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권 16화
제35장 절대중립(絶代中立) (16)
“이놈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역시 흉계를 꾸미고 있었구나!”
나찰마도 정옥상은 분을 삭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등봉현에서 붉은 악귀의 ‘동생’이라는 자를 만났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시도 쉬지 않고 뛰어온 보람이 있다. 풍운객잔의 모습을 보자 그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왜 무림맹 놈들이 객잔을 둘러싸고 있어! 이런 쳐죽일 놈들이!”
스릉―.
정옥상이 칼을 뽑아 들자, 청화도대 전체가 일제히 칼을 뽑았다.
무림맹이라고 가만히 있을 사람들이 아니다.
무림맹주가 그동안 농사나 지으면서 몸을 낮추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음지에서 활동을 이어 오던 무림맹의 무인들이 있었다.
대부분이 팔파일방의 속가 제자 출신.
깊은 인내심과 강인한 의지를 가진 무림맹의 정예, 집검대(集劍隊)가 일제히 검을 뽑았다.
“나찰. 저길 봐라.”
절영귀검 막하승이 가리키는 방향을 본 정옥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삼산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큰 이변이 벌어지고 있었다.
새하얀 백산, 녹음이 우거진 영산.
그리고 그 옆에, 바위산으로 보이는 흑산이 뜨거운 열기에 녹아 지글지글 끓으며 연기를 위로 풀풀 뿜어내고 있었다.
쿠구궁―.
콰앙!
“문주님!”
저만한 극양진기를 다루는 자가 고흠 말고 또 있을 리가 만무했다.
멀리 떨어져있음에도 엄청난 기운들이 부딪칠 때마다 공기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놈들, 무슨 짓거리를 한 거냐?”
“일단 진정하시오.”
백연은 엄중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우린 아무런 흉계도 꾸미지 않았소. 풍운객잔은 중립의 땅이오.”
“그런데 왜 저기서 문주님이 싸우고 있는 거요! 이 자리는 회담 자리 아니었나?”
“적양문주가 풍운객잔의 주인에게 대결을 청했소.”
정옥상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알아듣지 못한 것은 사정을 모르는 적양문의 무인들 뿐이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우리 문주님이 객잔의 주인한테 대결을 청했다고?”
“이런 씨불, 개소리하고 있네. 저것들이 우리 문주님을 업신여기는 거야 뭐야? 어디서 감히 객잔 주인을 태양염왕님께 갖다 붙여?”
한 번 풍운객잔에 왔었던 청화도대의 무인들 몇 명만이 사정을 알고 서둘러 그들을 진정시켰다.
“조용히 해. 모르면 가만히 있어, 여기 객잔 주인은 보통 사람이 아니야.”
“뭔 소리야? 객잔 주인이 누군데?”
“그런게 있어. 아무튼 엄청 강한 사람이다.”
차마 나찰마도가 일격에 기절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던 청화도대의 무인들은, 정옥상의 눈치를 보며 사람들을 달랬다.
“문주님께서 직접 대결을 신청하셨다고?”
정옥상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무림맹주 백연을 노려보았다.
“정말로 흉계가 아니란 말이오?”
“나찰마도. 그대도 잘 알지 않소? 내가 풍운객잔의 주인과 척을 질 것 같던가?”
“…….”
“풍운객잔은 정사마를 막론하고 중립의 공간이오.”
정옥상은 잠시 침묵하다가 서늘한 말투로 경고했다.
“분명히 알아두시오. 만약 문주님께서 잘못되면, 우린 살아서 돌아갈 생각이 없을 것이외다.”
“……그렇게되지는 않기를 바라고 있소.”
정옥상이 다시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 침묵을 지키자 누구 하나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멀리서 들리던 폭음이 잦아들었다.
멀쩡했던 산 하나가 펄펄 끓는 쇳물을 부은 것처럼 연기를 뿜어 대니 산신이 노한 듯 공포스러웠다.
화산이라는 것이 폭발하기도 한다던데,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저렇게 연기를 뿜어 대다가 산이 무너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한 사람의 힘이 지형조차 변화시키는 수준이라니.
지켜보던 모든 무인들이 태양염왕이 이룩한 무공의 경지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특히 객잔 주인과 싸운다는 말에 화를 냈던 자들은, 태양염왕이 저 정도의 힘을 쓰는데도 제압을 못하는 상대가 누군지 궁금해했다.
쿠구구궁―.
마치 유성이 떨어진 듯한 섬광이 번뜩이는 것을 끝으로 삼산현에 침묵이 돌아왔다.
무림맹과 적양문이 서로를 의식하며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억겁처럼 지나갔다.
“객주님.”
마침내 흑산에서 하산한 두 사람이 모두의 앞에 나타났을 때, 백연은 양팔을 벌려 그들을 환영했다.
무림맹주는 장기린의 의복이 온통 갈라지고 찢어지고 타들어 간 모습을 보며 깜짝 놀라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물론. 다친 곳은 없소.”
장기린은 주변의 지켜보는 시선을 의식하고 백연에게 공대를 했다.
모두가 수군거렸다.
태양염왕이 풍운객잔의 주인에게 대결을 신청했다던데 대결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적양문 사람들이 보기엔 태양염왕과 대결을 하고도 멀쩡하다는 사실이 큰 충격이었던 듯했다.
그들은 비교적 의복이 멀쩡해 보이는 태양염왕과 장기린을 번갈아 쳐다봤다.
얼핏 보기엔 장기린의 의복이 찢어지고 해져서 크게 손해를 본 듯하지만 정작 생채기가 난 것은 하나도 없다.
뒤따라온 고흠의 모습은 특이했다.
전체적으로 큰 외상은 없었으나, 이마에 마치 머리띠처럼 천을 하나 두르고 있었는데 거기서 피가 점점이 배어 나왔다.
그 모습에 모두가 눈을 부릅 뜨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산이 녹아내릴 정도의 싸움 끝에 생채기가 난 게 태양염왕뿐이란 말인가?
그리고 생사결로 끝나지 않고 저 정도의 상처로 마무리되다니.
서로 간의 격식 있는 대련이었을까?
아니면 한쪽과의 실력 차가 극심하게 났던 것일까?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태양염왕의 충실한 수하인 정옥상과 막하승이 서둘러 고흠에게 인사를 올렸다.
“문주님.”
“저희가 모시러 왔습니다.”
고흠은 두 사람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들이 왜 이곳에 있지?”
“그게…….”
정옥상은 어찌 설명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순순히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등봉현에 도착했더니 포구에 붉은 악귀의 동생이 있었습니다.”
“뭐라고?”
“미리 모든 것을 알고 저희를 기다린 것이지요. 그래서 함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우선 문주님을 구하기 위해 저희가 모든 병력을 이끌고 달려온 것입니다.”
명령에 대한 불복이라며 화낼 수도 있지만, 사실 나찰마도 정옥상과 절영귀검 막하승은 고흠의 명령에 의문을 표하거나, 마음껏 병력을 움직일 권한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평생을 적양문에 충성한 호법들이기에 가능한 행위다.
“이런.”
고흠은 그들을 탓할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백연에게 소림을 포위하고 있다고 협박했건만, 없는 일로 허세를 부린 꼴이 되고 말았지 않은가.
“동생을 보냈소?”
고흠의 질문에 장기린은 정말로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미간을 좁혔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런가.”
고흠은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 경지 이상의 무공을 겨루면,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 수 있게 된다.
장기린은 음모를 꾸미거나 거짓말을 할 성정이 아니었다.
“하늘이여. 아직 때가 아니란 말인가?”
고흠은 잠시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주.”
고흠은 대결에 있어 전력을 다했다. 그에 따라 결론을 내렸다.
“정사마를 막론하고, 우리가 싸울 수 없는 절대적인 중립 지대는 천하 무림에 이곳 풍운객잔 한 곳뿐이오.”
고흠은 풍운객잔이 절대적인 중립 지대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모든 이들이 놀랐다.
백연뿐만 아니라 사파의 맹주나 다름없는 적양문주 고흠까지 인정했다는 건, 전 무림이 풍운객잔을 중립 지대로 인정했다는 말과 같았다.
“바꿔 말하면 이곳에서만 싸우지 않는다면 풍운객잔의 주인도 개입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그렇지 않소?”
장기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 무림의 정세는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오. 그럴 자격도 없고.”
“그렇다는군.”
백연에게는 좋지 않은 이야기였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힘을 과시하던 고흠과 적양문의 무인들은, 풍운객잔만 벗어나면 무림맹을 공격하겠다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으니 말이다.
“위험한 말입니다. 적양문주. 정말로 정사대전을 일으키고 말 겁니까?”
“하북.”
“……예?”
“그 이상의 양보는 없소.”
적양문은 하북까지만 세력을 넓히고 관리하겠다는 소리였다.
백연은 난감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하북이라니.
어찌 생각하면 이미 북경 무림을 장악한 적양문 입장에선 인근인 하북 무림까지만 진출하겠다는 게 타당한 요구였다.
힘의 논리는 적양문의 편이니까 말이다.
다만 무림맹 입장에선 선뜻 수긍할 수가 없는 게, 하북에는 천하 오대세가 중 하나인 팽가가 있으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개방의 총타 또한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즉, 무림맹의 절대적인 우방들 중 중요한 두 개의 문파가 하북 무림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본능적으로 시선을 옆으로 힐끗 돌리니, 섬여개가 무림맹 무인들 틈바구니 안에서 당황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나도 아는 얼굴이로군.”
고흠이 손을 뻗자 섬여개의 몸이 마치 물건처럼 딸려 왔다.
“어어어?”
섬여개는 취팔선보를 밟으면서 도망가려 했으나, 바닥에 길게 족적이 남았을 뿐 무력하게 고흠의 앞으로 끌려왔다.
극한에 이른 허공섭물.
상단전의 묘용을 보여 주는 태양염왕의 경지가 보는 이들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두꺼비를 닮은 거지. 섬여개.”
“아, 예. 예.”
고흠의 뜨거운 눈빛을 감히 맞받기 힘들었던 섬여개는 부루퉁했던 볼이 해쓱해진 채 눈을 피했다.
“방주에게 전하라. 우리는 하북 무림을 관리할 것이지만, 개방을 적대하지는 않겠다. 물론 개방이 먼저 우리에게 이빨을 들이밀면 이야기는 다르다만.”
“으음, 개방은……. 양민이 피해를 본다면 좌시하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파이긴 하지만 마도가 아니다. 양민을 괴롭히는 일엔 관심 없다.”
섬여개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주께는 그리 전하겠습니다.”
“적양문에는 난민과 거지 출신이 많다. 거지들이 적양문에 들어오고 싶다면 그 또한 환영하겠다.”
“…….”
“불만인가?”
“아뇨, 하지만 개방의 거지는 옷을 잘 입고 좋은 음식을 먹더라도 거지입니다.”
섬여개는 끝까지 호기를 부렸으나, 고흠은 그저 피식 웃어넘겼다.
“팽가와는 따로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적양문에서 먼저 그들을 핍박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적양문주 고흠은 처음에 풍운객잔에 도착했을 때보다는 날카롭고 오만한 분위기가 많이 사라진 채였다.
장기린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와의 대결이.
아직 천외천의 경지를 넘어서진 못했다는 사실이 고흠을 다시 한 번 몸을 낮추고 힘을 비축하게 만들었다.
“어떤가? 무림맹은 우리가 하북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알겠습니다.”
백연은 인정했다.
고흠은 웃었고, 적양문의 문도들은 모두 가슴 벅찬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해가 지면 또 다른 해가 떠오르듯, 앞으로는 무림맹이 아니라 다른 곳과 이야기를 해야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미리 알고 계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지?”
“정도의 젊은 새싹이 자라고 있습니다. 나는 적양문의 힘을 인정하고 지금의 평화를 택했지만, 다음 세대는 어찌 될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백연은 천무련의 앞날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만, 고흠은 알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그때 가서의 일이지.”
다음 세대의 문제는 다음 세대가 처리할 일이었다.
무림맹은 큰 싸움이 싫어 하북을 내주면서 자존심을 챙기려는 것이리라.
고흠은 그리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풍운객잔의 주인. 많은 것을 배웠소.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다음에 다시 찾아오리다.”
적양문주 고흠의 정중한 포권은 적양문 문도들을 당황시켰다.
수백 명의 무인들이 황급히 고흠을 따라 똑같이 포권을 취했다.
“손님으로 찾아온다면 풍운객잔은 언제나 그대들을 환영하겠소.”
장기린의 담담한 답례와 포권은 또 한 번 주위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적양문주의 공손한 예가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일개 객잔의 주인이 보여 줄 도량이 아니기에 그 또한 호사가들의 입에 회자되기에 충분했다.
고흠은 적양문을 이끌고 장가구의 본파로 돌아갔다.
무림맹 또한 돌아간 뒤, 강호 무림에 한 줄기 바람처럼 소문이 퍼져 나갔다.
천하일통을 노리고 남하하던 적양문을 단 한 명이 멈춰 세웠다.
어떤 거대한 문파의 문주라도 이곳에선 분쟁을 일으킬 수 없다.
절대적인 중립.
그곳이 풍운객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