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19화 (548/686)

17권 17화

제36장 득이물유(得而勿有) (1)

투툭.

손바닥만 한 철판 위에 놓여 있던 지푸라기가 새빨갛게 변해 몸을 꼬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화섭자에 불을 붙인 것도 아니고, 밑에 아궁이가 있어 불을 때는 것도 아닌데 반짝이는 별을 가루로 만들어 뿌린 것처럼 지푸라기가 파바박 튀더니 불이 붙었다.

지푸라기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몸을 꼬았다.

그러다 불꽃이 피어오르는 그 순간.

푸화악!

철판 한가운데서 폭죽이 터지듯 끈적한 액체가 사방으로 튀어오른다.

액체는 뿌옇고 비릿한 향을 갖고 있었는데, 잘 익은 감이 땅에 떨어져서 터지듯 액체를 꽤 먼 거리까지 뿌려 댔다.

그뿐만이 아니라 액체를 태우면서 시작된 불꽃이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크기의 불덩어리로 변했다.

확― 하고 피어오른 불꽃은 열 걸음 밖에서도 그 열기로부터 몸을 피해야 할 만큼 강렬했다.

신화 속 용이 불꽃을 숨결처럼 내뱉으면 이런 모습일까?

확― 하고 피어올랐던 불꽃은 커진 것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작아져 진화되었다.

치이이―.

철판 위로 메마른 연기가 피어오른다. 천무공자 장소호는 입을 벌린 채 굳어 있었다.

“어때? 직접 보니까 어때? 소호 형. 어땠어?”

정체를 숨기고 은자촌에서 살던 황자.

지금은 천무련의 숨겨진 명장(名匠)이라 불리는 주기옥이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으음.”

소호는 신음하다가 오히려 되물었다.

“너는 뭐 이런 흉악한 걸 만들었어?”

“흉악하다고? 이게?”

“그래.”

소호는 탄식했다.

“도대체 철판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잘못 터지면 산 하나를 홀랑 태워먹는 거 아냐?”

“불이 붙는 물건 중에 안 그런 게 어딨어? 그게 매력이잖아. 순식간에 확― 커졌다가, 또 확― 꺼지는 불꽃.”

“으음, 강렬하긴 한데. 이런 거 갖고 있는 게 들키면 역모로 잡혀가는 거 아냐?”

소호는 자신의 어린 시절, 광 노인의 화기들을 이용해 싸울 때마다 왜 아버지 장기린이 그리도 심각한 얼굴로 안타까워했는지 그 심정을 실감했다.

“이건 너무 위험하네.”

동네 하급 관리가 보더라도 난리가 나서 펄펄 뛸 만한 물건이었다.

“뭐, 어때? 용식(龍息)은 화기도 아닌데 괜찮잖아?”

“용식? 용의 숨?”

“어. 이름이야. 잘 어울리지?”

“잘 어울리긴 하네. 그런데 뭐? 이게 화기가 아니라고? 누가 봐도 화약을 쓰지 않았냐?”

“쓰긴 했는데. 화기라고 하면 화포, 포탄. 뭐 이런 거잖아. 이건 아니지. 이건 그냥…… 장난감.”

“장난가암?”

주기옥은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소호는 어이가 없어서 웃어 버렸다.

“두 번 장난치다간 천무련을 홀랑 태우겠네.”

“아, 왜 이래. 옛날에 내가 알던 소호 형은 이렇게 고지식하지 않았어.”

“나도 늙었나 보다.”

“스물 몇 살밖에 안 됐으면서 늙은 척은.”

“됐어. 내 평가는 신기하긴 한데 무서운 물건. 장난으로 쓸 물건은 아냐. 그리고 아까 나온 액체는 백린이야?”

“맞아. 백검회가 쓰던 그거. 괜찮길래 활용 좀 해 봤어.”

“그런 건 또 어디서 났대?”

“광 영감이 만든 게 절반, 어디서 주워 온 게 절반.”

“얼씨구.”

주기옥은 아직도 개선할 점이 많다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마구 떠들었지만, 솔직히 소호의 귀에는 다 들어오진 않았다.

“요즘 배진화 아저씨랑 이것저것 배우고 있잖아. 그런데도 이런 ‘장난감’을 만들 시간이 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재미로 만드는 건데, 밤 좀 새면 어때?”

“대단하다. 너도.”

기분 좋게 웃는 소호를 향해 이번엔 주기옥이 질문을 던졌다.

“요즘 무기랑 각반들이 재고로 많이 들어오더라? 나한테 무기 좀 다듬어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도 많고.”

“이제 천무련도 제법 모양을 갖췄으니까. 무장도 해야지.”

“형은 원하는 게 뭐야?”

주기옥은 묻고 싶은 걸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다.

주기옥은 소호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원하는 거?”

“어. 자꾸 사람 늘리고, 무공 가르치고, 무기도 쥐어 주고. 뭘 하게? 나라라도 세울 거야?”

이 또한 주기옥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만에 하나 역모에 휩쓸리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건만.

주기옥은 그런 일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도 없었다.

“나라는 무슨.”

소호는 휘휘 손을 내저은 뒤, 가만히 생각하다가 답했다.

“난 그냥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야. 아니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다.”

“할 수 있는 일?”

“세상이 나한테 원하는 거. 나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야 하나?”

소호는 빙긋 웃었다.

거대한 강물의 흐름 속에 몸을 얹은 듯한 그 느낌.

온 세상이 이쪽으로 나아가라고 힘을 보태는 듯한 그런 느낌을 주기옥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인가.

“전혀 모르겠네.”

“시간 지나면 알게 될 거야.”

“나참, 늙은이처럼 굴기는. 그런데 형, 기분 좋아졌네?”

“내가?”

“한동안 세상 무너진 것처럼 심각하게 인상 빡 쓰고 살았잖아?”

“으음.”

소호는 턱을 긁적였다.

주기옥은 그리 느끼고 있었던가.

“언젠가는 알게 된다, 꼬마야.”

“내가 왜 꼬마야?”

“나보다 어리니까 꼬마지.”

풍운객잔.

은자촌.

조서인.

그리고 백설지.

굳이 말로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겉으로는 어엿한 청년이 된 주기옥이지만 소호가 보기엔 아직 은자촌에서 툴툴거리던 철없던 황족 꼬마의 모습에서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용식이든 뭐든 잘해 보라며 응원한 뒤 소호는 집무실로 돌아왔다.

집무실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소호는 이제 더 이상 스물두 살의 장소호가 아니다.

천무련의 련주.

수백 명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으로서 행동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련주님.”

개파식 이후 일할 때만큼은 소호를 직위로 부르는 섭주해가 산더미 같은 서찰 속에 파묻힌 채 소호를 반겼다.

“그렇게 파묻혀 있는데 숨은 쉬어져?”

“괜찮습니다. 뭘 이 정도 갖고. 이 정도면 비학문 때보다 훨씬 적은데요.”

“밥은?”

“대충 먹었어요.”

“잠도 잘 못 자는데 밥이라도 잘 챙겨먹어야지. 오늘 밖에 같이 놀러가서 맛있는 것 좀 먹을까?”

“꿈도 꾸지 마세요, 련주님. 그보다 오늘 결정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섭주해는 천무련주가 결정해야 할 서류들을 뭉텅이로 건넨 뒤, 이번에 천무련에 몇 명의 무인이 들어왔으며 배경은 어떤지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종심검문은 거절했다고? 왜? 위기니까 우리 도움이 필요한 거 아니야?”

“봉문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외부 활동을 끊고 내실을 기르겠다네요.”

“곧 흑시군의 지배가 끝나고 강호 무림의 황금기가 다가오는데 봉문이라니. 대세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많구나.”

“다들 생각이 다르니까요. 종남파도 회담을 거절했습니다.”

“거긴 또 왜?”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자존심 때문인 것 같아요. 회담 갖은 거 개최하지 말고 직접 와서 인사부터 하라는 거죠.”

“우리한테 패 호법이 있는데도?”

“패원강 호법이 있으니까 더 그런 거 아닐까요.”

섭주해는 담담하게 말하지만 사실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종남파에 정식으로 회담 요청을 넣은 게 벌써 세 번이 넘었다.

계속 이유 없이 거절하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명문 팔파일방 출신이 아니라는 게 그렇게 배가 아픈 문제일까?”

“그 사람들 눈에는 천무련주 자리를 자기들이 뺏긴 것처럼 보일 거예요.”

“아니, 천무련이라는 곳 자체를 내가 만들었는데?”

“내 식구들. 진짜 능력 있는 명문의 후예가 해야 할 일을 어디선가 나타난 무산학관 출신의 어린놈이 차지했으니까요.”

아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라면서 섭주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말투가 신랄하기 이를 데 없다.

소호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종남파가 아니라 네가 말하는데도 기분이 나쁘네.”

“적응하세요. 앞으로 많이 듣게 될 걸요?”

“나 참. 정작 패 호법은 나랑 대련한 다음에 별말 없이 인정했는데 왜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거야?”

“원래 사람 마음이 그래요. 남 잘되는 건 괜히 배아픈 법이에요. 그게 새파랗게 어린 놈이면 더더욱.”

소호는 어깨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나를 처리하면 세 개가 어긋나네. 원래 무림 문파를 만든다는 게 이런 거야?”

“세상이 온통 적이죠. 자기 밥줄 뺏기는 걸 누가 좋아하겠어요?”

“이해가 안 돼. 이미 딴 사람한테 다 뺏겼던 밥줄을 내가 관리하겠다는 건데 뭐. 그게 그리 아까운가?”

섭섭한 마음에 툴툴거렸더니 섭주해가 소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득이물유(得而勿有) 거이물수(居而勿守).”

“응?”

“재물을 얻으면 갖지 말라. 땅을 얻되 차지하지 말라.”

섭주해의 말에 소호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들은 적이 있어. 삼략이었지?”

“예. 무경칠서의 삼략 중 상략(上略)이죠.”

섭주해는 소호를 칭찬하듯 조용히 웃었다.

“천하를 노린다면 모든 걸 나누어 주세요. 금화가 가득 든 상자와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논밭을 얻더라도 다 나누어 주세요. 그걸 갖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자는 결국 그걸 나눠 주는 자의 밑에서 일하게 될 것입니다.”

“아…….”

“사람의 본성을 이해하고, 그들이 원하는 걸 아낌없이 나눠 주세요. 단, 나눠 주는 게 소호 형이라는 걸 잊지 않게 하세요.”

련주에서 형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섭주해의 장점이 바로 이것이다.

평소엔 쉬운 말로 이야기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학식의 깊이를 선보이며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 준다.

“역시 주해야. 잘 알겠어. 종남파랑은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보자. 아끼지 않고 나눠 줄게.”

“련주님은 잘 하실 겁니다.”

“에이, 그런 소리는 하지 말고. 어차피 화산파에도 가야 하는데 잘됐네.”

소호는 서류에 천무련주의 도장을 쾅쾅 찍은 뒤, 옷자락을 털고 일어섰다.

“화산파 갔다가, 종남파 갔다가. 그다음은 절강이지? 우리의 다음 진출로?”

“예. 금룡상단과 결판을 지을 차례예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네. 주해는 백 명이라도 부족하고.”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빨리 다 끝내고 쉬고 싶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소호가 마음을 다잡고 나섰다.

“다녀올게.”

***

중원 천하오악 중 서악(西岳).

화산의 산세는 드높은 한 자루의 검을 연상케 한다.

천하오악 중 유난히 험하기로 유명하며, 연화봉을 오르다 보면 길이 너무 좁아서 노새 한 마리도 끌고 가기 힘든 잔도가 심심찮게 나오곤 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한 번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산세가 험하다.

구름이라도 끼는 날엔 연화봉 정상의 봉우리들을 보고 있노라면 거령신이 돌로 만든 검을 여러 개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암벽을 등반하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가파른 계곡을 오르고, 마치 장성(長城)처럼 능선에 다닥다닥 세워 둔 전각들을 지나면 마침내 도교사대동천이라 불리는 태극동, 서현동, 노군동, 왕자동이 나온다.

달 밝은 밤이면 하늘의 옥녀가 내려와 머리를 감는다는 옥녀지와 화려하게 옷을 갖춰 입은 노도인 같은 상궁은 그 자체만으로도 신비로운 도가의 절경이다.

“이렇게나 산세가 가파르다니. 화산파가 문파를 지키며 농성했다면 역사가 바뀌었겠구나.”

소호는 화산파의 모습이 신비로울수록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화산파는 화산혈사 당시 장문인이었던 곽청과 무림 강호에서 노사라 불리며 존경받던 매화검신 악중광을 화산파의 모든 무인들과 함께 하산시켜 평지에서 흑시군과 싸운다는 악수를 두었다.

그들이 만약 섬서의 무인들과 함께하는 게 아니라, 화산파만을 지키며 따로 싸웠다면 어땠을까?

이렇게나 좁은 잔도에 가파른 산세를 넘어서, 흑시군이 화산파까지 밀고 올라올 수나 있었을까?

‘의미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아깝긴 하네.’

씁쓸함을 느끼며 화산의 정경을 둘러보는 소호를 향해 백발백염, 허리가 구부정한 노도인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천무공자.”

“화산파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이미 안면이 있던 소호는 현 화산파의 장문인, 현도(玄道)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오 척 단구.

작은 체구에 무공이라고는 일초반식도 느껴지지 않는 노인이다.

하지만 평생을 도문(道門)에 몸담은 사람 특유의 맑고 투명한 성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소호를 사심 없는 호감으로 대했다.

“이 먼 곳까지 와 주다니. 화산파가 큰 손님을 맞았구려.”

“아닙니다. 당연히 와야 하는 일이지요.”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그대가 보내 준 이십사수매화검법의 필사본으로 화산파의 어린아이들이 열심히 수련하고 있다오.”

무문이 몰살당한 화산파는 이제 예전의 거파가 아니지만.

그래도 도문의 도사들을 주축으로 다시 어린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도도한 화산의 기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에 큰 도움을 준 게 소호였다.

상궁 안의 대전으로 안내된 소호는 따뜻한 차를 대접받으며 지나가듯 가볍게 물었다.

“장문인, 여전히 육 대협의 소식은 없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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