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권 22화
제36장 득이물유(得而勿有) (6)
“왜 놀라세요? 설마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계속 금룡상회랑 함께 가려고요?”
지현은 혼란하고 당황하였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고는 소호의 말에 수긍했다.
지현은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진목룡은 그에 대한 관계를 끊어 버리고 오히려 뒤통수를 쳤다.
일이야 어찌 됐든 앞으로는 함께 갈 수 없는 사이였다.
“혹시 금룡상회가 아니라면 생각해 둔 곳은 있으신지……?”
“글쎄요? 거기까진 제가 관여하면 안 되겠죠?”
“으음.”
“탄광은 나라의 중요한 사업이니 좋은 조력자를 금방 만나실 겁니다.”
지현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진목룡 지부장.”
“예……?”
“가 보세요. 내일까지 돈을 지급하려면 할 일이 많으시잖아요?”
진목룡은 넋이 나간 얼굴로 마차에 올라타서 얼떨결에 떠났다.
마차의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한 얼굴로 소호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신광 지현.”
“예, 공자님.”
“용서한 것 아닙니다. 모른 척 기회를 한 번 더 주었을 뿐입니다.”
“흐읍.”
지현은 숨이 멎어 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사례감에 통보하면 난 일이 더 편할 거예요.”
“……!”
“대신 그렇게 하면 섬서에는 피바람이 불겠죠?”
황실의 일 처리는 자비롭지 않다.
뇌물이나 착복이 큰 흠은 아닌 시대라도, 그게 아예 발견되지 않았다면 모를까.
정식으로 발견되어 버리면 그로 인해 내려지는 벌은 가문이 쑥대밭이 될 정도다.
“제 의도는 파악했죠? 영민하신 분이니 잘 알 거라 믿습니다. 섬서에서 지각 변동이 좀 있을 거예요. 모든 게 끝날 때까지 누구 편을 들지 말고 조용히 계세요. 그러면 별문제 없이 끝납니다.”
“저, 저는…….”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동안 받은 금전을 탄광을 위해, 나라를 위해 쓰는 게 좋겠네요. 어때요?”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라를 위해 쓰겠습니다, 공자님.”
“훌륭합니다.”
소호는 웃는 얼굴로 떠나갔다.
폭풍이 몰아친 것 같은 새벽녘의 탄광.
넋을 잃은 지현만이 혼자서 덩그러니 남겨졌다.
***
“미친놈이구나. 제정신이 아닌 놈이야.”
진목룡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온몸이 서늘했다.
뒷목이 찌릿찌릿하고 숨이 턱 막혔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몸이 아프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된 걸까. 짐작도 가질 않는다.
“사례감 태감과의 인연이라고? 섬서성 지현이 벌벌 기게 만드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관부의 인맥 중에도 급이 있다.
황실 사례감 태감이라면 지금 시대에는 천하를 오시한다.
“젠장. 탄광에서 이뤄지는 일을 어떻게 알고……!”
상회로 돌아온 진목룡은 주판을 두들겨 계산을 뽑아 보았다.
“탄광 명부에 등록된 인부들이 삼백 명이니까. 달에 은자 석 냥씩 빠진 걸 다시 주려면 한 달에 구백 냥. 일 년이면 일만 팔백 냥. 오 년치를 계산하면…… 오만 사천 냥?”
은자 오만 사천 냥이라니.
듣는 것만으로도 맥이 풀릴 정도의 거금이다. 보통 사람은 평생 구경도 못할 금액이지 않은가.
그만한 돈을 대체 하루만에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물론 금룡상회 본점으로 가면 못 구할 돈은 아니라지만, 그러려면 지금의 상황을 본점에 보고하고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결과는 뻔하다.
금룡상회는 그리 자비롭지 않다.
금룡상회를 관리하는 큰손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어 진목룡을 물어뜯을 것이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애초에 계획부터 어떻게 잘못 세워졌고, 지금 사태에서 가장 돈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이 뭔지 논의할 것이다.
이 사태는 수습되겠지만, 앞으로 진목룡의 미래가 밤하늘처럼 캄캄해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걸 지부의 돈에서 꺼내 쓰면 올 한 해 우리 지부는 아무것도 못한다. 당장 다음 주에 지급할 물품 대금도 못 주게 될지도 몰라.’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진목룡은 헛웃음이 나왔다.
“한순간에 은자 오만 사천 냥을 뺏기고, 거기다가 섬서성 탄광들을 다 잃게 생겼다고? 허허헛. 허허허헛!”
금룡회주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진목룡을 찢어 죽이려 하지 않을까?
한참을 허탈하게 웃던 진목룡이 왜소한 몸과 어울리지 않는 독한 눈빛이 되었다.
“우리가 그 돈은 못 주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사건의 본질을 보자. 왜 그랬지? 우린 앞으로 섬서를 종남파가 장악할 테니 그에 맞춰서 판을 짜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천무공자가 우리 탄광의 약점을 찔렀지?”
천무공자가 바라던 일은 종남파가 천무련에 들어가는 것 딱 하나다.
종남파는 그에 대한 교섭권을 금룡상회에게 슬쩍 넘긴 거고, 금룡상회는 종남파가 천무련에 참가하는 대가로 원래 화산파의 것이었던 표국과 상회를 다 넘기라고 한 거고.
진목룡이 생각하기에 거기까진 이상한 점이 없다.
종남파가 천무련의 휘하로 들어간다면, 당연히 종남파가 섬서를 다스리는 게 좋은 건데 뭐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칼을 찔렀지. 이건 우리 금룡상회를 섬서에서 아예 빼 버리겠다는 소리인데……. 화산파를 키우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큰일이다. 내일이 되면 정말로 사례감에 이번 일을 보고하려고 한다면?”
진목룡은 뭉퉁한 코를 킁킁거렸다.
냄새가 난다.
돈 냄새가 아니라. 시체가 썩는 것 같은 구린내가 나고 있었다.
“흐으.”
시간이 없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이 구린내 속에서 돈 냄새를 찾아야만 했다.
진목룡은 생각을 가만히 정리한 뒤, 섬서지부에 있는 모든 상인들을 불러모아 지시를 내렸다.
“지금부터 너희는 전표를 준비해라. 은자 석 냥짜리 전표를 삼백 개. 전장에서 발행한 거 말고, 우리가 상인들끼리 쓰는 전표. 그걸로 준비해. 알았어? 그걸 오 년치를 준비해야 해. 열두 달씩 오 년이니까 육십 개. 삼백 냥 어치 전표를 육십 번 준비해. 이제 우리 금룡상회는 전쟁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목숨을 걸고 움직여라. 알겠냐?”
상인들은 잔뜩 긴장한 채 서둘러 움직였다.
“아! 그리고 마차를 불러! 종남파로 간다!”
이미 이판사판인 상황이다.
진목룡은 다급하게 옷을 갖춰입고 종남파로 향했다.
***
새로운 하루가 밝아 오자 소호는 푹신한 이불을 걷고 잠에서 깨어났다.
하늘은 화창한데 어째 몸이 끈적한 게 비가 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매일 하던 새벽 수련을 오늘 하루는 보류했다.
부드럽게 계란을 푼 죽을 먹고 따뜻한 차도 한 잔 마신 뒤에 밖으로 나가 보니 봇짐을 맨 중년의 사내가 소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진작 말씀하시죠.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닙니다.”
천무련 비각주.
청조는 조심스럽게 소호의 뒤로 따라붙었다.
“금룡상회의 움직임이 빠릅니다.”
“그래요? 착복했던 돈은 다 토해 냈어요?”
“어제 저녁에 금룡상회에서 탄광 인부들을 모두 모아 돈을 나눠 주긴 했습니다만.”
찝찝한 말투였다.
직접 서로를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지 않다보니 소호는 청조가 왜 망설이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개운치 않아 보이시네요. 금룡상회가 편법을 썼어요?”
“비슷합니다. 금룡상회가 돈을 나눠 주긴 했는데, 탄광 인부들에게 상인들만 쓰는 전표를 나눠 주었습니다.”
“뭐라고요?”
명나라의 화폐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위조하기도 쉽고 황실에서도 딱히 화폐를 그리 신경쓰지 않아서 지금도 장터에선 소금 한 됫박에 닭 몇 마리를 서로 교환하기도 하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말발굽을 닮은 은자나 금자가 가장 믿을 만한 돈이 되었는데, 지금 청조의 말대로라면 금룡상회는 그런 눈에 보이는 화폐로 돈을 준 게 아니다.
전표라는 금룡상회의 ‘약속’을 돈처럼 뿌렸다.
“금룡상회의 탄광에서 십 년을 일하면 원래의 월봉보다 더 큰 돈을 일한 연수만큼 쳐서 준다고 하니까 다들 난리가 났습니다. 금룡상회가 최고라고. 열심히 일하면 나중에 한몫 챙길 수 있겠다면서 다들 흥분했답니다.”
“하하핫.”
소호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가 막히다.
어찌 안 웃을 수 있겠는가.
“진목룡 그 사람. 제법이네요. 본점에서 빌려다가 돈을 뿌리든가, 아니면 아예 못 준다고 배 째란 식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마음에 드십니까?”
“일처리만큼은요. 그렇게 처리할 줄은 몰랐네요.”
광부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눈에 선하다.
원래 월봉으로 은자 두 냥씩 받던 광부들이, 십 년을 채우면 일한 개월 수에 은자 석 냥씩을 더 쳐 주겠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기분이 어땠을까.
갑자기 돈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 아닐까?
“가만보자. 십 년? 왜 십 년이지? 비각주. 금룡상회가 탄광 사업을 한 지 몇 년 되었죠? 오 년 아니었어요?”
“그렇습니다.”
“하하핫.”
재밌는 일이다.
돈을 주긴 줬는데, 만약 이번 일로 탄광에서 쫓겨나면 돈을 주지 않게 슬쩍 조건까지 걸어 놓았다니.
“대단하네, 진 지부장.”
소호는 솔직히 조금 놀랐다.
“조삼모사가 따로 없네요. 광부들도 참. 원래 자기 돈인데, 그게.”
안타까운 일이었다.
모르는 게 죄다.
자신의 돈이 자신의 것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제 몫을 찾아먹을까.
“대단한 건 대단한 거고. 그래도 꾀를 써서 광부들 돈을 떼먹고 이득을 보려는 건 탐탁지 않네요.”
소호는 뒷짐을 진 채 말없이 스무 걸음을 걸었다.
“비각주님. 종남파 말인데. 혹시 이인자가 누구예요?”
“지금 연종명 장문인 다음 가는 이인자 말이십니까?”
“네.”
“장로들이 몇 명 있기는 하지만, 화산혈사 때 핵심은 다 죽고 실권이 없는 자들만 남았습니다. 일대 제자들 중에 태을검객을 이끄는 오뢰권사 백리해가 장문인의 다음일 것 같군요.”
“그래요?”
“예. 벽력검의 제자이고 종남파의 대제자입니다.”
매화검신과 함께 섬서제일검을 다투던 벽력검의 후계자란 소리였다.
“백리해의 성정은 어때요?”
“원칙주의적이고 딱딱하다고 들었습니다. 벽력검의 친자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똑같다는 평입니다.”
“그렇구나. 잘됐네요. 그럼 지금의 장문인이랑은 잘 안 맞죠?”
“예.”
청조는 소호가 그걸 알아챈 것에 조금 놀란 듯했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설명을 계속했다.
“벽운검은……, 매사를 이득으로 보는 편이라. 그편이 문파의 부흥에는 좋다는 의견도 있지만. 종남파 다수의 지지를 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협의롭지 못하다고. 불만이 팽배합니다.”
“그렇구나. 종남파도 희망은 있네요.”
소호는 길가에서 파는 만두 가게가 왁자지껄한 모습을 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백리해를 만나 보고 싶어요. 좀 친해지고 싶네요.”
“약속은 언제로 잡을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아요.”
“준비하겠습니다. 혹시…….”
청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반간계(反間計: 간자를 역이용하는 계책)를 쓰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백리해의 주변 정보를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글쎄요? 그건 만나 봐야 알겠죠? 계책보다는. 그냥 뭘 좀 보여 주려고요.”
“예. 알겠습니다.”
청조는 언제나 그랬듯 수많은 인파 사이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소호는 주변의 시전 상인들을 구경하면서 계속해서 걸어갔다.
길이 끝나 가는 지점까지 걸어가니 점차 주변에 사람들이 줄어들고 인적이 드문 공터가 나타났다.
소호는 빙긋 웃었다.
한산한 공터에 종남파의 도복을 입은 서른 명의 무인들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기는 아니지만, 적의는 짙다.
가장 앞에서 다가오는 청년을 향해 소호가 한발 먼저 물었다.
“반갑소, 나는…….”
“백리해?”
체구가 듬직하고 얼굴이 넓적한 청년이었다.
그는 설핏 표정이 굳어진 채 고개를 저었다.
“나는 대사형이 아니오. 난 연사청이라고 하고 종남의 태을검객으로서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소.”
“다행이네요.”
연사청은 뭐가 다행이냐는 듯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잘 아시다시피 저는 장소호입니다. 연 소협은 무슨 일로 오셨죠?”
“어째서 우리의 우방인 금룡상회를 괴롭히는 것이오?”
다소 직설적인.
적의와 울분이 담긴 질문에 소호의 미소가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