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권 1화
제37장 비무첩래(比武牒來) (1)
조서인은 오랜만에 속도를 따라가기 버겁다는 생각을 했다. 발로 땅을 한 번 걷어찰 때마다 아름드리나무 서너 그루가 옆으로 휙휙 지나쳐 갔다.
최선을 다해 신법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래도 부족하다. 앞서가는 추룡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니 아무리 쫓아가도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좀처럼 줄어들지를 않았다.
‘저분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이 모든 건 그들이 한 무리의 무인들을 만난 탓이다.
수백 명에 달하는 그들은 백 리 밖에서도 군기(軍氣)를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렬한 기백을 내뿜고 있었다.
조서인과 추룡은 산을 타고 막 올라가고 있었고, 그들은 하산을 마쳐 가는 시점이었다.
위치는 삼산현 인근.
맹수가 맹수를 알아보듯 그들 또한 추룡과 조서인이 범상치 않다는 점을 알아채고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가장 선두에는 왜소한 체구의 장년인이 있었고, 그 뒤에는 하남의 포구에서 마주쳤던 나찰마도와 절영귀검이 함께다.
그 순간 추룡이 뿜어내던 기세를 조서인은 잊을 수 없다.
섬뜩한 느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거대한 표범이 그르렁거리며 발톱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솜뭉치 같던 발에서 칼날 같은 발톱이 돋아나듯.
등에 메고 있던 황룡창으로 손을 가져가는 추룡은 이제껏 조서인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섬뜩한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이게 전력이다.
목숨을 걸고 싸울 때 추룡이 얼마나 난폭하고 잔인하게 싸울 수 있는지 그 편린이 드러난 것이다.
‘적양문. 태양염왕도 대단하구나.’
추룡만 강맹했던가?
아니다.
건너 쪽에 있던 자들도 추룡을 발견하자 일제히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이 강렬하기 짝이 없었다.
나찰마도와 절영귀검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들을 이끌던 사파의 왕.
태양염왕이 살짝 웃음을 머금은 채 무시무시한 극양진기를 끌어 올리는 순간, 조서인은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사파제일인.
당금의 무림 강호에서 적양문주야말로 사파의 맹주라는 말이 단번에 납득되는 존재감이다.
태양염왕과 추룡 사이에는 백 보의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진기를 끌어 올린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지글지글 끓는 듯한 태양염왕의 무공과, 섬뜩한 살기를 드러낸 채 황룡창으로 상대를 물어뜯을 것 같던 추룡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은 채 서로를 응시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 당시 조서인에게는 그 순간이 영원처럼 길었다.
나찰마도가 태양염왕에게 귓속말을 했다. 태양염왕은 그 말을 듣더니 기세를 거두었다.
“근주자적이라더니. 과연.”
근묵자흑 근주자적
검은 것을 가까이하면 검어지고, 붉은 것을 가까이하면 붉어진다.
아마 조서인과 추룡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태양염왕이 먼저 기세를 거두고 지나치자, 나머지 적양문의 무인들도 더 이상 그들을 경계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추룡과 조서인을 지나쳤다.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싸움은 없었다.
태양염왕과 적양문 사람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그들의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황룡창에서 손은 뗐지만 추룡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얼굴이 굳어 있었다.
“무서운 놈이다. 그리고 싸움의 흔적이 있었어.”
태양염왕이 두건처럼 이마에 감고 있던 천은 조서인도 보았다.
깨끗한 천 위로 검붉은색으로 점점이 배어 나온 건 분명히 피가 아니던가.
“이마의 상처는 저 위에서 생긴 걸까요?”
“십중팔구 그렇겠지.”
태양염왕이 그만한 무공을 갖고도 상처를 입을 만큼의 큰 싸움이 있었다는 건 분명했다.
추룡은 그때부터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풍운객잔에 대한 걱정이 그를 전력으로 달리게 만들었다. 추룡의 속도를 따라가야만 하는 조서인만 죽을 맛이었다.
“다 왔다……!”
조서인은 풍운객잔에 도착하자마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숨을 헉헉거렸다.
한발 먼저 도착한 추룡은 객잔의 입구 앞에 찍혀 있는 수많은 발자국에 주목했다.
전장에서 수없이 단련된 그의 눈썰미는 바닥에 남은 흔적만으로도 그때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한눈에 알아챘다.
“이쪽에서 수백 명이 먼저. 아마 아까 그놈들이군. 우르르 몰려와서 객잔을 포위하려 했는데, 그리고 이쪽엔……. 두 명? 두 명이 있었군. 뒤늦게 저쪽에서 원군이 왔어.”
바닥에 찍혀 있는 발자국의 빈도.
그리고 나중에 찍힌 발자국을 토대로 시간대를 맞춰 보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희한하구나. 이쪽은 포위했지만 객잔을 경계하며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고, 저쪽은 그리 나설 마음이 없으면서도 반대쪽을 막으려 했어.”
추룡은 흔적을 읽으면서 중얼거렸다.
“이놈의 객잔. 도대체 뭔 일이 벌어졌던 거야? 다행히 여기는 큰 싸움은 없었던 것 같기는 한데.”
“일단…… 들어가시죠?”
“기다려 봐.”
기껏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왔더니 정작 객잔에는 들어가지 않는다니.
조서인은 기가 차서 아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추룡이 하고 싶은 조사를 실컷 할 때까지 그냥 포기하고 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누군가 했더니.”
그때 머리 위에서 나지막하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왔으면 들어올 것이지 뭘 그리 바쁘게 살피고 있는 거냐?”
조서인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아무런 기척도 없었는데 대체 언제 나타난 것일까.
풍운객잔의 지붕 위에서 한 사내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하얀 창의를 입은 중년의 사내는 뒷짐을 진 채 처마 끝에 서 있었는데, 발을 디딜 곳도 마땅치 않건만 서 있는 자세가 지극히 평안했다.
“아니, 형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이 특별한 겁니까? 아니면 이놈의 객잔은 매번 이런 겁니까?”
“이놈의 객잔이라니. 여기가 내 객잔이다.”
“속상해서 그러죠. 어째 형님의 객잔은 편히 장사하는 꼴을 못 봤어요.”
“우리도 매번 이렇지는 않아.”
“그럼 가는 날이 장날이었나 봅니다. 근데 도대체 어떤 몰상식한 놈들이 여기서 난리를 쳤습니까?”
“그냥, 몇 명 왔었다.”
“몇 명이라뇨. 이렇게 수백 명씩 몰려와서 객잔에서 기 싸움을 하면 어떻게 장사를 합니까? 제가 지금이라도 가서 혼 좀 내줄까요?”
“혼은 내가 내줬으니 너는 나설 필요 없다.”
지붕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장기린은 추룡을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서로를 마주한 두 사람글은 잠시 말을 잃었다.
“아까 그자들이 하남에서 내 동생을 봤다고 할 때 누구를 말하나 궁금했었다. 그게 너였구나.”
추룡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입만 벙긋거리더니, 잠시 후에야 장기린에게 성큼 다가가 덥석 끌어안았다.
장기린도 그를 반갑게 마주 안아 주었다.
“오랜만이다, 추룡.”
“오랜만입니다, 형님.”
무려 십 년 만에 만나는 두 사람이다.
삼십 대에 헤어져 사십 대에 다시 만났다.
강산이 변해 버릴 세월 동안 하나도 변치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두 사람은 서로를 살피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헛웃음을 지었다.
“형님, 옷이 그게 뭡니까. 다 찢어져서는. 누가 보면 장사가 너무 안 돼서 먹고살 돈도 없는 줄 알겠습니다.”
추룡은 태양염왕과의 싸움으로 여기저기 찢어진 장기린의 옷을 가리키며 분통이 터진다는 듯 소리쳤다.
“암만 봐도 안 되겠습니다. 적양문주인지 뭔지 이마를 한 대 까 주셨던데, 제가 가서 한 대 더 때리고 와야겠습니다.”
“아서라.”
“어? 저를 우습게 보시는 겁니까? 저 이래 봬도 꽤 강해졌습니다.”
“보면 안다. 그래도 그자는 강해. 함부로 까불다가는 네 그 요상한 옷이 홀랑 타 버릴 거다.”
“요상한 옷?”
추룡은 자신이 목에 둘둘 감고 있던 오색찬란한 이국적인 천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요상하다니요. 제가요?”
“그래. 널 보면 장날에 우르르 나타나는 기예단 같다.”
장기린은 농담을 던지기까지 했다.
조서인의 입장에선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일이다.
평소에 근엄하기만 하던 사부님은 대체 어디로 가 버렸단 말인가.
적룡기마대에 있으면서 전장을 질타하던 두 사람 사이의 끈끈한 정은 조서인이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하하핫! 기예단이라니. 무슨 말씀을. 이게 비단길 너머의 무인들 사이에서 얼마나 유행이었는데요.”
“…….”
“형님, 안 믿으시네!”
“그런 옷을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로 있단 말이냐?”
“그럼요. 제가 이래 봬도 비단길 너머에서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데요. 형님께서 의복에 대해 너무 모르셔서 그런 거예요.”
“인기가 많았다고?”
“저를 만나 보려는 여성분들이 성시 밖까지 줄을 섰습니다.”
장기린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래? 추룡 너는 혼인은 했냐?”
“……혼인은 안 했죠.”
“그러면 아무 소용 없지.”
추룡은 입을 쩍 벌리면서 굳어졌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오랜만에 봤는데 주저 없이 가슴에 비수를 날리시네.”
“백 명의 여자를 만나도 내 평생을 지켜 줄 한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운 일이다.”
“예, 예. 우리 형님께선 평생 해로할 형수님을 만나셨죠. 제가 풍류남아로 지내면서 형님이 정말로 평생 해로하나 끝까지 지켜볼 겁니다.”
“웃기고 있군. 어디 가서 객사나 하지 마라.”
서로가 정말로 특별하기에 할 수 있는 농담들이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삼산현의 풍운객잔.
십 년 만에 적룡기마대의 일원인 추룡이 찾아온 것이다.
***
“그래서 백경채를 지켜보다가 우연히 서인이를 만났다는 거냐? 보자마자 내 제자인 걸 한눈에 알아봤고?”
“예. 저희가 같이 밥 먹은 세월이 얼만데, 창끝만 봐도 진짜 형님의 무공인지 대번에 알 수 있죠. 일연적룡무더라고요.”
추룡은 오향장육을 씹으면서 “이것 참 맛있네.”라고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럼 너 말고도 알아챈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 옳겠다.”
“예, 예전에 형님을 만난 적이 있고 눈썰미 좋은 사람이라면 알아볼 것입니다. 들었냐? 서인아. 그러니까 네가 더 잘해야 해.”
조서인은 어향육사를 씹다가 다급하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추룡이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강운찬은 솜씨를 잔뜩 발휘했다.
적양문을 대접하기 위해 준비했던 그릇에, 똑같은 고급 요리들을 줄지어서 내어 왔다.
먼 거리를 이동한 데다 안 그래도 제대로 된 먹거리에 굶주려 있던 추룡은 체면 따위 벗어 던지고 게걸스럽게 음식들을 먹어 치웠다.
“역시 풍운객잔 음식이 최곱니다. 왜 비단길 너머에는 이런 게 없는지 모르겠네.”
추룡은 순식간에 나온 음식들을 남김없이 먹어 치운 뒤에 도저히 더 먹지 못한다는 듯이 포만감에 배를 두드렸다.
조서인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떨어져 있었을 뿐이지만, 그간의 여정을 돌이켜보면 강운찬의 요리 비슷한 것도 먹어 보지 못했다.
“숙수님. 여전히 맛이 최고예요!”
“하핫, 별거 아닌데 뭘.”
조서인은 겸양을 떠는 강운찬에게 아낌없이 칭찬을 쏟아냈다.
“서인이 이놈 아주 걸물입니다. 백경채에서 어떻게 굴었는지 혹시 들으셨습니까?”
“대충은 전해 들었다. 자세히는 모르고.”
“낙일지협이라고 무림의 호사가들이 아직까지도 떠들고 있을 겁니다. 이놈 혼자서 백검회의 가면 쓴 놈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곳을 장판파 장비처럼 지키고 있었지요.”
“그래?”
“예. 해가 지기 전까지 아무도 못 지나가게 만들 것이오! 라고 소리치면서…….”
두 사람은 얼굴이 빨개진 조서인은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며 즐거워했다.
추룡은 조서인이 마치 자기 제자인 것처럼 신이 나서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청계가 나서고, 조서인이 막아섰으며 결국엔 백검회가 버티지 못하고 물러났던 이야기다.
추룡은 많은 사실을 간결하게 잘 전달했지만, 백경채 안에 청조라는 살수가 나타나 곤란에 빠졌던 것과 소호가 나타나 사태를 수습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청계라는 자를 베었습니다. 백검회의 절반도 죽였고요.”
모두가 왁자지껄하던 와중에, 추룡은 별일 아니라는 듯 지난 일을 털어놓았다.
“우리 집 영감탱이를 쓰러뜨렸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잖습니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행패 좀 부렸습니다.”
“그래. 잘했다.”
장기린은 추룡을 탓할 생각이 없었다.
가족이 당했는데 어느 누가 참을 수 있을까.
“형님. 식사도 마쳤으니 우리 조용히 이야기 좀 할까요?”
“그래.”
추룡은 곧바로 따라나서려는 조서인을 제지했다.
“어른들끼리 할 이야기야. 넌 좀 쉬고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