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권 11화
제37장 비무첩래(比武牒來) (11)
“동생분과 만나게 해 준다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지금 팽가에선 팽자화를 농락한 유백담을 혼쭐을 내주기 위해 찾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이해가 안 되죠?”
“예.”
“자화는 유백담을 미워하지 않아요. 가문이 족쇄라고 생각할 뿐이죠. 자기가 팽가의 여식이 아니었다면 행복해졌을 거라 생각해서 상심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그런데 팽자화 소저는 그렇다 쳐도, 소저는 유백담을 싫어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싫어해요. 겁쟁이. 끝까지 책임지지 않고 도망간 놈. 사내답지 못하고 배짱도 없는 놈!”
팽자연이 어제 보였던 표정을 지었다.
분노한 모습.
동생을 속상하게 만든 자에 대한 언니로서의 순수한 분노다.
하지만 거기에 유백담에 대한 증오는 없다.
혼을 내주고 싶은 분노.
딱 그 정도다.
그녀는 내심 복잡한 얼굴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도 그놈이랑 있을 때 동생이 행복해하니 어쩌겠어요. 일단은 그 인간을 잡아서 한 번 더 만나 보게 만들 작정이에요.”
“기회를 한 번 더 주시는 겁니까?”
“비슷해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래서 저랑 같이 그를 찾으러 가고 싶어 하셨군요.”
“맞아요. 만약 유백담을 오라버니가 찾게 되면……. 분명히 사지가 멀쩡하긴 힘들 거예요.”
무시무시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을 보니, 천상 무가의 여식이 맞기는 한 모양이었다.
팽자연은 그 후로도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팽가에서 자라면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조서인이 보기엔 전부 다 다른 나라의 이야기처럼 신기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배운 서예와 예악 같은 교양과 가문 비전의 무공을 익히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열렬히 설파했다.
특히 팽가 특유의 강맹한 도법을 익히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밥을 먹을 때나 잠을 잘 때조차 무거운 목도를 늘 손에 쥐고 살았다는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다.
조서인도 똑같았다.
기억이 날 만한 어린 시절부터 창은 늘 조서인의 동반자였지 않던가. 노력을 맹신하는 조서인에게 세상 부족한 것 없는 하북팽가의 치열한 노력담은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반대로 팽자연은 무산학관에 대해 궁금해했다. 조서인이 무산학관에서 지낼 때는 어땠는지, 학관에서 어떻게 지내며 무엇을 배우는지를 꼬치꼬치 캐묻고 즐거워했다.
처음엔 낯을 가리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던 조서인이었지만, 마차 안에서 한 시진 동안 함께 있다 보니 나중에는 대화가 훨씬 편안해졌다.
“그런데 팽 소저, 늦은 감이 있습니다만 저희는 왜 북동쪽으로 향하는 겁니까? 유백담이 그쪽으로 갈 만한 이유가 있나요?”
처음 출발할 때도 물어봤었지만, 그때는 유백담이 그쪽으로 향할 만한 정보가 있다면서 얼버무리고 넘어갔던 이야기였다.
팽자연은 이제는 순순히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유백담이 자화와 함께 있을 때 종종 북동쪽으로 가 봐야겠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어요. 만약 자신처럼 뒷배가 없는 무인이 혈혈단신으로 큰 인물이 되고 싶다면 하북과 천진의 경계로 갈 거라고요. 거기엔 철풍단이라는 마적 떼가 있는데 그들을 잘 이용하면 크게 명성을 떨치고 한 세력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확신을 하더라고요.”
“철풍단……이요?”
“네. 조 공자는 혹시 들어 본 적 있나요?”
“아뇨, 처음 들어 봅니다.”
“그래요? 사실 저도 유백담한테 들을 때까지는 그들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어요. 하북팽가에 사는 제가 한 번도 듣지 못했다니 이상하지 않나요? 인상적인 이야기라서 저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유백담은 그 후로도 철풍단 이야기를 세 번이나 더 했었죠.”
조서인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원래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으면 무의식중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는 법이다.
유백담이 정말로 그런 말을 했었다면 찾아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혈혈단신으로 큰 인물이 되는 법이라……. 신기하네. 유백담은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을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났다.
그는 하북팽가의 여식을 꼬여낸 화화공자일까?
아니면 그저 외모가 뛰어나서 오해를 받았을 뿐, 야망이 있는 출중한 청년이었을까?
그에 대한 호기심은 머지않아 풀리게 되었다.
마부가 안내해 준 하북과 천진의 경계.
산골 화전촌을 떠올리게 하는 초라한 시골 마을에서 그는 뜻밖의 말을 듣게 된 것이다.
“그분을 찾는군요! 신선들이 즐비한 곤륜산에서 내려온, 그 잘생긴 공자님이요!”
고된 농사일로 단단하게 얽은 손과 주름진 얼굴 때문에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
외모만 봐서는 젊지 않아 보이는데 말투는 발랄했다.
그녀는 마가촌(馬家村)이라 불리는 곳에 사는 여인이었는데, 조서인이 유백담을 아냐고 묻자 곧장 황홀한 표정으로 그리 대답했다.
큰 기대를 않고 물었던 조서인은 크게 당황했다.
“예? 그, 정말로 유백담 공자를 만나 본 겁니까?”
“물론이죠! 키도 훤칠하고 머리에는 옥비녀를 꽂은 잘생긴 공자님이잖아요?”
“그래……요?”
“네! 여기 목덜미에 점도 하나 있었잖아요? 맞죠?”
조서인이 뒤에서 죽립을 쓴 채 조용히 기다리던 팽자연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구나! 진짜로 유백담이 여기로 왔었어!’
놀라운 일이다.
팽자연도 흥분했는지 호흡이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곤륜에서 왔다는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분께서 제게 서왕모의 복숭아를 주셨거든요. 아아! 정말 달고 맛있는 복숭아였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황홀하다는 듯 여인이 양손을 모은 채 탄성을 내뱉었다.
조서인은 또 한 번 놀랐다.
서왕모의 복숭아라니.
곤륜산 서왕모가 기른다는 그 불로장생의 반도(蟠桃)를 말하는 것일까?
“보, 복숭아요?”
“네. 제가 이번에 시집을 가야 하는데, 안 그래도 눈가에 주름이 너무 많이 생겨서 고민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분께서 서왕모의 복숭아를 주시지 않겠어요? 그걸 먹고 나니 눈가의 주름이 펴졌어요. 피부도 훨씬 밝아졌구요. 보세요. 정말로 십 년은 젊어진 것 같지 않아요?”
눈가를 손으로 비비며 되레 물어오는 여인에게 조서인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의 모습이 십 년은 젊어졌다는 게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원래 중년의 여인이란 말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죠? 앞으로 더 젊고 아름다워진다고 하니 정말로 기뻐요.”
“저기…….”
조서인은 여인의 나이를 묻고 싶었지만 입만 벙긋거리다가 꾹 눌러 닫았다.
여인의 나이가 많으면 어떻고, 또 적으면 어떠한가.
어느 쪽이든 충격을 받을 게 뻔하니 묻지 않는 게 상책이다.
조서인은 급히 말을 돌렸다.
“크흠, 시집을 가신다니 축하드립니다.”
“감사해요. 혼인 상대가 워낙 험한 사람이라 걱정했는데, 이제는 걱정이 되질 않아요. 서왕모의 복숭아를 먹고 미모를 찾았으니 가서도 이쁨을 받지 않겠어요?”
여인은 간드러지게 웃으며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거친 손이 눈에 띈다.
조서인은 최대한 그녀를 쳐다보지 않도록 노력하며 물었다.
“혼인을 하는 상대가 험한 사람입니까?”
“철풍단이요. 우리 마을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죠. 그중에서도 제가 시집갈 사람은 상당히 높은 위치래요.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하던데요.”
여인은 깜짝 놀라는 조서인에게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철풍단이 마적단이긴 하지만 얼마나 멋진데요. 함부로 행패도 안 부리고, 위계도 잘 잡혀 있어서 웬만한 군벌보다 낫다고 다들 그래요.”
“그렇……군요.”
“이제 제가 그곳에 시집을 가게 되었으니, 이 미모를 사용해 철풍단이 우리 마을과 잘 지내도록 만들 거예요. 미인계를 쓰다니. 낭군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어요?”
없던 사람이 성공하면 더 가관이라더니.
여인의 자부심은 도를 넘어설 지경이었다.
조서인이 남녀관계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래도 미추는 구분할 줄 안다.
만약 저 여인이 철풍단에서 미모를 사용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장담컨대 철풍단과 마을의 관계는 파국이다.
“그…… 으음, 예. 응원하겠습니다.”
“호호, 고마워요!”
“그 후에 유백담 공자는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저희는 그를 찾고 있습니다.”
“만약 서왕모의 복숭아를 원하시는 거라면 포기하세요. 그건 하나뿐인 거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렇군요. 저는 복숭아가 아니라 유 공자에게 볼일이 있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마가촌 이장 집으로 가 보세요. 거기 큰아들이랑 이야기하는 걸 봤어요.”
여인은 바가지에 떠놓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계속해서 감탄하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아, 나날이 아름다워지면 큰일인데.”
농촌 여인의 미모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꿰뚫을 듯 치솟은 상태다.
조서인은 감사를 표한 뒤 재빨리 뒤돌아 나왔다.
“조 공자, 생각보다 정보를 잘 캐네요?”
“……저 잘한 것 맞습니까?”
“힘들었죠?”
“어째 무시무시한 광인한테 비무하자고 말할 때보다 더 힘드네요.”
실제로 청계와 대화할 때보다 더욱 많은 심력을 소모한 듯한 기분이다.
조서인은 온몸이 축 늘어지는 듯한 피로감을 느꼈다.
“잘했어요. 저라면 한두 마디만에 욕을 했을 것 같던데. 잘 참으시네요. 인내심이 깊어요.”
팽자연의 칭찬은 진심이었다.
그녀가 살짝 죽립을 걷어 올리자 생기 넘치는 도톰한 입술이 살짝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도 욕을 하는 건 좀…….”
“왜요? 저런 건 사실 따끔하게 말해 줘서 정신 차리는 게 저 사람 인생에 도움이 되는 거죠. 그렇지 않아요?”
“으음, 그래도 좀, 안타깝지 않습니까? 차라리 미인이 저랬으면 저도 기분이 나빴을 겁니다.”
“뭐, 그건 그렇긴 하네요.”
거지가 한 푼의 동전을 자랑하는데 그걸 어찌 뭐라 할까.
팽자연은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이더니, 다른 곳으로 분노의 불똥이 튀었다.
“그나저나 유백담 이 인간, 복숭아인 척 마약이라도 먹인 거 아냐? 여자가 제정신이 아니잖아?”
“큽.”
조서인은 놀라우면서도 웃겨서 기침을 콜록거렸다.
“왜 웃어요? 제 말이 틀려요?”
“아뇨, 너무 동감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니까요? 미친 거 아냐? 서왕모의 복숭아는 무슨,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거지?”
그 점은 조서인도 궁금한 부분이다.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해서 여인에게 이상한 희망을 준 것일까.
“혹시 진짜 뭔가 신묘한 약재일 수도…….”
“조 공자, 순진하네요. 그럴 리가 있어요?”
팽자연은 우습다는 듯이 일축했다.
“진짜 서왕모의 복숭아였으면 저 여자가 진짜로 절세미인이 되어 있었겠죠.”
“아아…….”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이해가 안 가네…….”
두 사람이 아무리 이야기를 해 봤자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의 속마음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가촌에서 가장 큰 집으로 향했다.
척 보기에도 주변의 다른 집들보다 세 배 이상 큰 그 집은 마가촌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기와를 올린 집이었다.
담장은 좀 낮았지만, 대문도 크고 안에 보이는 마당도 상당히 넓었다.
때마침 그 집에서 나오던 건장한 사내가 조서인과 팽자연을 보고 경계하며 물었다.
“누구시오?”
“저희는 마가촌 촌장댁의 큰아들을 만나러 온 사람들입니다.”
“그게 난데?”
사내가 의아한 듯 눈살을 찌푸리고 조서인을 응시했다.
그는 농민답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덩치도 덩치지만, 두툼한 가죽신을 신고 손목과 발목에 칼을 막아 주는 비구를 찬 모습이 그러하다.
심지어 허리춤에는 크지는 않지만 손바닥만 한 크기의 단도 서너 개가 요대에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리 영리한 눈빛은 아니었는데, 얼굴은 넓적했고 광대가 튀어나와 고집스러운 느낌을 준다.
조서인은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그러셨군요. 저는 하북 사람인 조가입니다. 유백담 공자를 찾고 있는데, 촌장댁의 큰아들이 그 소재를 알고 있다고 해서 여쭤보러 찾아왔습니다.”
“유백담 공자?”
눈살을 찌푸리고 경계하던 사내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유백담 공자의 지인이었구만! 허허, 그랬군. 그렇다면 잘 찾아왔소.”
마치 먼 타지에서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급격한 변화였다.
그는 포권을 마주해서 예를 갖추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 조서인에게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유백담 공자는 이틀 전에 마을 밖으로 향했소.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다고 하던데.”
“예? 마을을 떠났습니까?”
“그렇소. 내가 며칠 더 머무르라고 청했지만 워낙 바쁜 사람이라 떠났다오.”
사내는 자신의 이름을 마광이라고 소개했다.
“그 공자 참, 곤륜산에서 내려온 신선처럼 신묘한 사람이었소.”
“……혹시 그가 뭘 주었습니까?”
“어떻게 아셨소?”
마광은 사납고 고집스러운 인상과 달리 생각보다 순박한 사내였다.
“타지에서 온 손님이라 차를 한 잔 대접했더니, 아니 글쎄 귀한 호심경을 주지 뭐요?”
“호심경……이요?”
“그렇소. 이거 보시오.”
마광은 부끄러움 없이 앞섶을 풀어헤쳐 상체를 드러냈다.
뒤에 있던 팽자연이 급히 몸을 돌린다.
조서인은 그가 가슴에 차고 있는 야차문(夜叉文)이 새겨진 동그란 호심경을 확인했다.
“그, 심장을 보호해 주는 귀물이군요?”
“하핫! 바로 그렇소. 이게 뭔지 아시오?”
마광은 주변 사람들이 들으면 큰일 난다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초패왕 항우의 유물이라오.”
자랑스러운 그 목소리에 조서인의 눈동자가 풍랑을 맞은 배처럼 거세게 흔들렸다.