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16화 (545/686)

17권 14화

제35장 절대중립(絶代中立) (14)

“지금 천하 무림의 패권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보다 요리가 더 중요하단 말이오?”

고흠은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는 듯했다.

진정으로 당황한 심정이 솔직하게 드러났다.

“그렇소.”

장기린은 무표정하게 요리를 가리켰다.

“요리로 천하제일이라 불리던 용화성 대령 숙수가 탐을 내던 숙수가 바로 우리 풍운객잔의 주방을 맡고 있소. 그 친구가 며칠 전부터 재료를 준비해서 만들어 낸 요리들이지.”

“허어.”

“따뜻할 때 먹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오.”

장기린은 자신만만했다.

간만의 큰 행사라며 강운찬은 열정을 불태웠다. 재료를 준비하고, 차려 낼 때는 그릇도 중요하다면서 웬일로 비싼 그릇까지 사 왔다. 지금 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요리들이 바로 그 정성을 다한 작품들이다. 아침잠을 줄여 가며 준비한 요리가 맛이 없을 리가 없었다.

“믿기지가 않는군.”

고흠은 요리가 정말로 맛있나 믿기지 않는다는 건지.

아니면 장기린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건지.

내심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어디 그 정도로 자신할 만한 것인지 먹어 보겠소.”

맛이 없기라도 하면 객잔에 불이라도 지를 것처럼 분위기가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젓가락을 들어 올린 고흠은 미간을 찌푸렸다.

많은 요리 중 어떤 것을 가장 먼저 먹을지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오향장육, 어향육사, 당초소배골, 용정하인, 서호초어.

잠시 허공을 유영하던 젓가락이 그중에 서호초어에 꽂혔다.

고흠은 생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가장 좋아하는 건 씹는 맛이 있는 질긴 말고기이며, 평소에 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생선은 그리 자주 보지도 않았다.

‘비린내 나는 생선이 맛있어 봤자지. 이딴 게 그리 자랑할 만한 맛이냐며 망신을 주마.’

고흠은 생사대적의 무공을 평가하듯 깐깐한 마음이었다.

미리 칼집이 나 있던 생선의 뱃살이 크게 한 점 떨어져 나왔다.

검붉은 양념이 걸쭉하게 흘러내리는 것을 기다렸다가,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탱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탄력적인 생선 살의 촉감이 느껴졌다.

입에 닿자마자 서호초어의 초(醋)가 식초 초자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시큼한 향.

혀는 물론이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번개가 치는 듯한 새콤함이 온몸을 관통했다.

강렬했지만 불쾌하지 않다.

코를 벌름거리고 입안에 침이 돌게 만드는 정도의 입맛을 돋우는 새콤함이다.

그 후에는 살짝 매콤하면서도 달콤하기도 한 간장양념의 맛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입안을 가득 채웠다.

처음에는 살점이 살아 있는 것처럼 탱탱했는데, 막상 이빨로 씹으려니 몇 번을 씹기도 전에 물처럼 부드럽게 풀어져 양념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아차 하는 순간 이미 풀어진 살점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꿀꺽.

완전히 삼키고 나니 자극적인 양념의 맛은 다 날아가고 생선 살이 본연에 품고 있던 고소한 기름기와 은은한 불 향만이 남았다.

고흠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입안에 있던 것이 없다.

어린 시절 쫄쫄 배를 곯다가 있는 돈을 다 털어서 만두 하나를 먹었을 때 같은 허망함과 아련함이 밀려왔다.

“이게 뭔가?”

고흠의 목소리가 떨렸다.

“비리지가, 않다.”

어느새 트집을 잡아 비난하려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고흠은 자존심이 높은 사파의 거물이지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아니다.

북방의 맹주 태양염왕이 비리지 않은 음식이 비리다고 타박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운찬.”

음식의 반응을 지켜보던 장기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 쪽으로 손짓을 했다.

“예! 부르셨습니까?”

이미 주방에서 몇 번이나 얼굴을 내밀며 손님들의 눈치를 살피던 강운찬이 기다렸다는 듯이 뛰쳐 나왔다.

“생선 요리에 대해 손님이 궁금해하신다.”

“아! 서호초어를 말씀하시는군요! 서호초어는 항주 서호를 대표하는 요리지요. 숙수전진(叔嫂傳珍)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남편을 억울하게 잃은 형수가 시동생에게 전한 비법이라는 뜻입니다. 관료가 되어 복수하려는 시동생에게 이 요리는 달지만 신맛이 섞여 있듯, 출세를 해서도 시린 고통을 잊지 말아 달라는 당부의 뜻이 담겨 있지요.”

운찬은 기다렸다는 듯이 서호초어에 얽힌 고사를 줄줄이 읊어 댔다.

“출세해서도 시린 고통을 잊지 말라…….”

고흠이 감탄하며 중얼거리자, 운찬은 신이 나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서호초어는 본래는 쏘가리나 잉어로 요리를 많이 합니다만, 손님께서 북방에서 오신다기에 뼈가 많으면 안 될 것 같아 숭어로 준비해 봤습니다. 숭어는 지금이 철이라서 살이 많이 올랐지요. 기름이 잔뜩 낀 게 고소하고 맛이 좋아서 육고기처럼 드시기에 편하셨을 겁니다.”

손님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숙수의 기본이었다.

고흠은 잠시 말을 잃고 침묵을 지켰다.

운찬은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맛이 괜찮으셨습니까?”

고흠은 폐부에서 끄집어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먹을 만하군.”

“흡.”

고흠은 맞은편에 앉은 백연을 노려보았다.

백연은 웃음을 멈출 수 없다는 듯 서호초어를 젓가락으로 집어 올린 채 입가를 씰룩거렸다.

“강 숙수. 최고요. 이건 정말 황실에 진상되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소.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맛을 낼 수 있는 것이오?”

“예? 아뇨, 하핫, 으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강운찬은 누가 봐도 기분이 좋은 얼굴로 굽실거리며 겸손을 표했다.

“사파의 맹주인 태양염왕이 저 정도로 맛을 표현했다면, 그건 너무 맛있어서 무릎을 꿇고 부복할 만한 맛이라는 뜻이니 속상해하지 마시오.”

고흠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를 갈 듯 말했다.

“백 맹주, 생각보다 말이 가벼운 사람이로군.”

“허헛, 제 말이 틀렸습니까?”

고흠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가 난 듯 손을 뻗어 허공섭물로 오량액 술병을 끌어와 한 잔을 따라 들이켰을 뿐이다.

“크흠.”

고흠은 술로 입을 헹군 뒤, 다시 한 번 서호초어를 맛보았고, 그 맛을 끝까지 음미하였다.

지그시 눈을 감았던 그에게서 신음이 길게 흘러나왔다.

“맛있군.”

패배하여 분하다는 듯, 이를 갈며 하는 칭찬이다.

당연히 강운찬은 뛸 듯이 기뻐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고흠의 젓가락질이 점점 빨라졌다.

생전 비려서 생선은 쳐다도 보지 않던 자가, 서호초어를 미친 듯이 먹고 있는 것이다.

강운찬이 미리 뼈를 발라 고기를 펼쳐 두길 잘한 일이었다.

고흠은 예의도 제쳐 둔 채 생선을 뒤집어 가며 먹을 정도로 서호초어에 빠져 있었다.

“으음.”

서호초어의 살점이 바닥나자, 그는 아쉽다는 듯 젓가락을 망설이다가 이번에는 오향장육을 집어 올렸다.

그는 이것만큼은 맛이 없을 거라는 듯, 또다시 도전적인 시선으로 얇게 썰어 놓은 오향장육을 노려보다가 입에 집어넣었다.

“으으음!”

신음이 길게 흘러나온다.

차갑게 식힌 고기가 주는 탄력이 그의 입을 또다시 즐겁게 만들었다.

고흠은 이젠 숫제 화가 난 얼굴이었다.

분기탱천한 것 같은 표정인데, 젓가락질은 숨 쉴 틈도 없을 만큼 빠르게 계속되었다.

그는 오향장육에 이어서 어향육사에도 손을 뻗었다.

돼지고기를 실처럼 가늘게 썰고, 야채와 함께 볶아 낸 요리를 씹는 순간, 객잔 안의 사람이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아삭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 요리들 또한 항주 제일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나?”

고흠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백연은 호탕하게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게 평가를 묻는다면 나는 단호하게 항주 제일이라고 말하겠소만, 그건 공인된 이름은 아닙니다.”

“소면은 항주 제일이라 들었는데?”

“나찰마도에게 들은 모양이군요. 그건 맞습니다. 명실공히, 항주 제일의 칭호를 받은 소면이 맞지요. 대령 숙수께 받은 증서도 있지 않았습니까?”

강운찬은 저러다 머리가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될 만큼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있습니다. 제가 잘 때마다 품고 자는 보물이지요.”

“하핫! 그럴 만도 하지요. 강 숙수, 혹시 소면도 먹어 볼 수 있겠습니까? 여기 계신 적양문주께 항주제일소면의 맛을 보여 드리고 싶군요.”

“예? 으음, 원래는 항주반면(杭州拌面)을 내올 생각이었는데, 예. 그럼 소면으로 내오겠습니다.”

주방으로 사라진 강운찬은 반 각의 시간이 지난 뒤 소면 두 그릇을 조심스레 소반에 받쳐서 직접 들고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소면을 앞에 둔 고흠은 마치 생사대적을 만나기라도 한 듯 얼굴이 심각했다.

후룩―.

노란빛이 감도는 면을 청경채와 함께 입에 집어넣은 고흠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아예 그릇을 들고 국물과 함께 면을 먹기 시작했다.

고요한 객잔 안에서, 두 사람이 소면을 먹는 소리만이 음악처럼 들려왔다.

탁!

바닥이 보일 정도로 국물까지 다 먹어치운 고흠이 젓가락을 거칠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너무 맛있어서 화가 나는군.”

“허허!”

백연은 큰 소리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떻습니까? 회담 장소를 풍운객잔으로 정한 이유가 있지요?”

“분하지만 이런 음식은 먹어 보질 못했소.”

소면의 맛에 아직도 빠져 있는 고흠을 향해 장기린이 따뜻하게 데운 차를 내밀며 말했다.

“풍운객잔은 중립을 지키는 곳이오. 정파든 사파든 이곳에서는 그저 다 같은 손님일 뿐이지. 무림의 정세에 대해 대답할 수는 없지만, 그저 이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자 한다면 언제든 환영하겠소.”

고흠은 강렬한 눈빛으로 장기린을 뚫어져라 응시했고, 장기린은 물처럼 담담한 모습으로 그 모든 기세를 받아들였다.

“허.”

고흠은 탄식했다.

활활 타오르는 정오의 태양 같던 그가 천천히 기운을 갈무리했다.

“음식이란 대단하군. 맛있는 걸 배부르게 먹으면 사람이 솔직해지는 모양이야.”

굶주림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강퍅하고 날카로우며, 사람으로서의 모든 여유를 앗아 가는 것이 배고픔이다.

음식의 무서움이 거기에 있다.

반대로 지극히 맛있는 음식으로 채우는 포만감은, 모든 욕구를 채워 사람을 부드럽게 만드는 법이다.

“붉은 악귀.”

고흠의 담담한 말 한마디가 장기린에게로 향했다.

“이십 년 전, 당신의 존재가 우리 적양문을 살렸소.”

그때 적양문이 장기린의 존재를 모르고 북천맹으로 향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대의 거악(巨惡)들처럼 북천맹주에게 왕의 칭호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붉은 악귀.

세간에 무쌍귀라 불리는 무신과 싸우는 방패가 되어야 했을 터.

“적양문은 붉은 악귀의 힘에 대해 알고 있었소. 그 덕분에 살아남았지만, 한편으론 그 지식이 우리를 만리장성 같은 거대한 벽으로 가두었지.”

그 후 적양문의 무림행의 기준은 붉은 악귀가 되었다.

어디선가 붉은 악귀가 나타나더라도 무사할 수 있을 힘을 기르자는 게 적양문 문주의 의지며, 모두의 총의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천하 무림을 오시할 것이라 꿈꾸며 기다린 세월이 고흠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후로 이십 년이 흘렀소. 천하의 일미를 배불리 먹었으나 그걸로 만족하고 돌아가기엔 세월이 너무 길구려.”

고흠이 일어선다.

평범한 체구지만, 극한까지 단련된 강철 같은 무인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모든 무력을 드러냈다.

후우웅―.

객잔 한편에 꽂아 둔 향불이 갑자기 기름이라도 부은 듯 활활 타올랐다.

“적양문의 무인들이 소림을 포위하고 있소.”

백연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고흠은 극단의 양기(陽氣)를 태양처럼 뿜어내며 장기린을 향해 정중하게 손을 모았다.

“대결을 요청하오. 붉은 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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