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30화 (559/686)

18권 2화

제37장 비무첩래(比武牒來) (2)

장기린은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자면서 마을 뒤편에 있는 흑산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적양문의 문주 태양염왕과 격전을 치렀던 바로 그 장소였다.

사람만 없는 게 아니라 동물도 찾아볼 수 없는 바위산에 황량한 바람이 불었다.

“휘유―. 거창하게도 때려부쉈네.”

추룡은 새카맣게 탄 데다 지글지글 녹아 버린 땅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감탄했다.

추룡은 땅에 남아 있는 발자국만 봐도 흔적을 추적할 수 있었다.

그는 바위를 지글지글 녹여 버린 흔적들을 보고 싸움의 향방을 가늠했다.

“장타? 도법인가? 극양진기라는 게 돌도 녹일 수 있는 것이구나. 처음 알았습니다.”

“나도 처음 알았다.”

“그래도 이기신 거죠?”

장기린은 말없이 씩 웃기만 했다.

추룡은 당연하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패배라는 말이 저렇게나 안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형님이 질 리가 없지요. 아까 산을 올라오다가 그자를 보았습니다. 엄청나더군요. 중원 땅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싸우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보기엔 너도 그리 밀리지 않을 것 같다.”

“하핫, 감사합니다. 당연히 저도 숨겨 둔 한 수가 있지요.”

추룡은 허리에 찬 서양식 쌍수검을 손으로 툭툭 치면서 씩 웃었다.

“형님이 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숫자에 장사 없는 법이지 않습니까. 혹시 그놈들이 떼로 몰려들어서 행패를 부리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어서 뛰어 올라왔는데 그래도 별일 없었던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네 마음이 참 기쁘다.”

진정한 가족이기에 한시라도 아껴 가며 급히 달려온 것 아니겠는가.

환담을 나누는 사이에 두 사람은 흑산의 정상에 도착했다.

백산과 영산.

건너 쪽에 비슷한 높이의 산봉우리들이 한눈에 보였다.

지금 그들이 서 있는 흑산과는 달리 눈에 뒤덮여 있거나, 푸른 나무에 덮여 있어 생기가 넘치는 곳들이다.

“형님. 백경채에서 소호를 보았습니다.”

움찔.

장기린의 어깨가 흔들렸다.

“잘 컸더군요. 키도 크고, 얼굴도 멀끔하니 잘생겼고. 외모는 형수를 닮았는지 형님보다 나아요.”

추룡은 일부러 농담도 던져 보았지만 장기린은 웃지 않았다.

그는 피가 비처럼 쏟아지는 전장에서도 호탕하게 웃으면서 싸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평생 누구 눈치를 보며 사는 성격이 아니건만, 장기린에게는 달랐다.

장기린이 수심에 찬 모습을 보자 추룡은 그도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런데 제가 알던 소호가 아닙디다. 작은 것 하나에도 환하게 웃고, 호기심이 많아서 사방을 빨빨거리면서 뛰어다니던 놈이 너무 달라졌어요. 지금도 웃고는 다니는데 좀……. 으음, 여러 가지 일들을 꾸미는데……. 살수도 부리는 것 같고. 솔직히 모른 척하기가 힘이 듭니다.”

십여 년 전, 은자촌에 놀러 올 때면 그를 가장 잘 따르던 아이가 소호였다.

추룡 또한 제 자식처럼 소호를 예뻐했다.

그런데도 소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사실을 알게 될수록 차마 나서서 소호를 만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름다운 추억이 망가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지금 만나면 추룡은 자신의 울컥하는 성질을 참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야기 좀 해 볼까 하다가, 지금 만나면……. 제 성격에 못 참고 사달이 날까 싶어서 못 본 체했습니다.”

“그랬나.”

장기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비로서의 씁쓸한 애환이 감돌았다.

“나도 전해 듣고는 있다.”

“도대체 십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소호는 나를 경쟁 상대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강해지려고 여기저기 손을 뻗다가 나쁜 일에 엮여서 이용을 당했지.”

장기린은 먼 산을 바라보았다.

“물론 술수를 쓴 작자는 이미 죽였다.”

“거 다행이네요. 당장 그놈부터 조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추룡이 사나운 얼굴로 등 뒤의 황룡창을 만지작거렸다.

“추룡.”

“예, 형님.”

“네가 보기에도 소호의 상태가 좋지 않았나?”

“…….”

추룡의 콧등을 가로지르는 긴 상처가 꿈틀거렸다.

“무림맹의 뒤를 이을 천무련이라는 곳을 만들었고, 무림 강호의 거물이 되어 가고 있는데 나쁠 수는 없지요. 그저, 제 마음에 안 드는 것뿐입니다. 그런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나쁘지 않아요.”

“나쁘지 않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지. 추룡이 할 만한 표현이 아니었다.

십 년 만에 만난 동생이라도 장기린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운화는 어릴 적에 소호가 나랑 판박이라고 말했었다.”

“어릴 때는 그랬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아니고?”

“예.”

추룡은 돌려말하지 않았다. 팽팽하게 당긴 시위를 놓아 버리듯 말을 직선적으로 내뱉어 버린다.

“사실 저는 소호가 좀 더 다른 사람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어떤 사람이 될 거라 생각했지?”

“말로 설명하긴 힘듭니다만, 솔직하고 호쾌하게 무림 강호를 질주할 줄 알았죠. 암중에서 강호를 떡 주무르듯 주무르려 할 줄은 몰랐습니다.”

추룡의 아쉬움이 곧 장기린의 아쉬움과 같았다.

부귀영화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

자기 자식이 솔직하고 맑게 세상을 살아가길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을까.

잠시 장기린의 눈치를 살피던 추룡이 슬쩍 말을 꺼냈다.

“형님, 정말로 가만히 둬도 되겠습니까? 제가 나서서 손을 좀 쓸까요?”

“아니.”

장기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뭘 한 것도 아닌데. 우리가 손을 댄다고 해서 바뀌겠나?”

“그건 모르죠. 앞으로 벌어질 일을 막을지도 모르고요.”

“그래. 모르지. 너는 어땠나? 추 어르신께서 네게 비단길을 가지 말라고 말리셨을 때 네 기분은 어땠지?”

추룡은 난감해져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때를 떠올리면 부끄럽다.

이 아비를 짓밟고 지나가라면서 배짱을 부리던 노인을 쓰러뜨리고 떠났으니 말이다.

“그때랑은 다릅니다, 형님.”

“같아.”

“다르죠. 우리 집 영감은 저를 맨날 쥐 잡듯이 잡고 때리면서 키웠어요.”

“아비와 자식은 아무리 그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너는 그때 기분이 어땠지?”

추룡은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솔직히 영감이 뭐라 말하든 와 닿지는 않았는데…….”

“소호에게는 내 말도 그렇겠지.”

“형님은 다르다니까요.”

“아들놈에겐 똑같아. 이번 일로 새삼 느꼈다. 나도 소호한테는 냉정해지기가 힘들더군.”

청명경 일만 자를 익히며 도인이 되어 가는 장기린이라도 자식의 일에는 쌍심지를 켜고 다시 붉은 악귀 시절로 돌아가게 되곤 했다.

왕진을 잡기 위해 황실로 출격했던 일.

장기린에게도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갔다.

오직 자식을 위해서.

게다가 집혼기 때문에 정상이 아닌 상태긴 했지만, 은자촌에서 소호가 대들며 따지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때 장기린이 느끼기엔 괘씸하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장기린도 한 사람의 인간이다.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

그리고 평생 부모라는 존재를 모르고 자기 마음껏 살아왔기에 더욱더 자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장기린은 뼈저리게 느꼈다.

자식의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손을 대서 고치려고 하면 할수록 엇나가는 게 자식이라는 점을 말이다.

“난 그래서 내가 아니라 소호의 친구에게 기대를 걸기로 했다.”

“서인이요?”

“그래. 나의 하나뿐인 제자. 서인이 말이다.”

추룡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것 때문에 제자로 선택했다면 크게 실망할 텐데요.”

“당연히 그 때문이 아니다.”

조서인에 관한 것은 장기린이 오랫동안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소호라는 화려한 재능이 눈앞에 있음에도 질투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친구를 아끼고 믿음을 줄 줄 알지. 그리고 무엇보다, 창을 좋아하며 무공에 최선을 다하는 ‘노력하는 재능’이 있다.”

“하핫.”

추룡은 장기린이 조서인을 칭찬하는 모습에 진심으로 껄껄 웃어댔다.

“팔불출이 따로 없네요. 제자 자랑을 그런 식으로 하실 겁니까?”

“부러우면 너도 한 명 만들어라.”

“형님의 이런 모습 처음 봅니다. 맞습니다. 서인이는 괜찮은 녀석이에요.”

“안다.”

“낙일지협 사건을 직접 보셨어야 했습니다. 우리 적룡기마대 시절이 떠오르던데요.”

“좁은 길을 막았다고 했지? 텐챠이 수호대한테 쫓길 때였나?”

“예. 그때요.”

같은 전장에서 활약했고, 함께 위기를 극복했던 기억은 이제 추억이 되었다.

“제가 제자를 받을 마음은 아직 없고, 일단 형님 제자한테 슬쩍 발 좀 얹겠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형님 말씀이 맞아요. 소호를 바로잡는 건 서인이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직 소호가 눈에 띄는 잘못을 한 건 아니니까요. 그런데 그러려면 능력이 좀 더 뛰어나야죠. 서인이는 아직 모자라요. 능력이든 명성이든, 제가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좀 가르치겠습니다.”

“네가?”

장기린의 시선이 추룡이 목에 두르고 있는 형형색색의 천으로 향했다.

“……뭘 가르칠 거지?”

“아니, 형님. 섭섭하려고 하네. 제가 설마 이상한 거 가르치겠습니까?”

“당연히 그러진 않겠지. 그럼 내가 쫓아갈 테니.”

“무섭습니다, 무서워.”

추룡은 진저리를 치듯 몸을 떨면서 웃었다.

“원래 적룡기마대에서도 저희를 이끄는 거랑 싸우는 건 형님이 주로 하고, 관직 관리는 운화 형님, 전략은 우생, 사람 대하는 건 제가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

호탕하고 호쾌한 성품의 추룡은 군문에 있을 때도 사내들 사이에 인기가 좋은 친구였다.

얼굴의 흉터처럼 성질도 불같지만 의리가 깊어 늘 친구가 많은 편이다.

타고난 성정이 조용하고 순박한 조서인에게 호연지기를 가르치기로는 이만한 인물도 없다.

“서인이도 강호인으로서 살아갈 텐데 무림 강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죠. 협객 일도 좀 해야 하고요.”

“낙일지협 같은 일을 계속 시키겠다는 건가?”

“예. 그런 일 좀 하면 좋죠. 제가 비단길 너머에서 온갖 경험을 하다 보니 배운 것들이 많아서요. 그런 걸 좀 가르치고 싶습니다.”

“그렇군.”

장기린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수긍했다.

“경험이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법이지.”

“맞습니다. 제가 제자도 없는데 누구한테 가르치겠어요. 그러니 서인이 좀 빌려주십쇼.”

“정말로 이상한 거 가르치진 않을 건가?”

“자꾸 그러시네. 제가 가르치면 뭘 얼마나 가르치겠습니까. 서인이 좀 보십쇼. 아마 지금도 밥 다 먹었으면 어제 배운 거 복기해 보겠다고 창 휘두르고 있을 놈입니다.”

“으음.”

장기린은 반박할 수 없었다.

조서인 성격이면 실제로 그러고도 남을 게 분명했다.

“저는 그저 서인의 인생의 안내자가 돼 볼까 합니다. 각지에 있는 형제들도 한 번씩 보고요.”

“형제들?”

“예.”

추룡은 씩 웃으면서 콧등의 흉터를 긁적였다.

“운화 형님도 보고 싶고, 나머지 동생들도 한 번씩 만나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구나.”

장기린은 생각도 못 했던 이야기라서 탄식했다.

추룡의 입장에선 오랜만에 돌아온 중원이다.

가까운 가족들을 한 번씩 만나고 다닐 마음이 생길 법도 했다.

‘그 참에 서인이 눈도장도 찍고, 돌아다니면서 무림 경험을 시켜보겠다는 건가.’

사실 적룡기마대 간부들 중 무당파 출신인 부운화를 제외하면 무림 강호에 가장 정통한 건 녹림수로맹주의 아들인 추룡이었다.

날것 그대로의 무림 경험이라면 추룡이 압도적으로 많이 경험했을 게 분명했다.

여러모로 최상의 선택이며 조서인에게 있어서는 좋은 기회였다.

“알겠다. 추룡. 잘 부탁하마.”

한 번 결심한 것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장기린의 승낙에 추룡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서인이 놈을 사내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그 이상한 천이나 목에 감지 못하게 해라.”

“이게 얼마나 비싼……. 아니, 알겠습니다, 형님.”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삼산으로 흘러갔다.

***

“조서인!”

흑산에서 하산한 추룡은 풍운객잔의 뒤뜰에서 창을 휘두르고 있는 조서인을 불렀다.

그 짧은 새에 어떤 수련을 했는지 긴 머리가 축축하게 젖어서 땀범벅이었다.

추룡은 품에서 두 장의 서찰을 꺼내 양손에 각각 펼쳐 들었다.

종이에는 특징이 완전히 다른 두 사내의 얼굴이 용모파기가 되어 그려져 있었다.

“어떤 놈을 먼저 잡고 싶냐?”

추룡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