웃으면서 하선을 준비하려던 그때였다.

뱃사람들이 시끄러운 함성을 내지르며 줄을 꺼내고 정박을 준비하는 사이, 견성포구에 정박하고 있던 배에서 내린 일단의 무리가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저것들은 뭐야?”

추룡이 흥미를 느낀 듯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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