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권 9화
제37장 비무첩래(比武牒來) (9)
특히 팽자겸은 화색이 돌더니 갑자기 환하게 웃었다.
“정말로 낙일창이오? 흉신광검 청계를 앞에 두고도 ‘해가 지기 전까지 나를 뚫을 수 있으면 뚫어 보라!’라고 소리치고 막아 냈다던 그 낙일지협의 주인공이란 말이오?”
“예? 아, 예에.”
조서인이 기억하는 그때의 상황과는 어째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만, 맥락은 맞으니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 그걸 어떻게 알지? 소문이란 게 원래 이렇게 빠른가?’
백검회와의 싸움 자체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멀리 떨어진 하북까지 소문이 퍼지다니.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고사가 딱 맞다.
조서인이 인정하자 주변의 시선은 더욱더 호감으로 변했다.
“낙일창은 무산학관 출신이며 천무공자의 절친한 친우라던데. 그 말이 사실이오?”
“……소호는 제 인생의 하나뿐인 벗이지요.”
그것 하나만큼은 지금의 상황이 아무리 어떻더라도 장담할 수 있는 사실이다.
팽자겸의 시선이 조서인의 허리춤으로 향한다.
조서인은 무산학관에서 졸업의 증표로 준 철 요대를 차고 있었고, 그 모습이 팽자겸에게 확신을 준 모양이었다.
“흐음!”
팽자겸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실례했소, 조 소협. 무례를 범했다면 사과하겠소. 부디 이해해 주시오. 우리 집안의 일이 지금 워낙 다급하게 돌아가다 보니 성급하게 무례를 범했구려.”
“아닙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보다 무슨 일로 이러시는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오. 금학루에서 소협이 ‘누군가’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이렇게 급하게 찾아왔소.”
“아……?”
조서인은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점소이 청년의 친절하지만 뭔가를 미안해하던 송구한 느낌.
그리고 대답을 해 주기 전에 반각 동안 위층으로 올라갔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서 번뜩였다.
‘팽가에 알렸구나! 그래서 미안해했던 거였어!’
세상에 공짜가 없음을 새삼 느낀다.
진작 깨달았어야 했는데 멍청했다.
점소이 청년이 과할 만큼 친절하고 겸손했던 것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조 소협, 여기서 긴 이야기를 하긴 어려울 것 같소. 이것도 인연인데 팽가에 한 번 들르시는 게 어떻겠소? 맛있는 차를 한 잔 대접하고 싶소.”
팽자겸은 어느새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듣는 귀가 많다.
이곳에선 말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분위기가 전해졌다.
‘일이 묘하게 돌아가는구나.’
유백담을 찾아서 비무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하북에서 제일가는 무가에 초청을 받게 되다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상황에서 모든 일의 돌파구는 팽가가 가지고 있는 것을.
‘게다가 팽가도 한 번쯤 구경해 보고 싶었고.’
조서인은 예를 갖춰서 초대를 승낙했다.
“물론입니다. 팽 공자께서 초대해 주시면 반드시 가야죠.”
팽자겸은 고맙다는 듯 호쾌하게 웃었다.
하북팽가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드넓은 땅에 담장 높은 건물들이 꽉 채우고 있으니 마치 성도에 온 듯했다.
실제로 팽가 자체가 하나의 마을이나 마찬가지였다.
높은 담장 밖에는 지평선까지 뻗어 있는 농토가 있고, 농민들이 거주하는 촌락도 팽가에 포함되어 있었다.
팽자겸은 바깥쪽의 마을들은 모두 팽가의 친족들이라고 설명했다.
“성씨는 다르지만 모두 팽가의 방계 친족들이오. 이곳, 이 땅에 우리 팽가의 피가 섞이지 않은 곳은 없소. 모두가 한 가족이오.”
팽자겸은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오만하지는 않지만, 말투, 표정, 그리고 당당한 모습에서 그의 자부심이 풍겨 나왔다.
사람 키의 두 배가 넘는 위풍당당한 대문을 넘어서자, 수백 명이 일렬로 늘어서서 무공을 수련할 수 있을 듯한 커다란 연무장이 나왔다.
입구에 비스듬히 세워진 십팔반병기에는 하나같이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했다. 잡초 한 포기 자라지 않도록 깨끗하게 관리된 연무장을 보니 절로 탄성이 나온다.
조서인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신창양가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그곳보다 큰 가문은 처음 와 보네요. 대단합니다. 한 지역에서 완전히 자리잡은 거대한 가문이란 이런 느낌이군요.”
“신창양가에 가 본 적이 있소?”
팽자겸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조 소협은 창을 쓰는 무인이니 양가와 인연이 있을 수도 있겠구려. 양가는 여기서 별로 멀지 않아 가주님도 몇 번 뵌 적이 있소. 혹시 어떤 인연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저희 아버지께서 양가의 가주님과 친우셔서, 몇 번 방문했었어요.”
“그렇소? 혹시 아버님 존함이 어떻게 되시오?”
“무명은 없으세요. 다만 상산 조가의 명맥만 이어 오고 계시죠. 무공도 일인전승이고요.”
“상산 조가!”
팽자겸은 감탄했다.
“조 공자는 상산 조자룡의 피를 이었구려. 하긴, 낙일지협의 고사가 갑작스레 이뤄질 리가 없지. 선친의 위대한 가풍이 있었기에 영웅이 나타난다는 것을 내 잠시 잊고 있었소.”
팽자겸은 크게 칭찬해 주었지만 조서인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좋게 해석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실제로 가문에서 배운 것은 아주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사이, 안채에서 뛰쳐나온 한 사람이 그들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엇?”
조서인은 처음엔 살수가 습격하는 줄 알았다.
쏘아지는 사람의 기세가 사나웠던 탓이다. 자신도 모르게 창을 뽑을 뻔했지만 주변에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습격자는 외모가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키가 크고 얼굴은 갸름했는데, 사내처럼 품이 넓은 무복을 입어 그녀가 땅을 한 번 박찰 때마다 품이 넓은 소맷자락이 날개처럼 펄럭였다. 그 바람에 여성스러운 몸매의 굴곡이 선명하게 보였다.
연무장의 절반 가까이를 날 듯이 가로지른 그녀는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왔다.
콧대는 그리 크지도 낮지도 않게 적당했고, 피부색이 밝아 이마와 양볼이 훤했다. 다만 눈썹이 짙고 눈매가 고집스러워 성격이 보통이 아닌 느낌이었다.
“그놈을 잡았어?”
여인은 신법에 능통했다. 그토록 빠르게 뛰다가 멈춰 서는 동작이 깃털 같았다.
여인은 팽자겸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조서인을 보더니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놈이 아니잖아? 그놈 잡으러 간다며?”
“자연아. 손님 앞이다.”
“손님?”
팽자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조서인에게 양해를 구했다.
“조 소협, 미안하오. 내 동생이 평생 사랑만 받고 자라 이리도 천방지축이라오.”
조서인이 괜찮다고 말하려는 찰나, 팽자연이 버럭 소리쳤다.
“나를 왜 이상한 사람 만들고 그래! 자화가 죽겠다고 난리치는데 지금 나만 급한 거야? 다들 뭐 이리 태평해? 당장 그놈부터 잡아와서 주리를 틀어야지!”
“팽자연!”
“내가 뭐 틀린 말했어?”
“그만해라.”
팽자겸이 나직하게 경고 섞인 말을 하자 팽자연은 불만스럽게 고개를 팩 돌렸다.
그러고는 숨을 씩씩거리면서 지지 않고 말했다.
“내 동생을 농락한 놈이야. 다른 사람이 안 잡으면 내가 직접 가서 머리채를 잡고 끌고 오겠어.”
“아서라. 우리 가문의 맹호도객들이 다들 찾고 있는데 네가 나서 봐야 방해밖에 안 된다.”
“내가 왜 방해야!”
“이리도 철이 없다니. 네가 우리 가문의 무공을 배웠다고 한들 혼자서 뭘 할 수 있단 말이냐. 괜히 사고쳐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조용히 결과를 기다리거라.”
울컥한 팽자연이 뭐라고 더 쏘아붙이기 전에 팽자겸은 조서인에게 한 번 더 양해를 구했다.
“미안하오. 조 공자, 가문의 못난 꼴을 보였소.”
“아닙니다. 혹시 가문의 일이 바쁘시면 저는 이만 돌아갈까요? 괜히 방해나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아니, 그럴 리가. 오히려 나도 공자께 묻고 싶은 것이 있으니 부디 자리를 함께 해 주었으면 하오.”
팽자겸의 태도가 워낙 정중하니 팽자연도 들끓던 화를 가라앉히고 호기심을 느낀 듯 보였다.
묘한 시선이 옆에서 찌르듯이 느껴진다.
‘기 센 여자의 시선이다. 무산학관에서 자주 느끼던 거야. 이건 마주 보면 안 돼.’
조서인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면서 애써 웃는 얼굴로 팽자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저야 괜찮습니다.”
“그럼 바로 안내하겠소.”
팽자겸은 서둘러 조서인을 접객실로 안내했다.
팽가의 접객실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예전에 소호를 따라 들어갔던 것처럼 객잔의 화려한 방 같은 느낌은 아니지만, 둔중하면서 무게감이 느껴지는 매력이 있었다.
명필로 보이는 족자나 명인의 작품으로 보이는 무기들이 벽에 한 가득이다.
조서인은 다탁에 앉아 시비들이 가져다주는 차를 마셨다.
정면에는 팽자겸, 조금 거리를 두고 옆에는 팽자연도 함께 동석했다.
“그러니까. 조 공자는 그와 아는 사이는 아니란 말이오? 나는 다루에서 그를 찾았다기에 영락 없이 지인일 거라 생각했다오.”
쪼르륵―.
찻물이 내려오는 소리가 경쾌했다.
조서인이 어째서 유백담을 쫓게 되었는지 사정을 들은 팽자겸은 크게 실망한 모습이었다.
“예. 뭔가를 기대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희 숙부님께서 제게 엄격한 가르침을 내리는 중인데, 이번에 시키신 일이 유백담 공자와의 대결이었어요.”
“허어.”
팽자겸은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신음을 흘렸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찻잔을 들고 있던 팽자연은 “공자는 무슨.”이라면서 다 들리도록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팽자겸이 혀를 차며 눈치를 주자 팽자연은 고개를 팩 돌렸다.
“조 공자, 그자의 무공이 또래에 비해 제법인 건 나도 인정을 하는 바지만. 낙일지협을 행한 조 공자가 배울 점이 있을 것 같지는 않소만?”
“그렇습니까? 아마 숙부님께서 무공을 보고 상대를 고른 것은 아닌 듯합니다. 분명히 다른 뜻이 있으셨을 거예요.”
“그자는 부채를 사용하는 선술이 뛰어나긴 하나 일절은 아니오. 무공보다는 오히려 말주변이 뛰어나 처세에 능하지. 으음, 알 수가 없구려. 공자의 숙부께선 도대체 그자의 무엇을 보고 비무 상대로 골랐단 말인가?”
“으음, 아마 직접 만나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여기 오기 전에는 내공에 금제를 가한 뒤에 도박장 문지기와 싸웠지요.”
풉.
막 찻물을 입에 머금었던 팽자연이 억눌린 기침을 토해냈다. 비웃음이 아니다.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동그랗게 토끼눈을 뜨고 있었다.
“허어.”
팽자겸도 마찬가지.
그는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는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면서 몇 번이나 신음을 내뱉었다.
“놀랍구려, 놀라워. 무공을 제대로 익힌 무인이 그런 자에게 배울 점이 있단 말이오?”
조서인은 선선히 긍정했다.
“예. 배울 점이 있더라고요.”
“어떤 점이 배울 만했소? 나로선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소.”
“싸워 보면 무인의 비무라기보단 그저 필부들의 목숨을 건 싸움이었습니다. 손에 잡히는 건 다 던지고, 벽과 집기들을 부수면서 바닥을 굴렀지요. 다만 내공이 없어도 상대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기를 내리치니 목숨의 위협은 진짜였습니다. 그때의 긴장감은…… 지금 생각해 봐도, 비무로는 겪을 수 없는 종류의 것입니다.”
조서인은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모골이 송연하다.
쇠사슬로 병기를 묶고, 객잔의 집기들을 집어 던지면서까지 집요하게 목을 노리던 광부의 도끼날.
그 무시무시한 위협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과연! 진정한 무인은 맨손백타에도 능해야 한다던데, 그걸 실제로 실행하는 사람을 볼 줄이야……!”
“모두 숙부님의 덕입니다. 그때 제가 느낀 바가 많아, 사실 이번 비무도 크게 기대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제 예상과 달리 일이 꼬인 듯합니다.”
팽자겸은 무거운 얼굴로 긍정했다.
“바로 그렇소. 철부지 동생 때문에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이 자리에 없는 다른 동생 때문에 우리 하북팽가도 그자를 급히 찾는 중이라오.”
“제가 알아도 되겠습니까? 혹시 모르는 게 낫다면 듣지 않겠습니다.”
“아니오. 어차피 그자를 찾고 있다면 공자도 알아야 할 것이오. 유백담. 그자는 아직 어리고 순진한 내 동생, 자화의 마음을 빼앗았소. 자화가 다도를 배우러 다니던 그 금학루를 기웃거리더니, 결국 그 화려한 말솜씨로 동생을 홀린 모양이오.”
“아…….”
조서인은 난감해졌다.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몰라야 할 남의 가정사를 들어 버리니 난감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오. 춘풍의 꽃처럼 흔들리던 자화가 큰맘 먹고 마음을 허락했는데 정작 자화가 마음을 표현하자 갑자기 우리 가문은 싫다면서 떠나 버렸지.”
팽자겸은 팽가의 대공자다운 인내심으로 무표정을 지켰지만, 마음의 창이라는 눈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의 두 눈은 호랑이도 도망칠 만큼 무시무시한 열기를 뿜어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소. 자화는 그 일이 있고나서 시름시름 앓으면서 방에서 두문불출하더니 이제는 죽겠다며 난리를 치고 있다오. 부끄러운 일이오. 큰오라버니나 되어서 동생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알지 못했다니. 호리공자라 불리는 놈이 내 동생을 저렇게 괴롭게 만드는 걸 방치했다니.”
팽자겸은 가문에 대한 자부심만큼 책임감도 큰 사내였다.
동생이 크게 상처입은 일을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는게 분명했다.
“이 기회에 말해 두겠소. 조 공자, 미안하지만 숙부님을 설득해 주시오. 설령 조 공자가 그를 찾는다고 한들, 그대가 유백담과 비무를 할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오.”
담담하게 단언하는 말투가 오히려 더욱 공포스럽다.
팽자겸의 뜻은 명확했다.
잡히면 죽는다.
호리공자 유백담은 사지에 발을 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