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권 4화
제37장 비무첩래(比武牒來) (4)
평범한 사내였다면 무인에게 뺨을 한 대 얻어맞았을 때 이미 바닥을 나뒹굴고 있을 것이다.
오기로 버텨 낸다 해도 볼이 퉁퉁 부어올랐을 테고.
그런데 광부는 팔짱을 끼고 서서 묵묵히 얻어맞았다.
너무 반응이 없으니 때린 쪽이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다.
광부는 근처의 파락호에게 손짓을 하며 평탄한 목소리로 묻기까지 했다.
“이 손님이 얼마나 잃었나?”
“은자 열 냥입니다.”
“열 냥?”
광부는 피식 웃더니 자신의 품 안에서 은자 두 개를 꺼냈다.
“받으시오.”
“……뭐하는 짓거리야?”
“원래 개평은 일 할만 주는 게 원칙인데, 워낙 화를 내시니 일 할 더 드렸소.”
“뭐?”
“한나절 재밌게 놀았으니, 이제 이 돈을 받고 도박장은 쳐다보지도 마시오. 은자 열 냥이면 그리 많은 것도 아니오. 목숨을 걸 만한 돈은 더더욱 아니지.”
광부의 목소리가 낮고 굵은 탓일까.
그의 충고는 진심처럼 들렸다.
손바닥 위에 놓인 은자 두 개를 보고 멈칫한 사내가 눈빛이 번들거렸다.
위에서 지켜보던 조서인은 그가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장난하나. 속임수로 내 돈을 홀랑 털어먹고, 두 냥 먹고 떨어지라고? 개소리하고 있네. 당장 주인 나오라고 안 해? 너네 검패 돌릴 때 조작했잖아! 이 몸께서 낱낱이 조사해서 밝혀 줄 테니까 당장 주인 나오라고 하라고!”
사내가 검을 반쯤 뽑았다.
분위기가 일변한다.
광부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칼을 뽑지 마시오. 후회하게 될 거요.”
“지랄하고 있네.”
스릉―.
사내는 광부를 비웃으며 검을 뽑아 겨누었다.
“척 보면 안다. 무공도 못 익힌 것 같은데, 인상 좀 험악하다고 여기서 유세 좀 부리나 보지? 난 무공을 익힌 몸이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검 쓰면 여기 있는 놈들 다 죽는다. 비켜.”
사내는 자신감 가득한 모습으로 주변을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파락호 두 사람은 한 발 떨어진 채 참견하지 않았는데, 사내는 그걸 파락호들이 자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 믿었다.
무공도 안 익힌 파락호 따위가 어찌 감히 무인에게 대항할까.
사내의 상식에선 당연한 일이다.
“야, 안 비켜?”
광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서서 사내를 가만히 응시했다.
결국 사내의 분노가 폭발했다.
“오냐. 굳이 벌주를 마시는구나. 오늘 칼춤 한번 춰 보자.”
치링―.
사내가 몸을 움츠리길 잠시.
팽팽하게 당겨진 활처럼 한순간에 쏘아진 협봉검 한 자루가 섬광처럼 광부의 어깨를 찔렀다.
쉬익―.
사람을 찌르는데 손속에 망설임이 전혀 없다.
사내는 오른발을 쭉 뻗으면서 오른팔도 뻗었는데, 그 동작이 한 마리 뱀처럼 유연했다.
찌익―.
섬뜩한 소리와 함께 협봉검 검끝이 광부의 어깻죽지를 찢었다.
“어쭈?”
사내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어깨를 찔렀는 줄 알았는데, 광부가 살짝 몸을 틀어서 옷자락만 찢어진 탓이다.
뻥 뚫린 구멍 사이로 멀쩡한 피부가 보였다.
단단한 근육.
검에 찔리지 않았으나 지렁이 같은 흉터가 어깨에 가득하다. 심지어 광부는 팔짱을 풀지도 않았다.
사내는 광부가 여유로운 모습에 놀랐는지 한발 물러서더니 검을 수평으로 눕혔다.
“피해? 과연, 숨겨 둔 한 수가 있었군.”
최소한의 동작으로 피하긴 했으나, 광부는 여전히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신체의 무게 중심은 위에 있었고 호흡도 장중하지 못하다.
사내가 검법의 기수식을 취해도 광부는 그 흔한 싸움자세조차 취하지 않는다.
사내가 우습게 보는 것도 당연하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양민을 대상으로 쓰는 검술이라니.
그게 허수아비를 상대로 검을 찌르는 것과 뭐가 다를까.
후우웅―.
사내는 검 면이 위로 가게 검을 눕힌 상태에서 좌수를 크게 돌려 허공에 원을 그렸다.
“스으읍―.”
크게 호흡을 들이마시며 뒤로 반보.
“후우우우우―!”
숨을 길게 내쉬면서 좌수로 검 면을 쓸어내자 검끝에 푸른색 아지랑이 같은 검기가 올올이 맺혔다.
검끝에서 한 치.
검기가 제대로 맺히긴 했으나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린다.
주변의 구경꾼들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검끝에 기운이 맺히다니
무공을 모르는 양민들 입장에선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신기였던 탓이다.
“어떠냐. 아직도 내 앞을 막을 건가?”
거창한 기수식에 비해 나약하기 짝이 없는 검기였으나, 그것만으로도 사내는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사내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눈에는 핏발이 섰다. 숨은 거칠어서 호흡이 흔들릴 때마다 검끝의 검기도 흔들렸다.
짤랑―.
광부는 사내의 검기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갑자기 품 안에서 전낭을 꺼내 들었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묵직해 보이는 전낭이다.
그가 전낭을 왼손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살짝 비틀자 안에 들어 있던 은화가 햇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
“이 안에 은자 열다섯 냥이 들어 있소.”
“……흥. 검기를 보니까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드나 보지?”
사내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손을 뻗는데, 광부가 전낭을 뒤로 슥― 뺐다.
사내의 손끝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 스쳤다.
“공짜를 좋아하나 보군. 뺏을 수 있으면 뺏어가 보시오.”
“이 새끼가?”
놀림을 당한 거나 다름없다.
손을 뻗으려 했던 사실이 사내에게 더욱 치욕을 주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사내가 짐승처럼 이를 악물고 살기를 뿜어냈다.
“오냐. 건방진 놈! 그 팔을 잘라내고 가져가겠다!”
펄쩍 뛰어올라 찌르는 검격이 전낭을 들고 있는 광부의 왼쪽 어깨를 노렸다.
팔을 통째로 잘라내고 전낭을 가져가겠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쉬이익―!
아까와 비슷하지만 더욱 빠르고 강맹한 검격.
심지어 검끝에는 검의 예기를 한껏 증폭시킨 검기까지 맺혀 있다.
깡!
광부는 자신의 어깨가 잘려 나가기 직전에, 갑자기 손바닥 위에 얹고 있던 전낭을 이용해 검날을 덥석 붙잡았다.
“……!”
전낭이 찢어지고 그 안에 있던 은자들이 끼긱―거리는 소리를 내며 검날을 갉아 냈다.
맨손이었다면 손이 잘려 나갔을 것이다.
검기는 날카롭고 힘을 조금만 주면 사람의 뼈 정도는 우습게 잘라낸다.
하지만 은자는 다르다.
은자 열닷 냥 사이에 검날이 끼자 마치 바위틈에 검을 꽂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검의 움직임이 멎었다.
푹― 하고 이미 검끝이 어깨를 파고 들었지만 광부는 조금도 주춤하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죽은 사람처럼 보일만큼 눈빛이 냉철하다.
손자가 그랬던가.
바람처럼 빠르게, 숲처럼 고요하게.
불길처럼 맹렬하게, 산처럼 묵직하게.
광부야말로 그 싸움의 이치에 딱 맞다.
뺨을 맞으면서 싸움을 참을 때는 숲처럼 고요하고, 산처럼 묵직했다.
그런데 한번 싸움을 시작하자 바람처럼 빠르고 불길처럼 맹렬하다.
광부는 전낭으로 사내의 검을 꽉 붙드는 순간, 지체 없이 허리춤에서 뽑아 든 자그마한 소부(小斧)로 상대의 목덜미를 비스듬하게 내리찍었다.
퍽!
날카로운 도끼날이 목뼈를 박살 내는 소리는 소름끼치도록 선명했다.
광부의 동작은 기민했고,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조금도 없었다.
기가 막힌 박자였다.
조금이라도 느렸다면 피하거나 반격당했을 텐데, 전낭에 검이 붙잡히고 움찔 호흡을 멈추는 바로 그 순간.
그 찰나의 순간을 쪼개면서 번개처럼 도끼를 내려찍은 것이다.
“칵.”
검기가 뚝 끊겼다.
사내는 눈을 부릅뜬 채 왼손으로 도끼를 붙잡고 버둥거렸다.
승부는 한순간이다.
광부가 도끼에 좀 더 힘을 줘서 누르자 사내의 다리가 휘청― 흔들렸다.
“그르으…….”
서서히 눈에서 초점이 사라진 그가 구멍 난 배처럼 서서히 가라앉았다.
바들바들 떨리던 몸이 슬금슬금 주저앉아 결국은 비스듬히 쓰러진다.
땡그랑―.
협봉검 한 자루가 바닥을 뒹굴고.
짜르릉―.
찢어진 전낭에서 흘러나온 상처 난 은자들이 마치 동냥하듯 사내의 몸 위에 흩뿌려졌다.
“카륵.”
피거품을 흘린 사내가 결국 완전히 정신을 잃는다.
광부는 그 모든 것을 단 한 번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게 은자 두 냥을 받고 그냥 갈 것이지.”
광부의 목소리에 담긴 씁쓸한 후회는 사내를 향한 것인가.
아니면 과거의 자신을 향한 것인가.
파락호 두 사람이 익숙한 움직임으로 사내를 질질 끌고 사라지는 동안, 광부는 그곳에 묵묵히 서 있었다.
드르륵―.
벌떡 일어선 조서인의 뒤에서 의자가 넘어져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세상에.”
치미는 격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광부가 도끼로 상대의 목덜미를 내려찍는 그 순간, 이미 조서인은 광부라는 사내에게 크나큰 경외를 느꼈다.
환호성을 내지르지 않은 것만 해도 꽤나 참은 거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가 이류의 무인을 일 수에 쓰러뜨려?
자그마한 당랑이 참새를 쓰러뜨린 것과 같다.
무공의 높낮이가 아니라 삶의 방식.
약자가 강자를 쓰러뜨리는 그 경이로운 순간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추룡이 물었을 때 승률이 팔 대 이라고 답하긴 했지만, 사실 무공을 익힌 자와 익히지 않은 자의 차이는 생각보다 더욱 크다. 구 대 일. 아니 어쩌면 십 대 영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그런데 광부는 그 확률을 정반대로 뒤집었다.
놀랍지 않은가.
“재밌는 놈이지?”
추룡은 조서인이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다는 듯 즐겁게 웃었다.
“전쟁터에 나가 보면 말이다. 생각보다 무공을 익힌 놈들이 많아. 가문의 비전이니 인근 무파에서 수련을 했니, 하면서 한 수를 배워서 전쟁터에 뛰어든단 말이야. 무과에 급제하긴 힘들 것 같은 애들이 군공을 세우고 출세 한번 해 보겠다는 거지.”
추룡은 혀를 차면서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공을 익힌 애들은 확실히 아무것도 안 익힌 놈들보다 빠르고 싸움도 잘한다. 그런데 그만큼 자만하고 앞으로 나서서 군공을 세우려 해.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희한하게 큰 전투를 치르고 나면 다 죽어 있어.”
“아…….”
“살아남는 놈들은 어떤 놈들이냐? 바로 저런 놈들. 상대가 나보다 강하더라도 묵묵히 기다리다가 독침 한 방 꽂아 넣을 줄 아는 대범하고 끈질긴 놈들. 자기가 살아남을 틈을 기가 막히게 찾는, 생존 본능을 타고난 놈들이 살아남는 거야.”
전쟁터를 전전했던 오랜 경험을 통해 해 주는 말이기에 더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생존 본능을 타고난 놈들이 끝까지 남는다…….’
조서인은 마음속으로 추룡이 해 준 말을 자연스레 되뇌었다.
추룡은 생각에 잠긴 조서인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임무를 내렸다.
“조카야, 쟤랑 내공 없이 싸워서 이겨 봐.”
“예?”
조서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공 없이요……?”
“당연한 것 아니냐. 넌 심지어 창술을 쓰잖아. 멀리서 일연적룡무로 푹푹 쑤시면 끝인데. 그러라고 내가 널 데려왔겠어?”
“그건…… 그렇죠?”
“그래, 인마.”
추룡은 잔에서 찰랑거리는 소홍주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놀리듯이 말했다.
“왜? 겁나?”
“……그럴 리가요.”
“눈이 활활 타네. 좋아. 좋은 자세다. 아무리 평생 무공을 수련한 무인이라도 평생 죽고 죽이는 데서 살아온 싸움꾼은 우습게 보면 안 되거든. 사람 목숨 한순간이야. 무공이 아무리 높아도 목에 칼 박히면 누구든 죽어.”
추룡의 이야기는 경고였다.
정신 차려라.
우습게 볼 만큼 만만한 싸움이 아니다.
“예.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낭으로 검기를 막는 그런 임기응변에 통달한 사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약자가 강자를 끌어내리는 데 도가 튼 싸움꾼이란 소리다.
그런 자와 내공 없이 싸운다?
조서인에게는 또 하나의 도전이며, 큰 배움의 기회다.
‘이럴 때 소호라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든다.
소호라면 어떻게 했을까.
늘 가진 바 이상의 성과를 이뤄 내던 그 불패의 천무공자라면 어떻게 싸웠을까.
‘상상은 되는데, 도움은 안 되네. 그런 천부적인 감각은 내 방식이 아니잖아.’
고민을 거듭하던 조서인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어떻게 싸울지.
무엇을 무기로 싸울지 결정했다.
“조카야. 미리 말해 두겠는데 싸우는 과정도 순탄치는 않을 거다. 아마 네가 싸우고 싶다고 한다고 싸워 주진 않을걸?”
“숙부님.”
“왜?”
조서인은 결연한 마음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돈 좀 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