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26화 (555/686)

17권 24화

제36장 득이물유(得而勿有) (8)

소호가 박도를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창틀에 까마귀처럼 올라서 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훌쩍 안으로 들어왔다.

왜소한 체구.

검은색 피풍의를 뒤로 젖히자, 안색이 나쁜 노파가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음침하게 웃었다.

“꼬마야. 그 칼을 뽑지 않는 것이 좋을 게다.”

쇳가루를 비비는 것처럼 거친 목소리였다.

호호백발에 진한 주름 때문에 눈도 뜨기 힘들어 보이는데 희한하게도 약하다는 느낌은 안 들었다.

섬뜩함.

몸을 낮추고 있는 늙은 고양이를 보는 듯했다.

소호는 가만히 노파를 마주 보다가 빙긋 웃었다.

“강호의 격언이 있죠. 여인, 어린아이, 노인을 조심하라고.”

“흘흘, 똑똑하구나. 예부터 격언을 안 따르는 놈들이 빨리 죽었지.”

“그러게요. 할머니는 되게 위험해 보이네요.”

분명히 눈앞에 있는데 눈앞에서 느껴지질 않는다.

무인의 ‘감각’이 속삭이고 있었다.

상대방의 호흡을 읽고 움직임을 예측해야 하는데, 노파는 자신의 숨소리도 자연스럽게 감춘다.

가슴과 몸은 물론이요, 어깨도 들썩이지 않았다. 마치 숨을 쉬지 않는 사람 같았다.

‘저런 모습은 묵신 할아버지 이후로 처음이야. 대단하네.’

소호는 박도를 쥐고 있던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탄탄한 교어 가죽이 손에 착 감겼다.

“옆에 있는 아이야. 너도 마찬가지다.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것이야. 탑에서 온 아이냐?”

노파의 사각지대로 움직이기 위해 뒤에서 은밀히 움직이던 청조가 움찔 멈춰 섰다.

“그 야행보를 보니 야조인 것 같은데. 살수가 저 꼬마 옆에 있을 줄은 몰랐구나. 탑주는 여전히 괄괄하더냐?”

“노인장은 누구요?”

“건방진 아이로다. 대선배의 이름을 알고 싶으면 자신의 이름부터 말해야지?”

노파는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눈앞에서 훅― 사라졌다가 청조의 한 걸음 앞에서 허깨비처럼 나타났다.

깜짝 놀란 청조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라 객실의 천장을 발로 박차고 소호의 옆에 내려섰다.

그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렸다.

“환환귀영보(幻幻鬼影步)라니. 백귀총의 귀신들이 아직도 살아 있었소?”

“흘흘, 귀신이란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는 법이다. 살아 있었냐니? 우린 한 번도 죽은 적이 없단다, 아이야.”

청조는 잔뜩 긴장한 채 소호를 항해 전언을 날렸다.

―살수계를 한때 주름잡았던 백귀총의 살수인 듯합니다. 왜소한 몸과 주름진 얼굴을 보면 쌍겸파파(雙鎌婆婆)인 것 같은데. 전대 고수입니다. 눈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어린아이까지 다 죽일 만큼 잔인하고 냉철한 자들이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전언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노파가 큰 웃음을 터뜨렸다.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십 년이 넘었는데 그래도 날 알아보는 걸 보니 제법 식견은 있는 놈이구나. 그래. 맞다. 나는 갓난아이도 죽일 수 있을 만큼 잔인하니 필히 조심해야 할 것이야.”

쇳소리를 내며 낄낄거리고 웃는 모습이 섬뜩하기 그지없다.

청조는 더욱더 놀라서 허리춤의 단검을 꽉 움켜쥐었다.

전언을 엿듣다니.

노괴물의 능력이 청조의 생각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전대 고수라는 건 참 신기해요. 보통은 나이가 들수록 힘이 약해지고 쇠락하는 게 보통인데. 어째서 전대 고수는 더욱 무서워지는 걸까요?”

소호는 평온한 목소리랑은 반대로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나이 든 사람들이 왜 그렇게 점점 강해져요? 젊은 사람들 억울하게.”

소호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더욱더 억울해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 든 사람들.

전대 고수.

이 두 가지에 대해 소호만큼 호되게 당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소호에 대해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영 뜬구름 잡는 이야기다.

천하의 쌍겸파파도 당황했는지 주름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는 이상한 아이로구나. 우리가 두렵지 않으냐?”

“두렵나고요? 할머니가 백귀총의 살수라서요?”

“그도 그렇지만, 너는 천무련이라는 곳의 어린 련주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어려도 시견이 멀쩡할 텐데. 지금 네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모르겠느냐?”

소호는 겉으로 보기엔 고작 약관의 나이에 불과한 청년 고수일 뿐이다.

아마 쌍겸파파 정도 되는 전대 고수 입장에서는 언제든 목숨을 취할 수 있는 어린아이로 보일 터.

그런 소호가 별로 겁도 안 먹고 태연하게 있으니 이상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소호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까마귀처럼 모여든 살수.

눈앞에 있는 전대 고수.

그 와중에 메케한 연기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고 보면 방 안이 점점 회백색으로 뿌옇게 변해 가는 것과 동시에 발밑이 뜨끈해졌다. 아래층에서 불길이 치솟는 모양이다.

“그렇죠. 위험하긴 하죠. 일단 할머니가 무슨 일로 왔는지는 알겠어요. 그런데 누구 의뢰로 왔어요? 누가 나를 죽여 달래요?”

“흘흘, 태평한 꼬마로구나.”

쌍겸파파는 소호가 너무 태연하니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손짓을 하자 창틀에 앉아 있던 자들 중 두 사람이 주변을 살피기 위해 바람처럼 사라졌다.

“꼬마야. 네가 어린 데다, 우리가 십 년 만에 봉문을 풀었기에 자비를 베풀도록 하마. 그 자리에 그대로 앉거라. 그러면 고통 없이 끝내 주마.”

스릉―.

쌍겸파파가 소매를 한 번 털자, 어느 순간 그녀의 양손에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낫 두 자루가 들려 있었다.

마치 변검술 같은 모습이다.

쌍겸파파는 낫 두 자루를 양손에 들고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

“하핫.”

헛웃음이 나왔다.

쌍겸파파는 고통 없이 보내 주는 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 듯 보이지 않는가.

“일단 의뢰주가 누군지 알려 주시지 않을래요?”

“그건 안된다. 명성 높은 살수가 함부로 의뢰인이 누군지 밝혀서야 장사를 할 수 있겠느냐?”

“그렇구나. 안 알려 주시는구나.”

깜빡.

소호의 몸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가 싶더니 쌍겸파파의 좌측 뒤 사각지대에서 나타났다.

박도를 뽑아 쌍겸노파의 목에 겨누는 소호의 동작에는 한 점의 군더더기도 없다.

한 호흡 만에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늘 그랬듯 완벽한 동작.

상대의 호흡을 파고드는 시점에 절묘하게 칼을 들이대는 모습은 살수보다 더욱 살수 같다.

“흐읍?”

파라락!

노파는 날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환환귀영보를 펼쳐 번개같이 튀어 올랐다.

청조를 향해 달려들었을 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몸을 날려 멀어졌다.

“이럴 수가!”

쌍겸파파는 주름진 얼굴에 더욱 주름이 늘어날 만큼 경악했다.

눈빛이 흔들리고 입은 벌어졌다.

설마 소호의 동작을 놓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탓이다.

우웅―.

소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아지랑이처럼 몸이 흔들리고, 순식간에 쌍겸파파의 앞으로 다가가 위에서 아래로 수직 일격을 내리쳤다.

아니.

내려치려다가 몸을 돌려 갑자기 뒤를 벴다.

후우웅―.

왼발을 앞으로 내딛고, 허리는 꼿꼿이 세운 채 천지를 일격에 가른다.

창천랑의 도법.

그 묵직한 일격에 천장이 갈라지고 쌍겸파파의 앞섶이 수직으로 찢어졌다.

신기루가 사라지듯.

원래의 장소에서 쌍겸파파는 사라지고, 텅 비어 보이던 곳에서 쌍겸파파가 칼을 맞은 것이다.

“크왁.”

쌍겸파파는 일격을 피하지 못했지만, 놀라운 독심으로 쌍겸을 휘둘렀다.

오른쪽 낫으로는 목을, 왼쪽 낫으로는 허벅지를 노린다.

번뜩이는 섬광.

일격필살이 필요 없다.

공격이 어찌나 빠른지 휘두르는 동작을 봤을 때는 이미 늦었다.

촤아악―!

뒤로 훌쩍 물러선 소호는 자신의 옷자락이 이미 베여서 쭉 찢어졌음을 알아챘다.

따끔거리면서 피부가 갈라졌다.

손으로 목덜미를 만져 보니 깊지는 않지만 상처가 만져졌다.

소호는 감탄하면서 박도로 다시 중단을 겨누며 쌍겸파파를 견제했다.

“대단하네요.”

“쿨럭. 쿨럭.”

쩍 벌어진 가슴을 붙잡고 비척비척 뒤로 물러나던 쌍겸노파가 객실의 벽면에 등을 부딪쳤다.

쿵.

노파의 상처와 똑같은 각도로, 그녀가 등을 기댄 벽면에 커다란 상흔이 길게 남았다.

천장에서 바닥까지.

마치 거인이 칼을 내리친 것처럼 천랑도법의 위력은 막강하다.

“어떻게……?”

살수의 극의인 환환귀영보의 실체를 대체 어떻게 꿰뚫어 보았냐는 의문이었다.

“일야회……? 너, 정체가 무엇이냐?”

전대 일야회주.

묵신의 신법을 알아챈 쌍겸노파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제가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어요. 살수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강하다. 살수가 적에게 모습을 드러냈다면, 그건 이미 진 것과 다름없다.”

“……!”

“할머니는 저를 우습게 보았죠? 그때 이미 진 거네요. 전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아요.”

쌍겸파파가 충격을 받은 듯 덜덜 떨었다.

“묵신……!”

만약 쌍겸파파가 암습을 했다면 위험했을 것이다.

눈앞에 뻔히 있는데도 기척이 안 느껴지던 그 모습이 얼마나 공포스럽던가.

쌍겸파파가 달인의 경지에 이른 은잠술을 써서 몰래 덮쳐왔다면 두려운 적이었겠지만, 노파는 자만했고, 소호의 눈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서 충고까지 했다.

지금 이건, 그 대가였다.

파라락―.

후웅!

신출귀몰한 신법으로 노파에게 다가간 소호가 박도로 그녀의 어깨를 내리쳤다.

아까와 같은 천랑도법이다.

막을 것인가?

반격할 것인가?

쩌어엉!

쌍겸을 교차해 막으려던 그녀의 낫 두 자루는 대번에 칼날이 부러지며 터져 나갔다.

“파파!”

창틀에 앉아 있던 까마귀 떼가 일제히 뛰쳐 올라 소호를 향해 덮쳐왔다.

검, 도, 비도.

무기도 제각각 다양하다.

퍽!

소호의 박도가 무기를 박살 내고도 모자라 쌍겸파파의 어깨에 파고들었다.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카학.”

상처 입은 고양이처럼 피를 토한 노파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소호를 노려보았다.

소호는 노파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뒤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펼친 것은 경고다.

일제히 달려들던 백귀총의 살수들이 움찔 멈춰 섰다.

“그놈들……, 일만 냥을 내놓은 이유가 있었구나…….”

쌍겸파파는 피를 토하면서도 씹어뱉듯이 말했다.

소호는 칼을 빼지 않은 채 웃었다.

“일만 냥이면 너무 적게 불렀네요. 오만 냥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클클클. 네놈이 그 정도나 된다고……?”

“적어도, 가진 돈은 다 걸었어야죠.”

콰득―.

소호는 박도의 칼끝을 쌍겸노파의 목 쪽으로 비틀면서 물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누가 의뢰했어요?”

“흘흘, 난 살수다. 백귀총이 네놈을 계속 쫓을 것이야.”

살수로서의 긍지인가.

아니면 이미 살 만큼 산 노인네의 허세인가.

노파는 웃으면서 박살 난 쌍겸의 손잡이를 휘둘렀다.

다 죽어 가는 반송장이 속도만큼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쾌속하기 그지없다.

서걱―.

유려하게 반원을 그린 소호의 박도가 노파의 목을 벴다.

섬광이 번뜩였다.

쌍겸파파가 휘두른 낫은 의미 없이 허공을 휘젓고, 이내 퍽! 소리와 함께 화골산을 뿜으며 터졌다.

치이익―.

메케한 연기와 함께 노파의 몸이 타들어 갔다.

보통은 시신을 처리하고 뼈를 녹일 때 쓰는 화골산이건만 산 사람의 몸도 연기를 내면서 무참히 녹아내렸다.

소호는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낼 시간조차 없었다.

쒜에엑―.

백귀총의 살수들이 일제히 덤벼들었다.

소호는 몸을 돌려 칼을 휘둘렀다.

두 눈에선 핏빛이 감돌고 몸 뒤에서는 전륜한 법광이 은은하게 뿜어졌다.

살수들은 환환귀영보를 통해 신출귀몰하게 덤벼 왔지만, 이미 소호는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한 뒤였다.

푸화악!

쩌정!

콰직!

쌍겸노파가 그들 중의 최고수였으며, 암습이 아닌 이상 승부는 이미 정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객실이 터져나갈 것처럼 들썩이길 잠시.

모든 백귀총의 살수들이 쓰러지자 방 안에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재빨리 밖으로 나간 청조가 백귀총의 살수 한 사람을 제압해서 들쳐 업고 돌아왔다.

“주변을 살피던 두 명 중 한 명은 반항이 심해 죽였습니다. 한 명은 잡아 왔는데…….”

청조는 소호의 위압감에 짓눌려 말끝을 흐렸다.

혈향이 가득한 곳에서, 붉은색이 섞인 법광을 뿜어내는 소호는 마치 불가에서 말하는 아수라 같았다.

“일단 나가죠. 우리 약속도 있잖아요?”

“약속이라고 하시면 혹시? 종남의 대제자 말씀이십니까?”

“네.”

소호는 박도에 묻은 피를 쓰러진 살수들의 등에 닦아 내고 다시 칼집에 집어넣었다.

“이름이 백리해였죠? 대제자를 만나고 싶어요. 가능한 한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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