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권 10화
제37장 비무첩래(比武牒來) (10)
‘호리공자가 여자를 잘못 건드렸구나. ……아니지. 어쩌면 사실과는 다를 수도 있어. 팽자화 소저는 호리공자를 어떻게 하고 싶을까? 그가 죽는 것을 원할까?’
남녀 간의 애정이란 조서인에게 있어 가장 약한 분야 중의 하나다.
조서인은 동생의 아픔에 분노하는 오라비를 앞에 두고 대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자화 소저는…… 괜찮습니까?”
“자화?”
팽자겸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보였다.
“자화는, 으음, 처음 며칠은 가문이 들썩일 만큼 난리였으나, 지금은 괜찮은 것 같소. 조용한 걸 보면 적어도 이전처럼 큰일은 벌이지 않는 듯하오.”
팽자겸은 같은 여동생들끼리 더 잘 알 거라 생각했는지 팽자연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팽자연은 뚫어져라 조서인만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자화 소저는 괜찮냐고 묻는 순간부터 따가울 정도로 조서인을 응시했다.
“자연. 자화는 지금 괜찮으냐?”
“응? 어어, 괜찮아. 지금은 좀 안정됐어.”
“다행이군.”
어색하고 씁쓸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조서인은 조심스럽게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잘 알겠습니다. 팽 공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숙부님께는 지금의 상황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혹시 제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
“말만으로도 고맙소. 하지만 하북을 찾은 손님에게 부탁할 사안은 아닌 듯하오. 우리 팽가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오.”
“오라버니.”
그때 팽자연이 팽자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나직하게 말했다.
“우린 도움이 필요하잖아. 오라버니랑 맹호도대는 적양문의 하북 진출 때문에 정신이 없고.”
“자연, 손님 앞이다.”
“어차피 우리 사정을 다 알게 된 손님이잖아. 오라버니가 그렇게까지 정중하게 대하는 걸 보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것 같고. 내가 저 손님이랑 같이 유백담을 한 번 찾아볼게.”
“뭐라고?”
팽자겸의 눈빛이 흔들렸다.
조서인이 놀란 것은, 그가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다.
‘척 봐도 자존심 강한 사람이 도움을 요청할까 고민을 하다니. 적양문 문제가 생각보다 큰일이었구나. 세상에, 풍운객잔에서의 사건이 여기에까지 영향을 미쳤어.’
산등성이에서 굴린 작은 조약돌이 거대한 산사태를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런 느낌일까?
태양염왕 고흠과 무림맹주 백연이 풍운객잔에서 회담을 가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조서인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왜 아니겠는가.
하북을 누군가가 가진다는 그런 거대한 이야기는 조서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실감이 조금도 안 나는 이야기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그 여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적양문이 하북을 갖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하북팽가와는 마찰을 겪게 되고, 그 사실이 팽자겸에게 부담을 주고 있었다.
“으음.”
팽자겸은 신음하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 처음 본 사이에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군.”
“오라버니!”
“그만. 이 이상 보채지 말거라. 그리고 정작 조 공자는 우리 가문의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 부탁은 폐를 끼치는 것이다.”
팽자겸의 말은 지극히 상식적이었으나 팽자연은 다르게 생각하는 듯했다.
“팽가는 은혜를 잊지 않잖아. 부탁을 하는 만큼 당당히 그 대가를 치르면 돼.”
하북팽가.
아니, 흔히 ‘세가’라 불리는 곳이 팔파일방과 다른 점이 이런 것이다.
협의와는 상관없이 대가를 주고받아 일을 처리하려는 모습.
어찌 보면 세속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태도였다.
팽자겸은 그 말에 불같이 화를 냈다.
탕!
탁자를 내리친 팽자겸이 무서운 시선으로 팽자연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낭인처럼 부탁을 하고 돈이라도 주고받으란 말이냐? 어디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느냐? 조 공자는 그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다.”
“난 그저…….”
“나중에 이야기하자. 네가 오늘따라 이상하구나.”
팽자연이 분한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문다.
‘동생을 많이 아끼는구나. 어떻게든 활로를 찾으려 하고 있어.’
팽자연이 팽자화를 얼마나 아끼는지가 절절히 느껴졌다.
한편 팽자겸의 태도 또한 조서인에게는 놀라웠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조서인을 높게 봐주는 건지 모를 일이다.
예의를 갖추는 모습.
정중하게 손님의 예를 갖추려는 모습에 조서인은 그에 대한 호감이 생겼다.
“조 공자, 오늘 들은 말들이 불편했을 텐데 내가 대신 사과하겠소.”
“아닙니다. 저를 중히 여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음?”
“오늘 처음 본 탓에 부탁하지 못할 일이면, 내일도 보고 앞으로도 보면 되는 것 아닐까요?”
순수하게 든 생각이다.
소호가 조서인에게 손을 내밀었듯.
곤란함에 빠진 팽가.
그중에서도 조서인을 높게 보고 정중하게 대해 주는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건 어떨까.
“친분이 없는 게 문제라면, 친분을 쌓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아닌가요? 저기, 제가 너무 뻔뻔했습니까?”
급격히 자신감이 떨어진 조서인의 동공이 흔들렸다.
팽자겸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웃더니 전보다 훨씬 호감 가득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조 공자는 인품이 참으로 훌륭하군. 천무공자를 보았을 때는 손오공 같은 순수함을 느꼈는데, 그대는 맑은 연못을 보는 것 같소.”
“예……?”
“조 공자, 내게 그리 말해 주어 고맙소.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내일’ 말씀드리겠소.”
즉, 내일도 조서인을 만나겠다는 소리다.
팽자겸은 호탕하게 웃으며 일어나 조서인을 배웅해 주었다.
팽가에서 자고 가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았으나, 일단 추룡을 만나야 하는 조서인은 그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문밖까지 나온 팽자겸의 곁에서 팽자연도 끝까지 함께 배웅해 주었다.
“어, 음, 나 잘한 건가……?”
금학루 근처의 거리로 돌아온 조서인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방금 들었던 이야기들을 되짚어 보면 되짚어 볼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뭘 그리 자신이 없어. 인마, 내가 가슴 쫙 펴고 다니라고 말을 했냐, 안 했냐.”
“으악.”
짝! 소리와 함께 등짝을 얻어맞은 조서인은 길고양이처럼 펄쩍 뛰어올라 깜짝 놀라며 뒤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십자로 가른 흉터를 꿈틀대며 추룡이 씩 웃고 있었다.
“숙부님!”
“뭘 그리 걱정하고 있어. 일이 잘 안 풀렸어?”
“그게…….”
조서인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유백담을 찾던 와중에 팽가의 사람들이 찾아와 팽가에 초청받았던 일.
그리고 거기서 유백담이 저지른 일에 대해 듣고, 힘든 상황이라면 조서인이 돕겠다는 의사를 넌지시 전했음을 설명했다.
“그래서, 왠지 돕고 싶어져서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힐끔 추룡을 보니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잘못한 걸까요?”
추룡은 기다렸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핫!”
“숙부님……?”
“너도 난 놈이긴 한 모양이다. 하늘이 돕는구나.”
“예……?”
추룡은 기특하다는 듯이 조서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적양문 때문에 팽가가 정신이 없긴 하구만. 두고 봐라. 아마 내일 찾아와서 부탁할 거다. 네게 유백담에 대해 찾아봐 달라고 부탁할 거야.”
“정말로 제게 그걸 부탁할까요?”
“그래. 원래는 오늘 부탁하고 싶은데 그래도 처음 만난 날 이야기하기가 껄끄러워서 체면상 참고 있을 뿐이야. 보나 마나 훤하다.”
그동안 추룡이 보여 준 통찰력을 생각하면 안 믿을 수가 없었다.
추룡이 워낙 자신감에 넘치기도 했다.
“변수는 네가 이야기한 팽가의 딸들인데. 뭐, 어차피 너랑 한동안 같이 다닐 테니까 이야기 많이 해 봐.”
“예?”
문득 눈썹을 치켜세운 채 조서인을 뚫어져라 보던 팽자연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아니, 팽 소저가 왜 저랑 한동안 함께 다닙니까?”
“걔가 그랬다며? 너랑 같이 유백담을 찾을 수 있게 허락해 달라 했다고.”
“예, 그러긴 했는데, 그래도 팽 공자는 그 의견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차피 걔들한테도 좋은 이야기야. 팽가 입장에서도 너한테만 덜렁 부탁하기보다는 팽가 사람 한 명을 붙여서 보내고 싶을 거고.”
“귀한 여동생을 저처럼 처음 본 사람과 동행을 시키겠습니까?”
“내가 보기엔 유백담 관련된 내용, 가주도 모른다.”
“예?”
“팽자겸 선에서 조용히 처리하려는 것 같은데 뭐.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결국 지 여동생이라도 쓸 거다.”
추룡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조서인은 말한 사람이 추룡임에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 정작 추룡은 이 당연한 걸 왜 모르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됐으니 오늘은 하북 특산물이나 든든히 먹으면서 푹 쉬어라. 내일부터 바빠질 텐데.”
“으음, 예.”
“팽자겸이 유백담을 찾아봤자 소용없다고 했지? 내 생각은 다르다. 찬찬히 쫓아가서 제대로 비무하고 와라. 하북팽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팽가의 여식들이 어떤 생각으로 움직이는지도 잘 알아보고.”
“생각까지 알아야 합니까……?”
“그래. 그 모든 과정이 네가 배울 점이야.”
“아…….”
“아참.”
추룡은 씩 웃으면서 조서인의 옆구리를 찔렀다.
“혹시 연애를 할 수 있음 연애도 해 보고.”
“……예에?”
“젊은 남녀가 함께 여정을 떠나는데 정분이 안 날 수가 없지.”
추룡은 늘 그랬듯 조서인에게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들어 주었다.
‘에이, 그럴 리가 없지. 놀리시는 거야.’
그날 밤, 조서인은 온갖 생각에 휩싸인 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추룡의 예상은 맞았다.
다음 날, 조서인이 묵은 곳을 대체 어떻게 찾았는지 직접 객잔까지 찾아온 팽자겸은 팽자연과 함께 유백담을 쫓아 달라며 정식으로 부탁했다.
“조 공자, 부탁하겠소. 아직 만난 적이 없을 테지만, 내 동생을 위한 일이라오. 이번에 도와준다면 나 팽가의 장자 팽자겸은 조 공자의 도움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오.”
명가의 자제가 정식으로 머리를 숙이며 부탁해 온 일이다.
조서인은 내심 추룡의 혜안에 감탄하며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팽가에서는 많은 것을 지원해 주었다.
두 사람이 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커다란 마차와, 하북 지역에 안 가 본 길이 없다는 경험이 많고 능수능란한 마부까지 붙여 줄 정도다.
덜컹거리며 나아가는 마차 안에서, 조서인은 어색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창밖만 바라보는데, 건너 쪽에서는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시선이 어찌나 집요한지 오른쪽 볼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요?”
“예?”
“궁금하지 않아요? 왜 갑자기 내가 따라가게 되었는지?”
그제야 처음으로 정식으로 마주 본 팽자연은 생각보다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아미를 상큼하게 치켜올리고 성질을 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정반대였다.
무산학관에서 보던 기가 센 여협들과는 좀 다른 모양이었다.
“팽 소저께서 팽 공자를 잘 설득해 주신 덕분이겠죠. 팽 공자께선 팽 소저가 일을 잘 처리해 줄 거라 믿기 때문일 거고요.”
“……”
“아닌가요?”
팽자연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하나는 제가 가문에서 자화랑 가장 친하다는 사실이에요.”
“아! 그렇겠네요. 팽가에서 자매는 두 분뿐이라 들었습니다.”
“맞아요. 제가 자화랑 친하기 때문에, 어제 그 자리에서 자화의 안부를 먼저 물어봐 준 조 공자한테 감사했어요. 그래서 더욱 함께 가겠다고 했고요.”
“아…….”
“두 번째, 이건 제게 내리는 벌이에요.”
“……예?”
“자화가 유백담, 그 사람을 만나는 걸 묵인하고 금학루에 맨날 놀러 갈 수 있게 도운 게 저였거든요.”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랬……습니까?”
“말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게다가 내 동생을 어찌나 섬세하게 챙겨 주는지. 그땐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이제 보니 그런 게 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였지만.”
“아……!”
“내 동생을 홀로 남겨두고 도망가 버리다니. 나쁜 놈. 내가 만나면 뺨을 때려줄 거예요.”
그 탓에 더욱 책임감을 느끼는 것일까.
팽자연의 두 눈이 활활 타는 듯했다.
“그러니 우리 가문에서 호리공자 유백담, 그자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도 저예요. 그 사람이 어딜 갈지, 뭘 하려고 할지, 그런 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자화고. 그 자화랑 가장 친한 게 저니까요.”
“그랬군요.”
생각보다 실용적인 이유로 팽자연이 이 추적조에 합류했다는 소리였다.
흥미를 느끼는 조서인에게 팽자연은 갑자기 폭탄을 터뜨렸다.
“우린 지금부터 하북의 경계로 갈 거예요. 그곳에서 유백담을 잡아 와서, 자화랑 만나게 해 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