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권 3화
제37장 비무첩래(比武牒來) (3)
“예?”
어떤 놈을 먼저 잡고 싶냐니.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추룡은 말없이 용모파기를 한층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종이가 코에 닿을 것 같아서 조서인은 살짝 상체를 뒤로 뺐다.
“골라 봐.”
조서인은 선택을 망설이면서 두 장의 용모파기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용모파기는 상당히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목구비는 물론이고 눈가의 잔주름까지 상당히 자세히 묘사된 그림이다.
한쪽은 얼굴이 둥글고 코가 주먹만 하게 컸다. 눈매가 사납게 위로 치솟은 데다 머리는 사자 같은 산발에 수염까지 덥수룩하니 인상만 봐서는 산중호걸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다.
반대로 다른 용모파기는 인상이 곱상했다. 얼굴이 갸름하고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진 모습이 영락없는 미공자였다. 머리에 영웅건을 쓰고 비녀를 꽂은 것만 봐도 알 만하다. 자기 자신을 꾸밀 줄 안다는 뜻이니 길거리에 이 청년이 나타난다면 열 중 일고여덟은 뒤돌아보지 않겠는가.
정반대의 외모.
산적과 화화공자.
어느 쪽을 골라서 ‘잡아야’ 할까.
“꼭 골라야 합니까?”
“그래. 골라 봐. 누구를 먼저 잡고 싶냐?”
“둘 다 죄인인가요?”
“아니, 무인이다. 뭐, 알아보면 죄인일 수도 있지만.”
추룡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조서인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를 시험하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조서인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결국 남는 건 직감뿐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조서인이 조심스레 험악한 인상의 사내를 가리켰다.
“저는 이 사람으로 하겠습니다.”
“왜 그리 조심스러워?”
추룡이 웃는 얼굴로 조서인의 등짝을 팡! 소리가 나게 때렸다.
“윽.”
“인마, 사내자식이. 가슴 쫙 펴고, 죄를 지었어도 당당히 있어야할 판국에. 왜 그리 우물쭈물해. 뭐 죄졌어? 죄 지은 거 있으면 빨리 불어. 지금 불면 내가 형님께 말씀드려서 용서해 줄게.”
“아, 아뇨. 저 아무 죄도 안 지었어요.”
희한한 일이었다.
추룡은 조서인에게 막소리를 하면서 우악스럽게 구는데, 기분은 하나도 나쁘질 않았다.
“말하면서 눈치 보고 그러는 거 아니다. 그러면 오히려 상대방이 기분 나빠. 난 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한테 무작정 뭐라 그러는 놈 아니야.”
“네, 그렇죠. 저기, 그럼 숙부님.”
“왜?”
“이 사람들이 죄인이 아니면 왜 잡는 겁니까?”
“자, 내가 누구냐?”
“예? 숙부님이죠.”
“그래. 아버지나 다름없는 네 사부의 형제. 숙부님이야. 숙부가 조카한테 나쁜 일을 시키겠냐?”
“그럴 리가 없죠.”
조서인은 신뢰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추룡과는 만난 지 오래되지 않았으나 인연으로 얽힌 사이다. 사람으로서 신뢰하기엔 충분했다.
“그럼 된 거 아니냐.”
추룡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만족스럽게 씩 웃었다. 그는 조서인의 곁으로 다가가서 용모파기 두 개를 쭉 펼쳐 놓고 함께 보면서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니까 너는 이 인상 더러운 놈을 고른 거지? 곱상한 놈 말고.”
“예.”
“왜? 이유가 뭐야?”
“어……, 음.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가슴 펴라니까.”
“아얏, 네, 인상이 사나워 보여서 골랐습니다. 지금 저는 두 사람의 얼굴밖에 모르니까요.”
“그래. 그래서 싸움을 한다면 차라리 인상 사나운 놈이랑 붙어 보자! 라고 결정한 거지? 지은 죄가 있을 것같이 생겼으니까?”
“예. 다혈질로는 보여서, 어? 싸운다고요? 제가요?”
“곱상한 놈은 큰 문제는 없어 보이지? 얼굴이 곱상하니까. 하여간 잘생긴 놈들은 그게 문제야.”
“저기, 숙부님. 저는 그 사람들이랑 싸우나요?”
“그럼 싸워서 잡아야지. 말빨로 잡을래? 너 말 잘하냐?”
“아, 아뇨.”
조서인은 자신이 말을 잘한다고 빈말로라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싸워야 하면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요.”
“무(武)의 길이다. 네가 배울 점이 하나라도 있다면 비무를 청해야 해. 그게 무림인의 기본이잖냐.”
“예?”
이번에야말로 놀랐다.
알려지지 않은 죄인이라거나, 악인이라서 잡아야 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설마 무예를 겨루라는 소리였다니.
“이게 비무였습니까!”
“당연히 비무지. 그럼 뭐 때문에 너한테 싸우라고 하겠냐?”
추룡은 지은 죄가 있었다면 주변에서 벌써 죽였을 거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앞으로 내가 비무 상대를 정해서 알려 줄 거다. 네게 부족한 것들을 채우기 위함이야. 네가 배울 점이 있는 자들을 골라오면 네가 비무를 청할 거다.”
“제게 부족한 점을 채운다……!”
“우리 큰형님의 하나뿐인 제자인데 모자란 꼴은 못 보지. 각오해. 내가 너를 끌고 다닐 거니까.”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한 강자들과의 비무.
조서인이 꿈에도 바라 마지않던 ‘무림인’으로서의 여정이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 비무는 얼마나 합니까?”
“네 부족함이 채워질 때까지. 그리고…….”
추룡은 잠시 뜸들이면서 씩 웃었다.
“마지막엔 소호를 이길 때까지.”
조서인은 입이 떡 벌어졌다.
설마 그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기에.
왠지 모르게 지금까진 소호에 대한 이야기를 피하는 듯했던 추룡이 설마 그렇게까지 말할 거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긴다.
소호를 이긴다.
무예를 갈고닦아 부족한 점을 채운 후, 최종적으로 소호를 이기는 일.
그야말로 모든 젊은 무인들의 꿈과 같은 이야기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조서인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대답했다.
불끈불끈 치솟는 열정 덕분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출발하자. 볼일 있으면 미리 보고.”
“예!”
추룡은 네 맘 다 안다는 듯한 얼굴로 어깨를 토닥여 주고 떠났다.
풍운객잔의 뒤뜰에 홀로 남은 조서인은 방 안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우뚝 멈춰 섰다.
“조금만 더 하고 쉬자.”
조서인은 비스듬히 기대어 놓았던 창을 다시 붙잡았다.
목표를 정했으면 최선을 다해 수련해야 한다.
더군다나 그 목표점이 하늘이 내린 무를 지닌 소호라면 잠잘 틈도 없을 정도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
노력의 재능.
그게 바로 조서인이다.
***
광부(狂斧)는 운남 출신으로 몸이 까무잡잡하고 다부진 사내였다.
원래도 인상이 험악했지만, 보통 사람들보다 떡 벌어진 어깨와 허벅지처럼 두꺼운 팔뚝을 지닌 그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옷 사이로 드러나는 그의 팔과 어깨에는 온통 흉터들로 가득했다.
손바닥에는 손가락이 잘렸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상처가 많았고, 심지어 얼굴 한가운데, 입을 오른쪽으로 쭉 찢어 놓은 듯한 흉터는 그를 용모파기보다 세 배는 더 사납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키가 그리 큰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육 척이 될까 말까.
지나다니는 보통 사람들보다 작지는 않지만 그리 크지도 않은 키다.
그런데도 덩치가 산만한 파락호들이 그의 앞에 서면 호랑이 앞에 선 개처럼 몸을 움츠린 채 도통 기를 펴지 못했다.
하남 도박장에서 광부에게는 싸움을 걸지 말라는 격언까지 있을 정도다.
실제로 도박장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입구에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는 그를 최대한 피해서 슬쩍 지나다니곤 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긴 한데.
“그런데 숙부님, 저 사람 무공을 안 익힌 것 같은데요? 우리가 찾던 사람이 저 사람이 맞나요?”
객잔 이 층 창가에 앉아 어향가지(鱼香茄子)를 음미하던 추룡이 말없이 조서인에게 용모파기를 건네주었다.
“의심스러우면 다시 한 번 봐봐.”
조서인은 용모파기를 펼쳐 놓고 창밖으로 보이는 하남 도박장 앞에 우뚝 서 있는 광부와 용모파기를 비교해 보았다.
“으음, 암만 봐도 용모파기랑은 똑같아 보이는데요…….”
“그럼 맞는 거지.”
추룡은 의자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풍류를 즐기는 화화공자처럼 멋들어지게 술잔을 홀짝였다.
순식간에 술병을 비우자, 멀리서 눈치를 살피던 점소이가 재빨리 뛰어와 추룡의 앞에 새로운 소홍주를 가져다주었다.
추룡이 고맙다며 손을 흔들자 연신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멀어졌다.
“쟤가 왜 저렇게 나한테 잘하는 것 같냐?”
“아까 숙부님이 웃돈을 주셨기 때문 아닐까요?”
“아니지. 그 웃돈은 이 자리를 위한 값이었어.”
“자릿값이요?”
놀란 조서인이 탁자와 주변을 살폈지만, 특별히 웃돈을 주고 앉을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탁자가 창가에 붙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가 황학루처럼 절경이 펼쳐진 객잔도 아니지 않은가?
여기서 창밖으로 목을 쭉 빼 봤자 보이는 거라곤 음침한 하남도박장과 주변에 모여 있는 파락호들뿐이었다.
“경치도 안 좋은 자리인데 왜 자릿값을 받나 싶지?”
“예.”
“그게 답이야. 차분히 앉아서 왜 웃돈을 주고 앉아야 하는지 지켜봐봐.”
“아…….”
조서인은 기다렸다.
추룡이 틀린 말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렇게 일각의 시간이 지났다.
슬슬 수련이라도 하고 있을까 싶어 몸이 쑤셔 올 때쯤, 도박장의 입구에서 왁자지껄한 소란과 함께 한 사내가 우락부락한 파락호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끌려 나왔다.
“이 새끼들이 진짜. 정말로 해 보자는 거야!”
끌려 나온 사내는 양팔로 파락호들을 거칠게 밀치면서 버럭 소리쳤다.
파락호들은 화를 내지도 않았다.
이런 일에 익숙한 듯, 그들은 옷자락을 툭툭 털어낸 뒤 안쪽에서 사내가 맡겨 두었던 겉옷과 검 한 자루를 가져다가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그만 가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 새끼들이 사람을 무시하고……!”
사내는 마른 체구였지만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발걸음도 가볍고, 허리의 중심도 곧게 서 있다.
더군다나 허리에 검을 차자, 그는 기세 만만하여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여기 주인 나오라고 해! 이 새끼들이 사람을 얼마나 우습게 보고. 너희들 속임수 썼잖아. 그렇지? 속임수로 내 돈을 다 털어먹고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엉?”
사내는 도박장으로 다시 성큼성큼 나아갔다.
키에 비해 걸음걸이가 매우 빠르고 보폭이 넓었다.
파락호들이 그 앞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묵묵히 입구에서 지켜보던 광부가 먼저 나섰다.
“당신은 들어갈 수 없소.”
“당신? 당시인?”
사내는 광부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코웃음 쳤다.
“파락호는 꺼져! 주인 나오라고 하라고! 지금 당장!”
“주인은 이곳에 없소. 그리고 있더라도 이런 작은 일에는 주인을 부르지 않지.”
“작은 일? 이 새끼가.”
짝!
사내는 손이 매서웠다.
우장으로 광부의 뺨을 후려쳤는데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보통 사람의 눈에는 번개처럼 번쩍! 하니 어느새 뺨을 맞은 수준이다.
“쳤다!”
“광부를 쳤어!”
“시작되는구만. 이번엔 어디서 온 뜨내기야?”
“여기 출신이면 하남의 미친 도끼 뺨을 때릴 수가 없지. 시작되었구나. 이놈들아, 오늘은 어디에 걸 거야?”
“저놈 제법 손이 빠르던데. 보기보다 무공이 높은 거 아냐?”
“그럼 저쪽에 거시던가.”
조서인과 마찬가지로 창가에 자리를 잡고 있던 사내들이 한껏 흥분하면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제각각 돈을 걸어 댔다.
대부분 광부에게, 일부는 광부의 상대에게 걸면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이다.
“자릿값이 이래서 생겼군요?”
“그래. 여기 뒷골목의 명물이라더라.”
추룡은 젓가락 끝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조카야. 네가 보기엔 어떠냐? 검 차고 있는 저 도박꾼 무공 수준이 어떤 것 같아?”
“이류 중입. 검 실력에 따라 잘하면 이류 끝자락 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일류는 절대로 아닙니다.”
조서인은 냉철하게 파악했다.
발동작, 긴 손가락과 잘 발달된 팔목.
자세와 호흡으로 볼 때 지금 파락호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자는 무공을 익힌 게 분명했다.
수준은 이류 중입에서 말.
검술을 십 년 이상 단련했고, 검기상인을 조금이나마 경험해 보기 시작하는 단계다.
검끝에 맺히는 검기로 나뭇가지 정도는 벨 수 있으니 그리 크지 않은 표국의 표사 정도가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정확해. 그럼 저 둘이 싸우면 승부는 어찌 될 것 같냐?”
“광부라는 자는 내공이 없는 듯합니다. 있어도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과 다름없지요. 팔대 이로, 저 사내가 이깁니다.”
“그렇지. 그게 일반적인 평가지.”
이류 중입.
작은 표국의 표사 정도라고 해도, 그래도 무공을 제대로 익힌 무인이며,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양민에게는 닿을 수 없는 하늘 같은 존재다.
군문의 병사들처럼 갑주를 입고 온갖 무기를 쓴다면 모를까.
일대일로, 무공을 제대로 익힌 무인을 이긴다는 건 그야말로 기적에 가깝다.
“그래도 광부한테 승률을 이 할이나 줬구나. 왜? 몸도 단련되어 있고, 뭔가 있을 것 같아서?”
“예. 딱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럼 한번 봐봐.”
두 사람이 입을 다무는 것과 동시에, 사내는 광부의 뺨을 한 대 더 올려쳤다.
“까불지 말고 빨리 비켜!”
짝!
경쾌한 소리와 함께 광부의 목이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