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36화 (565/686)

18권 8화

제37장 비무첩래(比武牒來) (8)

하북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태어난 곳이다. 진시황이 태어난 한단이 하북이고, 유비와 장비가 태어나고 자란 유주의 탁군도 하북이다.

원래는 변방으로 취급받던 곳이었지만, 송나라와 금나라의 시대를 지나 원나라가 집권하면서 크게 중요한 곳으로 변한다.

그리고 명조가 시작된 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하북은 이제 나라에서 가장 가치 있는 땅 중 하나다.

북경 인근.

성 밖에서 열린 시장통을 걸어가던 조서인과 추룡은 주변에 사람이든 물건이든 너무 붐벼서 피하느라 진땀을 뺐다.

“아까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유…… 무슨 담이었는데.”

추룡은 혀를 차며 대답해 주었다.

“유백담.”

“별호는 호리공자(狐狸公子)였죠?”

“그건 또 기억하네?”

“숙부님께서, 별호부터가 교활한 여우 새끼인데 계집애들이 믿고 따른다면서 세상 말세라고 혀를 차셨잖아요.”

“그 말이 그렇게 강렬했냐?”

“엄청요.”

추룡은 지나가던 사람이 놀라서 쳐다볼 만큼 큰 소리로 웃었다.

“여자 경험 없는 너다운 감상이다.”

“아닛? 여기서 그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너 연애도 한 번 안 해 봤다며.”

“……크흠!”

“원래 사람은 자기한테 없는 걸 가진 사람을 무작정 미워하는 법이야.”

조서인은 그 말에 크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사람 많은 시장통에서 그런 말로 싸워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안 미워해요. 하나도 안 부럽습니다.”

“거짓말하고 있네.”

“크흠! 매력적이니까 별호에 공자가 붙었겠죠. 그런 사람도 있는 거죠, 뭐. 예, 세상이 그리 공평하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인마, 너도 잘 꾸미고 다니면 공자 소리 들어.”

“에이. 아닙니다.”

“에이? 에이? 옷차림이 얼마나 중요한데. 원래 밥 빌어먹는 거지들도 잘 차려입은 거지가 훨씬 잘 얻어먹는 것 모르냐?”

조서인은 자신의 옷을 살펴보았다.

평범한 회색 면 옷이다. 무공을 수련하고 바닥을 굴러도 때가 잘 안 타니 무인에게 이만한 색감이 없다.

반대로 추룡을 보았다.

양팔이 다 드러나는 황색의 이국적인 복색에 목에는 칠색이 섞인 잠자리 날개 같은 묘한 재질의 천을 두르고 있다.

“숙부님도 그리…… 아닙니다.”

조서인이 말을 얼버무리자 추룡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야, 내가 목에 두른 이 천이 얼마나 값비싼 건지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되는 거냐?”

“좀, 특이하긴 합니다.”

“멋에 대해 무지한 자들 같으니.”

추룡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그에게서 세상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비운의 천재 같은 우수가 감돌았다.

“어…… 으음, 아무튼, 그 사람한테는 어떤 점을 배우면 될까요?”

“만나 보면 알 거야.”

“광부 때랑 똑같네요?”

“그렇지. 내가 듣기로는 그놈이 하북팽가 근처에서 논다니까 분명히 이 근방이겠지.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하북팽가…….”

“들어는 봤지?”

“들어 보다마다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 중 하나인데요.”

하북팽가.

도신 팽무혁을 시작으로, 현 가주인 칠절도왕 팽만식. 그리고 최근에 각광 받는 유망한 후기지수인 참철도 팽자겸까지.

막강한 가전 무공을 바탕으로 늘 탁월한 무인을 배출해 내는 명문 중의 명문이다.

“술집에 가 보면 될까요?”

“이 동네에서 제일 비싼 기루나 다루에 가 봐야지. 보통 이름에 ‘공자’ 붙은 놈들은 거기서 노니까.”

“…….”

“왜?”

“아뇨, 제가 아는 별호에 공자 붙은 놈들 중에 그런데 잘 안 가는 친구도 있어서요.”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추룡도 알 것이다.

추룡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코웃음 쳤다.

“친구라고 다 아는 건 아니지. 뭐, 예외도 있는 법이지만. 그래도 기루나 다루에 소식이 모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예, 그렇긴 하죠.”

추룡은 별말 없이 품속에서 전낭을 하나 꺼내서 던져 주었다.

무심코 받았는데 생각보다 묵직했다.

“이렇게나 많이 주세요?”

“도박장 가면 백 냥씩 따오는 놈이 뭘 놀라는 척을 해. 스무 냥 정도는 가지고 가 봐. 다 쓰지는 말고, 은자 한두 개씩 주면서 루주랑 이야기하면 대충 동향이 나올 거다.”

추룡은 이런 일에 익숙해 보였다.

중원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대체 언제 강호 경험을 그리 많이 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같이 안 가세요?”

“찾는 것부터도 공부야. 네가 직접 한번 해 봐.”

“으음, 예.”

“분위기 수상하면 주는 음료 함부로 먹지 말고.”

“예, 기초 독술은 무산학관에서 다 배웠습니다.”

“배운 게 대수냐. 학당에서 경전 배운다고 다 과거시험 보는 거 아니다. 제대로 쓸 줄 알아야지.”

등을 팡팡 때리는 응원을 받으며 향한 곳엔 하북 제일이라 불리는 금학루가 있었다.

산등성이에 높게 솟은 전각들은 그야말로 주변의 풍경을 모두 아우르는 군계일학의 풍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호북의 황학루에서는 시선 이태백이 외로운 돛단배를 논하며 장강을 바라봤다는데, 금학루도 그에 못지않게 시상을 자극할 듯했다.

“손님, 혼자 오셨는지요?”

“네.”

금학루의 일 층에서 접객을 하는 점소이는 인상이 좋고 조서인보다 좋은 옷을 입은 청년이었다.

허리도 곧고 눈빛도 맑아서 많이 배운 느낌이 들었다.

청년은 혼자서도 부담 없이 앉을 수 있는 작은 다탁으로 안내해 주었다. 의자에는 푹신한 천이 깔려 있었고 다탁은 잘 관리되어 깨끗했다. 착석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따뜻한 오룡차를 내오는 솜씨가 능숙했다.

“루주를 만나고 싶어요.”

“루주께 누구라고 전하면 될까요?”

“저는 조서인이라고 합니다. 루주와 안면이 있는 사이는 아니에요.”

안면이 없다고 말하자 청년이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그의 시선이 조서인이 등에 차고 있는 은자창으로 향한다.

무림인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대응을 고민하는 것이다.

“그리 걱정하실 일은 없습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제가 사람을 찾고 있거든요”

“어떤 분을 찾으시는지 말씀해주시면 제가 아는 것을 답해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아무래도 곧바로 루주에게 안내해 주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조서인은 전낭에서 은자 하나를 꺼내 청년에게 넌지시 건네주었다.

청년은 그것을 바로 품 안에 넣지 않고 손에 쥔 채 질문을 기다렸다.

“유백담이라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하북에서 호리공자라는 별호로 불린다던데요.”

움찔.

청년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는 고민하더니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하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가 반각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돌아왔다.

“손님, 죄송하지만 저는 이걸 받을 수 없겠습니다.”

공손히 내미는 손에는 아까 건네주었던 은자가 그대로 들려 있었다.

“……비밀인가요?”

“아뇨, 말씀드릴 만한 내용이 없어서입니다.”

청년은 미안한 기색이었다.

“이해가 안 되네요.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시는 거예요?”

“예. 분명 유 공자는 저희 다루의 단골이셨습니다. 문제는 사흘 전쯤에 이곳을 떠났고 그 후에는 아무도 유 공자를 만난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아, 그래요? 홀연히 사라진 거예요?”

“예. 천진 근처로 향했다는 말은 있는데 아무도 그를 보지는 못했답니다.”

보통 있는 말 없는 말 다 지어내면서 어떻게든 돈은 받으려 할 텐데, 이렇게나 솔직하다니.

의외였다.

조서인은 은자를 받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도로 밀어내자 청년 점소이가 당황했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됐습니다. 충분해요. 다만 한 가지만 더 물을게요. 그럼 떠나기 전까지 유 공자와 가장 친하게 지내던 건 누구예요?”

“…….”

“대답하기 힘든가요?”

청년은 고민하더니 뭔가를 결심한 듯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나직하게 말했다.

“팽가입니다. 그곳의 여식과 오래 어울리셨습니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충분해요.”

“아뇨. 송구합니다.”

청년은 은자 한 냥이 과분하다는 듯 연신 허리를 굽히며 조서인을 배웅해 주었다.

‘되게 겸손한 사람이네.’

그의 말을 다 믿을 수 있는지 확인은 해 봐야겠지만 일단은 태도에서 진실됨이 느껴졌다.

평소에 보던 점소이들은 하나같이 능글맞고 정보도 잘 팔던데 희한할 정도로 정직하지 않은가. 특히 마지막에 송구해하는 모습에선 마치 잘못이라도 저지르고 사과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럼 이제 주루에 가 봐야겠지? 여기서 가장 유명한 주루가 어딜까?’

조서인이 노점상에게 여기서 어느 주루가 가장 유명한지 물어보려는 그때였다.

웅성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통행이 많은 길목에서 사람들이 양옆으로 쫙 갈라졌다.

“어?”

허리에 칼 한 자루씩을 찬 덩치 큰 사내들이 거리의 중심을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호랑이 한 무리가 움직이는 듯했다.

부리부리한 눈.

듬성듬성한 수염 위로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인상을 지닌 호걸들이었다.

‘군기(軍氣)?’

전투를 앞둔 병사들이 내뿜는 찌르는 듯한 압박감이 멀리서부터 느껴졌다.

특히 선두에 서 있는 청년의 기세가 굉장했다.

건장한 체구.

관복을 입거나 한 것도 아닌데, 그저 걷는 모습만으로도 어딘가에서 장군 역할을 할 것 같은 젊은 사내였다.

조서인은 사람들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옆으로 함께 비켜섰다.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는 것도 잠시.

성큼성큼 화난 듯한 걸음으로 걸어가던 사내가 조서인이 등에 비스듬히 메고 있는 창을 보고 멈춰 섰다.

선두의 청년이 멈춰 서자 뒤따라 오던 십여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멈춰 선다.

조서인은 거기서 상명하복이 철저한 조직의 느낌을 받았다.

또는 위계질서가 강한 한 가족일 것이다.

“소협, 말 좀 묻겠소. 혹시 방금 금학루에서 나왔소?”

“저 말입니까? 예. 방금 금학루에서 나왔습니다.”

“그렇군.”

청년의 분위기가 바뀐다.

미간을 좁히고 눈을 조금 가늘게 떴을 뿐인데,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서늘해졌다.

어느새 조서인의 주변에 십여 명의 사내들이 슬그머니 포위망을 갖췄다.

전후좌우, 어디로 튀어 나가든 반드시 한 명과는 맞서야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이다.

‘뭐지? 날 적으로 보는 건가?’

심지어 포위한 사내들은 언제든 뽑을 수 있도록 칼집에 손을 얹고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전신에 쏟아진다. 함부로 움직이면 벨 것 같은 섬뜩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 와중에 먼저 말을 건넸던 청년이 짧고 격식 있게 포권을 취했다.

“정식으로 인사하겠소. 나는 하북팽가에서 온 팽자겸이라 하오.”

“참철도……!”

“그렇소. 강호에선 그리 불리기도 한 다오. 알아주니 이야기가 빠르겠구려.”

분위기가 요상한 데다 어째 포위까지 당했지만, 조서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고작 이런 일에 당황하기엔 조서인도 그동안 꽤나 많은 일을 겪었다.

광부와의 싸움.

그 치열하고 격렬한 싸움을 겪고 나니 별것 아닌 일은 가볍게 느껴질 정도다.

당황할 이유가 없는 데다, 더군다나 상대방인 참철도 팽자겸도 선을 넘지 않은 채 예의를 지키고 있지 않은가.

“처음 뵙겠습니다. 조서인이라고 합니다.”

조서인 역시도 딱 팽자겸이 보인 예의만큼 짧게 포권을 취했다.

그런데 조서인의 이름을 들은 팽자겸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서인? 들어 본 적 있소. 혹시 서릉협과 백경채에서 활약한 분이 아니오?”

“아, 예. 그런 적이 있긴 했습니다.”

“낙일창!”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호걸 한 사람이 감탄을 내뱉었다.

주변이 수군거리며 갑자기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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