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권 5화
제37장 비무첩래(比武牒來) (5)
“으음.”
튼튼하고 고급스러운 자단목 탁자 위에서 조서인은 손가락만 한 대나무 검패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검패란 생각보다 오묘한 놀이였다.
흑검(黑劍), 흑구(黑鉤), 홍검(紅劍), 홍편(紅鞭).
네 가지 종류가 있고, 각각의 종류마다 일부터 십까지 열 개의 숫자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왕패가 하나 있는데, 연속된 네 개의 숫자와 함께 왕패가 나오면 그게 검패 중 최고인 오천왕(五天王)이다.
“난 쌍검이오.”
옆에 앉아 있던 고급스러운 비단을 몸에 휘감은 퉁퉁한 사내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검패를 슥 들이밀었다.
홍편 오(五)와 홍검 오.
똑같은 숫자의 검패 두 개가 나왔으니 쌍검이다.
“나도 쌍검.”
이번엔 반대쪽에 앉아 있던 강퍅하게 마른 사내가 씩 웃으면서 똑같이 검패 두 개를 내밀었다.
흑검 칠에 흑구 칠.
이 또한 쌍검이지만, 퉁퉁한 사내의 오쌍검보다는 칠쌍검이 더 높다.
“이런 젠장.”
퉁퉁한 사내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아쉬워했다.
이제 탁자 위에 놓인 은자들은 그의 돈이 아니다.
두 사람은 패를 깠으니 이제 남은 것은 조서인 뿐.
고민하며 검패를 만지작거리는 조서인에게 모두의 시선이 찌르듯이 꽂혔다.
“이거 이렇게 하면…… 이거, 이러면 되는 거죠?”
조서인은 흑검패 중에 일(一), 오(吾), 십(十).
세 개의 검패를 머뭇거리며 내밀었다.
“허? 삼절검(三絶劍)”
“어이가 없군. 이게 말이 되는 거야?”
검패가 일, 오, 십이 한꺼번에 나오는 것을 삼절검이라고 하며, 삼절검은 쌍검보다 높은 패였다.
오쌍검이든 칠쌍검이든 삼절검에는 이길 수가 없다.
탁자 한 가운데에 쌓여 있던 은자들이 조서인에게로 밀어졌다.
적어도 스무 개가 넘는 은자다.
조서인은 실감이 나질 않아서 덜덜 떨면서 은자를 긁어모았다.
‘아니, 왜 자꾸 돈을 따지? 잃어야 하는데, 은자 다섯 냥으로 시작한 게 이게 다 얼마야.’
지금 조서인이 판돈으로 꺼내놓은 은자만 서른 개가 넘는다. 평생 이런 큰돈을 만져 본 적 없는 조서인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봐, 젊은이. 오늘 검패 처음 만져 본다고 하지 않았어?”
“예에, 오늘 처음 해 봤어요.”
퉁퉁한 사내가 박수를 치며 웃었다.
“이래서 초짜랑 하면 안 된다니까. 평생 검패만 만지던 놈도 초심자의 운은 이길 수가 없어.”
“크흠!”
강퍅하게 마른 사내가 불편하게 헛기침을 했다.
“난 그런 거 믿지 않소.”
“이렇게 당하고도? 저 친구 세 판 연속으로 내리 이기는 게 안 보이나? 그쪽 눈은 장식이오?”
“그냥 잠시 운이 좋았던 거지.”
“그래? 그럼 우리 판돈 한번 올려 보겠소? 초심자의 운이 어디까지 가나 시험해 봅시다.”
“호오?”
퉁퉁한 사내의 도발에 강퍅하게 마른 사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퉁퉁한 사내가 보란 듯이 자신의 앞에 있던 은자의 개수를 세더니 서른 냥을 쭉 내밀었다.
그가 가진 판돈의 구 할 이상이다.
강퍅하게 마른 사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그 역시도 은자 서른 냥을 냉큼 판돈에 올려놓았다.
“좋아. 이런 걸 피해서야 사내라고 할 수 없지.”
탕!
탁자를 호탕하게 한 번 내리친 그가 다음은 조서인의 차례라는 듯이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아니 잠깐만, 이거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한데. 이, 이래도 되는 건가?’
평생 은자 한 냥에 벌벌 떨던 조서인이다.
어릴 때는 동전 한 닢을 벌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고, 다 커서 무산학관까지 졸업한 지금도 아낄 수 있는 돈은 최대한 아끼는 게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런데 은자 서른 냥.
한 가족이 이 년 넘게 먹고 살 수 있는 돈이라니!
그런 큰돈을 냉큼 판돈으로 올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니!
“어, 으음.”
조서인은 손이 덜덜 떨리긴 했지만 그래도 은자 서른 냥을 세서 판돈으로 밀어 넣었다.
촤르륵―.
검패가 탁자 위에서 이리저리 섞이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침묵이 감돈다.
탁자 위에 있는 은자만 아흔 냥이다.
옆에서 벌레 싸움을 붙이던 사람들도, 옆에서 주사위를 던지며 쌍육놀이를 하던 사내들도 모조리 몰려들어 검패판을 구경했다.
아무리 도박판에서 큰돈이 굴러다닌다지만, 그래도 은자 아흔 냥짜리 단판은 흔치 않다.
모두의 관심이 모두 쏠린 가운데, 도박장을 관리하는 자가 직접 검패를 섞어 무작위로 나누어주었다.
하나씩, 하나씩.
강퍅한 사내에서부터, 조서인을 거쳐 퉁퉁한 사내에게로 이어지는 순서로 검패가 나눠졌다.
관리자가 검패를 네 개까지 나눠 준 뒤, 마지막으로 남은 검패는 가운데에 모아 놓고 다섯 번째 검패는 직접 손으로 뽑아 가는 게 규칙이다.
강퍅하게 마른 사내는 무심하게 검패를 뽑았다. 마치 은자 서른 냥이 걸려 있지 않은 사람처럼 태연했다.
두 번째로 뽑을 차례가 온 조서인은 누가 봐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패 중의 하나를 붙잡았다.
“으음.”
심장이 두근거리는 탓일까.
귀에서 삐― 하고 이명이 들리는 것 같다.
조서인은 문득 마음이 바뀌어서 눈에 가장 잘 띄는 검패가 아니라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는 보이지 않던 검패를 뽑았다.
‘휴우, 다 뽑았다. ……응?’
문제는 마지막으로 검패를 뽑는 퉁퉁한 사내다.
그는 가운데 모아 놓은 검패를 뒤적거리다가 하나를 뽑았는데, 평범한 사람이면 모를까, 무공의 고수인 조서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손목에서 검패가 튀어나왔어! 이게 속임수구나! 대단하네. 무공 못지않아.’
말 그대로 번개처럼 빠른 손놀림이었다.
변검술사보다 더 빠르다면 믿어질까.
손목을 탁― 털면서 튀어나온 검패를 탁자 위에서 뽑은 척하는 모습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속임수는 안 되지. 항의를 해야겠는데……. 응?’
어디서 속임수를 쓰냐고 항의하려던 조서인은 자신의 패를 보자 입이 꾹 다물어졌다.
‘아니, 또 이러면 곤란한데. 으음, 저 사람 속임수를 썼는데. 뭔가 있겠지? ……아니면 또 아닌 대로 방법을 찾아보자.’
조서인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검패가 모두 나누어졌다.
“흐흐.”
“흐음.”
퉁퉁한 사내는 자신의 패를 보면서 만족스럽게 웃었고, 강퍅하게 마른 사내는 여유롭게 턱을 쓰다듬었다.
“패가 아주 좋군. 판돈을 더 거시겠소?”
“이미 거의 다 걸었는데. 좋소. 닷 냥을 더 걸지.”
“그럼 나도.”
두 사람이 제각각 닷 냥씩을 더 걸고 나서 조서인에게 눈치를 주었다.
조서인은 망설이다가 남아 있던 은자 다섯 개까지 탈탈 털어서 판돈에 올려놓았다.
검패를 먼저 깐 것은 강퍅한 인상의 마른 사내였다.
“크흠, 삼절검이오.”
흑구패로 일, 오, 십.
전판에서 조서인이 받았던 삼절검의 패다.
자신만만한 것도 이해가 되는 상당히 높은 패.
그런데 퉁퉁한 사내는 보란 듯이 씩 웃으면서 들고 있던 검패를 모두 내려놓았다.
“설마?”
“오늘은 나의 날인가 보오. 연환검(連環劍)이오.”
홍편패 오륙칠팔구십.
다섯 개의 숫자가 연이어지는 검패에 주변이 뒤집어졌다.
“연환검이라니!”
“저 사람 오늘 운이 대통이구나!”
쌍륙놀이를 하던 사람들이 탄성을 내지르며 감탄했다.
다섯 개의 검패를 받고 시작하는 검패놀이에서 연이은 숫자의 검패가 나오는 건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퉁퉁한 사내가 의기양양한 시선을 보냈다.
“저는……”
조서인은 난감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검패 다섯 개를 다 내려놓았다.
“흡!”
“허억.”
왕(王), 일. 일. 일. 일.
흑검(黑劍) 일, 흑구(黑鉤) 일, 홍검(紅劍) 일, 홍편(紅鞭)일.
각 패의 첫 번째 검패와 하나뿐인 왕패를 합친 짝.
“오, 오천왕(五天王)?”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패를 여기서……!”
“세상에, 내 눈으로 오천왕을 보다니.”
사람들이 너무 놀라면 탄성이 아니라 침묵에 휩싸이는 법이다.
고요해진 장내에서 조서인이 쑥스럽게 웃었다.
“운이 좋았네요.”
정말로 예상 못했던 일이기에 조서인은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검패로 할 수 있는 최고의 패가 떡하니 손에 쥐여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건 같이 검패를 하던 두 사람인 모양이었다.
삼절검을 내밀었던 마른 사내는 석상이 되어 버린 듯 딱딱하게 굳었다.
“오천왕……. 오천왕이라니.”
퉁퉁한 사내는 입을 쩍 벌린 채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그는 방금 전의 일전을 되짚어 보듯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대뜸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보게, 자네, 정말로 검패는 처음 잡아 봤나?”
“예? 예. 오늘 처음 잡아 봤어요.”
“아니, 솔직히 말해 주게. 어차피 우리는 다 잃어서 개털이 되었으니 그것만이라도 솔직히 말해 줘.”
“……으음, 저는 이런 도박장에 온 것도 처음이라서요.”
처음 와서 해 본 도박에서 승승장구를 하고 있으니 오히려 조서인이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퉁퉁한 사내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파하핫! 관 형. 순진한 청년이 온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도신(賭神)이 온 모양이오.”
“이대로 끝낼 건가?”
“어쩌겠소? 판돈은 다 잃었고 그 어려운 오천왕까지 나왔으니 오늘은 검패를 하루 쉬어야 하지 않겠소?”
관 형이라 불린 마른 사내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조서인을 한 번 쏘아본 뒤 탁자를 한 번 두드리고 떠나 버렸다.
퉁퉁한 사내는 그 모습조차 즐겁다는 듯 유쾌하게 웃었다. 그는 사람을 시켜 큼직하고 고급스러운 전낭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자, 오늘 딴 은자는 여기에 담으시오. 은자 백 냥을 담기에 충분할 것이오.”
“아, 네.”
조서인은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전낭에 오늘 딴 돈을 담았다.
‘이게 진짜 은자 백 냥이야? 다 내 돈이고?’
믿기지가 않는 일이었다.
조서인은 은자를 쓸어 담는 손이 자신의 손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소협. 내 이름은 후금성이라고 하오. 나랑 차 한잔하겠소?”
“예? ……예. 검패는 더 안 하는 건가요?”
“안 하오. 오천왕이 나오면 그 날은 쉬어야지.”
후금성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떨결에 따라나서긴 했는데 후금성은 차를 마시러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왁자지껄한 도박장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도박장에서 문을 하나만 열고 들어가면 있는 곳.
창호지로 사방이 막힌 채, 자그마한 창 하나만 나 있는 방 안에서 후금성은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앉았다.
‘돈을 다시 뺏으려고 흉계를 꾸미는 걸까?’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는 모습이다.
불안한 조서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금성은 태연하게 도박장을 관리하는 자들에게 일러서 차까지 내오게 만들었다.
“전낭을 그리 꽉 끌어안지 않아도 난 소협의 돈을 탐낼 생각 없소. 그렇게 꽉 안고 있다가는 내가 선물한 전낭이 터져 버릴 것 같은데?”
조서인은 당황하며 품에 안고 있던 전낭을 몸에서 살짝 떨어뜨렸다.
물론, 전낭을 움켜쥐고 있는 왼손으로는 창술을 훈련할 때보다 더 힘을 세게 주고 잡았다.
“차는 드시지 않을 것이오?”
“목이 별로 안 말라서요.”
수상하기 짝이 없는 차를 어찌 받아 마시겠는가.
무산학관에서는 무림에서 흔히 있는 암계들도 배운다.
조서인이 잘하는 과목은 아니었지만,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 흉계를 꾸미기 좋은 모습이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흐흣, 소협은 재밌는 사람이오. 내가 말했는지 모르겠는데. 이곳 도박장의 주인이 바로 나요.”
“그러셨……. 네?”
후금성은 조서인이 놀라는 모습이 못내 즐거운 듯 껄껄 웃었다.
“거참 솔직한 성격이오. 재미있소. 아무튼 이 도박장이 내 것인데, 그중에 검패는 내 취미였다오. 뛰어난 검패 실력으로 다른 지역에서 온 뜨내기들을 골려먹는 게 내 낙이지.”
바로 어제 얼뜨기 무인 한 명의 돈을 싹 털어먹었다는 사실을 후금성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소협이 와서 완전히 판이 뒤집혀 버렸다오.”
“……검패를 소매에서 뽑는 솜씨가 엄청나시던데요.”
“그걸 보았소? 역시 눈이 좋구만. 무인은 역시 함부로 속일 수가 없는 사람들이오.”
“제가 무인인걸 아셨어요?”
“보자마자. 알았소. 무인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거든. 그래서 속임수를 썼나 싶었는데, 소협은 그럴 인물이 안 되는 것 같고. 속임수도 찾지 못했고.”
후금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바닥에서는 속임수를 못 찾아냈으면 진 거요.”
“저는 속임수를 쓰지 않았어요.”
“그러니 도신이지.”
후금성은 조서인보고 보란 듯이 찻물을 자연스레 마시면서 웃었다.
“자, 이제 솔직히 말해 보시오. 여기에는 왜 왔소?”
“……솔직히요?”
“솔직히 말해 주시오.”
“여기에 문지기 있죠? 광부라고.”
“있지. 없으면 안 될 사람이오.”
“그 사람이랑 한판 붙고 싶어요. 내공은 쓰지 않고.”
기호지세.
조서인은 정면으로 벽을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