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25화 (554/686)

17권 23화

제36장 득이물유(得而勿有) (7)

“제가요? 괴롭혔다고요?”

“그렇소. 우리 종남의 장문인께서 천무련에 가입하려고 생각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런데 어째서 금룡상회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괴롭혀서 일을 방해하는 것이오?”

연사청의 분개한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종남파의 무인들이 그와 같은 마음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입장에서는 천무련의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소. 종남파를 한 가족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것이 맞소? 어째서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는 것이오?”

“재밌네요.”

소호는 연사청의 분노가 진심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오히려 재밌어졌다.

“금룡상회에서 뭐라고 했어요?”

“금룡상회는 장 공자가 탄광 사업에 트집을 잡고 있다고 말했소.”

“트집이 아니죠. 그동안 몰래 나라의 돈을 착복하던 걸 제가 발견했을 뿐인데요.”

“뭐요?”

연사청의 눈빛이 흔들린다.

아무래도 그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자세히 듣지 못한 듯했다.

‘이건 싸울 거리도 안 되네.’

소호는 뒷짐을 진 채 종남파의 무인들을 한 명씩 쭉 둘러보았다.

“나랏돈으로 광부들에게 주는 돈을 절반 이상이나 떼먹던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연 소협. 말해 봐요. 어차피 금룡상회가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종남파를 지원하니까 그냥 모른 척하기로 한 거예요?”

“무슨 그런. 그게 사실이오?”

연사청의 얼굴이 붉어졌다.

분노와 부끄러움이 혼합된 표정이었다.

그는 혹시 듣는 사람이 있을까 봐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종남파 무인들이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니 다들 멀리서 돌아가느라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 종남은 그런 곳이 아니오!”

“그래야죠. 정파의 지주인 팔파일방이 그래서야 제가 이렇게 천무련을 만드는 의미가 없죠.”

소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오히려 실망입니다. 종남파가 이렇게나 사람 보는 눈이 없나 싶어서요.”

“큭.”

“오해가 있는 듯 한데. 저는 오히려 금룡상회에게 기회를 줬어요. 착복하던 돈만 인부들에게 다 돌려주면 없던 일로 하겠다고. 한 번 생각해 봐요. 제가 왜 금룡상회한테 기회를 줬겠어요? 그게 다 종남파 때문에 봐준 거라고요.”

구구절절 맞는 말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진목룡의 성토에 흥분해서 우르르 달려나왔던 자들이 당황하여 서로를 쳐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럼 우리 종남과의 협상을 쉽게 하기 위해 트집을 잡은게 아니란 말이오?”

“한 번 살펴봤을 뿐이에요. 금룡상회가 어떤 곳인가 궁금하기도 했고. 그런데 실제로 죄를 짓고 있었으니 어쩌겠어요?”

“으음.”

소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 소협. 한 가지 물어볼게요. 장문인은 그걸 알고 있었을까요?”

“무엇을 말이오?”

“금룡상회의 비리 말이에요. 장문인은 알고도 묵인한 걸까요?”

연사청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건장하고 다혈질의 청년이지만 대범하지는 못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만 봐도 그가 얼마나 당황하는지 보인다.

“아버지는, 아니, 장문인께서는 그럴 리가 없소. 대종남의 장문인이오. 그런 비리를 알고도 묵인할 리가 없지 않소!”

‘연사청이 장문인의 아들이었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소호는 연사청을 더 압박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났다.

‘정말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더 화를 내며 부정하겠지.’

하지만 연사청을 비롯한 서른 명의 무인들은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당황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겨 버렸다.

그들의 침묵이 역설적이게도 정답을 알려 주고 있었다.

“장문인께 전해 주세요. 금룡상회는 착복한 돈을 인부들에게 제대로 돌려주지 않고 꾀를 부렸고, 나는 이 사건을 조용히 넘어갈 마음이 없다고. 그러니 장문인과 내가 했던 약조는 내용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전해 주세요.”

“그……!”

연사청은 속에 든 뜨거운 감정을 꺼내고 싶은 것처럼 입을 벌렸으나, 차마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고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알겠소. 그리 전하리다.”

씹어뱉는 듯한 한마디만을 남긴 채 연사청은 모두를 이끌고 다시 종남산으로 올라갔다.

“아직 희망은 있네. 이제부터가 문제인데 어떻게 나오려나?”

소호는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

“도대체 그놈은 왜 문제를 만드는 것이지?”

벽운검 연종명은 못 마땅한 심기를 있는 대로 드러냈다.

반백의 머리를 거칠게 긁으면서 두툼한 눈두덩이를 잔뜩 찌푸렸다.

그나마 차를 우려내는 손길만 차분할 뿐, 불룩 튀어나온 뱃살이 그가 거칠게 숨을 내쉴 때마다 들썩거렸다.

“상대의 가격을 싸게 후려치는 것은 거래의 기본이지요. 아무래도 천무공자가 섬서성을 놓고 장사를 제대로 해 보려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쯧, 아니, 아니지.”

연종명은 건너 쪽에 앉아 있는 진목룡을 향해 혀를 찼다.

“그놈이 어리긴 하지만 무인이야. 장사꾼은 아닐세. 뭔가 제 놈 맘에 안 드는 게 있었던 것이지. 그러니 트집을 잡고 난리를 치는 것이야.”

종남파와 금룡상회는 협력 관계이지만, 늘 연종명은 진목룡을 돈만 밝히는 한 수 아래의 사람으로 취급했다.

진목룡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민망했지만,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무공자와 만났을 때 분명히 그런 말을 듣긴 했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십중팔구는 그럴 것이야.”

연종명은 못마땅한 얼굴로 좀처럼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래서? 은자 오만 사천 냥을 전표로 때운 것은 탄복할 만하긴 한데, 그걸로 천무공자가 납득을 하겠나? 안 그래도 미운 놈이 꾀를 부린다고 더 화를 내진 않겠냐는 말일세.”

“그래서 제가 장문인을 찾아뵌 것입니다.”

“나를 왜?”

진목룡은 정말로 모르겠냐는 듯 눈빛으로 되물었다.

“왜? 종남파 무인으로 천무공자 버릇이라도 고쳐 주라고?”

연종명은 화난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이보게. 나도 그깟 애송이 하나에 쩔쩔매고 싶지 않아. 그런데 그놈은 위치도 범상치 않고, 무공도 강하지. 심지어 사례감 태감과 연이 있는 것 같다고 자네가 방금 말하지 않았어?”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장문인께서 해 주실 수 있는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 모두의 집에 불이 난 겁니다. 강 건너 불구경만 할 때가 아닙니다.”

“자네 말이 묘하군. 금룡상회가 우리 종남파를 강제할 수 있다고 보나?”

“그럴 마음은 없습니다만 하려고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요.”

침묵이 흘렀다.

연종명의 아미가 위로 치솟았고, 진목룡은 왜소한 체구임에도 연종명의 압박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자네 제정신인가?”

“이대로 탄광도 잃고, 오만 사천 냥도 뜯기고, 사례감에 보고까지 올라가면 저는 제정신이 아닐 것입니다.”

“본인들이 지은 죄의 업보가 왔을 뿐인데 왜 난 그 말이 협박처럼 들리는가?”

“저희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뻔히 아는 데다 도움까지 주셨던 분께서 선을 그으시니 그런 게지요.”

연종명이 비록 벽력검처럼 사해에 무명을 떨친 인물은 아니나, 그래도 종남파의 장문인이며 경지에 오른 고수다.

그가 분노를 드러내자 방 안이 꽉 찰 만큼의 기운으로 공기가 흔들렸다.

“자네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

“장문인. 진정하시지요.”

“종남이 이리도 우습게 보였던가? 우리 덕분에 섬서 땅에서 부스러기나 주워 먹던 자들이. 감히!”

진목룡의 눈빛이 지극히 차가워졌으나,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달래듯 말투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저희가 종남에 들인 정성과 돈이 얼마나 큰지 아시지 않습니까? 정녕 밖에서 온 뜨내기 하나에 그 오랜 세월 이어진 인연을 날려 버릴 셈이십니까?”

“흐음.”

“말씀하신 대로 저는 장사꾼입니다. 그러니 손해 득실을 잘 알지요. 이대로 물러서면 모든 것을 잃을 것입니다. 화산파가 되살아날 싹을 밟고 섬서를 지배할 기회가 자주 올 것 같으십니까?”

연종명은 붉으락푸르락하며 화를 주체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금룡상회는 기분에 따라 쳐 내기에는 너무나 큰 곳이었다.

“종남이 그놈을 죽였다고 치자. 그 후폭풍은 어떻게 감당하라고 그래?”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사는 법이지요.”

“살아서 지옥이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은 법일세. 명심하게.”

연종명은 비웃으면서 새로운 제안을 던졌다.

“이렇게 하도록 하지. 어차피 오만 사천 냥을 날릴 상황이었는데, 일만 냥이나 이만 냥 정도는 쓸 생각이 있겠지?”

“……상황에 따라서 가능합니다.”

“좋아. 늘 그랬듯이 돈은 자네가 대. 내가 아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이용해서 처리하도록 하지.”

연종명은 서탁 사이에서 책 한 권을 꺼내더니 그 안에서 손바닥만 한 종이를 꺼내 진목룡에게 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백귀총(百鬼塚). 정당한 가격만 준비하면 어떠한 의뢰든 반드시 한 번은 받아 준다는 서약서일세.”

진목룡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귀총이라고 하면 살수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전설적인 곳이다.

돈만 주면 설령 황제라도 죽일 수 있다고 자랑하던 곳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소문이 들리지 않게 되었다.

한때는 일야회나 야조탑조차 한 수 접어 준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여기서 종남파의 장문인을 통해 인연이 생길 줄이야.

“백귀총이 아직도 활동하고 있었습니까?”

“힘을 감춘다고 이곳 섬서 땅에 숨어 있었지. 대외적으로 의뢰는 받지 않지만 나는 받을 빚이 있으니 아마 순순히 의뢰를 받아 줄 걸세.”

연종명은 이제 됐냐는 식으로 눈총을 주었다.

진목룡은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 쪼가리를 떨리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세월이 느껴지는 먹색으로 선명하게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탈명인(脫命印).

그 밑에는 붉은색 인장으로 백(百)이라는 글자도 찍혀 있었다.

목숨을 빼앗는 인장이라니.

진목룡은 자그마한 종이 쪼가리에서 짙은 피비린내를 맡았다.

“오늘 밤 대동 탄광 근처의 관제묘로 가게. 거기서 밤중에 향불을 켜는 노파가 있거든 그 사람에게 그 종이를 보여 주면 해결될 것이야.”

그 후 별 의미 없는 대화를 잠시 나눈 뒤 진목룡은 종남산을 내려왔다.

품 안에 든 탈명인이 천 근짜리 쇳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진목룡은 망설임을 끊어내고 다급한 걸음걸이로 대동 탄광을 향해 움직였다.

***

어두운 밤.

조용히 잠을 청하던 소호의 방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쿵. 쿵.

적절한 힘으로 절도 있게 두드리는 소리에서 공손함이 느껴졌다.

소호가 말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 보니 오늘은 봇짐을 짊어지지 않은 평범한 차림의 청조가 기다리고 있었다.

“련주님.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네. 안으로 들어오세요.”

다탁으로 안내받은 청조는 손바닥 두 개만 한 상자 하나를 다탁 위에 올려 두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납작하면서도 튼튼해 보이는 상자였다.

금룡상회에서 구매했던 연와와 똑같은 크기의 상자다. 소호는 화로 위에 올려 두었던 찻주전자를 집어 들며 물었다.

“그게 제가 부탁드렸던 거예요?”

“예. 방금 도착했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안 그래도 올 때쯤 됐다 싶었는데.”

“아닙니다. 그보다, 급히 전해 드릴 소식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어떤 거요? 살수가 붙었다는 거요?”

청조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란다.

소호는 웃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최근에 저를 보는 시선이 많아졌거든요. 상황적으로도 슬슬 올 때가 됐다 싶었죠. 그래서, 누가 경고해 주었는데요?”

“일야회입니다. 전혀 연관이 없었는데 갑자기 조심하라는 전서를 받았습니다.”

“묵신 할아버지가 도와주시네요.”

소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묵신이라고 하시면, 혹시 제가 아는 전대 일야회주를 말하시는 겁니까?”

“아마 맞을 거예요. 은자촌에서 저한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 할아버지이신데, 지금 오랜만에 본파로 돌아가 계시거든요.”

살수계의 전대 고수가 있다면 그가 바로 묵신이다.

헛된 말을 할 리 없고, 근거 없이 경고를 할 사람도 아니다.

소호는 살수의 위협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야밤에 운동이나 하려고 돌아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보네요.”

청조는 소호의 말뜻을 곰곰이 곱씹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쨍그랑―.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소호가 머무는 객잔의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불이 났다면서 소리를 지르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객실에서 우르르 몰려나온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밖으로 나서는 소리도 들렸다.

쿵쿵쿵쿵.

사람들이 몰려 나가다 보니 객잔 전체가 흔들리는 듯했다.

매캐하게 무언가가 타는 듯한 냄새도 솔솔 밀려왔다.

소호와 청조.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얗게 만월이 뜬 밤.

반쯤 열려 있던 창틀에 어느새 복면을 쓴 사람들이 까마귀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그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소름이 오싹 돋는 광경이다.

특급 살수였던 청조가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이미 여러 사람이 창틀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생각보다 행동이 빠르네요.”

소호는 다탁에 비스듬히 기대 두었던 박도를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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