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34화 (563/686)

18권 6화

제37장 비무첩래(比武牒來) (6)

후금성은 항상 웃음을 달고 사는 사람 같았으나 처음으로 인상이 굳어졌다.

그는 딱딱해진 얼굴로 조심스레 물었다.

“원한이오?”

“아뇨. 무(武)입니다.”

“허?”

“배울 점이 있어서요. 비무를 하고 싶어요.”

후금성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빛이 흔들렸다.

“척 봐도 제대로 무공을 익혔을 것 같은 공자가 고작 도박장 문지기한테 무를 논한단 말이오?”

“그 도박장 문지기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더라고요.”

후금성은 눈을 끔뻑거리더니 도통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으니 더욱 혼란스럽소. 아까 검패 판에서도 그러더니 나를 얼마나 놀라게 할 작정이오?”

“저는 그럴 마음은 없는데요.”

“후우, 광부. 그 사람에 대해서는 좀 알고 있소?”

조용히 고개를 젓자 후금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씁쓸하게 말했다.

“그는 운남 출신의 뜨내기였소. 원래는 여기가 아니라 호남 쪽에 자리를 잡고 나무꾼 일을 했지. 처자식도 있었는데, 그때는 지금보다 성질이 괄괄했다더군. 힘도 좋고 싸움도 잘하니 왈패들이랑 어울리다가 도박판에 발을 들였던 모양이오.”

“아…….”

“소협도 짐작이 가는 모양이오. 도박이라는 게 그렇지. 한번 손맛을 보고 도박에 빠진 그는 처자식까지 판돈에 걸어 잃어버렸소. 그러고는 눈이 돌아 버려서 더욱 도박에 집착했고……. 결국은 자기 자신까지도 팔려서 노예처럼 투기판을 전전하는 걸 내가 사 왔소. 뒷세계에서 투견처럼 싸우던 모습이 어찌나 처절하던지 원.”

후금성은 그때를 떠올리는지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도박장을 운용하는 주인이라고 해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일 거라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후금성은 조서인의 표정이 오묘한 것을 발견하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안타까워하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하시오?”

“조금은요.”

“솔직하구려.”

“도박장에서 돈을 잃고 팔려 가는 사람은 많다고 들었거든요. 안타까운 사람이 광부뿐만은 아닐 것 같아서요.”

“그렇지. 그래서 더 그런 것이오. 도박판을 깔아서 돈을 버는 나 같은 놈은 마음 한구석에 짐이 있다오. 광부는 내 마음속 짐 그 자체였고. 그래서 지은 죄도 청산할 겸 과감히 투자한 것이오.”

본인이 저지른 잘못은 아니지만, 자신의 죄책감을 덜 요량으로 광부를 사 왔다는 소리였다.

의외로 솔직한 이야기다.

“광부는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 줬고, 지금은 문지기로서 그만한 사람을 더는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해졌소. 소협. 그러니 비무는 다른 무인과 하면 안 되겠소?”

“제가 이긴다 해도 광부가 죽는 것은 아닐 텐데요. 저는 비무 중에 사람을 죽일 생각이 없어요.”

“소협의 의지가 아무리 확고해도 비무라는 게 싸우다 보면 크게 다치거나 죽기도 하는 것 아니겠소? 그리고 나는 사업장에서 광부가 하루라도 없어지면 불안한 사람이오.”

“광부를 많이 아끼시네요.”

얼핏 굉장히 인정 많은 주인의 안타까운 만류 같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마음에 와 닿지는 않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아끼고 소중하면 애초에 문지기를 시키면 안 되지 않을까? 무공이 높은 사람을 고용해도 되는 걸 텐데?’

당장 어제만 해도 그 이류 무인의 무공이 조금만 더 강했으면 지금쯤 광부는 팔이 잘려 있을 것이다.

후금성의 말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다 진실도 아닐 것이다.

언제든 죽을 수 있는 곳에서 일을 시키는 자가, 고작 비무를 만류하는 상황이라니.

‘만약 거짓말이라면 원하는 게 뭘까?’

잠시 고민하던 조서인은 강하게 나가 보기로 했다.

“이건 어떨까요? 저랑 검패로 내기를 해요. 그래서 제가 이기면 순순히 비무를 시켜 주시고, 혹시 진다면…….”

“진다면?”

“제가 갖고 있는 이 은자 백 냥을 도로 돌려드릴게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후금성은 의외였는지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너털웃음을 지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순진하고 소심한 척하고 있는데, 알고 보면 타고난 도박사구려.”

후금성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좋소! 한번 해 봅시다. 이번에도 도신이 소협을 돕는지 내 직접 한번 확인해 봐야겠소.”

그렇다.

후금성 또한 도박의 늪에 깊이 빠져 있는 사림이다.

인정을 논했던가?

그래도 결국엔 광부를 판돈으로 거는 것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왜지? 질 것 같지가 않아. 만약 지면……. 아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검패를 갖고 와서 이리저리 뒤섞어 내미는 후금성을 앞에 두고, 조서인은 힘차게 검패를 뽑아 들었다.

***

“숙부, 저 의외로 재능이 있나 봅니다.”

추룡은 조서인이 건넨 묵직한 전낭을 받아 들고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파하핫! 뭐에? 도박에?”

“네.”

“하하하핫!”

“아니 진짠데. 도박장 주인이 계속 저보고 도신이라 부르던데요?”

추룡의 좋은 점은 세상에서 가장 세속적인 사람 같으면서도, 은자 백 냥을 받아도 대충 근처에 던져 둘 정도로 물욕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조서인이 돈을 엄청나게 불려서 돌려주었음에도 그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을 뿐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뭐, 운 좋은 날도 있겠지. 그래서? 무공 때려치우고 가서 도박이나 할래?”

“아뇨, 그럴 리가요.”

“그럼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점혈 받을 준비나 해라.”

희한한 일이다.

추룡에게 돈은 별로 중요치 않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그래도 빌렸던 돈을 은자 백 냥으로 불려 왔으면 칭찬을 받을 줄 알았다.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조서인의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추룡이 조서인의 등짝을 팡팡 두드렸다.

“으악!”

“가만 보면 암만 어른스러운 척해도 아직도 애야. 인마. 네가 어디서 일해서 돈 벌어온 것도 아니고 도박해서 벌어온 돈을 내가 참 기쁘게 쓰겠다. 그치?”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고생했다. 우리가 북경 가는 동안 이 돈으로 먹고 싶은 건 실컷 먹을 수 있겠어. 네 덕분이다.”

“하핫.”

“……는 개뿔. 야, 옛날에 우리 부대에 있던 놈이 전쟁터 굴러서 목숨 걸고 번 돈을 도박장에서 날려먹는 꼴을 얼마나 많이 봤는 줄 알아? 어쩌다 한 번 땄다고 도박장 기웃거리다가 패가망신하기만 해 봐라. 내가 너 쫓아가서 팔다리를 다 부러뜨릴 거야.”

추룡이 우악스럽게 주먹으로 관자놀이를 짓누르자 극악한 고통이 몰려왔다.

“우와악?”

“알아들었어, 못 알아들었어?”

“알아들었습니다! 잘 알아들었어요!”

“좋아. 이 고통을 기억해라.”

추룡은 조서인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혈기 넘치는 젊은 삼촌 같았다.

우악스럽지만, 그 안에는 조서인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있다.

조서인은 얼얼한 머리를 문지르면서도 배시시 웃었다.

“뭘 웃어?”

“하핫, 아뇨, 그냥요.”

추룡은 따스한 눈빛으로 조서인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얼빠진 놈. 어쨌든 도박장 주인한테 비무 허락도 다 받았다는 거지?”

“네.”

“그래. 그럼 점혈 받고 가 봐.”

추룡은 검지와 중지를 세운 검결지로 조서인의 가슴 주변 혈도를 빠르게 격타했다.

총 일곱 번의 타격.

조서인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상체의 혈도가 하나씩 닫혀 가는 감각을 유심히 관찰했다.

상단전과 중단전, 그리고 하단전 진기의 교통로가 뚝 끊어진다.

대주천은 물론 소주천도 할 수 없도록 필수적인 혈도들이 닫혀 가는 감각은 마치 진흙 속에 몸을 파묻는 것처럼 기묘하고 찝찝했다.

“칠점법이다. 해혈은 점혈의 역순으로 하면 풀려.”

“당당하게 돌아와서 받겠습니다.”

“오냐. 많이 배우고 와라.”

조서인은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내공의 흐름이 뚝 끊어진 신체의 감각을 확인하고 있었다.

추룡은 조서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조카야.”

“네?”

“죽으면 복수는 해 주마.”

즉, 싸움 도중에는 조서인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개입하지 않겠다는 소리다.

‘그래. 방심하면 안 되지.’

도박장에서 허락을 받는 동안 긴장이 좀 풀려 버렸다.

지금부터는 생사결.

죽어도 불평할 수 없는 목숨을 건 비무다.

“이기고 오겠습니다.”

추룡은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은 십자 목걸이에 입을 맞추며 그를 배웅해 주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아마 응원해 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조서인은 결연하게 도박장으로 향했다.

광부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크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내였지만, 조서인을 보자마자 미간을 좁히고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는 모습은 누가 봐도 당황스러워 보였다.

“이야기는 들으셨나요?”

“나는, 으음, 들었소.”

“제 이름은 조서인입니다. 무인으로서 하남 뒷골목의 광부에게 한 수 가르침을 청합니다.”

정식으로 포권을 취하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 그들은 도박장 입구 앞에 있었다.

이류 무인이 광부의 도끼에 처참하게 쓰러졌던 바로 그 장소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면서 수군거리는 말들이 들려왔다.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것이오?”

“공자께선 세 명이 지나가면 세 사람의 스승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 했다지요. 당신에게 배울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후 대인과 약조를 한 거요?”

“네.”

광부는 이야기를 다 들었음에도 납득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럼 이렇게 말씀드릴게요. 후 대인과는 추가로 내기를 해서 제가 이겼어요. 저를 이기면. 당신은 자유입니다.”

“……!”

“도박장을 떠나 어디로 가도 좋아요. 저를 이기고 자신의 삶을 찾으세요.”

광부의 표정이 변한다.

천천히.

마치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듯, 꿈도 희망도 없던 눈에 이글거리는 열정이 타올랐다.

“후, 대인이 한 말이 정말이었소?”

“네. 믿지 않으셨어요?”

“……나에게 원한 있는 자가 꾸며낸 판이라고 생각했소.”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 어쨌거나 저도 목숨을 걸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싸워 주세요.”

조서인은 자세를 살짝 낮추며 자신의 애창 은자를 들고 광부를 겨누었다.

점혈로 내공을 제한했다고 한들, 평생을 단련한 육신은 창을 잡자마자 반사적으로 기수식을 갖추었다.

창술의 가장 기본인 거창 자세다.

수천, 수만 번을 단련한 몸놀림에는 한 점의 군더더기도 없다.

스윽―.

광부도 허리에서 손도끼를 뽑았다.

특별한 자세는 아니다.

엉거주춤하게 선 것 같지만, 상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어떤 공격에도 대응할 수 있는 묘한 기세가 있다.

‘투기장 경험도 있다고 했지. 그래서 그렇게 싸움법이 참신했구나.’

한낱 뒷골목 싸움꾼이 무인을 이긴다고 하면 헛소리라고 치부해야 하지만, 광부에겐 그걸 뛰어넘을 만한 경험이 있다.

투기장.

온갖 무기는 물론이고, 짐승과도 싸워야 하는 곳이다.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다양한 싸움법을 터득했을까.

“갑니다.”

선공은 조서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가벼운 찌르기.

오른발을 내디디며, 오른손으로 창을 찌르는 기본적인 찌르기다.

내공이 없어서 힘은 덜 실렸지만, 자세가 정확하니 쉭― 하고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불끈.

평생을 단련한 팔목과 전완근이 회전력을 가미하니, 갑자기 창끝이 빨라지며 광부의 가슴으로 빨려들어 갔다.

텅!

광부는 그 순간 허리를 확 굽히더니, 들고 있던 손도끼를 창대에 덜컥 걸었다.

“……!”

창끝을 피하는 시점이 절묘했다.

보고 피했는가?

짐작하기 어렵다.

중간에 속도가 변했기에 눈으로 보고 피하기엔 어려운 공격이었다.

그런데도 감각적으로 피한다.

광부는 그 자리에서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도끼를 창대에 건 상태로 주저앉았으니 그야말로 창대에 매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서인 본인보다도 덩치가 큰 듬직한 사내가 창끝에 매달린 것을 상상해 보라.

내공이 있었다면 모를까.

순수한 육신의 힘으로는 버텨 내기 힘든 일이다.

자연스레 창끝이 바닥으로 내리꽂히고 손이 위로 올라갔다.

광부는 그 상태에서 왼발을 앞으로 쭉 뻗었다.

기묘한 자세.

근본 없는 움직임.

그런데 그 발끝은 조서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빨려들 듯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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