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권 25화
제36장 득이물유(得而勿有) (9)
객잔에 붙은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인근 마을 사람들이 다 뛰쳐나와 물과 모래를 마구 뿌려도 불길이 잡히기는커녕 오히려 더욱더 거세게 타올라 결국 객잔 전체가 활활 타올랐다.
“아이고! 내 객잔이 다 타는구나! 망했구나! 망했어!”
엉엉 우는 객잔 주인을 뒤로한 채 소호는 청조와 함께 옆 마을로 이동했다.
청조는 기절한 살수를 어깨에 들쳐 멨고, 소호는 청조에게 받았던 손바닥 두 개만 한 제비집 상자를 챙겼다.
“나중에 저 객잔 주인에게 천무련에 올 생각 없냐고 물어봐 주세요. 없다고 하면 적당한 금액으로 보상해 주시고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약속을 잡은 장소는 생각보다 크고 화려한 다루였다.
오 층짜리 전각으로, 승천하는 용처럼 위로 치솟은 처마가 겹겹이 겹쳐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청조는 섬서 다루가 외관이 화려한 데다 올라가면 주변 거리를 다 내려다볼 수 있어 인기가 많은 곳이라고 했다.
소호는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몰려 있는 모습을 보자 난감해졌다.
입구부터 이럴진대, 안에 들어가면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겠는가.
실제로 올려다보니 층마다 손님이 꽉 차 있었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은데요? 여기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련주님의 이름을 대고 오 층을 통째로 빌려두었습니다.”
“……그래요? 통째로요?”
“예.”
소호는 조금 당황했지만 수긍했다.
“잘하셨어요. 돈을 쓸 때는 써야죠.”
이렇게 인기가 많고 사람이 북적거리는 다루의 한 층을 통째로 빌리다니.
소호는 청조의 배포에 감탄하면서 다루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청조는 나중에 신호를 보내면 따로 들어오기로 합의를 보고 소호가 혼자 들어가자, 곧바로 점소이가 따라붙었다.
“공자님 혼자 오셨습니까?”
“내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다고 하던데요.”
“혹시 오 층을 통째로 예약하셨다던 분이신지요?”
“맞을 거예요. 장소호입니다.”
“아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점소이는 허리를 굽실거리며 지극히 공손한 자세로 그를 오 층으로 안내했다.
한 층, 한 층.
층을 올라갈 때마다 다루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꽂힌다.
소호가 워낙 화려한 옷을 입은 데다, 누군가가 오 층을 통째로 빌린 탓에 그보다 낮은 층에 있어야만 했던 자들이 관심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꼭대기 층에 올라가자 숨이 탁 트이는 것만 같았다.
사방으로 뚫려 있는 오 층에서 내려다보니 주변의 모든 건물이 발아래에 있었다.
고개를 들어 멀리 보면 종남산의 전역이 눈에 들어온다.
고고하게 솟아 있는 종남산 봉우리가 다루의 오 층에서 훤히 보이는 것이다.
풍경에 놀라고, 먼저 그곳에 한 명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에 또 한 번 놀랐다.
백명이 나란히 앉아도 남을 법한 공간에 한 사람이 조용히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천무공자이십니까?”
“네.”
그는 소호를 보자 벌떡 일어나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나이는 삼십 대 초반 정도 되었을까.
체구는 건장했고, 코밑과 입 주변에 수염을 짧게 기르고 있는 모습이 특이했다.
눈빛은 깊고 콧대가 높아 진중해 보이는 인상이다.
종남파의 감색 도복을 입었는데, 넓은 소매 사이로 평평하게 굳은 주먹과 퉁퉁 부은 것처럼 두껍게 단련된 손등이 유난히 돋보였다.
‘타고난 권사. 굳은살이 쌓이다 못해 돌처럼 굳어졌네. 손이 펴지기는 할까?’
철사장을 극한까지 단련하면 스스로 젓가락도 쥘 수 없을 만큼 손날이 굳어 버린다고 하지 않던가.
그가 포권을 취하는데, 보통 사람들보다 주먹이 두 배는 커 보였다.
“종남파의 대제자 백리해라고 합니다.”
“장소호입니다. 오뢰권사(五雷拳士)의 명성은 익히 들었어요. 종남제일검이셨던 벽력검께서 계실 때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제야 만나게 되네요.”
소호가 사심 없이 벽력검에 대한 칭찬을 하자, 그게 의외였는지 백리해는 당황하면서 감사해했다.
“사부께서는 무림의 인재들을 만나기를 즐기셨지요. 만약 건재하셨다면 오늘 천무공자를 만나고 크게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하핫, 저를 높게 평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차는 드실 만하던가요?”
“섬서 다루의 차 맛이야 유명하지요. 그런데 저는 제가 오늘 무슨 이야기를 듣게 될까 걱정이 되어서 차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공손하지만 할 말은 하는 사람이다.
자신보다 연하인 소호를 무림의 위치에 따라 깍듯이 대우하지만, 종남의 대제자로서 자존심은 강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가 적의는 아니고, 경계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온다.
소호는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제가 만나길 청하는 게 의외였죠?”
“사실 그렇습니다. 지금 종남파의 분위기가……, 조금 거칠어서 더욱 신경이 쓰입니다.”
“제 욕을 많이 하나 봐요.”
안 봐도 눈에 선했다.
서로 동맹을 맺자고 해 놓고 돈줄인 금룡상회를 쥐 잡듯이 잡았으니 그 세속적인 종남파 장문인이 문도들에게 오죽 욕을 했겠는가.
백리해는 그 사실이 부끄러운 듯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금룡상회에 명백한 문제가 있었으니 그럴 만하다고 공자를 편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요? 백 소협께선 어느 쪽이었어요?”
“…….”
“말씀하시기 어려우면 다른 사람을 물어볼까요? 얼마 전에 장문인의 아들이라던 연사청 소협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는 뭐라고 하던가요?”
“사청이는 사백과 크게 다투었습니다. 문파의 체면이 서질 않는다면서 크게 반발하여 지금은 참회동에서 벌을 받는 중입니다.”
시장 근처에서 소호를 기다리고 있던 연사청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집스럽긴 하지만 자존심이 무척 강해 보이던데.
그 높은 자존심으로 아버지와도 대립을 한 모양이었다.
“그래요? 그래도 제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니 기쁘긴 하네요.”
“저도…….”
백리해는 크게 결심한 듯 눈빛이 단호해졌다.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오늘 이 자리에 나오질 않았을 것입니다.”
“종남파가 복이 있네요.”
“……예?”
“어리석은 대장 때문에 멸문의 위기가 닥치면 늘 의인이 나서서 문파의 기틀을 바로 잡죠. 팔파일방은 그런 부분이 있어서 오래 가는 것 같아요.”
소호는 손으로 입술을 붙잡고 휘파람 소리를 냈다.
휘릭―.
그 순간 지붕 위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뚝 떨어졌다.
다루의 지붕 위에서 뛰어내린 청조가 들쳐 매고 있던 살수를 바닥에 거칠게 떨어뜨렸다.
“이게 무슨?”
깜짝 놀라 검을 뽑을 뻔한 백리해를 달래듯 소호가 손을 내저었다.
“제 일행이에요. 사실 저는 조금 전에 백귀총의 살수들에게 습격을 당했어요. 쌍겸파파라던데, 혹시 들은 적이 있어요?”
“쌍겸파파!”
섬서 사람으로서 쌍겸파파를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백귀총이라고 하면 지금은 좀 뜸하지만, 십 년 전까지만해도 섬서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천하제일을 다투던 살수 문파였다.
백리해의 입장에선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게 백귀총이며 쌍겸파파인 것이다.
“그 노괴물이 살아 있었습니까?”
“지금은 죽었어요.”
“……!”
“은자 일만 냥에 의뢰를 받았대요. 재밌죠? 은자 오만 사천 냥을 아꼈는데 그나마도 살수를 고용할 때 오 분지 일만 썼다는 게?”
소호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하지만 사실 매우 심각한 이야기였다.
은자 오만 사천 냥을 아꼈다는 건 금룡상회가 결부되어 있다는 소리다.
금룡상회가 살인을 위해 살수한테 의뢰를 한다?
미친 짓이다.
종남파와는 연을 끊겠다는 소리이며 강호 무림의 공적이 되어 지탄을 받아도 당연하다.
“그게 사실입니까?”
백리해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다.
그는 진심으로 종남파를 아꼈고, 그렇기에 종남과 연결된 금룡상회의 만행에 피가 끓는 것처럼 화를 냈다.
“네. 저를 습격한 살수들 중에 살아남은 건 이자뿐입니다. 이자를……, 백 소협께 넘길게요.”
“예?”
“종남으로 데려가서 추궁해 보세요. 그러면 제가 백 마디 말로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지금 사태에 대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겠죠?”
“…….”
“싫으세요?”
입을 꾹 다물고 깊은 생각에 잠겼던 백리해가 활활 타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공자께서 제게 화두를 던지시는군요. 예. 제가 한번 캐내 보겠습니다.”
“종남파에 데리고 가면 여러 가지 사건이 있을 것 같아요.”
소호는 입을 달싹이며 목울대가 움직이는데 정작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전음이다.
말이 길게 이어질수록 백리해의 안색이 점점 창백하게 변해 갔다.
“종남파는 기로에 서 있어요. 천무련의 맹우가 되지는 않지만 섬서의 패권을 노리겠다고 한다면……. 저도 존중할게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순간, 결심하고 변해야 할 겁니다.”
소호는 그러면서 자신이 들고 온 나무 상자를 건네주었다.
백리해는 상자의 크기를 보고 내용물을 충분히 짐작했는지 당황하며 물었다.
“이건, 혹시 연와입니까?”
“네. 지난번에 보니까 장문인이 제비집 요리를 참 좋아하더라고요.”
“어째서 지금 선물을……?”
소호는 또 한 번 전음을 보냈고, 백리해는 무거운 얼굴로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혼란은 잠시.
결심을 한 백리해는 한시가 아깝다는 듯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인하겠습니다. 결정은 그 이후에 내릴 것입니다.”
“응원하고 있을게요.”
백리해는 살수를 등에 업고 종남파로 돌아갔다. 소호가 차를 따라 마시자 청조는 그 뒤에 공손히 시립한 채 물었다.
“종남파 대제자에게 다 넘겨도 괜찮겠습니까?”
“스스로 매듭지어야 할 일이니까요. 저희는 기다려 보죠.”
은은한 차향과 함께, 멀리 보이는 종남산은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
신법을 써서 종남산을 순식간에 올라간 백리해는 대문을 밀치고 성큼성큼 들어갔다.
문을 지키던 제자 두 사람이 백리해를 보고 깜짝 놀라 인사하며 물었다.
“대사형?”
“들쳐 업은 그자는 누구입니까?”
백리해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장문인을 뵙겠다.”
“예?”
뜬금없는 말인지라 되물어봐도 백리해는 묵묵부답이다.
제자 한 명이 신법까지 쓰면서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종남파에 소식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각자 무공을 수련하던 종남파의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백리해의 뒤로 따라붙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종남파를 가로지른 백리해는 장문인의 처소 앞에 살수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컥.”
살수는 그 충격에 정신을 차렸지만, 백리해는 마혈을 제압해서 그가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살수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백리해는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장문인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종남파의 장문인.
벽운검객 연종명은 퉁퉁한 얼굴 위로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는 장문 처소의 앞에 수백의 무인들이 모여 있는 상황이 못내 불쾌해 보였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연종명은 백리해의 예를 받아 주지도 않은 채 버럭 소리쳤다.
“무슨 소란이냐고 물었다. 내게 볼일이 있다면 조용히 찾아와 예를 갖추거라. 어째서 이렇게 다 끌고 와서 소란을 피우는 것이야?”
“사청이 때문에 예민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일은 사태가 위중하여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흥. 사청이는 잠시 흥분했을 뿐이며, 나중 되면 나를 다 이해하게 될 것이다.”
“…….”
“이 꼴을 봐라. 누가 보면 대제자님께서 장문인에게 반기라도 든 줄 알겠구나.”
연종명은 비웃듯 주변을 노려보았다.
몰려왔던 제자들이 그리 곱지 않은 눈빛으로 연종명을 보며 서로 수군거렸다.
젊은 제자들 중에 연종명을 좋아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벽력검과 비교되어서 더욱 그렇다.
그가 보이는 행보는 종남의 이익을 탐하지만, 협의의 도는 조금도 보이지 않은 탓이다.
“대제자라는 놈이 사제들을 다독여 주지는 못할망정 이리도 경망되게 구는 꼴이라니. 쯧쯧. 좋다. 이야기나 한번 들어 보자. 그자가 누구기에 내 앞에 그자를 끌고 온 것이야?”
“장문인.”
백리해는 가만히 연종명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백귀총을 아시지요?”
연종명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찰나의 변화였으나, 백리해는 연종명이 당황하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을 분명히 확인했다.
“너무 오래전 이야기다. 네가 그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 알 수 없도다.”
“은자 일만 냥으로 천무공자를 죽여 달라 백귀총에 의뢰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십니까?”
“이놈! 지금 네가 나를 추궁하는 것이야?”
연종명이 검을 뽑을 것처럼 사나운 기세를 뿜어냈지만, 백리해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는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천무련, 그리고 천무공자와 갈등은 벌어질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살수를 고용해서야 당연히 안 될 일이지요. 그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왜 내게 하는 것이야!”
“이번에도 금룡상회뿐입니까? 금룡상회가 단독으로 저지른 일이라는 것입니까?”
“그걸 내가 어찌 알아! 어쩌면 저 살수 놈이 거짓을 말했을지도 모르지. 살수라는 놈들이 원래 돈 받고 사람도 죽이는 놈 아니더냐! 아니지. 어쩌면 천무공자라는 그 영악한 놈이 판을 깔았을지도 모르고!”
“장문인.”
입을 꾹 다문 백리해에게서 차가운 패기가 흘렀다.
“그 말, 진심이십니까?”
“점입가경이로구나. 대제자가 장문인을 이리도 핍박하는 문파가 세상에 어디에 있어! 이놈! 벽력검 사형에게도 똑같이 이 따위로 버릇없게 굴었겠느냐!”
연종명은 씩씩거리면서 분노를 토해 내더니, 슬그머니 다가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살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놈 마혈과 아혈이 제압당해 있나?”
“마혈을 제압했습니다.”
“근데 왜 말은 안 하느냐?”
그때까지 눈알만 굴리던 살수가 연종명을 가만히 노려보더니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