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권 20화
제36장 득이물유(得而勿有) (4)
“그래서, 지부장께서 원하는 건 무엇이죠?”
“흘흘, 제가 드린 서류를 한 번 보시면 매출이…….”
“아뇨, 직접 말씀해 주세요.”
소호는 진목룡이 내민 서찰을 몇 장 들춰 보다가 덮어 버렸다.
이런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미 모든 계산을 맞춰 두었을 텐데.
“진목룡 지부장께서. 저 천무련의 련주 장소호에게 원하는 걸 직접 말씀하세요.”
소호는 몰랐지만 소호의 눈에서 붉은색 기운이 살짝 감돌다가 사라졌다.
용이 아무리 어려도 감히 살쾡이가 용의 수염을 잡아당길 수가 있겠는가.
진목룡은 젊은 용의 존재감에 짓눌렸다.
그는 안 그래도 창백하던 안색이 더욱 딱딱하게 굳은 채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게, 크흠, 그것이…….”
진목룡은 ‘내가 정말로 잘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표정으로 다 드러났다.
하지만 이미 내친걸음이다.
그는 딱딱한 목소리로 요구 사항을 말했다.
“화산파를 먹여 살리기 위해 천무련이 매화표국과 매화상회를 사들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넘겨주십시오.”
“과한 요구입니다.”
소호는 딱 잘라 말했다.
“종남파에선 '의리'를 말했습니다. 그건 부탁이나 의리로 처리할 부분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저희 금룡상회에서는 천무련에서 투자하신 금액 이상의 금전으로 보상하겠습니다.”
“돈의 문제가 아니죠.”
진목룡은 자신의 툭 튀어나온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난감해했다.
“련주님. 천무련은 종남파를 혈맹의 아래에 두고, 종남파는 그 대가로 섬서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입니다. 천무련에도 나쁜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종남파가 그러던가요?”
“예?”
“화산파가 부활의 싹도 보일 수 없도록 완전히 잘라 버리라고. 종남파에서 그렇게 계획을 세웠어요?”
진목룡은 가볍지 않은 사내였다. 입을 꾹 다물고 고민하더니 말을 돌렸다.
“저희도 당연히 화산파에 지원금을 보낼 것입니다. 화산파가 섬서에 자리 잡고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당연히 돈을 끊어 버리면 안 될 일이지요.”
“지금 저희가 보내는 액수 그대로요? 화산파가 차츰 다시 예전의 거파로 부흥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보낼 건가요?”
“련주님.”
진목룡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섬서 땅의 균형은 이미 깨졌습니다. 인생사새옹지마의 고사가 딱 맞습니다. 화산혈사는 비극이었으나 종남파에게는 또 한편으론 일생일대의 기회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화산은 몰락했고, 종남은 그래도 절반의 전력이 남았으니 말이죠?”
“예. 앞으로는 섬서의 지배자가 되기 위한 단계들을 차곡차곡 밟아 나갈 뿐입니다. 종남파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지요.”
시대는 바뀌었고 이제 섬서의 지배자는 종남파다.
그들에게 화산파의 부활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래요? 지부장님은 그래서 종남파에 판돈을 걸었군요?”
“저희 금룡상회가 자부하는 것이 있다면 저희는 지는 내기에 돈을 걸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거 어쩌나.”
“예?”
“판돈을 잘못 거신 것 같은데.”
소호는 진목룡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을 확인한 뒤 빙긋 웃으면서 일어났다.
진목룡은 소호의 의중을 짐작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부질없는 짓이다.
살쾡이가 어찌 용의 마음을 헤아릴까.
“잘 알겠습니다. 저도 대승적인 목적으로 그림을 크게 볼 필요는 있겠네요.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죠.”
“말씀드렸듯이 원하시는 금액은 얼마든지 저희가 준비하겠습니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소호는 배웅을 위해 따라 나서려는 진목룡을 몇 번이나 말린 뒤 상회 밖으로 나왔다.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은 청량했다.
무겁고 칙칙한 대화를 나눈 탓일까.
오늘따라 유난히 밖의 공기가 청량하게 느껴졌다.
“비각주. 거기에 있죠?”
시끌벅적한 장터의 입구에서 수많은 인파 사이로 지극히 평범한 일꾼 하나가 스리슬쩍 나타났다.
그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소호의 뒤에서 봇짐을 메고 따라붙었다.
소호는 주변의 노점들을 구경하면서 평온하게 물었다.
“알아보셨어요?”
“예. 최근에 금룡상회의 행보가 적극적입니다. 팔파일방 전체를 돌면서 지원금을 뿌리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워 나가고 있습니다.”
“윗선은 누구예요?”
제일 중요한 문제였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든, 만약 적대시한다면 누구까지 상대해야 하는지는 알고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윗선은 없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진짜요?”
“금룡상회의 회주가 야심이 크다고 합니다. 매번 상행을 할 때마다 너무 공격적으로 움직여서 적이 많기로도 유명하더군요.”
“저는 너무 과감해서 황실이나 다른 무림 문파가 뒷배로 있는 줄 알았어요.”
“그건 아닌 듯합니다. 하오문의 의견도 같았습니다.”
“그래요……?”
“그간의 행적을 좇아 보면 금룡상회는 상대가 무림 문파가 아니었을 뿐이지 지금과 비슷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갈등을 파고들어 싸우는 듯하다가 결국엔 독점하고, 그걸 토대로 항상 큰 이득을 봤다고 합니다.”
“금룡상회의 이름이 최근 들어 많이 들린다 싶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네요.”
“예. 아무래도 천무련과 큰 거래를 해 보려고 판을 까는 것 같습니다.”
“큰 거래라.”
소호가 팔파일방의 포섭을 섬서에서 시작하듯, 금룡상회도 섬서에서부터 자신들의 영역을 무림에까지 넓히려는 모양이었다.
“금룡상회 회주가 욕심이 많네요.”
“과욕입니다.”
청조는 단호했다.
살쾡이들이 용의 꼬리를 잡아 보겠다고 함정을 파는 것이 과욕이 아니면 무엇일까.
“련주님께서 섬서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오문의 의견이니 참고하십시오.”
“뭘 해도 그 ‘많은 분들’이 보고 있으니 신경이 쓰이네요. 알겠어요. 그럼 부탁 하나만 할게요.”
“하명하십시오.”
소호는 천무련으로 돌아가 섭주해에게 지금의 상황을 알리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 달라고 말한 뒤 미련 없이 장터를 뒤로했다.
뒤따르던 청조는 어느 순간, 소호가 느끼기도 전에 바람처럼 사라졌다.
기척을 숨기는 은신술과 바람 같은 신법의 경지가 감탄스러울 만큼 높았다.
“실력이 점점 느시네. 지난 일이 충격이었나?”
녹림수로맹.
백경채에서 실패한 일들이 청조에겐 충격적이었던 모양이었다.
최근 들어 무공을 더욱 열심히 수련하는 데다 심지어 소호에게 도와달라면서 무리(武理)를 묻기도 했다.
천무련의 미래는 밝다.
모두가 이렇게 의욕을 갖고 일하고 있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섬서 전체를 노린단 말이지? 종남파?”
소호는 어이가 없다 못해 재밌어서 웃고 말았다.
종남파와 금룡상회는 자신들이 당연한 권리를 찾는 거라 생각하나 본데, 사실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본래는 화산파의 것이었던 표국과 상회를 산 건 천무련이다.
그리고 그 표국과 상회를 돌려받는다는 것?
그건 천무련의 영향력을 섬서에서 지우겠다는 말과 동일하다.
“재밌네. 이런 싸움도.”
오랜만에 전의가 끓어오른다.
소호는 들끓는 열정을 가슴속에 담아 둔 채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지부장을 뵙고 싶어요.”
섬서에서 풍운표국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대대로 화산파와 종남파가 상권을 장악하던 곳이라 그런 것일까.
도시의 한구석에 그리 크지도 않은 건물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고, 투박한 물건들을 잔뜩 담은 마차들만 쉬지 않고 드나들었다.
소호는 품 안에서 흑색과 백색이 균일한 조화를 이룬 태극전을 꺼내 표국의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직원은 처음에는 의심스러운 눈빛이었으나 태극전을 갖고 윗사람에게 다녀온 뒤 태도가 급변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풍운표국 섬서지부의 지부장은 이충선(李忠善)이라는 자로 자세가 곧고 눈빛이 맑은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소호를 공손한 예로 맞이했다.
“공자님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섬서 지부를 담당하는 이충선이라고 합니다.”
“장소호입니다. 사실 여기를 먼저 들르고 싶었는데 너무 늦게 왔네요.”
소호는 이충선이 권하는 차를 사양하고 간단한 인사만 나눈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가 솔직하게 이야기를 좀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말씀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머지않아 다 알려질 테니 비밀도 아니지만, 그리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서요.”
“회주님께도 비밀입니까?”
“아뇨. 어머니는……. 뭐, 어차피 비밀로 해도 아실 것 같으니 말씀하셔도 상관없어요. 다만 다른 곳에는 비밀입니다.”
“회주님을 제외한 그 어떤 분께도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깔끔하시네요. 마음에 들어요.”
이충선은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진중해서 신뢰를 주는 사내였다.
소호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종남파를 천무련에 포섭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조건을 너무 큰 걸 거네요. 제가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요.”
“그러시군요.”
이충선은 섣불리 말을 끊지 않고 소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종남파가 내건 조건에서부터 금룡상회의 제안까지 모든 이야기를 들은 이충선은 인상을 찌푸린 채 자신의 일처럼 화를 내주었다.
“종남파가 섬서 전체에 욕심을 부리는군요. 옳지 않은 일입니다.”
“지부장이 보기에도 욕심이 과하죠?”
“과유불급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능력보다 많은 것을 원하면 파탄이 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예요. 종남이 무명을 떨쳐서 섬서의 인망을 얻을 생각은 안 하고 금룡상회를 도와서 이득만 챙기려고 하네요.”
소호가 종남파에 가장 크게 실망한 이유 중의 하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걸 다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는 거예요.”
“제가 알기로 지금 종남파의 능력으로는 섬서의 절반도 관리하기 힘듭니다. 애초에 사람이 적어 그럴 만한 여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금룡상회에게 허가를 주고 그들을 통해서 외부의 인력을 쓰겠다는 말인데,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반드시 파탄이 나게 될 것입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충선은 상황을 듣자마자 아는 것을 왜 저들은 보지 않는 것일까?
아니.
아마 보지 못하는 건 종남파 뿐일 것이다.
금룡상회는 상권을 차지하기만 하면 그뿐이니.
그 뒤에 섬서에서 어떤 파국이 펼쳐지든 돈만 벌면 그뿐인 금룡상회와는 상관이 없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만약에 금룡상회가 사라진다면 그 빈 자리를 풍운표국이나 풍운상회가 채울 수 있을까요?”
“예?”
이충선은 크게 당황하여 일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공자님께서는, 매화표국과 매화상회가 있지 않으십니까?”
“그곳은 화산파에 대한 지원을 위해 사들인 곳이죠. 아까 지부장이 그릇을 말씀하셨죠? 매화표국이나 매화상회도 똑같아요. 섬서 전체를 차지할 만한 표국이나 상회는 아닌 것 같네요.”
“……제가 함부로 대답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공자님.”
“능력적으로만 말해 주세요. 풍운회에서 가능은 해요?”
“다른 지부에 증원을 요청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지만 종남파와의 관계나, 지방 토호들과의 관계에서는 충돌이 일어날 것입니다.”
“네. 그야 그렇겠죠.”
고민하는 소호를 향해 이충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자님께선 금룡상회를 몰아내실 생각이십니까?”
“대응책의 하나로 생각 중이에요. 물론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요.”
“지켜보신다는 건……?”
“아직은, 선을 넘지 않아서요.”
톡. 톡.
소호는 손끝으로 다탁을 몇 번 두드리다가 물었다.
“금룡상회가 섬서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건 어느 분야예요?”
“석탄입니다.”
이충선은 고민도 하지 않고 답했다.
“대동(大同)이나 서산(西山)같은 곳에 있는 탄광이 섬서에서 가장 돈이 되는 사업입니다. 금룡상회가 단단히 목줄을 죄고 있는 사업이기도 하지요.”
“그래요?”
소호의 눈이 범처럼 빛났다.
“그럼 그것부터 손을 좀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