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28화 (557/686)

17권 26화

제36장 득이물유(得而勿有) (10)

“돈을 받고 사람도 죽이는 놈이라지만, 우리도 지키는 선이 있소.”

살수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백귀총의 살수는 의뢰인에 대해서는 발설하지 않는 게 규칙이오. 그러니 장문인은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시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의뢰인이 누군지 밝히지 않겠소.”

살수의 뜨거운 시선이 장문인에게서 떨어지지를 않는다.

당당한 모습만 봐서는 마치 절개 높은 학자가 충절을 지키는 듯하지만, 말투가 영 꺼림칙했다.

무감정하지만 비꼬는 듯한 말투.

이상함을 느낀 종남파 무인들이 입이 떡 벌어졌다.

살수는 분명히 자신은 의뢰인이 누군지 밝히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그 말을 되새겨 보면 장문인이 의뢰인이라고 알리는 셈이었다.

“이런 발칙한!”

벽운검객 연종명은 곧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찌른 검끝이 무릎을 꿇고 있던 살수의 목을 대번에 꿰뚫었다.

푹!

“크, 크륵…….”

살수는 끝까지 연종명을 노려보면서 점차 생기를 잃어 갔다.

무거운 침묵이 감돈다.

연종명은 살수의 목뿐만이 아니라 모두의 마음을 꿰뚫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종남의 모든 이들이 할 말을 잃고 연종명을 응시했다.

“하찮은 놈이. 살수 따위가 감히 누구에게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연종명은 피를 보고도 한참이나 분이 가라앉지 않는 듯 숨을 씨근거렸다.

백리해는 탄식했다.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있겠느냐는 말이 딱 맞다.

무림은 가혹하다.

사람을 죽이면서 돈을 받는 살수 따위는 팔파일방의 무인쯤 되면 별 이유 없이 죽일 수도 있다.

종남파의 장문인이라면 그게 큰 흠이 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흠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건 아니다.

특히 지금과 같이 상황이 너무나 공교로울 때는 더욱 그렇다.

“장문인, 죽일 필요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배후를 더 캐서 일의 전후를 더 알아냈어야 하지 않습니까?”

“알아내긴 뭘 알아내! 어차피 살수 놈들은 의뢰인이 누군지 순순히 털어놓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쯧쯧, 이래서 네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이야. 시대를 잘못 만나 강호행을 제대로 못했으니. 식견이라고는 쌀알 한 톨만큼도 없구나.”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더 화를 내고 비난하는 장문인을 앞에 두고, 백리해는 성을 내지 않았다.

그저 무거운 표정.

진중한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게 탄식했을 뿐이었다.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을 때, 백리해는 뭔가를 결심한 듯 결연한 얼굴로 연종명에게 다가갔다.

“장문인, 천무공자가 전해 달라던 게 있었습니다.”

“천무공자가? 나에게?”

“예.”

연종명은 양손으로 받칠 수 있는 크기의 나무상자를 받아 내심 기뻐했다.

연와.

장소호가 처음 만날 때 선물로 주었던 최고급 제비집과 똑같은 상자였다.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도 더 값비싼 물건을 또 한 번 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충분히 상상이 가질 않는가.

그는 그래도 종남파의 무인들 앞이라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지만,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묵직하군. 드디어 누구와 잘 지내야 하는지 깨달은 모양이야. 그냥 이걸 전해 달라고만 하던가? 다른 말은 없었고?”

백리해는 고개를 저었다.

“백귀총의 습격을 받아 보니 느낀 점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살수를 데리고 종남파에 가라고 한 것도 천무공자의 생각입니다.”

“그렇군. 그런 거였어.”

연종명은 근엄하게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제야 제대로 상황을 이해한 것이군. 쯧쯧, 진작 그럴 것이지. 역시 연륜은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생각하는 방식이 너와 수준이 똑같구나.”

연종명은 백리해를 향해 냉랭하게 손을 내저었다.

“모든 건 끝났다. 이 선물로 보다시피 천무련과도 다시 화해하게 될 것이다. 아무도 문제를 삼지 않으니 이대로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될 것이야.”

대답은 없었다.

연종명은 코웃음 친 뒤 더욱 차갑게 명령했다.

“시신을 치우고 장내를 수습하거라. 명색이 종남의 대제자인데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만약 천무공자가 찾아오거든 곧장 나에게로 안내하고. 알겠느냐?”

“장문인의 명을 받듭니다.”

백리해는 허리를 굽히며 포권을 취했다.

그 모습이 평소보다 더욱 정중하고 예의가 있어서 주변의 모든 제자가 감탄하며 백리해를 우러러보았다.

그토록 모멸을 당하고도 정중한 모습에 감탄한 것이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들 이제야 철이 드는 모양이구나.”

중얼중얼 불만을 토해 내면서 등을 돌린 연종명은 다시 장문인의 처소로 돌아갔다.

잠시 열린 문틈 사이로 금룡상회의 섬서 본부장인 진목룡의 얼굴이 살짝 보였다가 사라졌다.

“하늘이여. 부디 길을 알려 주시오.”

백리해는 지그시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하늘의 대답은 없다.

그는 다시 평소의 진중한 모습으로 돌아와 사제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살수의 시신은 거적으로 말아 밖에 내놓거라. 필요한 자들이 있다면 찾아오겠지. 우리 문파에서 벌어진 일이니 사흘이 넘도록 소식이 없다면 우리가 정중히 장사를 지내도록 하자.”

“예!”

“그리고…….”

백리해는 장문인의 처소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다 같이 하산해서 식사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

“예?”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기에 모두가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모두, 말입니까?”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아…….”

“기분 전환을 좀 하고 싶다. 다들 싫으냐?”

“아뇨. 사형께서 그러시다면 당연히 함께해야지요.”

대사형의 의외의 모습을 본 종남파 제자들은 조금 당황하면서도 그의 뜻대로 식사를 약속했다.

열기가 한풀 꺾인 해 질 녘의 오후.

여느 때와 같았던 종남파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

“일이 잘 풀렸나 봅니다.”

“흥, 당연히 잘 풀려야지.”

“아까 나서실 때는 꽤 긴장하시지 않았습니까?”

“흥, 대제자가 누군가를 업고 무서운 표정으로 들어온다기에 천무공자를 업고 오는 줄 알았네. 그런데 그게 백귀총의 살수 놈이었다니.”

장문인의 처소에서 연종명은 웃었지만 진목룡은 웃을 수 없었다.

“결국 계획은 실패했군요. 탈명인이 아무 소용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백귀총에서 잘 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한 번 잘 썼으면 된 것이지. 어찌 됐든 잘 끝났으니 되었네.”

“정말로 잘 끝난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 참, 소심하군. 천무공자 같은 놈도 제 놈이 잘난 척해 봐야 아직 어린애야.”

연종명은 천무공자에게 선물로 받은 묵직한 연와 상자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다가 다탁 아래에 내려놓았다.

“백귀총의 살수들이 자기를 끝까지 쫓아 죽이려 드는데 제 놈이 그걸 어찌 배겨. 그렇다고 우리를 탓할 수 있는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천무공자가 사로잡은 살수를 우리에게 괜히 보내 줬겠나? 우릴 적대시하려면 어떻게든 데리고 고문을 하면서라도 정보를 캐냈겠지. 그런데 이렇게 선물까지 함께 보낸 것을 보면 우리와 잘해 보고 싶다는 뜻을 보인 거야. 안 그런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긴 합니다.”

“쯧, 최선은 천무공자가 사라지는 것이었네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겁을 좀 준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연종명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정파의 일익.

팔파일방 중 한 곳의 수장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언행이고 성품이다.

벽력검의 위명에 가려져 있던 이인자.

어릴 때부터 밖으로 겉돌던 벽운검객이 자신의 본성을 내비치고 있었다.

“하핫, 그러게 그놈, 섬서 땅에서 감히 누구에게 짖어, 짖기를.”

진목룡은 연종명의 폭주를 보며 더욱 위험함을 느꼈으나 이미 기호지세였다.

그는 이 호랑이 등에서 어찌 내려가야 하는지를 몰랐다.

“자. 술이나 한잔하게. 우리도 서로 잘못된 길로 갈 뻔했으나, 어찌 됐건 이렇게 다시 한배를 타지 않았나. 이 술 한 잔에 다 털어 버리고 앞으로도 잘 지내 보세.”

연종명은 숨겨 두었던 오량액을 꺼냈고, 두 사람 사이에 술잔이 몇 순배 오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공범이 되어 버린 이상 앞으로도 함께 걸어가야만 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연종명은 내공으로 주독을 해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그는 술을 들이켜면서 껄껄 웃어 댔다.

“종남이 섬서의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날인가!”

쉴 새 없이 순배가 돌길 반 시진.

진목룡은 결국 견디다 못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꼴이 되어 밖으로 도망치듯 나갔다.

장문인의 처소 안이 주향으로 가득했다.

연종명은 홀로 남은 뒤에도 한참이나 혼자 술을 마시며 미친 듯이 웃다가, 다탁 밑에 있는 연와를 발견했다.

“그래. 이게 있었구나!”

사람의 욕망은 다 이어져 있다.

권력욕에 취한 연종명은 극심한 허기를 느꼈다.

맛있는 요리.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비싸다는 연와가 너무나도 먹고 싶어졌다.

“어디, 얼마나 좋은 제비집을 보냈는지 한번 볼까.”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주향을 풀풀 풍기면서 초점을 잃고 풀린 눈으로 연종명은 상자를 감싸고 있던 보자기를 벗기고 뚜껑을 열었다.

딸깍.

만약 연종명의 정신이 멀쩡했다면 선물에서 나는 쇳소리에 곧바로 반응했을 것이다.

승리와 술에 취한 데다 식욕에 사로잡힌 연종명은 상자 안의 모습이 자신의 예상과 다름에도 방심하는 우를 범했다.

“철판……? 지푸라기?”

연와가 있긴 있었다.

가장 싸구려.

처마 밑에서 아무렇게나 주운 우연(屋燕), 그중에서도 털과 분비물도 걸러내지 않은 모연(毛燕)이다.

“이 따위……!”

등급으로 따지면 최하품 중의 최하품.

제비집 그 자체가 고급 식재료라지만 대종남파의 장문인이 젓가락을 댈 물건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제비집의 밑에는 손바닥만 한 철판이 깔려 있었고, 그 위를 덮은 지푸라기들이 빨갛게 타서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

푸화악―!

철판의 한가운데에서 폭죽이 터지듯 끈적한 액체가 튀어나와 연종명의 온몸을 적셨다.

막거나 피할 틈은 없었다.

액체는 뿌옇고 비린 향이 났는데, 연종명의 몸을 적시고도 모자라 사방으로 그 액체가 튀었다.

“우풉.”

하찮은 선물에 화가 나 버럭 소리치려 했던 연종명의 입안으로도 그 액체가 들어왔다.

그가 비릿한 향에 술이 확― 깨려는 그 순간.

몸을 배배 꼬던 지푸라기에서 시작된 불꽃이 순식간에 커다란 겁화가 되어 연종명을 집어삼켰다.

“그아아아아아―――!”

잠시나마 자신이 섬서의 지배자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종남파 장문인은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었다.

불꽃의 무서움은 열기가 아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파괴력.

온몸을 태울 때의 그 극악한 고통으로 정신을 잃게 되는 즉각적인 충격.

몸 곳곳에 지방이 끼어 있던 그의 둔중한 육신은 너무나도 불꽃에 취약했다.

그는 활활 불타면서도 발악했다.

종남파 비전 무공.

오뢰인으로 다탁을 박살 내고, 벽운천강수(碧雲天罡手)로 처소의 벽을 부쉈다.

도와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입안이 모두 타 버려서 소리가 나질 않았다.

금안공(金雁功)으로 펄쩍 뛰어 처소의 문을 부쉈을 땐 이미 한껏 기세를 얻은 불이 처소를 활활 태우고 있었다.

눈이 끓고 성대가 타 버린 연종명은 한껏 비명을 질렀으나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만약 그가 벽력검처럼 협의지도를 지키며 살았다면 달랐을 것이다.

종남파 안에서 아무도 편을 들어 주지 않는 장문인.

벽운검객 연종명은 그렇게 자신의 문파, 자신의 처소 안에서 끈 떨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

섬서다루.

오 층의 탁 트인 전망에는 종남산도 포함되어 있다.

조용히 향긋한 차를 음미하던 소호는 종남산의 꼭대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았다.

향 끝에 붙은 불꽃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종남파에서 생겨난 불이 새카만 연기를 하늘로 올려보낸다.

소호는 빙긋 웃었다.

“용식(龍息). 용의 숨결. 이름이 참 좋네요.”

소호는 종남파의 대제자.

백리해에게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대의 장문인이 백귀총에 저를 죽여 달라 의뢰를 했습니다. 은자 일만 냥짜리 의뢰니 백귀총은 저에게 사력을 다해 달려들겠죠. 금룡상회는 돈을 대는 조력자일 뿐이에요. 사실 저는 이걸 고민 중이에요. 무림맹을 열어 공론화를 해야 할지, 아니면 제 선에서 처리를 할지. 제 말을 믿기 힘들다면 살수를 데리고 장문인에게 가 보세요. 그가 만약 결백하다면 사태를 낱낱이 밝히려 할 것이고, 그가 의뢰를 한 것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그를 죽여 없애려 할 것입니다.”

소호는 암기를 장치한 선물 상자를 주면서도 말했었다.

“이건 위험한 선물입니다. 백 소협이 만약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걸 저의 선물이라 하며 장문인에게 주세요. 문파의 제자들을 데리고 식사라도 하고 오면 어떨까요? 장문인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소호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죄책감이란 것은 찻물과 같다.

입을 적실 때는 향이 가득하지만, 다 마시고 나면 은은하게 사라져 간다.

가끔 생각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입안에서 향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백리해는 선택을 했다.

이제 소호는 그가 함께 은은한 다향을 떠올릴 뿐이다.

“종남에 용이 나타났으니. 그 숨결이 종남산을 태워 버렸구나.”

소호는 일어나서 다루를 떠났고 청조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다음 날 섬서 땅에 소문이 퍼져 나갔다.

종남파의 장문인.

벽운검객 연종명은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 있던 금룡상회의 진목룡이 그 진범으로 의심받았다.

대제자 백리해는 장문인을 대신해 사태를 수습했으며, 장문인의 장례를 치르면서 천무련과의 협약을 맺어 이 사태를 낱낱이 밝히고 앞으로 함께 무림 강호를 헤쳐 나가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섬서 땅에 천무련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무림 강호의 격변이 시작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