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권 19화
제36장 득이물유(得而勿有) (3)
“드시오.”
종남파 장문인 벽운검객 연종명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녹차를 우려내 대접했다.
고관대작의 집이나 고급 다루에서나 맛볼 법한 차향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맛있네요.”
소호의 칭찬에 연종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차를 우리는 솜씨만큼은 종남에서 최고라고 자부한다오.”
“쌉싸름한 맛 끝에 은은히 맺히는 단맛이 아주 좋습니다.”
“우려내는 데 비법이 있소. 점점 나이가 들면서 뒷방에 머물다 보니 생긴 취미지. 조급함을 버리고 한 호흡을 더 기다려야 하는 게 비법이라오.”
서로를 보며 찻물을 머금은 뒤 소호는 솔직하게 물었다.
“장문인. 천무련에 들어와 주시지요?”
대뜸 훅 들어가는 질문은 소호의 성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흐음.”
연종명은 긴 회백색의 수염을 근엄하게 쓰다듬으며 시간을 끌었다.
“어려운 질문이구려. 그런 중차대한 일을 단번에 결정할 수야 있겠소?”
“그래요?”
소호는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이번에 북방의 적양문이 봉문을 깨고 나타나 남진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으시지요?”
“으음?”
“진주언가의 가주가 십 초식 안에 무릎을 꿇었다고 하더라고요. 잠호대 전원이 동원되었는데도 적양문은 손해가 거의 없었다던데. 봉문을 하면서 칼을 제대로 갈았나 봐요.”
소호가 웃는 만큼 연종명의 얼굴은 굳어졌다.
“욱일승천하는 그 자신감으로 볼 때 아무래도 하남의 소림으로 향하겠죠? 그런데 만약에 말이에요. 장문인. 그들이 마지막에 마음을 바꿔서 방향만 조금 틀면 곧바로 섬서죠?”
하남이 아니라 섬서.
소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했다.
적양문은 진주언가가 있는 산서에 진출했고 무명을 떨쳤다. 그 산서와 땅을 맞대고 있는 곳이 두 곳이다. 남쪽의 하남과 서쪽의 섬서.
북경에서 내려온 적양문이 지금은 하남만 바라보고 있다만, 사실 방향만 옆으로 틀면 바로 섬서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오? 천무공자. 우리의 힘만으로는 적양문 같은 이름 없는 문파조차 감당할 수 없다는 이야기인 것이오?”
양종명은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퉁퉁한 볼살이 잔뜩 붉어져서 혈관까지 툭툭 튀어나왔다.
설득하려는 상대를 화나게 만드는 건 곤란한 일이었다.
하지만 소호는 당황하지 않고 되물었다.
“적양문의 문주는 사파의 맹주가 될 거라 공공연히 이야기되는 사람이에요. 팔파일방 어디라도 만만히 볼 곳은 아닙니다. 진주언가가 불과 몇 시진도 못 버티고 무너졌음을 잊지 마세요.”
“우리 종남파는 진주언가와 다르오.”
“다르죠. 화산혈사로 전력의 절반을 잃었으니까요. 어쩌면 더 짧을 수도 있겠네요.”
“공자.”
연종명의 눈빛이 서늘했다.
“어린아이가 따로 없군. 화산혈사라니. 지금 그게 한 집단의 대표자로서 지금 할 말이라고 보시오?”
“이상한가요? 저는 지금이기 때문에 더욱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소호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연종명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뭘 하자는 거요? 종남파에 와서 우리 종남을 모욕하러 왔소?”
“아뇨. 현실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화무십일홍이라지요. 종남파가 역사가 오래된 뛰어난 문파라는 것을 누가 부정할까요. 하지만 지금 홀로 섬서를 지킬 역량이 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솔직히 의구심이 드네요.”
“우리 종남은 섬서 땅을 지킬 만한 충분한 역량이 있소!”
연종명의 외침은 공허했다.
그게 사실이 아님을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종남은 예전의 종남파가 아니다.
벽력검 연종태가 건재하고 태을검객의 정예들이 화산파의 매화검객들과 자웅을 겨루던 그 시절의 종남이 아니었다.
“우리 천무련은 흑시군 이전에 무림맹이 하던 역할을 이어받을 거예요. 그 무림맹의 역할 중 하나가 이겁니다. 소속된 문파의 존립을 다투는 사건이 발생할 시 모두가 한 몸이 되어 돕는다.”
연종명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무림맹의 보호는 필요해요. 그렇죠? 사파처럼 하나의 맹주가 모두를 다스리는 게 아니라. 정파 모두가 골고루 힘을 합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중요해요.”
“크흠!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그런데 왜 천무련에 들어오지 않으세요?”
연종명은 불편한 기색으로 끙! 하고 신음할 뿐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이유가 있을 리가 없다.
종남파는 그저 자존심을 최대한 세우다가 가장 비싼 값에 천무련에 팔리고 싶을 뿐이니까 말이다.
아마 종남파 장문인은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천무련 련주가 그래도 팔파일방 출신이길 원했을 것이다.
패원강 같은.
그런 팔파일방 모두의 진전을 이은 후계자라면 더 좋다. 자존심을 굽히기에 쉬운 명분이 있으니.
‘하지만 현실은 무산학관 출신의 웬 애송이죠. 받아들여요, 장문인.’
소호는 그를 달래듯 부드러운 말투로 권유했다.
“장문인. 제 선물을 한번 열어 보시겠어요?”
“……이게 무엇이오?”
“장문인께서 좋아하시는 거라 들어 준비해 봤어요.”
연종명은 비단을 풀고 목곽을 열어 그 안에 들어있는 연와를 보았다.
“이건……!”
연종명은 선물의 내용물이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크게 뜬 눈이 좌우로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 뽀얀 색감을 보아하니 동연 중에서도 초연. 최고급 연잔(燕盏)이군. 이걸 어디서 구했소?”
“말씀드렸듯이, 장문인께서 연와요리를 좋아하신다기에 어렵게 구했어요.”
연종명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연와를 요리해서 먹고 싶은 얼굴이었다.
소호는 화산파 장문인의 조언이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장문인, 종남이 천무련에 합류해 주시면 세상에 큰 파장이 일 것입니다. 그리고 팔파일방 중에 제일 먼저 련에 들어오셔야죠? 저희 천무련은 의리는 반드시 지킬 거예요.”
“처음에 대한 의리. 의리라……. 흥, 그래 봐야 소림과 무당의 다음이 아닌가?”
“그 두 곳은 애초에 무림맹의 핵심이니까요. 천무련에 대해서도 논외죠. 하지만 제가 처음으로 권유하러 온 문파는 종남파입니다.”
“으음.”
탁.
연종명은 목함을 닫더니, 손바닥으로 다탁을 단호하게 내리쳤다.
“좋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천무공자에게 부탁이 하나 있소.”
“어떤 부탁이죠?”
“우리 종남파는 금전적으로 금룡상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소.”
“예?”
“우리는 팔파일방이 직접 상회를 갖고 운용하는 걸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오. 무인의 자존심이라는 것이지. 상회의 이득에 좌지우지되는 존재가 어찌 정도의 거파이며 협객이라 자부할 수 있겠는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긴 하네요. 무인이 돈을 쫓으면 안 된다는.”
“바로 그거요. 그러다 보니 우린 종남파 운영비의 대부분을 금룡상회의 지원으로 충당하고 있소. 그런데 최근에 문제가 생겼소. 금룡상회가 문제가 있다면서 지원금을 줄인다고 하지 않소?”
소호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왜일까.
기분이 찝찝했다.
“왜 갑자기 액수를 줄인다고 하던가요?”
“섬서의 장사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더군. 자신들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우는 소리를 하는데 도대체 당해 낼 수가 없소.”
“장사꾼들이야 다 그리 말하겠죠.”
“차라리 싸우면 마음이 편할 텐데. 에잉. 종남의 검객들을 낭인처럼 돈을 받고 빌려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고. 이때 천무공자께서 ‘의리’로 금룡상회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내, 종남파의 장문인으로서 천무련의 가입을 세상에 천명하겠소.”
탕!
탁자를 두드려 가며 말하는 모습이 제법 결연했다.
큰 결심을 했다는 양 자신의 멋에 취해 고개를 끄덕거리기까지 했다.
‘재밌네.’
뭔가 의도가 있다는 건 알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 이상 도망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일단 금룡상회를 도와서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오. 무림맹을 대체할 천무련에 대한 우리의 첫 번째 부탁이라고 할 수 있소. 그렇게 된다면 우리 종남파는 천무련에 가입해 천무공자를 지지하겠소. 내 종남파 장문인의 이름으로 약속하오.”
“약속은 지키실 거라 믿어요.”
“물론.”
소호는 씩 웃는 연종명의 얼굴이 상상 이상으로 더욱 능글맞아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약속을 안 지키면 지키게 만들어 드려야죠.’
소호는 한 번 더 최고급 녹차를 마셨고, 두 사람은 그렇게 종남파의 집무실에서 작별을 했다.
***
“비각주님.”
종남산을 하산하는 소호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한 사내가 내려섰다.
천무련의 어둠 속에서 내밀한 일을 처리하는 비각(祕閣)이라는 존재가 있다.
섭주해의 생각으로 창설된 곳이었는데, 비각주인 청조가 야조탑의 인물들을 끌어모아 점점 기틀이 잡히고 있었다.
“종남파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어때요?”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청조는 그가 하오문의 도움을 받고, 직접 발품도 팔아서 검증된 사실만 보고했다.
“오랜 세월 섬서에서 자리를 잡고 있으니 인망이야 있습니다만, 화산 혈사 이후로 문파의 세가 기울다 보니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별로 없답니다.”
“베풀지를 않는다는 소리네요.”
“맞습니다. 평범한 민초들과 교류가 전혀 없다고 하더군요.”
“예전엔 달랐구요?”
“벽력검이 있을 때는 안 그랬다면서 한탄하는 농민을 보았습니다.”
“역시 힘이 중요하네요. 곳간에서 인심 난다잖아요? 절대고수도 있고, 태을검객들도 막강할 때는 사람들에게 손 뻗고 인심을 베풀 여유가 있었겠죠. 지금은 반대로 살림이 빠듯하다는 뜻이고요.”
청조는 조용했다.
그는 직접 묻는 말만 대답할 뿐,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사실 종남파 정도의 전력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데. 이름값이 문제네요. 제가 지금 필요한 건 ‘무림맹의 유지를 완전히 물려받은 천무련’이라는 명분이라서요.”
그걸 위해서 지금도 이렇게 발품을 팔고 있는 것이다.
팔파일방을 모두 포섭한, 진정한 정파 무림의 맹주라는 이름을 쥐기 위해서.
“비각주님. 금룡상회 쪽도 알아봐 주세요. 종남파의 재원을 금룡상회가 채워 주고 있었다던데, 최근에 지원을 줄였다고 하네요.”
“존명.”
청조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산길의 나무 사이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소호는 일을 길게 끌지 않았다.
종남에서 하산하는 것과 동시에, 연와를 구매했던 금룡상회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아이고, 공자님. 어쩐 일로 다시 오셨습니까? 혹시 연와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는지요?”
금룡상회의 점포를 책임지는 점장이 버선발로 뛰쳐나와 소호를 맞이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연잔 정도의 급이 되는 연와를 구매하는 사람이 그리 흔할 리가 없다.
그야말로 금덩어리를 주고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을 홀대한다면 그건 장사를 할 줄 모르는 바보가 아니겠는가.
“연와는 좋았어요. 선물 받은 사람이 좋아하더라고요. 그것과는 상관없이 지부장님을 뵙고 싶어요.”
“저희 지부장님을요?”
“네.”
“혹시 어떤 용무시라고 전해 드릴까요?”
점주는 쭈뼛거리면서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천무련에서 왔어요.”
“천무련?”
“천무련의 련주가 금룡상회 섬서 지부장을 뵙고 싶다고 전해 주세요.”
점주는 눈을 부릅뜨면서 굳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불이라도 난 것처럼 급히 뛰어서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고 되돌아온 점주는 굽실거리는 허리를 펴지 못한 채, 공손히 그를 위층으로 안내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금룡상회의 섬서 지부장 진목룡이라고 합니다.”
진목룡은 사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덩치가 작은 중년의 사내였다.
어깨가 좁고 골격도 왜소한데, 심지어 이마도 툭 튀어나온 사내였다.
그 모습이 마치 무산학관에서 보던 주작방장 곽도엽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소호는 약간의 친근감을 느꼈다.
‘곽도엽 방장이 나이가 들면 딱 저렇게 생겼겠네. 그러고 보니 지금 잘 살고 있으려나?’
“천무련의 장소호입니다.”
“흘흘, 강호에 명성이 자자하신 천무공자님을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진목룡은 노인처럼 웃으면서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종남파 때문에 오셨지요?”
“잘 알고 계시네요?”
“강호의 정세는 끊임없이 파악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저희의 목숨 줄이 걸린 일이니까 말이지요. 그래서 말인데, 사실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부탁드리고 싶었던 일이 있었지요.”
“어떤 일이죠?”
진목룡은 기다렸다는 듯이 작업실에 쌓여 있던 종이 뭉치 하나를 슬쩍 소호의 앞으로 밀었다.
“저희 금룡상회 섬서 지부의 매출표입니다.”
“아, 그래요?”
“보시면 알겠지만 안 그래도 상권이 그리 크지 않은데 경쟁하는 표국과 상회가 있어서 저희가 크게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흘흘, 그 때문에 매출이 줄어서 종남파에 전달되는 지원금도 줄일 수밖에 없었지요.”
종남파 장문인과 금룡상회 섬서 지부장, 두 사람의 요구가 물 흐르듯 한 곳으로 이어진다.
섬서에 있는 상회와 표국을 치워 달라.
즉, 천무련에서 인수한 본래는 화산파의 것이었던 표국과 상회를 치워 달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큰일이라면서 한숨을 푹 내쉬는 진목룡은 확실히 종남파의 연종명보다는 훨씬 연기를 잘했다.
소호도 깜빡 속을 뻔했으니 말이다.
‘이 사람들 보게?’
소호는 폐부가 싸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