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15화 (544/686)

17권 13화

제35장 절대중립(絶代中立) (13)

“적양문주.”

백연은 먼저 포권을 취했다.

무림맹주라는 직위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애초에 직위를 내려놓고 사람 대 사람으로서 만나기 위한 자리였다.

백연은 연장자이자 강호의 선배에 대한 예를 지켰다.

그 태도 하나만으로도 백연이 어떤 마음으로 이 회담을 주선했는지 드러났다.

“남검태극(南劍太極) 북도태양(北刀太陽)이라더니. 이제 그 말뜻을 알 것 같습니다.”

남쪽의 검왕이 있으니 무당파의 태극검왕이며, 북쪽에 도왕이 있으니 그는 적양문의 태양염왕이다.

“허허.”

고흠은 가벼운 포권으로 백연의 예를 받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폐관에 들어가기 전이라면 그럴지도 모르나, 지금은 그 말이 틀렸다고 해야겠소.”

나직한 목소리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남검도 북도도 이미 장강의 물처럼 지나간 일. 하늘 위에 태양은 단 하나뿐이라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그에게서는 부처와 같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신감이 엿보였다.

등허리에 비스듬히 찬 대도 하나가 마치 몸의 일부처럼 보인다.

백연은 감탄과 탄식이 동시에 흘러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깨달았다.

“대단하군요. 폐관 수련이 성공적이었나 봅니다.”

“무공을 대성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쁜 일이오. 세상에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이 보이게 되니 말이오.”

“그렇습니까?”

“그렇소. 가령, 저 뒤에 산 아래에 모여있는 군기(軍氣)는 예전의 나라면 알지 못했을 것이오. 보이지 않던 게 이제는 보이게 된 것이지.”

산 아래에 모여있는 무림맹의 무인들을 말함이다.

뛰어난 무인이라도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거리에서 숨죽이고 있는데 고흠은 그걸 알아챈 것이었다.

명진 도장이 “무량수불.”이라며 도호를 되뇌었다.

수뇌부만의 회담이지만, 무림맹은 무인들을 매복시킨 셈이 되어버렸다.

속셈이 뭐냐고 추궁당해도 할 말이 없다.

부끄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강호에 무림맹과 적양문이 회담을 갖는다는 소문이 크게 나서, 온갖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렸습니다. 지금도 보는 눈이 많습니다. 그들을 막느라 모인 것이니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괜찮소. 무림맹의 무인들이 수백이 있든, 수만이 있든 상관하지 않으니 신경 쓰지 마시오.”

무림맹의 무인이 수만이나 있어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니.

그 자신감이 광오할 정도다.

명진 도장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는데, 백연은 도리어 사람 좋은 웃음을 허허 터뜨렸다.

“과연 그 자신감! 무공을 대성하셨으니 보일 수 있는 것일 테지요. 무공을 대성하신 게 정말로 부럽습니다. 적양문주.”

“일해검의 검술 또한 그리도 대단하다던데 부러울 게 뭐 있겠소.”

“제가 익히는 무당의 무공은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적양문의 무공은 이미 끝을 보았다니 어찌 부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흠이 입을 꾹 다문다.

칭찬처럼 보이지만 칭찬이 아니다.

무당의 무공은 깊이가 깊어 끝이 없으나, 적양문의 무공은 깊이가 얕아 금방 대성했다는 뜻이 아닌가.

“무당의 태극권이 이화접목의 절기라던데, 일해검이 말로도 태극권을 쓸 수 있을 줄은 몰랐군.”

“과찬이십니다. 대성하려면 아직 멀었지요.”

뜻밖의 한 방을 먹은 고흠은 헛웃음을 흘렸다.

고흠은 자신만만했고 백연은 예를 갖추고 있지만 만만치는 않다.

두 사람 간의 첫인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래서, 회담은 어디서 하는 것이오? 저 안인가?”

“그 전에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연은 사람 좋게 웃던 표정을 지우고 진지하게 경고했다.

“오늘은 사람 대 사람으로서 적양문주를 뵙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어떠한 분쟁도 없으며, 평화롭게 앞날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거라고. 그리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고흠은 말없이 백연을 응시했다.

태양 두 개를 박아 넣은 듯 강렬한 시선이, 백연의 물처럼 담담한 시선과 마주했다.

찰나의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흘러갔다.

“그 누구도 적양문을, 그리고 나 태양염왕을 강제할 수는 없소.”

백연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허나, 일단 대화는 나눠 보지. 객잔의 주인도 한번 보고 싶고.”

고흠은 소매를 한 번 펄럭인 뒤 뒷짐을 진 채 객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내해 주시겠소?”

“들어가시지요.”

백연이 먼저 들어가고, 그 뒤에 고흠이 따라 들어갔다.

객잔 내부에는 원래 있던 탁자와 의자들을 모두 빼 버린 뒤 커다란 원형의 탁자 하나만을 놓아 둔 상태였다.

안으로 들어온 두 명의 손님을 한 사람이 맞이해 주었다.

“두 분, 풍운객잔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깨끗한 백색 창의를 입은 장기린이 정중하게 인사하며 자리를 권했다.

백연은 장기린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한 뒤 순순히 탁자 쪽으로 다가갔지만, 고흠은 움직이지 않았다.

입구를 등지고 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고흠은 믿기지 않는 듯한, 의심 가득한 시선을 장기린에게서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엔 탐색을, 그 후에는 믿을 수 없다는 불신, 그리고 그 후에는 강한 호승심을 드러냈다.

“손님.”

장기린은 다시 한 번 자리를 권유했다.

“앉으시는 게 어떻겠소?”

“내가 누군지 아시오?”

고흠은 대뜸 그렇게 물었다.

그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두 눈을 지그시 감더니 그 후에야 감정을 갈무리했다.

“적양문의 문주라고 들었소만.”

“맞소. 내가 적양문의 문주 고흠이오. 이십 년 전에도 문주였고, 지금도 문주지.”

고흠은 그 말만을 한 뒤 천천히 움직여 자리에 앉았다.

장기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을 안내한 뒤, 애초의 계획대로 주방에 손짓을 해 신호를 보냈다.

강운찬을 시작으로 이태산과 태성천이 각자 소반을 받쳐 들고 요리를 옮겼다.

커다란 탁자 위로 강운찬이 한껏 솜씨를 부린 요리들이 하나둘씩 올라왔다.

오향장육, 어향육사, 당초소배골을 비롯해, 흔히 저장 요리로 불리는 항주에서 유명한 수많은 요리가 나왔다.

용정차로 새우를 볶은 용정하인(龍井蝦仁), 초어를 익혀 새콤달콤한 양념을 부은 서호초어(西湖醋魚)도 나왔다.

손재주도 부려서 당근으로 조각한 용과 숙주나물을 쌓아서 만든 호랑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을 뽐냈다.

고소한 기름 냄새와 함께 풍기는 신선한 요리의 향기는 누가 봐도 최고급의 느낌을 주었다.

강운찬의 실력을 미리 알고 있었던 백연조차 탄성을 발하며 감탄했을 정도다.

“회담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식사도 하는 거였소?”

고흠은 흥미롭게 요리를 보다가 대뜸 물어왔다.

“사람 대 사람의 만남이라면 좋은 음식과 술이 빠질 수는 없지요.”

백연은 미리 준비해 온 술을 품에서 꺼내며 말했다.

“오량액입니다. 무림맹 본당 마룻바닥 아래 묻혀 있던 이십 년이 넘은 세 병의 술 중 하나지요.”

“귀한 술이로군.”

고흠은 사양하지 않았다.

백연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 병을 넘겨주었고, 고흠은 그 술을 잔에 넘치도록 부었다.

“아까운 술이 넘치겠습니다.”

“난 욕심이 많다오. 그런데 삼십 년을 참았지.”

잔을 다 채운 술이 마침내 넘치려는 순간, 보이지 않는 힘이 술병 위에 술을 붙들어 놓았다.

우우웅―.

백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술을 따르는 고흠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고흠은 술잔 위로 또 하나의 술잔을 올려놓은 것만큼이나 술을 따라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기둥처럼 불쑥 솟아오른 술의 모습은 신기하면서도 기괴했다.

“하남 무림까지요.”

“무엇이 말입니까?”

“우리 적양문이, 하남까지만 갖겠소.”

천인공노.

천지가 뒤집힐 발언이다.

하남 무림이 어떤 곳인데, 그곳까지만 갖겠다는 걸 선심 쓰듯 말하는가.

고흠은 허공섭물의 묘리를 숨 쉬듯 사용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는 술 기둥이 불룩 솟아오른 술잔을 들고 건배를 준비했다.

“회담을 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적양문주는 선전포고를 하러 오셨군요.”

백연은 침음하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둥실 허공으로 떠오른 오량액병이 천천히 백연에게로 날아왔다.

백연은 건배를 하지 않고 술잔의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옆에 둥둥 떠 있던 술병은 백연이 술잔을 비우자마자 그 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마치 옆에 누군가 서 있다가 술을 따라 주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저는 욕심이 그리 없는 사람이지만, 딱 하나 지키려는 게 있습니다. 상대가 두 잔을 마시면, 저도 두 잔을 마셔야 한다는 주도(酒道)이지요.”

백연은 두 잔째의 술잔을 들어 올렸다.

일해검 백연.

비록 평소에 온화하고 늘 자신을 낮추는 모습만 보였으나, 강직하고 정의로운 성정을 갖췄기에 무림맹주가 된 사람이었다.

사파의 위협에 머리를 숙인다면, 무림맹주의 자격이 없다.

당당하게 자신에게 대응하는 백연을 보며 고흠이 씩 입꼬리를 올려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주량이 약한 자의 주도만큼 꼴사나운 것도 없지.”

“제가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아직까지 술이 약하다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재밌군. 그럼 오늘 듣게 되면 처음이라는 건가.”

고흠과 백연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술잔을 들이켰다.

“무림맹은 우리 적양문을 막을 수 없소.”

탁.

빈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적양문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움직이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한 자신감은 화를 부를 것입니다. 적양문주.”

“구파일방이 강호 무림을 영도하던 시대는 끝났소. 이제는 적양문의 시대요.”

“정말 적양문이 그 정도로 강하다 생각하십니까?”

“물론.”

“하남을 지키기 위해 정도(正道)의 수많은 무인이 구름처럼 몰려올 것입니다.”

“적양문의 깃발 앞으로도 사마의 무인들이 모여들어 천지를 진동시키겠지.”

백연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북원은 강성했으나, 이 땅을 백 년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몽골.

칸의 군대가 세상을 호령했으나, 그 나라는 중원을 고작 일백 년도 다스리지 못했다.

“패권이란 원래 그런 것이오. 한때나마 세상을 품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정녕 정사대전을 일으켜야 만족하시겠습니까?”

“그러지 않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인데 무슨 소리요?”

고흠은 자신의 턱을 손으로 매만지며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남 무림을 내달라는 것이 그리도 무리한 요구인가?”

“물론입니다. 하남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소림?”

고흠은 코웃음 쳤다.

강인한 성정.

천하를 오시하는 고수가 되어 범과 용 같은 무인들을 휘하에 둔 지금, 무림의 태산북두라고 해 봤자 한낱 절이 눈에 차겠는가.

“소림이 지금도 무림맹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군.”

고흠의 의미심장한 말에 백연이 인상을 찌푸리는 찰나, 고흠은 몇 걸음 떨어져 있던 장기린에게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풍운객잔의 주인.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장기린은 물끄러미 고흠을 바라보았다.

“나의 생각을 묻는 것이오?”

“그렇소. 내가 하남 무림을 내달라는 주장을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군.”

백연은 인상을 찌푸렸고, 고흠은 도전적으로 장기린을 바라보았다.

어떤 말이라도 받아치겠다는 듯 고흠은 전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남을 내주라고 하면 그것 보라면서 백연을 압박할 것이고, 하남을 내줄 수 없다고 하면 장기린과 한판 붙기라도 할 기세다.

장기린은 무심하게 그런 고흠을 바라보다가 툭 던지듯이 내뱉었다.

“풍운객잔의 주인으로서 말하자면, 귀한 요리가 식고 있소. 후회하기 전에 어서 드시오.”

고흠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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