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권 15화
제35장 절대중립(絶代中立) (15)
“나와 대결을?”
설마하긴 했지만 정말로 이야기가 그쪽으로 튈 줄이야.
묵묵히 생각에 잠긴 장기린을 향해 고흠은 쐐기를 박았다.
고흠은 손가락으로 백연을 가리켰다.
“중립이 쉬울 거라 생각하시오? 천만에. 진정 힘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게 중립이오.”
“내가 지금 이 순간 일해검을 죽이겠다고 하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이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백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적양문주, 우린 평화로운 해결책을 찾기 위해 회담을 하러 온 겁니다.”
“가식적인 말은 하지 마시오. 평화로운 화합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더구나 내가 왜 풍운객잔이 정한 규칙을 따라야 하는가? 누가 나를 강제하는가!”
북방의 맹주.
사파의 기둥인 태양염왕 고흠의 일갈이었다.
“일개 객잔의 주인이 감히 무림맹주와 내가 분란을 일으킬 수 없다고 한다. 이 세상 누가 그 말을 수긍하겠는가?”
번쩍.
고흠의 눈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분명히 말하겠소. 붉은 악귀. 당신이 대결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 부하들은 소림을 불바다로 만들 것이고, 난 내 눈앞에 있는 무림맹주를 죽여서 지금이 적양문의 천하라는 것을 세상에 알릴 것이오.”
시작은 부탁이었으나 협박으로 끝나고 말았다.
장기린은 고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힘이 없는 자는 중립을 주장할 수 없다.
풍운객잔을 중립의 땅으로 만들고 싶다면 먼저 아무도 트집을 잡을 수 없는 힘을 보이라는 말이다.
“그런가.”
장기린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는 끝났소?”
“천하일미를 충분히 먹었소.”
“그렇다면 손님 대접은 충분히 했군. 따라오시오. 대결을 받아들이지.”
백연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는데, 두 사람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객잔의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다니.”
설마 적양문주 고흠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나올 줄이야.
백연은 객잔 밖에서 기다리는 명진 도장에게 소림의 상황을 알아보라고 전한 뒤, 재빨리 두 사람을 쫓아갔다.
***
삼산현은 이름 그대로 세 개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흑산, 백산, 영산.
가운데에 위치한 녹음이 푸르른 산이 검선이 거주하는 영산이고, 우측에 계절과 상관없이 늘 구름이 끼어 있고 사시사철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 산이 백산이다.
장기린은 그중 흑산으로 향했다.
가파른 경사가 생길 즈음부터는 바닥에 풀 한 포기 안 자라는 죽음의 땅이 펼쳐지자 고흠은 신기해했다.
“흥미롭군. 옆 산과 이렇게나 다를 수가 있는 건가?”
뒷짐을 지고 천천히 올라가는 듯하지만, 두 사람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신형이 앞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장기린은 흑산의 정상에 만들어진 네모난 석조 제단 같은 곳에서 창을 들어 올렸다.
고흠 역시도 등에 차고 있던 대도를 뽑아 들었다.
“드디어 붉은 악귀를 마주하는구나.”
고흠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가 쥔 대도의 손잡이 끝에 박혀 있는 붉은색 보석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였다.
고오오―.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극강의 양기가 고흠의 몸 주변에 일렁거리는 아지랑이를 만들었다.
공기가 변한다. 작열하는 태양이 눈앞에 있는 듯했다. 주변에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양민이 있었다면 숨이 턱하니 막혀서 바닥을 굴렀을 것이다.
이글이글 끓는 공간.
고흠의 평범한 체구가 거인으로 보일 만큼 그의 존재감은 막강했다.
“나는 사파의 태양이오.”
펑―.
입이 바짝 마를 만큼 주변의 공기가 말라붙다 못해 허공에서 불꽃이 화르륵― 타올랐다가 사라졌다.
펑. 펑. 펑.
고흠의 몸 주변이 극양진기로 일렁거릴수록 주변에선 작게 공기가 터져 나가는 빈도가 잦아졌다.
“당신을 태우고, 천하를 얻겠소. 막을 수 있다면 나를 한번 막아 보시오.”
고흠이 들고 있던 대도의 칼날이 빨갛게 보일 지경이다.
장기린은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신의 애창 진청룡을 들어 고흠을 겨누었다.
스윽―.
공기가 바뀐 것이 아니다.
여전히 주변은 뜨겁고, 열기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장기린은 그 안에 완전히 동화되어 있었다.
자신만의 세상은 변함이 없다는 듯, 차분한 시선으로 고흠을 응시할 뿐이다.
“풍운객잔에 분쟁은 없소.”
콰아아앙―――.
고흠이 수직으로 내리친 참격이 장기린의 진청룡과 만나 폭발하는 듯한 굉음을 터뜨렸다.
구구구구―.
흑산의 땅이 흔들리고, 허공의 구름이 절반으로 쪼개졌다.
화르륵―.
창과 대도가 마주친 지점을 경계선으로 삼아, 태양염왕 고흠이 있는 쪽에선 불꽃이 거세게 타올라 실제로 열기를 내뿜었다.
극양무극도(極陽無極刀).
비폭참(飛暴斬).
콰과과광―.
고흠이 칼을 비틀어 다시 한 번 내려치는 순간, 장기린의 주변을 터뜨린 열기가 거꾸로 역류해 엄청난 폭압을 선사했다.
고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보아라.”
보아라.
이것이 태양염왕의 극양무극도다.
호선을 그리며 내리친 일격이 땅을 가르고 하늘을 찢었다.
사방의 땅거죽을 뒤집고, 몰아치는 경력들이 천지를 뒤집어 놓았다.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면 한 줌의 핏물로 변했을 듯 모든 것이 비틀렸다.
화르르륵―.
불꽃이 타올라 엄청난 열기를 내뿜었음은 덤이다.
장기린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건곤조화신공을 끌어 올렸다.
청명경 일만자의 경전이 마음을 다스리고, 건곤조화신공의 신묘함이 주변의 자연기를 장기린과 융화시켰다.
고흠이 보여 준 극양무극도의 막강함도, 그로 인해 만들어진 뜨거운 염열지옥도 모두 다 잊었다.
남은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
하늘. 땅.
나.
진청룡 창 끝에 고요한 전의가 모여 드니, 그건 이미 심즉창이라.
쿠웅!
장기린이 진각을 내딛자 펄펄 들끓던 땅이 한순간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땅에서 치솟은 반탄력이 온몸을 회전시키고, 군더더기 하나 없는 동작으로 내찌른 창끝이 고흠의 칼날을 옆에서 때렸다.
일연적룡무.
제일식.
쒜에에에엑――.
쿡 하고 칼날을 가볍게 때리는 순간, 장기린의 뒤쪽에 있던 모든 공기가 그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거대한 바람이 장기린에게 조종이라도 받는 듯했다.
고흠이 내뿜던 모든 극양의 힘이 순식간에 반탄력이 되어 칼날로 되돌아와 엄청난 부담을 만들어 냈다.
“흐읍!”
칼날이 부러질 듯 휘청거리자 고흠은 진기를 더 불어넣고 자신의 몸을 강하게 지탱하면서 버텨 냈다.
장기린의 일격은 막강했고, 극양무극도의 비폭참이 거의 단박에 무력화되었다.
“허허헛!”
고흠은 즐거워했다.
당연하다는 듯.
이래야 적양문을 가로막고 있던 지상 최대의 방벽이 맞다는 듯 기꺼워했다.
“나찰마도가 이마를 얻어맞은 게 이것이로군.”
붉은 악귀의 일연적룡무에 맞서, 고흠은 곧바로 극양무극도의 절초를 끌어냈다.
극양무극도.
염열수라참(炎熱修羅斬).
후우웅― 후우웅―.
허공에서 팔(八)자를 그려 낸 고흠의 칼이 쥐불놀이처럼 허공에 긴 불꽃의 잔상을 만들었다.
활활 타오르는 칼을 든 고흠은 마치 지옥의 수라와 같았다.
장기린의 속공을 밀어붙이기 위해, 고흠의 극양무극도가 수십 번의 칼질로 허공에 거대한 장벽을 세웠다.
‘강하군.’
장기린은 고흠의 자신감을 이해했다.
이 정도의 경지.
은자촌 노인들 못지 않은 막강한 힘이다.
칼 하나로 천하에 불벼락을 내릴 수 있는 자가 무엇이 두려울까.
천하를 오시할 만한 자신감이 있을 법도 했다.
콰드드득―.
밖으로 새어 나간 힘의 파편만으로도 땅이 뒤집히고.
고오오오―.
뜨겁게 타오른 극양의 기운이 펑펑 공기를 터뜨리며 위협적인 불꽃을 피워 올렸다.
고오오―.
불꽃의 잔상을 남기며 수십 번의 칼질이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은 마치 커다란 목책에 불을 질러 통째로 밀어붙이는 것과 같았다.
완벽한 방어이자, 그 자체로 강력한 공격이다.
터엉!
장기린의 진각이 한 번 더 땅을 뒤흔들었다.
돌아가는 몸.
양손으로 붙잡은 진청룡 창날이 천천히 일직선으로 고흠을 향해 쏘아졌다.
일연적룡무.
제삼식.
심검의 묘리를 담은 창격이 고흠의 염열수라참을 정면에서 박살 냈다.
후우웅―.
고흠은 염열수라참이 깨지는 순간, 망설이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비폭참으로 변형시켰다.
뭉쳐 있던 힘이 흩어지고, 거기서 시작된 뜨거운 열기가 장기린을 향해 폭압을 밀어붙였다.
찌익―.
장기린의 어깨죽지 부근이 찢겨나갔다.
화르륵―.
장기린은 불이 붙은 어깨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려서 불을 껐다.
“쿨럭.”
그 대가로 고흠은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오히려 더욱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적염승천공을 극성까지 끌어 올렸다.
“흐하하핫! 이걸로는 부족하오! 더! 더 힘을 보여 주시오!”
화아아악―.
들끓는 열기가 마침내 눈에 보이는 선명한 화염으로 변했다.
온몸에서 불꽃을 피워 올리는 그는 그야말로 구천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마귀처럼 보였다.
염열장. 극양무극도.
흑산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 것 같은 기세로 욱일승천하는 고흠을 향해, 장기린은 조용히 창을 갈무리했다가, 좌장을 펴서 앞으로 내밀었다.
창술의 기본인 거창 자세.
노리는 곳은 미간.
“그렇다면 보여 주겠소.”
장기린의 손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
“저게 정말 사람의 무공입니까.”
어느새 백연의 곁으로 다가온 명진 도장은 산 전체를 활활 태우고 있는 태양염왕의 극양진기를 보며 경탄했다.
하늘이 쪼개지고 구름이 갈라졌다.
뜨거워진 열기로 인한 상승기류가 얼마나 강력한지, 오직 흑산의 위에만 구름이 사라져 있을 정도다.
그야말로 신화속 신들의 싸움 같은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북해의 빙궁이 빙백신기로 유명하듯, 이제는 적양문을 극양진기의 명가로 평가해야겠어. 저 힘은, 정말로 대단하군.”
백연의 평가는 타당했다.
저 정도의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절공이라면 팔파일방의 무공 못지않다.
이미 일대종사의 수준에 오른 자라는 뜻이다.
무림 강호의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될지도 몰랐다.
“오늘 이후로 적양문에 대한 강호의 평가가 바뀌겠지요. 무림맹이 싸웠다면 피해가 얼마나 컸을지…….”
명진 도장은 무림맹의 입장에서 냉철하게 싸움을 상상해 본 뒤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무난하게 막아 내는 풍운객잔의 주인은 대체…….”
“명진, 아무래도 정파의 결집을 좀 더 빠르게 진행하는 게 좋겠어.”
이번 일을 겪으면서 백연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정파의 힘을 순리대로 모으겠답시고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는 점이다.
세상은 이미 왕진과 흑시군의 부재를 눈치챘고, 강호 무림은 영웅과 악당들이 난립하는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멍하니 있다가는 당한다.
과거의 영광만 믿고 가만히 있다가는 시대의 뒤떨어진 토호처럼 누군가의 세력에 흡수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천무공자를 밀어 주실 생각이……?”
명진 도장은 말을 끝까지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찌릿한 직감이 그들의 마음속에 경종을 울렸다.
백연과 명진 도장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제운종을 펼쳐 풍운객잔의 입구로 뛰쳐 나갔다.
삼산현의 아래쪽에서 거대한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앞서 쏜살같이 다가온 무인 하나가 뛰어난 신법을 뽐내며 그들의 앞에 황급히 멈춰섰다.
“개방?”
누더기 옷에 매듭을 몇 개나 묶은 거지는 개방의 인물뿐이었다.
명진 도장이 다가온 거지와 안면이 있어 상대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섬여개!”
“명진 도장님을 뵙습니다.”
두꺼비처럼 생긴 거지.
섬여개는 숨을 헐떡이며 노래진 얼굴로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까 진인께서 여쭤보신 소림의 소식은 사실이 아닙니다. 적양문의 적화검대와 청화도대가 등봉현에 나타났던 것은 사실이나, 그 뒤 무서운 속도로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소림은 무사하고?”
“예.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허어.”
백연은 아연해하는 명진 도장을 제쳐 둔 채 손가락으로 삼산현 아래쪽에서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가리켰다.
“저들이 적양문인가?”
“무림맹주님을 뵙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빨리 소식을 전해 드리고자 급히 왔습니다.”
“고맙네. 방주께는 상황을 알려 줘서 고맙다고 전해 주게.”
“예!”
상황이 다급해졌다.
이유는 모르지만 적양문의 병력이 한 곳으로 급히 집결되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닐게 분명했다.
명진 도장은 품속에 갖고 있던 연흔전을 하늘을 향해 쏘아올렸다.
피이이잉―.
하늘에 길게 신호가 피어오르자, 삼산현의 반대쪽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림맹의 무인들이 일제히 풍운객잔 앞으로 모여들었다.
적화검대와 청화도대로 나뉘어진 적양문의 이대 세력이 풍운객잔에 도착하고.
그 반대쪽에선 백연과 명진 도장을 위시한 무림맹의 무인들이 기다리고 있어 팽팽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두 세력들 사이에서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것 같은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