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권 18화
제36장 득이물유(得而勿有) (2)
“으음, 육 사질에 대한 소식은 안타깝게도 들리지를 않는구려.”
현도 진인은 늘 그랬듯 육모담을 껄끄러워했다.
화산파의 입장에선 유일하게 남은 정통 무맥(武脈)이니 아낄 만도 하건만, 그가 백검회에서 저지른 일들 때문인지 소호가 육모담에 대해 물을 때마다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마치 육모담을 과거에 두고 그대로 잊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화산파를 버리고 복수행을 떠난 화산파의 대제자.’
문파의 복수행을 떠난 자가 소호가 복수해야 할 대상이 되었으니 세상 일이란 참으로 오묘했다.
“살아 있음은 분명하니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장문인께서 문파의 부흥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시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이요. 문파의 대제자이자 화산의 무공을 모두 익히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데.”
“천망회회라. 하늘의 그물은 넓고도 성겨서 피할 수 있을 것 같아도 피하질 못한다오. 하늘의 뜻으로 우리 화산파가 고난을 겪었으니, 그걸 억지로 뒤집으려 하면 더 큰 화를 입을 것이오.”
즉, 천리를 거스르지 말라는 뜻이었다.
‘장문인은 이미 과거를 모두 묻었구나.’
현도 진인은 도인으로서의 경지가 높은 사람이었다.
담담한 목소리에서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해탈이 느껴졌다.
“본파의 위기를 보고 각지에 있던 속가 제자들이 돌아와 주고 있으니 무공에 대한 것도 차차 괜찮아질 것이외다. 화산의 뿌리가 깊으니, 언젠가는 다시 매화향이 나지 않겠소?”
허허 웃는 현도 진인은 증오나 집착 같은 감정과는 전혀 상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화산파의 도문(道門)과 무문(武門)이 서로 달랐다지만, 그래도 똑같이 연화봉에서 먹고 자고 수학하던 사형제지간이다.
한 가족이던 사형제와 사질들이 몰살당하고 심지어 문파의 무공들까지 모조리 불태워으니 그 마음이 어떠할까.
‘그럼에도 저렇게 웃을 수 있다니. 대단하다. 이런 게 도사의 마음가짐이구나.’
소호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존경심을 느꼈다.
“저희 천무련은 화산파가 되살아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무공을 익히는 사람으로서 서악의 검맥이 끊어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지요.”
“허허, 천무공자와 천무련의 지원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르오.”
왕진과 흑시군은 화산파의 무공만 빼앗은 게 아니었다.
힘이 없으면 돈도 없는 법.
화산파의 이름 아래 섬서성을 지배하던 수많은 상단과 표국들은 지금은 거의 유명무실해진 상태였다.
무인은 돈이 없어도 이슬만 먹고 살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산중유곡에 들어간 은거 기인 한두 명이면 모를까.
제자들만 수백.
관련된 사람들까지 다 합하면 수천에 다하는 인원이 황량한 산속에 모여 있으니 돈이 없으면 굶을 수밖에 없었다.
먹는 것, 입는 것, 무공을 수련하기 위한 무기, 도구, 금창약.
숨 쉬듯이 필요한 게 돈이다.
대외적인 활동이 전무하니 화산파는 이미 무림 문파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 화산파에 손을 내밀고 무공 수련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준 것이 천무련이었다.
천무련은 염상에게서 빼앗은 자금을 이용해 예전에 화산파의 휘하에 있던 표국과 상단을 모조리 인수했다.
그곳에서 나오는 이득을 다시 화산파에 전달하니, 지금은 천무련 덕분에 화산파가 살아 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십 년 안에 결과가 나오겠지. 그것을 위한 투자야. 무엇보다 육모담의 소식을 알 수 있을 테니까. 그게 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하고.’
소호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제게 연락 주시면 됩니다. 늘 말씀드렸지만, 화산파가 되살아야 저희 천무련도 성공할 수 있어요. 제가 지금 정도 문파들을 포섭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거든요.”
소호가 장난스럽게 죽는 소리를 하며 너스레를 떨자 현도 진인은 다 안다는 듯이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소식은 듣고 있소이다. 특히 종남파의 장문인이 반대가 심하다던데.”
“앞으로 벌어질 일을 대비해서 정도의 문파들이 힘을 합치자는 건데,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장문인.”
“사람의 마음은 오욕칠정에 쉽게 흔들린다오. 천무공자께 내 작은 조언을 해도 되겠소?”
“얼마든지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종남파의 장문인을 만날 때 연와(燕窩)를 선물하는 게 좋을 것 같구려.”
“연와라면. 제비집이요?”
광동과 복건 쪽에서 유명한 제비집 요리는 내륙에선 부르는 게 값일 만큼 값비싼 고급 식재료였다.
“화산에 기도를 하러 온 손님 중에 종남파와 인연이 있는 상인이 있었소. 그가 한탄을 하더이다. 종남파 장문인이 복건 출신인데 늘 넌지시 연와를 먹고 싶어 해서 곤란하다 하더구려.”
종남파와 회담을 해야 하는 소호의 입장에선 눈이 번쩍 뜨이는 정보였다.
“장문인 말씀대로 준비를 해 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허허, 그저 들은 것을 전해 준 것뿐이니 감사할 필요 없소이다.”
“무슨 말씀을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화산파가 몰락했어도 거파의 저력이 이것이다.
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간다고 흔히 말하지 않던가.
선대에서 대대로 내려온 인맥이 비록 빛을 바랬을지언정,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그 뒤, 지난번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환담을 나누고 연화봉에서 하산한 소호는 곧바로 섬서에서 가장 큰 금룡상회에서 연와를 찾았다.
종남산을 오르면서, 소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자그마한 목함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겨우 요만한 제비집이 뭐 이리 비싸?”
제비집이라고 다 같은 제비집이 아니었다.
제비집은 해초나 물고기를 제비가 물고 와서 타액으로 단단하게 굳힌 것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상태와 품질에 따라 급이 나뉘었다.
해안 절벽이나 바닷가 동굴에 만들어진 제비집을 자연적으로 채취한 것이 동연(洞燕), 민가 근처에서 비교적 쉽게 채취한 것이 옥연(屋燕)이라 했다.
동연은 절벽을 타서 캐야 하는 경우가 많으니 당연히 옥연보다 귀한 취급을 받으며, 깨끗하고 품질이 좋은 동연은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하기가 어려운 귀품이라고 했다.
심지어는 그 안에서 가공 정도에 따라 또 급수가 나뉘는데, 채집은 했으나 가공은 하지 않은 제비집이 모연(毛燕), 제비의 털과 피 같은 불순물을 일일이 제거해서 뽀얗게 만든 것이 초연(草燕)이다.
즉, 동연을 채취해 초연으로 만든 것이 최상품 중의 최상품이 되며, 이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비쌌다.
“천무공자이십니까?”
종남파의 문을 지키던 이대 제자가 소호를 향해 정중하게 물어왔다.
‘내 움직임을 알고 있었구나.’
과연 거파는 거파다.
흑시군에 때문에 오래도록 봉문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음에도, 섬서땅에 펼쳐 둔 정보망이 유용하게 기능하는 모양이었다.
“예. 안휘에서 온 장소호입니다. 장문인을 뵈러 왔습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문지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며 소호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종남파는 전진교의 영향으로 도문(道門)의 성격을 갖고 있는 문파였다.
이들이 자리 잡은 산은 종남파 때문에 주로 종남산이라 불리지만 오랜 주민들 사이에선 주남산이나 태을산이라고 불렸다.
화산 혈사 때 태을검객들을 모두 잃어 전력의 절반 이상을 잃기는 했으나, 화산은 전부를 잃었기에 종남파가 섬서에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쪽입니다.”
종남파는 고요했다.
소호가 온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딱히 뭔가를 보여 주려 하거나 강한 인상을 주려는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연무장에 제자들 몇 명이 수련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조용했고, 괜히 무공이 강한 사람들을 전면에 내세워서 검무를 시연하지도 않았다.
장문인은 머리카락과 수염이 반백으로 물들어 회색으로 보이는 노인이었다.
눈두덩이가 두껍고 코도 두툼해서 고집스러워 보인다. 종남파의 장문인으로서 일평생 몸을 단련했을 검객이지만 제법 살집이 있고 배도 두툼하게 나온 점이 신기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걸어와 소호의 앞에 섰다.
깐깐하게 내리깐 눈에서 소호를 평가하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반갑소. 나는 종남의 장문인 연종명이라고 하오.”
인사는 하지만 포권을 취하지 않는다.
소호는 빙긋 웃으면서 짧게 포권을 취했다.
“벽운검객께서 섬서에서 손꼽히는 검사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장소호라고 합니다.”
“허헛, 형님께서 유명하셨지. 내가 어찌 감히 무명을 내세울 수 있겠소. 나는 그저 종남을 건사하는 것만도 벅차다오.”
연종명은 소호가 먼저 포권을 취하자, 그제야 하는 둥 마는 둥 포권을 대충 취하다가 빠르게 거뒀다.
대인배처럼 웃는 얼굴에서 천무공자의 기를 죽였다는 듯이 득의양양한 눈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형인 벽력검 연종태는 천하에 이름 높은 협객이었다던데, 종남의 장문인은 그릇이 작구나.’
아무래도 화산혈사로 운명이 바뀐 것은 화산파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소호는 그 모습을 모른 척 넘긴 뒤 드넓은 종남파의 부지를 손으로 쭉 가리켰다.
“종남의 분위기가 고즈넉해서 좋습니다.”
“최근에 외부에서 일이 많아 제자들이 대부분 밖으로 나가 있으니 그리 느낄 수도 있겠소. 평소의 종남은 조금 더 바쁘다오.”
“그렇군요. 이제 시대가 바뀌는 중이니 더더욱 바빠지겠습니다.”
“시대가 바뀐다! 참으로 좋은 말이오. 하지만 때론 바뀌지 않는 게 좋을 때도 있소이다. 구관이 명관이란 말도 있지 않소? 나는 지금 그대로가 좋고, 만약 바뀌어야 한다면 그나마 좀 더 옳은 방향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소호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세 치 혀로 나누는 설전이 칼을 직접 휘두르는 것보다 더욱 예리했다.
구관이 명관이며, 좀 더 옳은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니.
구관은 구파일방을 주축으로 했던 무림맹이고, 새로운 시대는 소호가 시작하고 있는 천무련이라는 집단이다.
이 말은 지금 소호가 만든 천무련이 잘못되었다는 걸 돌려말하는 듯하지 않은가?
‘대놓고 지적하면 내가 예민하다고 말하면서 빠져나가겠지.’
종남파 장문인의 인상과 말본새를 보아하니 능글맞기가 웬만한 관리 못지 않았다.
“저의 나이보다 더 오랜 세월을 강호 무림에서 보내셨으니 장문인의 말씀이 맞겠지요. 장문인과 같은 무림 강호의 선배님들께서 새시대를 옳게 이끌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헛, 천무공자께서 이리도 나를 띄워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구려. 허나 난 이미 늙은 몸이오. 굳이 이리저리 옮겨 다닐 필요가 있겠소? 그저 살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을.”
연종명이 껄껄 웃으니 주변에 있던 종남파의 일대 제자들이 비슷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닙니다. 그럴수록 움직여 주셔야지요.”
“어째서 그렇소?”
“종남의 태을검객들이 앞으로 천하에 명성을 떨쳐야 할 텐데, 새 시대가 종남과 맞지 않으면 힘들지 않겠습니까?”
“허어.”
이번엔 연종명의 얼굴이 굳었다.
주변에 있던 일대 제자들도 골똘히 생각하다가 안색이 딱딱해졌다.
“천무공자의 뜻을 이해하기 어렵구려. 우리 태을검객들은 어떠한 세상에서도 잘 헤쳐나갈 것이외다.”
“그래야죠. 그런데 장문인처럼 경험 많은 선배님들이 새 시대가 열리는 걸 도와주신다면 얼마나 더 편해지겠습니까?”
반대로 말하자면.
너희가 돕지 않는다면 종남파는 앞으로 무림 강호에서 활약하기 어려울 거란 소리였다.
소호는 상대를 어르고 달래되, 만만치 않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뒷짐을 진 채 기운을 끌어 올렸다.
우우웅―.
역근경 진기가 전신에 퍼지며 은은한 광채를 냈다.
소호의 존재감이 퍼져 나가자 종남파 장문인 연종명이 놀란 듯 탄성을 흘렸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소호의 기운이 더욱 뛰어났던 것이다.
“하루 종일 산을 탔더니 목이 마르네요. 장문인. 제가 선물도 하나 들고 왔는데, 차 한 잔 주시겠습니까?”
빙긋 웃는 소호를 보며 연종명은 침중한 안색으로 자신의 거처를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