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14화 (543/686)

17권 12화

제35장 절대중립(絶代中立) (12)

커다란 상선에서 수백 명의 사내들이 포구로 내려섰다.

그들은 땅에 발을 딛자마자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섰다.

한쪽은 새카만 무복을 입고 팔에 붉은색 천을 완장처럼 차고 있는 검객들이다.

그들은 모두 동작이 가벼웠고 조용하며 기민해 보였다. 가장 앞에 있는 한 사내를 따라 절도 있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쓸데없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반면에 다른 한쪽의 사내들은 그들과는 정반대였다. 검은색, 회색, 갈색 같은 온갖 종류의 옷을 마음대로 입은 데다 체구도 제각각, 성향 또한 다 달랐다.

팔에 푸른색 천을 완장처럼 차고 있으며 모두가 등에 칼날이 넓적한 대도를 차고 있다는 점 때문에 일행으로 보일 뿐이다.

서로 극단적으로 다른 두 무리는 견성포구로 물밀 듯이 밀고 들어가다가 포구를 관리하는 관료들에게 제지당했다.

관료들은 그들을 막으면서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포구를 관리하는 직위라고 해봤자 등봉현에 소속되어 있을 뿐 녹봉도 얼마 안 되는 미관말직이다.

갑작스레 강인한 무인 수백 명을 맞이한 그는 사색이 되어 얼굴이 창백했다.

“무슨 일로 포구를 찾으셨소?”

“소림사를 보러 왔소.”

“호, 호패를 보여 주시오.”

“여기.”

의외라면 의외랄까.

나찰마도 정옥상과 절영귀검 막하승은 순순히 호패를 내밀었다.

“장가구……? 그 멀리서 오셨소?”

“소림사가 유명해서.”

적어도 하남에서 그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지금 나타난 자들이 워낙 무시무시하니 그 말이 흉계를 꾸미는 자의 핑계처럼 들릴 뿐이다.

“이만 가도 되겠소?”

“그, 그렇긴한데. 다들 같은 곳에서 온 분들이오?”

“장가구의 적양문. 우린 모두 적양문 사람들이오. 안 그러냐, 얘들아?”

우오―!

수백의 함성이 견성포구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장강에 한 발을 걸치고 거칠게 살아온 뱃사람들조차 함부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대규모 인원은 혀, 현령님께 보고를 해야 하는데…….”

“더 기다리라고?”

이미 사파의 무인들치고는 참을 만큼 참은 상태다.

기약도 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정옥상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칼을 든 수백의 무인들이 순식간에 기세가 험악해진다.

“그, 그게.”

미관말직의 관리가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기세였다.

당황한 그의 눈에 지금 막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익숙한 깃발의 배가 보였다.

새카만 묵빛의 전선은 그중에서도 용왕수호대가 분명했다.

“수, 수로맹!”

“뭐라고?”

“녹림수로맹이오. 저들에게 물어봐야겠소! 아암, 장강의 수로는 저들이 관리해야지.”

관료는 사실 관과 무림은 서로 상관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 자였다.

그는 면피용으로 황급히 책임을 돌린 것이었지만, 엉뚱하게도 그 말이 통했다.

정옥상과 막하승이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수로맹을 드디어 보는구나. 온통 평지인 곳에서 살다 보니 한 번도 못 봤었지.”

“장강용왕이 유명하지 않나?”

“그래. 무림에서 열 손 안에 꼽히는 수준이라던데. 그래도 우리 문주님보다 강할 리는 없겠지.”

정옥상과 막하승이 팔짱을 끼고 기다리는 사이, 수로맹의 배에서 내린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얼굴에 십자 모양 흉터가 있는 기묘한 복색의 중년 사내와 선한 인상의 젊은 청년.

추룡과 조서인이 정옥상과 막하승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적양문에서 오셨다고?”

관리가 있는 곳과 배 사이의 간격은 가깝지 않았지만, 무공을 익힌 무림인으로서는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

처음엔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서 있던 정옥상과 막하승이었지만, 추룡이 다가오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완성된 무인들끼리의 만남이었다.

정옥상과 막하승이 팔짱을 풀고 각자의 병기 근처에 손을 뒀다.

“적양문의 막하승이오. 녹림수로맹이신가?”

“추룡이오. 오늘은 그저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우연히 엮여 버렸군.”

조서인은 나직하게 “절영귀검.”이라며 중얼거렸다.

추룡은 못 들은 척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아까 거기 관리가 말하는 걸 들었는데, 뭐, 우리 녹림수로맹이 장강 만 리 수적들의 관리를 하긴 한다지만 어찌 소림사를 찾아온 손님을 허락하니 마니 하겠소? 우린 상관없으니 편한 대로 하셔도 좋소.”

관의 문제는 관이 해결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추룡은 사색이 된 관리에게 빙긋 웃어 준 뒤, 그들이 타고 온 묵빛 전선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용왕수호대! 나는 일 보고 돌아간다고 영감님께 전해 줘!”

“언제쯤 오십니까!”

“한 몇 달 걸리겠지! 아니면 영감님께 풍운객잔에서 뵙자고 말씀드려. 괴물 같은 늙은이가 약한척하지 말고 빨리 나오라고도 전해 주고.”

“알겠습니다!”

추룡의 입장에선 별것 아닌 대화였으나, 그것만으로도 적양문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아까까지 그저 산속에서 야생동물을 만난 것처럼 추룡과 조서인을 경계했다면, 지금은 맹수를 본 것처럼 긴장감이 팽팽하게 흘렀다.

특히 나찰마도 정옥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원래 대화를 나누던 막하승을 제치고 먼저 앞으로 나섰다.

“당신, 추룡이라고 했소? 난 적양문의 정옥상이오.”

조서인이 이번엔 “나찰마도까지……!”라며 놀랐다.

“당신이 말한 풍운객잔이 혹시 삼산현 화전촌에 있는 그 풍운객잔이오?”

“그렇소만?”

“……풍운객잔과 어떤 사이요?”

“응?”

추룡은 미간을 좁힌 채 되물었다.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추룡은 잠시 고민하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가족이지. 거기 주인이 우리 큰형이오.”

“……!”

정옥상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는 황급히 막하승의 소매를 잡아끌고 한발 물러서더니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호오.”

추룡은 그간 말도 통하지 않던 외국에서 지내던 경험으로, 그들이 당황하면서 혼란스러워한다는 사실을 한눈에 간파했다.

추룡은 멍하니 서서 두리번거리는 조서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적양문놈들. 뭔가 일을 꾸미다가 꼬인 모양인데?

추룡의 목젖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조서인은 머릿속에 들려오는 전음에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게요. 수상해 보이긴 하네요.

―좀 더 찔러 보자.

추룡은 서로 간의 대화가 길어지는 정옥상과 막하승을 향해 헛기침을 하면서 눈치를 줬다.

“크흠! 거기 두 분은 소림사로 간다고 하지 않았소? 지금 가지 않을 거요? 이러다 향불하기 전에 날 새겠는데?”

“……혹시, 그쪽은 어디로 가시오?”

“우리? 우리도 당연히 소림으로 가오.”

그 말이 두 사람에게 어떤 확신을 준 듯했다.

특히 정옥상은 소름이 끼친다는 듯이 몸을 한 번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 일정이 바뀌었소.”

“갑자기? 방금 저 관리한테 소림사로 가겠다고 하지 않았소?”

“급한 일이 생겼소. 우린 아무래도 삼산현으로 먼저 가야 할 것 같소.”

“삼산현으로 간단 말이오?”

추룡은 곤란하다는 듯 혀를 찼다.

정옥상은 시험하는 듯, 또 한편으로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추룡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추룡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큰일인데. 큰 형님께 여쭤봐야 하나.”

상황이 바뀌었을 때 상급자를 넌지시 암시하는 건 좋은 한 수였다.

마치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은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니까 말이다.

“우린 떠나겠소. 한시가 바쁘니 그럼 이만.”

정옥상과 막하승은 각자 청화도대와 적화검대를 이끌고 떠나 버렸다.

서둘러 움직이는 모습이 다급해 보이기까지 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모든 이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 추룡은 박장대소를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죄지은 놈들은 저래서 발 뻗고 못 자는 거야. 뭐가 그리 두려워서 눈치를 자꾸만 봐?”

“그러게요.”

조서인은 추룡에게 순수하게 감탄했다.

“저라면 멍하니 있다가 있는 그대로 대답하고 끝냈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그……, 뭔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셨어요?”

“아니, 척 봐도 뭔가 구린 걸 숨기고 있는 것 같잖아? 그걸 장난 안 치고 배기냐?”

추룡은 주먹으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그나저나 어땠냐?”

“예?”

“아까 그 둘. 제법 강하던데. 너도 느꼈냐?”

“예. 청계와 싸울 때가 생각났어요.”

사파 무림에서 수위를 다투는 자들이다.

약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

“아까 그 두 사람, 난 잘 모르는데 유명한 자들이지?”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서역으로 오랫동안 나갔다 돌아온 추룡이 강호 무림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게 당연했다.

“나찰마도 정옥상과 절영귀검 막하승. 저 두 사람은 지금 사파의 맹주라 불리는 적양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들이에요. 적양문은 장가구 쪽에 있는 사파 일문인데……, 혹시 아세요?”

“알지. 잘 알지.”

추룡은 의뭉스럽게 씩 웃었다.

“몇십 년 전 이야기긴 한데, 직접 몇 명 만나 본 적도 있고 그래.”

“어? 그래요?”

적양문과는 전혀 인연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조서인의 입장에선 뜻밖의 이야기였다.

‘하긴 이분이면 왠지 아무도 모르는 사실도 다 알고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조서인이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견문이 넓은 사람이 추룡이었다.

“문주가 그 뭐냐. 양기를 쓰는 무공을 썼던 것 같은데.”

“태양염왕 고흠. 사파제일인이 누구냐 물으면 손꼽히는 한 사람이죠.”

“고흠! 그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추룡은 과거를 떠올리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포기했다.

“잘 생각은 안 나네. 그땐 별로 인상적이지가 않았어. 아무튼, 그놈들이 지금 사파의 맹주라 불리고, 분위기 보아하니 풍운객잔에 들키면 안 될 무언가 음모를 꾸민단 말이지.”

“겁을 내는 분위기였어요. 혹시 사부님을 아는 건 아닐까요?”

“나도 그런 것 같다. 형님 이야기 나왔을 때 겁을 많이 내더라고.”

“사부님을 한 번이라도 만나 뵀다면 겁을 내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죠.”

조서인은 짐짓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추룡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더니 파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뜬금없는 곳에서 자부심을 갖는 놈일세. 사부가 무서운 사람이라 좋으냐?”

“어, 음. 싫진 않……은 것 같은데요.”

“그렇지. 그렇지. 다들 무시하는 호인보다는 다들 두려워하는 맹장이 좋긴 하지.”

추룡은 손가락으로 조서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나저나 적양문도 그렇고, 아까 그 둘, 나찰마도? 절영귀검? 너 쫌 많이 안다? 원래 무림인들한테 관심이 많았냐?”

“그렇기도 하고……, 으음, 무산학관에서 졸업하려면 필수적으로 외워야 하는 것들이 있어서요.”

“그런 것도 있냐?”

“예. 강호 무림의 주요 세력들이랑 지역의 강자들 같은…….”

“그중에 우리 큰형님은 계셨냐?”

“예.”

당연히 없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추룡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뭐라고 하던데?”

“그,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조심해야 할 은거기인들 중에 한 명이라고……, 무쌍귀는 생존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무림 십대고수 수준일 테니 조심하라고 배웠습니다.”

“파하핫!”

추룡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웃었다.

“십대고수는 무슨.”

“예, 나중에 생각하니 웃음만 나더라고요. 소호도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그 내용을 듣고 추 대협과 똑같이 웃었어요.”

추룡은 소호의 이야기를 듣자 묘한 표정으로 웃음을 멈췄다.

그는 소호에 대해 묻지 않고, 그저 조용히 숭산 쪽을 바라봤다.

“서인아. 넌 천천히 삼산현 쪽으로 가고 있어. 대로를 따라 쭉 가고 있으면 내가 얼른 볼일을 보고 돌아오마.”

“소림에 가시게요?”

“그래.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길에서 보자.”

조서인은 추룡의 표정이 참으로 묘하다고 생각했다.

결연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듯한, 긴장된 모습은 추룡을 만난 뒤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저분이 긴장도 하는구나. 황제 앞에서도 너스레를 떨 것 같은 분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로 가는가.

궁금했지만 조서인은 묻지 않았다.

추룡이 바람처럼 홀연히 떠난 뒤, 조서인은 그가 마지막에 말한 대로 삼산현 풍운객잔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삼산현의 소박한 산길.

황제가 타야 할 것처럼 거대한 사두마차가 위용을 뽐내며 나타났다.

검은색 옻칠을 한 몸체에 적색염료로 떠오르는 태양을 그려 놓은 마차는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가 온 산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듯했다.

나무가 흔들리고 새들이 놀라 달아났다.

서서히 속도를 줄이던 마차가 풍운객잔의 앞에서 완전히 멈춰섰을 때, 객잔 앞에는 이미 두 사람이 나와서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림맹주 백연과 그의 사질이자, 무당파의 새로운 쌍절진인이라 불리는 명진 도장이었다.

히히힝―.

절도 있는 동작으로 마부석에서 뛰어내린 사내가 마차의 문을 열자, 그 안에서 몸집이 평범한 장년의 사내가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새카만 옷을 입고, 자신의 등에 커다란 태양을 그려 놓은 사내다.

그는 볼이 움푹 파여서 더욱 깊어 보이는 눈을 빛내며 산천초목이 떠나가라 큰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무림맹주를 보는구려.”

생각보다 더욱 강력한 기파에 백연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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